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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날'에 대한 이해 / '안식 후 첫날'에 대한 이해
    2002-07-23 20:11:44   read : 2712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주의 날에 대한 이해와 질문의 답변


    1. 고전 16:2의 개역성경에 나오는 ‘매주일 첫날’
    이 본문을 그대로 직역하자면 ‘매 안식 후 첫날’입니다. 즉 행20:7의 ‘안식 후 첫날’과 그리고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말씀하는 본문에서만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이 일상적인 유대인의 날짜 표현 방법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의도적으로 부활과 교회의 회집에 관련된 용어로만 국한해서 사용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에서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이자 주일이 왜 교회의 공적이 회집일로서 권위있게 받아들이게 되었는가에 대한 최소한의 근거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은 인정되는 바입니다. 여기서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주일 예배의 기원이 성경기록 시대 즉 정경시대로 거슬러 가는 기원을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최소한의 결론입니다.

    이는 신약 성경이 기록되는 과정의 교회가 이미 주일을 예배의 날로 받고 지키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에는 의의가 없는 것입니다.

    2. 계1:10에 나오는 ‘주의 날’에 대한 이해
    이 ‘주의 날’은 일반적으로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날’과는 다른 날입니다. 구약 성경의 ‘여호와의 날’이 신약에서 ‘주의 날’로 번역됩니다. 예를 들어 살전5:2, 살후2:2, 벧후3:10에도 ‘주의 날’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종말의 심판의 날로서 구약의 ‘여호와의 날’에 대한 신약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1:10의 ‘주의 날’은 앞의 구절들과 다른 용어로 사용합니다. 간단하게 구별할 수 있도록 말한다면 앞의 구절들은 ‘투 쿠리우(tou kuriou)’로 표기하고 계1:10은 ‘쿠리아케(kuriake)’로 표현합니다. 모두 우리 말로는 ‘주의 날’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법은 전혀 다릅니다.

    이런 언어사용의 차이가 의미의 차이를 일으키는 이유는 구약과 신약 사이에 연결고리가 되는 구약의 헬라어 번역에서 ‘여호와의 날’을 모두 앞의 여러 구절들의 용어로 했습니다. 한번도 칠십인 역이 ‘여호와의 날’을 ‘쿠리아케’라는 용어로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투 쿠리우’라는 용어를 사도 요한은 의도적으로 계시록에서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 이러한 용어는 고전11:20에 ‘주의 만찬’에서 한번 더 사용됩니다. 이 용어의 세속적인 표현은 황제를 지칭하는데 사용되는 것이 최초로 AD68년에 나타나는 것으로 리차드 보캄은 말합니다.

    이제 이러한 계1:10의 독특한 표현의 ‘주의 날’이 왜 오늘날의 교회의 회집일 ‘주일’과 연속성상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졌고, 연속선이 있는 것으로 증거됩니다. 저의 글에 나타나는 외경과 가경 그리고 속사도 교부들의 글과 니케아 회의 이전의 교부들의 글들에서 계시록의 주의 날이라는 표현은 주일의 회집과 연결되어서 사용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이는 계시록의 기록시기와 적게는 10년정도의 차이밖에는 없기에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3. ‘안식 후 첫날’과 ‘주의 날’에 대한 정리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나와있는 내용을 정리하면서 의미를 도출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과 ‘안식 후 첫날’의 긴밀한 연결을 부정할 수 없고, 이것이 교회의 회집의 날과도 깊이 연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계시록과 같은 후대의 성경 기록에서 ‘주의 날’이라는 교회 역사에서 사용하는 주일로 굳어진 표현이 사용된 것입니다. 특별히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임과 동시에 계시의 내용이 일어난 사건을 인간의 기자가 기록을 한 책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말씀을 기록을 할 때에 기록하는 시점은 성경 말씀의 내용이 일어난 시점과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차이가 나는 시점에 있는 성경의 저자가 기록을 할 때는 항상 교회를 염두에 두게 됩니다. 그리고 기록 저자가 일차적으로 관심하는 교회적 상황 혹은 선교적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성경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럼으로 기록 당시의 교회의 보편적인 가치가 기록 속에 담겨있게 되고, 특별히 별도의 설명이 없이 반복되는 용어들은 우리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어휘이지만 당시의 교회들은 아주 친하고 의미있는 어휘들입니다. 그러한 내용들 중에 하나가 ‘안식 후 첫날’과 ‘주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성경을 해석하는 기본적인 과정을 따르면서 얻어지는 결론을 종합해서 일차적인 결론을 내려보는 것입니다. 즉 주일 예배의 시작은 정경 형성시기 때부터 이루어졌고 근거로는 주님의 부활이 중요하고도 거의 유일한 권위로 작용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4. 히브리서의 안식과 주일과의 관계
    이렇게 얻어진 결론은 제 4계명의 안식일의 직접적인 연속선상에 있는 주일이라는 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바대로 날의 구별은 없습니다. 모든 날이 주의 날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또한 고전16:2에서 고린도 교회를 비롯한 갈라디아 교회 등이 주일에 회집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물론 직접적으로 회집했다는 말이 없음을 계속해서 지적하겠지만, 그러나 주일 논쟁과는 상관없이 주일에 공적인 회집을 거부하지 않는 본문임을 대부분의 주석은 말합니다) 그 날에 헌금을 하도록 명령함으로 ‘매 안식 후 첫날’의 의미의 보편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도의 태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안식 후 첫날’ 그리고 ‘매 안식 후 첫날’이 교회의 회집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가의 근거로서 주님의 부활을 말하고 이미 정경기록시에 교회의 관행으로 자리잡고 있기에 이러한 현상을 교회 역사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주일이 안식일의 연속으로서 의미를 지니는 요소가 있습니다. 만약에 모든 날이 그리스도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날이고 주의 날이라면 주일도 안식일 중에 하루이고 주의 날중에 하루입니다. 따라서 그런 형식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어떤 형태로든지 주일은 안식일과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적 거룩의 개념으로서 안식일의 특별함이 주일에는 없다는 말은 동의할 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신 본질적인 요소는 시간의 개념을 거룩하게 했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창2:3에서 제 칠일의 거룩함은 여호와의 안식에 근거하고, 이것이 안식일의 계명 속에서 자리잡을 때에는 안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거룩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안식에 참여하는 방식이 쉼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쉼의 목적을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설명하실 때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일을 하기 위해 쉼을 우리에게 허락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설명했습니다. 즉 구약에서의 제 4계명의 본질은 시간적인 거룩을 넘어서 의를 행함으로 생명을 구하고 선을 행함으로 자신의 쉼과 다른 사람의 쉼을 함께 누리는 축복을 나누고 즐기는 날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의미의 안식일의 본질적인 거룩은 신약 시대에 추구되어야 할 안식의 본질입니다. 안식은 거룩을 근거로 담보되는 것입니다. 즉 의를 행함으로 공평과 정의를 근거로 해서 안식은 누려지고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구약의 예언대로 온전한 공평과 정의의 실현으로서 죽음과 부활을 가지셨고, 그리고 지금도 성령을 통해서 자기의 교회를 공평과 정의로서 통치하면서 안식을 주시는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가진 표현정서의 자극성을 줄이기 위해서 공평과 정의로 통치한다는 표현은 사랑의 통치라는 말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잃어버리고 낮아지고 고난당하심의 사랑의 봉사로서 우리는 안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그 어떤 직분자들의 봉사, 혹은 천사들의 섬김으로도 이루지 못했던 그리스도의 봉사가 가지는 온전함을 소개하면서 핍박시에 교회가 오직 이 예수만을 바라보고 믿음을 지키라고 히브리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히4장에서 시95편의 인용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가나안의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에 대한 경고를 다윗을 통해서 신약의 교회들에게 적용을 합니다. 우리도 안식에 들어가지 못함에 대해서 경고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히브리서의 핍박시에 교회를 굳게 하기 위한 사도의 경고임을 이해합니다. 이것이 배경이 되어서 우리는 히10:24-25의 본문을 읽게 됩니다. 히4, 10장의 본문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사이의 본문은 그리스도를 왜 의지해야 하는지의 논증입니다. 모든 논증을 마치고 이를 근거로 히10:19부터 좀 더 현실적인 문제에 적용을 하기 때문에 히4장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표현과 히10:24-5절에 나오는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의 습관을 버리라는 본문은 거의 직접적인 문맥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히4장이 그리스도안에 안식입니다. 주일의 안식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안식이 누려지기록 애를 쓰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편중에 서로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모이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우리는 히브리서의 교회가 앞의 논증의 다른 경우들의 교회들과 같이 정기적인 모임을 가진 교회임을 염두에 두면서 이러한 정기적인 모임을 힘쓰는 것이 안식에 들어가는 일과 떨어질 수 없는 한 요소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일의 회집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안식을 누리는 축제의 시간이고, 안식을 추구하기를 다짐하는 결의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시적 방편으로서 이러한 모임에서 성찬을 함으로 교제를 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주일이 다른 날과 시간적인 질적인 의미에서 구별되는 한 날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안식을 누리고 지향하는 교회가 이 날에 모여서 예배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기독교회가 로마의 황제로부터 안식일적인 쉼의 날이 되도록 하기 위한 공휴일의 유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일은 그 이전부터 새벽과 한밤중에 예배의 날로 드려졌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두 가지의 유산을 존중합니다. 예배의 날임과 동시에 쉼의 날이 되는 것 그러나 그 쉼이 이기적인 욕심을 발휘하는 쉼이 아니고 생명과 선을 행하기 위한 쉼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를 위해서 쉬는 것도 생명을 위하는 일이고 선을 위한 일입니다. 교회가 너무 성도들을 피곤하게 강요하는 일을 자제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 한국의 노동조건이 아직은 열악하기에, 주일이 주안에서 가족들과의 좋은 나눔의 시간이 되도록 장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과도 교제하고 나누고 봉사하는 시간이 되도록도 해야 합니다. 특별히 의를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희생할 필요가 있을 때, 피곤을 무릅쓰고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부름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부르심을 따라서 성도는 살아갑니다. 그래서 피곤하지만 어린 영혼들을 위해서 일찍부터 수고의 땀을 흘리는 많은 교사들이 있고, 이것이 우리 교회의 내일의 소망입니다. 이것이 주일의 본질에 합당한 태도입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안식하는 삶 자체입니다.

    안식을 지향하는 주일의 실제에 대해서 앞으로 논의가 진행되면서 여러 성도들의 참여로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4. 날짜 변경선에 대해서
    앞에서 시간적 의미의 질적인 구별로서 주일을 말하지 않았기에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야 할 이유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 중에 한 형제가 고민을 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실제이기에 답변을 해야한다고 생각됩니다. 완전히 형식 논리의 문제이지만 문제 해결의 핵심은 성경이 말하는 즉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에 있다고 봅니다.

    먼저 왜 이런 문제까지 생각하게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 시간을 꼭 사람의 관점에서만 생각할까? 계시를 주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주의 날이 설혹 24시간의 개념이 된다 하더라도 일요일 24시간을 주님이 받으시면 되는 것이 아닌가? 온 세계 사람들이 동일한 시간에 24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여기에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겠습니다. 주일을 지킨다면 지키는 것은 사람이기에 정확하게 24시간이 언제부터 언제인가가 중요하다는 논리입니다. 과연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실제로 안식일을 엄수한 구약에서도 해가 지는 시각이 팔레스틴 지역 전체가 동일했을까요? 일분 일초도 틀림이 없이 동일했을까요? 갈릴리 지역과 저 밑의 남방 지역의 해지는 시각은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았겠습니까? 주님은 계시가 주어지는 그리고 그것이 선포되는 환경에 맟추어서 안식일의 법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사람을 얽어매는 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나님 스스로 계시를 하시는 것은 인간의 형편에 맞추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인간의 언어로 인간의 환경에 맟추어서 하나님을 알고 섬기도록 계시를 하시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중심을 구약이나 신약시대에나 변함없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것으로만 답변을 하자면, 형제가 제기한 문제가 현실적인 인간의 환경이라면 하나님께서 충분히 이러한 문제를 고려하시고 적응하셔서 자신의 요구를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기계적이지 않으시고 언약적이시기에(우리와의 관계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 그의 명령과 요청에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언제나 자유하고 행복한 것이지요.

    소리나라 성경공부

    =================================
    '안식 후 첫날'에 대한 이해

    작성자: 소리나라

    아래의 글은 동대구 노회의 전권위원회의 제명소식에 대한 소식을 기독교보 게시판으로부터(667번게시물) 알기 전에 주일에 대한 여러 논의들이 계속진행되는 것을 보고서 정리했던 글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올려서 함께 의견을 나누고자 했으나 상황보고가 올라오고 노회가 다가옮으로 미루었다가 이제서야 올리게 됩니다. 주일에 대한 논의에 한걸음 진전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도 이 논의의 시작때에 가졌던 생각에 변함이 없이 우리가 논의의 핵심에 충실하는 것이 이 사건 자체를 바르게 해결하고, 그리고 이 사건이 궁극적으로 교회를 유익케 할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함께 나누는 일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대한 이해

    I 들어가는 말
    이전에 주일에 대한 논의에서(2001년 년말에 있었던 논의) 필자는 주일의 정경적 가능성을 ‘안식 후 첫날’에 대한 성경의 용법에서 제시해보았다. 그 이후에 여러 글들이 올라왔다. 주석적 문제점을 제시하기고 하고, 어떤 이는 ‘안식 후 첫날’이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시했다. 부활의 날에 새로운 출발로서 주일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면서 안식일과의 철저한 단절을 강조하기도 하고, 주일은 부활과의 관계도 그리고 더욱이 안식일과는 더더욱 관련의 의미가 없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제 이러한 글들을 중심으로 본인이 이전에 제시했던 “주일의 정경적 가능성” 글에 대한 주석적 뒷받침을 하는 논의를 발전시켜 보려고 한다. 아직 철저하게 된 주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대략의 주석적인 검토를 한 글이다. 논지는 여전히 부활의 날로서 안식 후 첫날 즉 주일이 정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입장이고, 이 주일이 일로부터의 쉼의 개념보다는 예배의 날로서 구별된 날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주일과 안식일이 함께 지켜졌고 주일이 기독교회의 예배의 날로 정해진 것이 후대라는 교회사의 자료들에 대한 이전의 평가에 대한 재고도 해야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정경적 가능성의 타진이 구약의 제 4계명으로서의 안식일과의 직접적인 연속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더 살펴보아야 하는 문제로 남는다. 명백히 몇몇 신약의 서신서들의 언급이 안식일을 비롯한 날의 구별을 폐했다고 했기에(골2:16, 롬14:5-6) 과연 구약적 의미의 안식일이 주일에서 연속되는가의 문제는 별도로 더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래서도 언급하겠지만 히브리서의 본문을 주석하면서 남아있는 안식의 때를 바라보는 의미에서의 회집과 예배의 날로서 주일이 가진 의미가 연속성을 도출할 수 있다고도 보여진다(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게시판의 글 382번에 ‘완성된 4계명으로서의 주일의 가능성’을 참고하라).

    하여간 이를 계기로 좋은 논의가 진행되어서 주일의 신학적이고도 실천적인 의미가 충분히 교회 속에서 자리잡는데 봉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개역성경에 나오는 ‘안식 후 첫날’과 ‘매주일 첫날’은 같은 헬라어 용어이다(물론 관사가 들어가는가 아닌가의 차이가 있지만). 이것은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사용되던 날짜 표시방식으로 안식일을 기준으로 며칠째인가를 세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활 용어가 오늘날의 주일로 굳어진 표현 이전에 특별한 의미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다른 말로 하면 신약성경에서 주일을 표현하는 신학적 교회적 관용어일 수 있겠는가? 특별히 복음서가 기록된 시점의 교회의 관용적 표현일 수 있는가?

    글의 전개 방식은 유명한 주일 관련 본문 세 개를 우선 주석하면서 다루면서(고전16:2, 행20:7, 계2:10) 주일 회집의 기원이 정경시대 자체에 근거함을 밝히고 그리고 히브리서 4,10장의 본문을 주석하면서 구속의 성취인 안식과 주일의 회집과의 관계를 제시해보려고 한다. 여기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눅6장이나 관련 병행 본문도 살피면서 히브리서의 논증을 도우려고 한다.

    II 관련 본문에 대한 주석적인 고찰
    1 고전 16:2의 경우
    먼저 고전 16:2의 매 주일 첫날이라는 표현을 이해한다.
    여기서 16:1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헌금임을 제시하는데(16:3),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헌금을 하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는 구체적인 방법을 2절에서 제시한다. “매 주일 첫 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이다. 여기 2절 상반절의 내용에 나오는 매 주일 첫 날에 이익을 얻은 것을 가지고 헌금을 위해서 저축하는 것은 교회의 공적 모임이기 보다는 교인들 ‘각 사람이’ 주어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가정사의 일을 말함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1절과 관련해서 볼 때 갈라디아 교회에게도 명한 방식이다. 따라서 매 주일 첫날에 헌금을 위해서 구별하는 행위는 고린도 교회만의 것이 아닌 갈라디아 교회도 역시 같은 관행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관심은 왜 매 주일 첫 날에 각자 얻은 이익을 구별해서 저축하는 것일까? 이것이 교회의 회집을 완전히 배제하는 본문인가? 이것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2절 하반절의 내용을 보아야 한다. 2절 상반절에서 매 주일 첫 날에 저축하는 이유는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이익 중에 일부를 떼어놓는 이유는 연보를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매 주일에 가정 별로 이익을 떼어놓는 이유는 나중에 바울이 왔을 때 연보하지 않고 그때 그때마다 연보하여 모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문제는 연보를 한다는 표현이 예배의 회집을 전제하는 언급인지 아닌지를 질문하게 된다. 그리고 매 주일 첫 날(혹 안식 후 첫날)이라는 규칙성과 연보라는 용어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이것은 고린도 교회 만에게 주어진 요청이라기 보다는 갈라디아 교회에게도 주어진 요청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헌금 계획은 실제로 고후 8-9장에 걸쳐서 자세히 언급되는데, 마케도냐 교회도 이미 고린도의 열심을 따라서 헌금했음을 말한다(고후8:2). 그럼 고전16:1의 진술을 따라서 알 수 있는 사실은 갈라디아, 마케도냐(일정 정도 가능성?) 그리고 고린도 교회들이 매주일 첫날에 예루살렘 교회의 헌금을 위해서 각 성도들이 자신의 수입 중 얼마를 구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성에서 ‘매주일 첫날’에 하라고 바울 사도가 사도적 권위에 의한 명령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고전16:1절의 두 동사는 명령형이다)?

    여기서 잠시 갈2:10의 본문을 살핀다. 바울은 갈2장에서 야고보, 베드로, 요한과 함께 교제의 악수를 한 사실을 말하면서 이들이 유대인의 사도로 그리고 바울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서로 확정한다(갈2:7-9) 그리고 나서 양 사도들의 동일한 관심사가 10절에 제시된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가난한 이들을 기억해 달라는 할례자들의 사도들의 요청에 대해서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은 이전부터 힘써서 하던 관심사라고 하면서 서로 나눈 교제의 악수가 지닌 실질적인 일치의 의미를 반영한다. 본래 힘써 행하였던 일이라는 말은 바울이 회심후 안디옥 교회에서 봉사하는 중에 유대에 사는 형제들을 위해서 돕는 봉사의 물질을 가지고 같던 일을 염두에 두고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행11:27-30에 나온다. 이는 각각 그 힘대로 도왔던 일이다.

    이제 이러한 갈2장의 바울의 사도직과 관련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헌금을 갈라디아 교회의 편지에 서술한 내용은 역시 고전16:1의 배경이 된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명한 내용과 일치한다. 이 때에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에게 요청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매주일 첫날’에 헌금하도록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현재까지의 정리는 갈라디아, 고린도, 그리고 가능하다면 마케도니아 교회를 포함하여 소위 “예루살렘 구제 프로젝트”라 불리우는 헌금을 바울 사도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 안의 교회들이 ‘매 주일 첫날’에 헌금을 하였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럼 이제 우리는 논의의 핵심으로 나아가서, 이러한 헌금을 하는 것이 예배와 무관하게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양한 것들이 고려될 수 있겠다. 왜 매주일 첫날에 모아두어야 했을까? 당시에 주급제가 실시되었는가? 일반적으로 일용직이라고 했을 때 매일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고린도나 갈라디아의 지역은 다른 풍습이 있었는가? 주급제의 가설이 서지 않는다면, 왜 매주일 첫날에 모았는가?

    특히 바울이 자기가 가서 헌금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는 말에는 이미 각자 모은 돈은 헌금이라는 말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때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모은 즉시 헌금했음을 의미한다. 즉 고전16:2의 말씀을 다시 풀어서 설명하면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헌금하여서 내가 갈 때에 비로소 헌금하지 않도록 하라는 명령과 같은 말이다. 즉 이익을 얻은대로 집에서 저축하는 목적은 회집에서 헌금하기 위해서고 이것은 헌금이라는 말로 대변된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바로 매주일 첫날에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물론 이렇게 반론할 수 있다. 매주일 첫날에 각자의 집에서 구별해서 모아놓은 것을 바울이 왔을 때에 가지고 와서 헌금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러한 주장은 교회가 언제 모였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정기적으로 모이는 기회에 그렇게 모은 돈을 헌금으로 모으지 않고 각자의 집에 두었다는 것으로, 그렇게 함으로서 매 주일 첫날과 예배의 회집과 관련성을 끊어버리려고 노력하는 것인데, 이것은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바울은 단지 돈을 저축하라고만 명령하지 않고 매주일 첫날이라고 확정된 날자를 못을 박아서 명령을 하고 있는가? 여기에는 매주일 첫날이라고 하는 시점이 고린도 교회에서 가진 어떤 기존의 의미가 존재함을 말한다. 따라서 바울은 이미 매주일 첫날이라는 고린도 교회에 의미가 있는 날자를 택하여서 헌금을 집에서 저축할 것을 말한다. 이것은 집에서 저축하는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원래 고린도 교회에서 의미를 가진 매주일 첫날이라는 가치에 접근하는 것이다. 따라서 매 주일 돈을 모은다는 것은 예배의 회집 시에 교회가 공적으로 모으는 과정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는가? 그래서 본문은 회집을 명백히 말하지 않지만 회집시 모으는 과정을 “매 주일 첫날”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충분히 언급하고 있다고 보고 바울은 내가 갈 때에 한번만 즉시 헌금하지 말고 지속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헌금해서 모으는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가난한 교회를 위한 돌보는 행위는 교회의 일치와 정체성과 관련된 중요한 일임을 바울은 갈2:10에 근거해서 권하는 차원을 넘어 명령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고전16:1).

    이러한 논증을 위해서는 고린도 교회가 실제로 정기적인 회집을 가졌으며 또한 예배의 형태의 회집이 있었음을 보아야 한다. 고린도 교회가 신령한 은사들이 정기적인 예배의 회집에서 무질서하게 이루어짐을 보고 바울 사도는 질서있게 하라고 권면을 하였다(고전14:26-40, 특히 26, 39-40참고). 역시 성찬의 본문인 고전11:17,18,21,33절은 정기적인 모임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임은 가정교회의 규모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실이다(참고 고전16:19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에 있는 교회). 그렇다면 분명한 것은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는 것과 헌금을 하는 것 사이에는 고린도 교회의 공적인 정기적인 집회 즉 예배의 모임이 있었다는 것을 연결로 해서 이해하게 된다. 교회는 일정한 기간을 헌금을 하여서 모았다가 바울이 올 때에 내어 놓도록 하라는 권면이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의 이러한 권면은 실천되지 않았음을 고후8:10-11절에 의하면 고린도 교회는 일년전에 먼저 시작하였고 원함도 있지만 지속적으로 실천되지 못했음을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행하기를 성취하라고 다시 권면한다. 역시 고후9:2절 보면 아가야 즉 고린도 교회가 일년전부터 예배하였다고 바울은 마케도냐 교회에 자랑했음을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 고린도 교회가 준비하고 즐겨서 헌금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이렇게 믿고 있던 일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까 염려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일년이라는 긴 시간을 정해놓고 고린도 교회가 정기적으로 즉 ‘매주일 첫날’에 모일때마다 한주간 모아놓은 것을 가지고 와서 헌금하고 이것을 가지고 바울이 올 때에 드리도록 했다고 정리해 볼수 있겠다.

    그리고 앞서 살핀대로 고후 16:1-2에 등장하는 명령형의 첫째 관심은 물론 헌금하는 일이다. 그런데 매주일 첫날이라는 구체적 날짜를 지명해서 헌금하라는 명령에서 명령의 내용이 헌금이 중심이지만 그러나 헌금의 시기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매주일 첫날이라는 정해진 날자에 대한 사도의 확인이다. 이것은 달리 말한다면 이미 매주일 첫날이라는 정해진 날자가 교회의 정기적인 회집이라는 기존의 의미를 가졌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난 후에도, 남은 문제는 고린도 교회는 왜 매주일 첫날에 예배하게 되었는가를 계속 생각해야한다.

    2 행20:7의 떡을 떼러 모인 날에 대해서
    본문에 바울이 일주일간을 머문 것의 의미를 생각하기에 앞서 주변의 정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3차 전도 여행중 바울 일행이 무교절 이후로부터 시작해서(20:6) 오순절까지는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급히 움직이는 과정에(행20:16) 첫 행선지가 바로 본문의 드로아였다. 그 과정에서 드로아에 무려 일주일을 머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무교절의 기간이 일주일 간이라고 한다면 유월절 이후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다. 빌립보에서 드로아에 이르는 기간이 5일간이었다. 그래서 두로아에서 머문 기간을 합쳐서 이미 20여일이 흘렀다. 예루살렘까지 남은 시간이 한달여 기간이다. 실제로 두로까지 해로로 행선하는 기간만 해도 적지않는 시간이다. 이미 두로에 이르렀다면 육로로 어려움 없이 예측해서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지만 바닷길이 예측을 불허하는 상황이 많이 일어난다. 그러한 와중에 일주일을 머물면서 지나는 것이 적은 시간이 아니다. 다른 장소들을 지날 때 바울 일행은 단지 하루씩을 경과했다고 묘사한다(행20:15). 그리고 밀레도에 이르렀을 때에는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서 서로 문안을 하면서 작별을 할 만큼 급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일정에 있었다(행20:16). 그리고 밀레도에서도 작별의 말을 마친 후 바로 고스로 향했고(행20:38) 그리고 다음날 또 로도에 이른다(행21:1). 이렇게 일정을 급히 몰아서 두로에 도착한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일주일 정도를 거기서 머문다. 향후는 육지 행로이기에 예측이 가능한 일정을 잡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급히 오순절이라는 기한 내에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사도의 일행이 드로아에 이레를 머물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관심하는 본문이 나온다. 바울이 이곳에서 안식후 첫 날 밤중에 떡을 떼기 위해 모인 회중에게 말씀의 봉사를 오래 했다. 이 때가 토요일 밤일 가능성과 그리고 주일 밤일 가능성은 다 있다. 유대식의 계산법과 로마식의 계산법의 차이이다. 누가가 어디 법을 따랐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안식 후 첫날이다.

    이제 이곳에서 바울이 일주일 간을 지나면서 말씀의 봉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 다루는 본문은 유독 떡을 떼러 모인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의 말씀의 봉사를 서술한다. 즉 떡을 떼기 위한 모임이 왜 다른 날이 안되는가? 왜 이날이어야 했는가? 여러 날 중에서 안식 후 첫날에 행했는가가 관심사이다.

    안식일에는 멀리 가지 못해서 제자들이 전부 모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그렇다면 왜 다른 날에 안 모였을까? 여행 전날 제자들을 모으려고 했다는 칼빈의 해석은 근거를 찾기 어렵다. 즉 본문이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는 가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행20:4-5절에 의하면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소바더, 아리스다고 세군도,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 등을 바울은 드로아에 먼저 보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이렇게 다 모인 것은 예루살렘으로 함께 가기 위한 것인데 여기에는 앞서 고전16장에서 말한 예루살렘 구제프로젝트의 헌금을 지역별로 운반하는 사람들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바울이 도착하기 전에 이들이 다 도착했기에 더 기다려야 할 중요한 이유가 없다. 즉 중요한 바울의 일행들은 이미 드로아에 먼저 갔고 그리고 바울이 올 것을 다 예비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바울이 온다는 사실이나 교회를 회집을 위해서 준비하는 일도 이들에 의해서 먼저 알려지고 준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회집의 준비를 위해서 단지 기다렸다는 말은 이해되기 어렵다.

    그리고 이때에 모인 모임의 정황은 바울의 강론이 밤중까지 지속되었던 상황이지만 모인 시작을 밤중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강론을 하고 난 다음에 떡을 떼었다고 진술한다(행20:11). 이것은 전통적으로 설교 후에 성찬을 하는 방식의 원형이 될 수 있다. 즉 의도적으로 깊은 밤중에 성찬을 한 것이 아니고 설교가 길어진데다 유드고의 사건이 겹쳐져서 더 늦어진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모임의 목표대로 성찬을 하였고 다시 긴 이야기가 진행되었다고 보면 된다. 여기서 앞에서는 강론을 했던 것이 설교의 형식이라고 한다면(행20:7,9), 행20:11절의 ‘이야기하고’는 대화 정도의 내용이다. 즉 설교와 성찬 그리고 이후의 헤어짐을 놓고 대화하는 형식으로 진행이 된 그날의 정경을 그려볼 수 있다. 예배의 순서를 정확히 말하려는 것은 원래의 의도는 아니다.

    여기서 명백한 사실은 성찬을 하기 위한 교회의 회집으로서 ‘안식 후 첫날’이다. 이것이 얼마나 정기적으로 모였는가의 문제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울이 주일에 성찬식과 더불어 교회의 회집에서 설교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바울은 주일에 성찬과 예배를 위한 회집을 하기 위해서 이레를 기다렸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리고 그가 복음을 전한 곳에 대한 섬김과 봉사이다.

    에베소 교회의 경우에는 장로들을 밀레도에 불러들여서 작별을 했다. 그런데 이곳의 교회를 위해서는 그가 일주일을 기다려가면서 성찬을 미루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온 제자들에 의해서 모든 준비가 일찍 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일주일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드로아 지역에 대한 설명은 필자의 앞 글 ‘주일의 정경적 가능성’을 참고하라)

    한가지 더 이 본문에서 살펴야 하는 것은 바울은 이레를 머물렀기에 성찬의 모임이 토요일 저녁이나 혹은 주일 저녁이냐를 보는 관점에 따라서 그의 주일과 안식일에 대한 태도를 보는 한 측면이 형성된다. 즉 이 집회가 유대인의 계산법에 따라서 토요일 저녁이라고 할 때에 바울은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 하다가 주일에 떠났다는 말이다. 이는 이레를 머물렀다는 진술에 의해서 바울은 전 주일 즉 ‘안식 후 첫날’에 도착을 한 셈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안식일에 여행을 했을 가능성이 많다. 이는 닷새동안의 여행을 말하기에 이 여행의 기간에 안식일이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면 안식일에 여행을 했다는 말인데, 이는 안식일에 규정된 여행의 구간을 훨씬 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규정에 의한 안식일을 어긴 셈이다. 그러나 바울은 안식일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일하는 날이라는 예수님의 정의에 따라서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의 바쁜 일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만약에 이 회집의 날이 로마식의 계산법에 의해서 주일 저녁이라고 하고 그가 떠난 날이 월요일 아침이라고 한다면 바울은 한주 전 월요일에 도착을 했고, 역시 주일에 여행을 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바울에게 있어서 주일은 결국 일로부터 쉬는 날이기 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위해서 즉 생명을 구하는 일을 위해서 일을 하는 날로서 이해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 역시 바울의 바쁜 일정속에서 움직였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즉 이런 양자의 가능성이 어떤 것인지에 관계없이 바울의 안식일이든 주일이든지 간에 선과 생명을 위해 일을 하는 날이라는 관점은 분명하다. 쉼을 가진다는 개념만이 신약시대에 계속해서 적용되기는 힘든 경우 중에 하나이다.

    이제 정확히 언제인지를 가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안식일이 지난 이후에 예배의 날로서 바울의 교회들이 회집을 했다는 명백한 사실이 중요하다.

    이러한 결론 후에도 왜 ‘안식 후 첫날’인가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3 계1:10의 ‘주의 날’에 대해서
    ‘주의 날’은 ‘안식 후 첫날’과 같은 동일한 용어가 아니다. 그리고 이 날이 사도 요한 개인에게 있어서 오늘 날의 주일을 의미했는지도 성경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교회사에 있어서 주의 날이 주일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사실로부터 거꾸로 추적하여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여기에 대해서는 리챠드 보캄의 주의 날에 대한 연구를 참고하라).

    여기서 교회사의 자료들을 한 번 정리해보자
    1)초기의 자료중에 플리니의 보고서에 있는 주일 회집에 대한 것이다. 일요일에 모이고 있는 무리들을 소개한다. 따라서 이 사실은 이미 111년 당시에 교회는 주일에 모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언제부터 모였는지의 시작을 말하고 있는 자료는 아니다. 그러나 앞에서 논증한 두 본문에 근거할 때 주일은 바울 사도의 영향아래 있던 이방교회에서는 45년 이후 혹은 50년경부터 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두 지역의 개체 교회가 아니다. 갈라디아, 고린도, 그리고 두로아가 포함된 아시아 교회(마케도냐도 가능하다)를 언급할 수 있다. 이것은 로마의 속주 명칭이기에 여기에 속한 개체 교회들은 무수히 많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의 선교권 거의 전부를 언급하는 의미를 줄 수 있다.
    참고) 플리니 서신10:96에 의하면 1세기 말경에 적어도 비두니아에 크리스천들은 동이 트기 전에 모였다가 같은 날 저녁에(아마도 일을 마치고) 다시 모였다

    2) 디다케가 100-150년 사이에 기록된 외경으로 보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었다.
    디다케14:1에 모든 주의 날에 - 그의 특별한 날에 - 함께 와서 빵을 나누고, 감사하십시오. 먼저 여러분 의 죄를 고백하면, 여러분의 예물은 순수하게 되어질 것입니다.

    3)이그나티우스의 편지의 년도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110년 이전에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가 순교했기에 플리니의 연대보다 최소한 더 빠르다. 관련 내용은
    Ignatius, Magnesians 9:1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의 날을 따라 산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 역시 바로 이 날에 그를 통해, 그의 죽음을 통해 온다.

    4)베드로 복음서는 주전 150년경에 가까운 이전으로 본다.
    베드로 복음서 XII. 50-52 “이제 주의 날 일찍이 주님의 여제자였던 막달라 마리아가 그녀의 친구였던 다른 여인들을 데리고 그가 누우신 무덤으로 갔다. 이는 유대인들 때문에 두렸웠기 때문인데, 이들이 매우 분노했기에 그러하다. 그래서 죽은 자들에게 행했던 익숙한 일을 주님의 무덤에서는 하지 못했다…”
    안식 후 첫날은 여기서는 주의 날로 기록한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부활의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는 복음서의 내용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5)고린도의 디오니시우스 주교가 로마의 소테르 주교에게 보내는 서신은 약 170년 경으로 본다. 그 내용은 “오늘 우리는 주의 거룩한 날을 지키면서 당신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6)베드로 행전은 저작연대가 이백년은 넘지 않는데, 여기서 특이한 점은 ‘주의 날’과 ‘안식 후 첫날’이 문맥적으로 동일시 된다
    베드로 행전 XXIX “…그러나 베드로는 마르셀러스와 “주일”에 함께 있을 것을 약속을 했었는데, 이때에 마찬가지로 그의 집에서 과부들을 돌아보고 그들에게 안수하기로 했다. 살아난 소년은 말하기를: 나는 베드로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아주 기뻐하는 소년의 모친은 자신의 집을 돌아 갔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에 그녀는 마르셀러스의 집으로 금 이천을 가지고 와서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따라서 주의 날을 주일이라고 이들 문서에서 말한다면 아주 이른 시기에 벌써 주일의 회집뿐만 아니라 주의 날을 주일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7)바나바의 서신은 주의 날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안식일 대신에 제8일을 언급하고 저작연대를 약 100년경으로 보기에 상당히 이른 시점을 말한다.
    바나바 서신15:25-26 “너희가 지키는 현재의 안식일이 내게 합당치 않은데… 그러므로 우리는 제 8일을 기쁨으로 지키는데, 이날에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나타나셨고 하늘로 올리우셨기 때문이다”

    이상의 교회사의 기록들과 요한 계시록의 기록연대와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간이다. 이러한 문서들에서 주의 날을 주일이라고 언급하고 일요일에 회집을 말했다면 이미 이것이 사용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계시록이 9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할 때 교회 역사에서 주의 날의 주일로서의 용도와 계시록1:10의 주의 날은 동일한 예배의 일요일을 말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거의 확실하다).

    실제로 리처드 보캄은 일요일 예배가 2세기에 팔레스틴 바같의 기독교권에서 보편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고 하고 그리고 이에 대한 증거로서 주일 예배에 대한 어떤 논쟁도 발견하지 못하고 일요일에 예배하지 않았던 기독교 그룹에 대한 기록도 찾아볼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리고 그는 나아가 팔레스틴 지역에서도 에비온 파들중에(율법을 준수하고 바울의 서신을 거부했던 팔레스틴의 기독교인들) 안식일과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서 주의 날을 지켰다고 말한다. 이런 증거는 태양신을 섬기는 날의 영향으로 일요일 예배를 보는 것에 결정적인 반론이 된다).

    그럼으로 우리는 주의 날에 정기적인 회집을 가졌다는 초기 교회사의 자료와 이에서 멀리않은 시점의 계1:10의 주의 날은 같은 의미의 날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여기에 다른 논증은 주의 날에서 tou kuriou가 아니고 kuriake가 쓰이는 경우와 계시록의 문맥에서 주의 날의 의미에 대한 리처드 보캄의 논증을 참고하라).

    그리고 또한 교회사의 자료에 의거하면 주의 날은 안식 후 첫날과 동일시 되는 경우도 나타나기에 복음서 기자들이 기록을 할 시점의 예배의 날로서 부활과 관련된 ‘안식 후 첫날’이 나중에 ‘주의 날’이란 표현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을 제시해 볼수 있다. 실제로 앞의 초기 교회 역사의 기록에서 주의 날을 안식 후 첫날의 대신으로 사용한 용례가 베드로 복음서와 베드로 행전에서 나타난다.

    III 왜 안식 후 첫날이 예배의 날이 되었는가?
    이제 앞의 본문들에서 바울 사도가 선교한 교회들인 갈라디아, 고린도, 아시아 지역에서(혹 마케도냐 지역도 가능하지 않을까?-헌금 계획과 관련된 고후8장의 관련)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을 예배의 날로 지켰음을 논증했다. 그리고 계시록에서 주의 날이 주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을 교회사의 자료와 관련해서 상고했다.

    이제 그러면 왜 ‘안식 후 첫날’에 예배의 날로 회집되었는가라는 문제로 나아간다.

    1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는 “안식 후 첫날”
    이를 위해서는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복음서 기자들의 표현이 중요한 자료로 사용된다. 즉 사복음서에서 공히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은 오직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서술하는데만 사용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물론 앞서 언급한 대로 안식 후 첫날이 명백히 유대인의 당시의 날자를 헤아리는 평범한 일상의 용어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이러한 일상의 용어가 성경의 기자들의 손에서 기록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와 그의 사역을 기록한 사 복음서 기자들 중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 사건외에는 이 방식을 도입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안식 후 첫날의 사건은 복음서 기자들에게 있어서 한 사건을 가리키는 유일한 표제어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다. 이러한 용법은 필자의 이전의 글(주일의 정경적 가능성)에서 말했듯이 앞에서의 설명한 본문들을 근거로 해서 복음서 기자들의 복음서 기록 당시의 교회속에서 이미 관용화된 예배의 날로서 주일의 표현기법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제 조금 더 생각해보자. 앞의 본문들의 결론인 안식 후 첫날이 교회의 회집의 날이된 배경이 무엇인가? 왜 다른 날이 아니고 안식 후 첫날이 예배의 날로서 이해되었고 회집되었는가?

    결국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결론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를 가졌기에 교회의 예배의 날로서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예수님의 율법을 완전케 하시는 사역의 인치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성전 휘장을 찢겨나감으로 성전과 관련된 모든 율법을 스스로 완전케 하셨음을 선포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성전이 되시고, 그를 머리로 하는 교회가 성전이 된다. 이것이 사도들이 이해한 율법의 완성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율법의 완성은 구속의 완성이기도 하다. 또한 구속의 완성은 구속의 목표인 창조의 회복을 말하고 재창조를 의미한다. 창조를 마치시고 그날을 복주어 거룩하게 하신 것이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라고 창2:3은 말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창조의 완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구속을 통해서 이루어지기에 이것을 재창조라고 부른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바울 사도는 말한다.

    이제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완성으로서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 즉 안식이 도래했다. 이전의 안식을 지향하는 모든 규례들과 율법들이 이 구속의 사건속에서 완성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날의 구별이 없다는 말은 옳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예배의 날로서 주일을 정경속에서 초대 교회들이 받아들이게 된 배경을 살피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구약적 의미의 날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하게 다른 날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구속의 완성을 이루신 안식 후 첫날의 부활의 날을 자신들의 구원을 축하하고, 기념하고, 즐기고 경배하는 날로서 가지고 왔던 것을 본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완전한 안식을 우리에게 보장했지만 누리도록 허락된 것은 아니다. 더 이상의 안식을 위한 중보자가 필요로 한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영원한 안식을 우리가 교회가 현재 완전히 누리는 것은 아니기에 히브리서의 기자는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히4:11) 분명히 선언하고, 이것은 마치 바울 사도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표현(빌2:12)과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2 히브리서의 구속사적 이해 속에서 안식과 공적 예배의 회집
    1) 히4:8절의 이해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의 집의 종이었던 모세보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히3-4장의 말씀이다. 그래서 마치 모세시대에 불순종하여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던 일을 시95편을 인용하면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것을 핍박가운데 있는 히브리서 당시의 성도들과 교회들에게로 적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꼭 붙잡고 순종하지 않으면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단순히 모세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더 위대하니까 우리를 안식에 그냥 넣어줄 수 있다는 논리가 아니다. 더 위대하신 그 분의 말씀을 믿음에 화합해서 순종함은 확실히 안식을 보장한다는 논리로서 더 분명한 것이 없기에 이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격노케 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이러한 배경속에는 바로 예수님의 안식 주심의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문제의 본문은 히4:8절의 해석이다. 개역성경은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난외 주에 예수라는 말로 헬라어로 기록되었음을 알린다. 이것은 예수로 바꾸어도 된다는 의미이다. 물론 예수와 여호수아가 같은 발음이기에 생긴 문제임을 안다. 그러나 실제로 여호수아인가 예수인가?

    먼저 조금 앞의 본문인 히4:4에서 제 칠일이 언급되는 상황을 이해해보자. 3절에서 이미 믿는 자들이 안식에 들어간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리고 나서 시95:11절을 인용하면서 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 있음을 1절에 대한 논증으로 사용한다. 중요한 것은 들어가는 것과 들어가지 못하는 것의 대조이다.

    이에 다윗의 시편 95편의 말씀을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당대를 가리켜 예언한 말씀으로 “오늘날”을 이해한다. 그래서 7절의 인용이 위치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다루려는 8절의 말씀이 나온다. 여기 8절에 나오는 이가 여호수아인가 아니면 예수님인가?

    먼저 예수님이 아닌 여호수아를 선호하는 번역은 교리적인 부담감을 줄일 수 있다. 즉 여호수아의 인도아래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기에 완전히 정복하는 다른 날을 말한다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이해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안식을 아직 주지 못했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완전성에 누가 된다는 이해이다. 이것은 건강한 교회적인 이해이다. 그러한 신앙고백적인 이해를 근거해서 성경을 일차적으로 읽기 시작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성경 읽기 혹은 성경 해석은 성경 자체의 서술 방식과 주변 문맥에 의해서 다시 검증을 받고 나서 이러한 읽기가 적당한 것인지를 확정해야 한다.

    여기서 7절에서 시편의 다윗이 오늘날이라고 말할 때가 바로 8절에서 여호수아가 안식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말할 수밖에 없는 다른 한 날을 의미한다. 여호수아가 주지 못한 안식을 얻기 위해서 다음 시대에 다윗은 자기 시대까지 아직 이르지 않은 더 먼 어떤 날에 얻을 안식의 때를 바라보면서 오늘날이라고 했다는 해석이다. 다윗은 그때에 순종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야 함을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9절은 안식할 때가 남아있다는 진술을 하는데, 이는 다윗 시대에 유효했던 진술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10절이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쉬는 자들은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들 즉 죽은 자들 외에는 없고, 현재는 11절이 경고하는 바와 같이 순종치 않는 본에 빠지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서 12절 이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14절) 붙잡으라고 한다.

    여호수아가 완전한 안식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다윗은 자신의 시대에 그 안식을 소망하면서 순종할 것을 7절에서 권면과 경고를 했고, 이것은 역시 히4:1-2에 의하면 히브리서 기자의 시대에도 해당하는 것이다. 아직도 완전한 안식의 때는 아니다. 그래서 그 안식을 바라보면서 힘써 들어가기를 애쓰라고 11절은 권면한다.

    그런데 만약에 여호수아가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했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가? 8절에 나오는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고 하는 진술과 충돌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 후에 다른 날은 명백히 다윗이 말한 오늘날을 말한다. 따라서 예수님보다는 다윗 이전 시대에 있었던 여호수아가 더 옳다고 본다.

    요지는 히4:1이 말하는대로 아직 우리가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찌라도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있다는 경고이다. 즉 안식의 약속이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윗이 말한 오늘날의 경고는 아직도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14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으라고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안식에 들어가는 확실한 길이 열린 것은 사실이지만 제 7일에 하나님이 일을 쉬신 것 같이(4:4) 쉬는 일은 아직 죽은 자 외에는 도래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지향하여 들어가기를 힘쓰는 일이 필요하다. 완전히 천국의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2) 히10:25절의 모이기를 힘쓰라는 표현
    이제 어떻게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가 구체적으로 붙잡는지 히브리서는 히10:19이하에서 실제로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열어놓으신 생명의 길을 통해서 사죄의 은총을 얻어서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서 그리고 사랑으로 서로를 격려하면서 10:25은 모이기를 힘쓰라고 반어적으로 강조한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그날 즉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바라보면서 서로 모이기를 힘쓰라는 권면이다.

    여기서 모이기를 힘쓰라고 할 때 언제를 말하는가? 본문은 정확히 언제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이기를 힘쓰라는 표현이 일반적인 사적인 모임을 말할 수도 있고 물론 예배의 공적인 모임을 말한다. 당시의 환경이 핍박 속에 있었기 때문에 공적인 예배보다는 권면을 위한 사적인 모임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공적인 예배의 모임을 배제한다고 볼수는 없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성격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대로 핍박시에 공적 예배로 모이는 것은 노출의 위험성이 있으므로 피하자는 견해와 자신들은 신령하기에 모일 필요가 없다는 견해 그리고 혹 가설적으로 설교자에 대한 불만족으로 인한 예배 기피증 등도 제시된다. 그러나 강력한 증거가 첫 번째의 것이리라. 즉 문맥에 따라서 핍박시에 모여서 예배하는 일을 피하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정기적인 모임임을 말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날 즉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날을 사모하는 자들은 더욱 권하여 모이기를 힘쓰라고 한다.

    이제 히브리서 기자가 그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는 날이 즉 예배로 정기적으로 모이라고 하는 날이 안식일인지 혹은 주일인지를 확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본문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모든 것들보다 위에 있는 분임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분을 깊이 생각하고, 그분을 붙잡는 길만이 이 시련의 때를 이기고 안식에 들어가는 길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구약의 제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물 되심으로 완성되었음을 강조했다. 우리가 비록 어느 날인지를 확정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요성이다. 그리고 공적인 예배의 모임이 환란 때의 교회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히브리서의 두 본문 즉 4장과 10장의 본문을 설명하면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창조의 제 7일 이후에 구속사의 진전 속에서, 그러나 아직 안식할 때가 남아있는 교회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10장 19절로 시작되는 구체적인 적용부분에서 소망과 믿음과 사랑의 행위들은 물론 모이기를 힘쓰라는 공적 예배의 행위를 강조해서 말한다. 즉 안식할 때가 남아있는 성도의 삶 교회의 삶에서 공적인 예배를 통해서 이러한 신앙의 덕목들이 권면되어 영원한 안식을 향하는 걸음을 재촉하라고 한다.

    3) 눅6:1-11절이 말하는 안식의 의미
    눅 6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사이에서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은 사건을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답변으로 구성되었다. 다윗이 진설병을 먹은 사건을 통해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용하는 일이 가능함을 먼저 진술하고 그리고 나서 구체적으로 허용되는 일의 범위를 생명을 구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일로 규정하신다. 따라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참된 안식에 들어가는 행위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일이 바로 생명을 구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제 4계명이 요청하는 바의 본질인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의 본류에 속한다. 거룩히 지킨다는 말은 하나님의 거룩을 반영하는 삶을 안식일에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는데, 실질적으로 안식을 지향하는 삶을 말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안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이 분명히 선언하신 말씀이다.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 바로 안식을 지향하는 거룩한 삶의 모습을 말한다.

    여기서 진설병을 다윗이 먹을 수 있었던 일을 근거해서 생명을 구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의 연결을 이루어 가신 예수님의 논증의 중심을 좀 더 살펴본다. 삼상21:6에 의하면 여호와앞에서 물려낸 떡이다. 이것은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떡으로 규정되었다(출25:30; 35:13; 39:36; 40:23; 레 24:8, 9). 그런데 제사장만이 이 떡을 먹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떡의 의미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음을 인하여 부정한 여부를 확인한 다음에 제사장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그 떡을 다윗의 일행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여기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의 발전의 기틀이 마련된다. 즉 자신의 권리를 희생하여서 다른 사람의 생명과 선을 행하는 것을 위해 먹이는 것이 바로 진정한 거룩을 보존하는 적극적인 방식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안식의 봉사를 위한 잃어버림과 낮아짐의 원리가 거룩의 보존과 안식의 보존의 원리로서 작용한다.
    안식일에 쉬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안식을 위해서 즉 생명과 선을 위한 봉사를 위해서 자기의 일로부터 쉬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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