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그릇안에 담긴 보배 2002-08-13 15:26:18 read : 4318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년 7월 21일 // 고린도후서 4 : 7-11
유명한 철학자 에릭 프롬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전히 태어나기 전에 죽는다." 진정한 나를 알지 못하고 살다가 겨우 나 자신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때가 되면 죽게 된다는 말입니다.
미국 UCLA의 심리학 교수인 로저 골드 박사는 성인의 심리 발달 과정을 7단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도망의 시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16-17세 때 경험하는 시기입니다. 부모님의 통제에서 벗어나려 하고 도망치려 하고 어쨌든 모든 통제에서 자유 하고자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미지의 미래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고, 장래에 대해서는 걱정과 근심이 많습니다. 도망가고 싶으면서도 도망가서 살 자신은 없는 것입니다. 저의 처 조카중에 그의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 속을 많이 아프게 한 조카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와서 마음 아프게 한 것이 생각나서 그러는지 엉엉 우는데 그렇게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그런데 이 아이가 장례기간에 어떤 여학생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아이가 열심히 주방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나이를 물어보니까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는 일을 보면 어른처럼 일을 하는데 학교 끝나면 장레식장으로 출근을 해서 열심히 일을 해줍니다. 이미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아서 제가 조카에게 물었습니다. '애야 넌 학교 졸업하지 마자 빨리 장가가거라.' 그랬더니 안 간데요. '왜 그러니?' "돈 벌어야 먹여 살리지요." 그러더라고요. 부모님의 통제를 벗어나서 이미 어른 흉을 다 내버렸는데 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현실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망의 시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둘째는 탐색의 시기인데 18-22세까지라고 합니다. '내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해서 이런 일도 생각해보고, 저런 일도 시도해봅니다. 여기서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가족보다는 친구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 대신에 그 자리에 친구가 자리합니다. 그 다음 23-28세까지는 '투쟁기' 라고 합니다. 가장 어려운 시기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자이 이상의 실현을 위해서, 혹은 자기 실현을 위한 무한 경쟁자로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과 맞부딪치고 모든 사건에 도전하면서 성장해나갑니다.
29-34세가 되면 벌써 회의기에 다다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부터 인생 전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니까요. 철이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한대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내가 수고하고 노력하면 모든 것을 될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 이제 무언가 한계를 느낍니다.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 회의를 느낍니다. 그리고 35세에서부터 43세가 되면 '불안의 시기'가 옵니다. 이제 한계가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허탈감에 빠지고 앞에 있는 미래를 생각하면서 초조해집니다. '내 인생이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이래서 위기감도 느끼고 불안에 떤다는 것입니다.
또 44-50세까지는 '회고기'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나를 압니다. 그리고 지난날을 생각해 봅니다. 잘못된 것이 너무 많습니다. 후회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내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어버렸나? 를 돌아보면서 '물질이라는 것을 얻어보려고 그렇게 목숨걸고 애썻건만 그실 별게 아니었구나! 지위도 별게 아니었구나 ! 하고 깨닫게 됩니다. 이 때는 사람이 소중해지기 시작하고 친구가 소중해지기 시작하고 가족이 소중해지기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50세 이후의 시기로서 '성숙기' 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나이 쉰에 다다라서야 성숙해지고 비로소 철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냐' 하는 것을 여기서 평가하게 되고 나와 너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고 건강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때가 되면 진정한 자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장례식을 치르게 되면 어김없이 한번은 통과해야할 대목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장례식이 다 끝난 후에 조문객들이 보내온 조의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어떤 전통이나, 법칙이 없습니다. 좀 성숙한 유족들은 '그것 함부로 사용할 수 없으니 의미 있게 사용합시다.' 해서 선교헌금으로 드린다든가? 남아 있는 어머니에게 다 드려서 여생을 좀 여유 있게 살게 하신 다든가 하는데 현실이 현실이라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가족 간에 불화도 겪기도 하고 어려움도 당하기도 합니다. 저의 처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례식을 다 치렀습니다. 심신이 피곤해서 온 가족들이 다 목욕을 하고 어느 식당에 들렀습니다.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합니다. 그리고 이제 의견이 모아집니다. '가장 큰 누님하고 형님 이렇게 두 분이 상의해서 결정하면 우리는 순종하겠습니다.' 그래서 한시간 동안 상의를 하는데 결론이 없이 왔습니다. 두 분이 이야기하다가 울고만 왔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말이 없던 큰처남이 말을 꺼냅니다. "월급쟁이 한다고 하면서 객지 생활만 하다가 아버지 어머니 곁을 떠나서 살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항상 아버지, 어머니가 건강하게 살아 계시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을병에 걸려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아 아버님도 죽게 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보름동안 밤잠 안자고 간호를 했지만 이제 세상을 떠나버렸다" 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60이 다된 사람이 울먹이는데 동생들이 다 울었습니다. 사위인 저도 눈물이 나는데 동생들이 안 울었겠습니까?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서로의 오해가 풀어지고, 아름다운 고백을 나누게 됩니다. 진솔한 나눔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자리에서는 말못하고 있다가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 저의 집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왜 진작 저런 고백과 대화가 없었나? 사람이 죽은 그 죽음 앞에서 진실해지니 진실을 찾는 대가가 너무 크다' 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먹고 살아가기가 바쁘시지요.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마음은 있습니다. 그런데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철이 들고 내가, 나를 알아갈 때쯤 되면 부모님은 내 곁에 안 계시고, 사랑해야 할 그 대상은 저만큼 멀리 가버렸습니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한가지 깨닫는 자각은 '아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자신의 연약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실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렇게 건강관리도 하고, 지식과 명예를 얻는데 그렇게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기도 합니다 만은 죽음 앞에 그 모든 것이 다 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흙으로 왔다가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우리 인간을 단 한마디로 정확하게 정의해 줍니다. 무엇입니까? '질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그릇은 그릇인데 가장 깨지기 쉬운 그릇, 부서지기 쉬운 그릇입니다. 흘러 지나가는 말에 상처를 받기도 쉬운 그릇이고, 질병에 무너지기 쉬운 그릇이고, 사고와 재난을 만날 때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지만 그냥 무너져 버리는 그릇. 질그릇입니다.
질그릇 됨을 발견하라.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연약함을 발견하고 인정할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항상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스스로가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인간의 문제는 연약함에 있지 않습니다.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가 나는 항상 강한 사람이다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데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영성가 니느웨의 이삭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기 죄를 아는 사람은 죽은 자를 일으키는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 자기 죄를 위해 한 시간을 진실로 울부짖는 사람은 온 세상을 가르치는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 자기 약함을 아는 사람은 천사를 볼 수 있는 자보다 더 위대하다."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사모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자신의 약함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강함을 사모합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 앞에 위대하게 쓰임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그들이 자신의 약함을 발견하였을 때, 하나님 앞에 위대한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질그릇으로 깨달았을 때 그는 그 때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고 발견하였을 때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화로다 나로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깨달았을 때 소명을 받아 위대한 선지가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나는 벌레요 백성의 조롱거리입니다." 라고 자신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은 그를 위대한 성군 다윗으로 축복해주셨습니다. 얍복강 가의 야곱은 자신을 야곱으로 깨달았을 때 이스라엘로 바뀌어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달았을 때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질그릇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너무 약합니다. 깨지기 쉽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세요. 저는 컴퓨터 게임을 못합니다. 그런데 세살 짜리 어린아이들 보면 기가 막히게 잘합니다. 언젠가 우리 교역자들과 함께 격포에 있는 어느 교회에 교역자 수련회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돌아오다가 놀이기구가 있어서 비행기 놀이기구에 박온유를 태웠습니다. 눈 하나 찡그리지 않고 웃으면서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타지 못합니다. 못하는 것이 왜 그리 많은지 모릅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모르는 사람들이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에 사는 분들은 예의가 바르답니다. 아무리 높은 사람도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그보다 더 많은 사람도 있고 돈과 지위가 있을 지라도 금방 몰락하기도 하고, 밑바닥까지 떨어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금방 성공할 수 도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겸손하고 예의가 바르답니다. 그런데 누가 예의가 없습니까? 누가 겸손하지 못합니까? 나의 연약함과 한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의 연약함을 알고 내가 지극히 한계 적 존재임을 인식하고 언제나 겸손할 때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능력을 입혀 주십니다. 인간의 힘과 인간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능력과 지혜를 공급하여 줍니다. 나의 약함은 곧 하나님의 강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핍박도 이겨내게 하고, 시련도 감당하게 하고, 유혹도 물리치게 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가장 연약한 질그릇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능력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죄악을 이깁니다. 사단을 이깁니다. 환경을 이깁니다. 세상의 유혹과 풍조를 이깁니다.
당신 안에 보배를 발견하라.
그러므로 나는 약하지만, 나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이지만 그보다 더 비교할 수 없이 강하고 위대한 보배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에게는 더러워진 죄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죄가 아무리 강할 지라도 그 죄를 이기는 강력한 예수의 보혈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하는 길은 여러분 안에 있는 보배를 발견하고 그 보배를 힘입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그 지글러가 쓴 {정상에서 만납시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17년 동안 저능아로 살았던 한 천재를 소개합니다. 빅터 세리브리아코프 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15세 때 한 선생님이 "너 같은 저능아는 공부해도 소용없어! 장사나 하는 것이 낫다." 그 말을 듣고 그는 무려 17년 동안 저능아처럼 살았습니다. 그가 32살이 되었을 때 우연히 자기 아이큐가 161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천재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많은 책을 썼고, 특허를 냈고, 기업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이큐 132이상의 사람만이 가입할 수 있는 맨사 클럽의 회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자기 안에 엄청난 보배가 있었는데 그는 잘못된 선생님의 한마디 말 때문에 그 보배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저능아로 무려 17년 동안을 헛되게 살아 온 것입니다.
의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인간이 가진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인간의 몸은 33조라고 하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많은 세포들에 의해 조직되고 조화되어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정밀한 조직은 머리 속에 있는 두뇌의 표면으로서 140억 개의 신경세포가 생각하는 기능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학문의 즐거움] 이라는 책을 쓴 일본의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의 두뇌에는 140억 개의 뇌 세포가 있다. 그 140억 개의 뇌 세포를 다 쓰려면 234개라는 긴 수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사람은 방대한 수의 뇌 세포를 가지고 있지만 보통 그 10퍼센트, 많아야 20퍼센트를 다 못쓰고 일생을 마친다. 쓰이지 않는 뇌 세포는 마치 바다 속에 숨어 있어서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빙산과 같다. 즉 우리는 잠자고 있는 거대한 뇌 세포에 숨어 있는 자기 재능이나 자질을 스스로 알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의 재능을 모두 발견하고, 자기라는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인생은 너무 짧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여러분!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내 안에 엄청난 보화가 있음을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가며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조용히 명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를 발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발견해야 할 가장 소중한 가능성은 우리 안에 보배로우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선지자 에례미야는 하나님을 발견하기 전에 자신에 대한 비전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발견하기 전에 자신을 '어린아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어나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1:5)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는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발견하기 전에 흔들리는 갈대라는 뜻을 가진 '시몬'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만난 후에 그는 거대한 암반이라는 뜻을 가진 '베드로', 반석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그 질그릇 됨은 결코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보배로우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가능성을 여러분 밖에서 찾지 말고 여러분 안에서 찾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 안에 무엇이 있는 가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났을 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모세는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무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출4:2) 질문하셨습니다. 모세가 가지고 있던 것은 지팡이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세가 가지고 있는 하찮은 지팡이가 이스라엘 민중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해질 무렵 벳새다 들녘,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있을 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오병이어 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 실망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사람들을 먹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네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네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오병이어입니다. 그것을 가져오라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 성전에 예배하고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구걸을 합니다. 그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는 순간 베드로는 흥분하였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걸었습니다. 뛰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은과 금은 없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주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가진 것이 없을 지라도 우리 안에 가장 확실하고, 가장 절대적이고, 가장 가치 있는 보배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 이름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이 떠나갑니다. 예수 이름으로 병자가 고침을 받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지식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때 어린 소년 다윗이 구척 장수를 물리친 것이 그의 지혜와 힘과 무기가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농촌에 단독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심방을 가는데 저는 항상 빈손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저와 동행하시는 분이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합니다. "목사님 심방을 하는데 그냥 빈손으로 가면 사랑이 없다고 말합니다." 처음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내가 지금 내 안에 있는 예수 이름 의지하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 가장 큰 사랑을 표현하는 것인데 무슨 다른 것이 필요할까? 선키스트 한 박스 가지고 가는 것보다 예수 이름으로 주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주는 사랑이 아닌가?'
여러분! 성도가 이사를 하였다든가, 병원에 입원했다든가 할 때마다 물론 사랑을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것이라도 정성껏 사들고 가는 것 아름답습니다. 필요합니다. 왜? 사랑은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러분 안에 보배로우신 예수 이름을 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성도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축복하고, 위로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습니다.
일본의 여류 작가, 빙점, 이 질그릇에도, 양치는 목자 등 수많은 소설을 써서 기독교를 올바르게 이해시키고 복음을 전했던 미우라 아아꼬라는 기독교작가가 있습니다.
그녀의 반평생은 병주머니의 반평생이었습니다. 폐결핵, 척추카리에스, 띠 모양 습진, 파킨스병, 그리고 암 등 갖가지 질병 속에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 속에서 그는 위대한 작품들을 생산해 냈습니다. 이 여인이 고통 속에서 암송한 시가 하나 있는데 작자 미상의 "아프지 않으면" 이라는 제목의 시였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말씀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뵈지 못할 성안이 있다.
아아 ,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 수 없다.
아픔이 있기 때문에 기도가 있었고, 노래가 있었고, 신앙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실 아야꼬는 말할 수 없는 아픔 속에서 영광스런 작품들이 나왔고 그 작품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운 인생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아야꼬 여사가 누워 있는 병실에는 다른 환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야꼬 여사는 아픔 속에서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을까? " 그녀는 기도하는 가운데 "비록 나는 아프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기쁨을 보여 드려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비록 겉모습은 초라한 질그릇이지만 그 안에 보배로우신 그리스도가 계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그녀는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간호사가 오면 부드럽게 웃었고, 옆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질 그릇 속에 핀 아름다운 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상처받기 쉽고, 사단의 유혹에 그냥 넘어지기 쉽고, 질병 앞에 건강을 막을 수 없고, 아무리 운동을 하고 몸매를 가꾸어도 활처럼 지나가는 세월 앞에 늙음과 죽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다. 우리의 약함 속에 강하신 주님이 계심을 말입니다. 세상과 죄악과 사단 귀신을 이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지혜와 하늘의 능력입니다. 그 보배로우신 주님의 능력 힘입어 죄악을 이기고, 질병을 이기고, 절망을 이겨내서 질그릇 속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