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의 뜻은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도 좋은 일이 생기면 시기와 질투가 생기는 법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집니다. 그런데 원래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촌이 논을 샀을 때, 시기와 질투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뭔가 도와줄 일이 없는지를 먼저 생각하는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인분(人糞)은 매우 소중한 거름이었습니다. 만약 사촌이 논을 사게 되면 인분이 더 필요할 것이고, 그것을 생각하니 '뒷간'엘 자주 가서 거름을 만들어 줘야겠다는 생각에서 그 속담이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의미의 속담이 그만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왜곡되어진 것입니다. 즉 사촌을 사랑하는 마음이 정반대로 해석되어져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가까운 사람이 슬픈 일을 만났을 때, 그 슬픈 일에는 함께 할 수 있어도 기쁜 일, 혹은 즐거운 일에는 함께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꼭 트집잡고 이 말 저말하면서 기어코 흠집을 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은 원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영 엉뚱한 말은 아닌 듯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도 그런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사촌이 논을 사는 정도가 아니라 이웃사촌이 오랜 질병에서 고침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을 보면서 함께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생트집 잡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흔히 '호사다마'라고 하듯이 '좋은 일에는 탈이 생길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며 넘길 수도 있겠지만 이들의 트집은 그런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생각의 차이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0절에 "유대인들이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내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들이 문제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안식일 날 그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람은 자그마치 38년 동안이나 병석에 누워있었습니다. 아마도 왠만한 사람들이라면 이 병자에 대한 얘기를 다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38년동안 병석에 누워 있던 사람이 지금 일어나서 자기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고 있다면 이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며 한편으로는 기뻐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비슷한 종류의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 외에 비록 다른 질병이라 할지라도 그동안 의원을 통해서 고치지 못했던 사람들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미국에서 폐암 치료에 아주 탁월한 효능이 있는 신약이 개발되었다 하여 화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임상 실험을 거쳐 시판되려면 적어도 몇년 정도는 더 걸릴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은 자신이 그 임상실험의 대상이 되어도 좋으니 그 약을 자기에게 복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환자의 가족들도 무척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 희망이 거의 없던 사람들에게 한 가닥 희망을 갖게 하는 희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질병으로 고통 당하던 사람이 누군가가 개발한 약으로 인해 그 병이 낫게 되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기뻐해야 할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그런 질병에 걸리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병 나은 사람을 보면서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느냐?' '이제부터는 더 열심히 살아야지'하며 격려해주지는 못할망정 '누가 너에게 그 약을 줬느냐?' '왜 아직 정식으로 시판을 결정하지도 않는 약을 먹었느냐?'라고 트집을 잡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약이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혹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따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트집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종류의 트집이 아닙니다. 그들이 지금 문제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안식일 날 왜 자리를 들고 걸어가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은 38년된 병자가 나았다는 것에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단지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안식일 날 문제의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안식일날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을 문제삼고 있습니까? 그들이 정해놓은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물건을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물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한 것은 느헤미야때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안식일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서 안식일에도 물건을 들고 성내에 들어와 장사를 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느헤미야가 안식일을 이런 식으로 지키면 안식일이나 평일이나 별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안식일에는 물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요즘도 보수성향이 짙은 신자와 그렇지 않은 신자들 사이에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일날 돈 쓰는 문제입니다. 과연 주일날 돈 쓰는 것이 합당하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주일날 돈을 쓰면 안된다고 주장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주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날 돈을 쓰게 되니까 주일이 예배드리는 것 외에 평일과 구분이 별로 되어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을 가지고서 평일날 하던 일들을 주일에도 똑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일날 돈을 쓰면 안된다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법을 정해놓았지만 불편한 것은 정작 그 법안에 갇혀 있는 자신들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무엇입니까? 자의적으로 그 법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즉 병자를 자리에 눕힌 채로 운반하는 것은 괜찮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빈자리라도 들고 가게 되면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그들은 간주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주일날 돈을 쓰면 안되지만 교회에 오기 위해 차에 주유를 하고 톨게이트비를 지불하는 것은 괜찮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이들이 문제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안식일 날 왜 자리를 들고 걸었느냐?는 것입니다. 38년된 병자가 그 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실로 인해 함께 기뻐해 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이런 말로 사람의 기분을 망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우리들도 자주 그런 잘못을 범할 때가 있습니다. 함께 기뻐해 주어야 할 일에 기뻐해 주지는 못할망정 엉뚱한 말로 사람의 기분을 망쳐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한마디는 전체 분위기를 위축시키기도 하고, 혹은 썰렁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위축시키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것일까요? 유대인들의 이런 율법규정을 몰라서 그렇게 명령하신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굳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것은 그가 분명히 이 질병에서 나았다는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더 이상 그 질병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 병자에게 자리는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니 그 자리를 들고 가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약 봉지를 쌓아놓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개 완치가 어려운 질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머리맡에 약봉지를 두고서 수시로 약을 먹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질병으로부터 완치가 되었다면 그 약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과감하게 쓰레기통에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자신이 아팠다는 것을 기념하면서 약을 그대로 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디 기념할 것이 없어서 아팠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약을 남겨 둡니까? 어떤 분은 깁스를 했던 것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약을 버립니다. 깁스한 것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다 나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완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약을 버리지 못하거나 치료기구들을 끼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자신이 나았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는 사림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왜 이 사람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그가 다 나았다는 선언입니다. 더 이상 자리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갔다하여 그것을 문제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런 것일까요?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율법을 어기는 것일까요? 율법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병자가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깨닫게 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깨닫기는커녕 율법의 문자적 의미에 얽매여서 정말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은 뻔합니다.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풍성한 사랑을 깨닫지 못한 사람의 특징 중에 하나가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함께 기뻐해야 할 일에 기뻐하지 않고, 이것은 옳다, 이것은 옳지 않다만 따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것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기뻐해야 할 일에 기뻐하지 않고 옳고 그름만 따진다면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놓쳐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물음에 대해 이 병자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11절에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 병자의 대답은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한 너무도 정확한 대답이었습니다. 자기가 자리를 들고 걸어간 것은 자신을 낫게 한 사람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한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얼핏보면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에 대해 핑계를 대는 것 같지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은 자신을 걷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기에 안식일에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실 권리도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다시 물었습니다. 12절에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을 고쳐준 자가 누구인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계속된 질문은 단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 병자가 회복되어진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38년동안이나 질병으로 인해 고생하다가 낫게 되었는데 어떻게 해서 병이 낫게 되었느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율법을 어기도록 지시한 사람이 누구냐? 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사소한 일도 따지게 만드는 사람들의 규칙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회복이지 어떤 규칙이나 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틀이나 규칙을 무시하자는 얘기도 아닙니다. 그런 것이 없다면 질서가 무너져서 엉망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면 부부간에도 분명한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질서만 생각하고 남편들이 아내를 하인 부리듯 하거나 '어디 아녀자가 감히'하면서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과연 그 질서가 바른 질서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질서가 중요하지만 남편과 아내사이의 회복은 질서이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질서 때문에 아내가 상처입고 고통을 받게 된다면 그 질서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회복을 무시하는 규칙은 결코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틀이나 규칙보다 우선되는 것은 사람의 회복입니다. 회복이 없는 규칙이나 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규칙이나 틀에 얽매여서 사람과 사람사이의 회복을 추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에 관심을 가져야지 엉뚱한 것으로 소모전을 벌이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얼마 있지 않으면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실시됩니다. 이미 후보들이 등록을 마쳐서 선거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후보들이 해야 할 일은 지역구를 위해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 어떻게 정책적인 대결을 벌일 것인가? 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상대 후보에 대한 흑색선전과 비방하는데 선거운동기간을 다 보내는 후보가 있다면 과연 그런 사람을 뽑아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들의 관심은 이 사람이 어떻게 해서 병이 낫게 되었느냐? 가 아닙니다. 왜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갔느냐? 이며 누가 그렇게 하라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음을 입은 이 사람도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면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낫게 한 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금 전까지 분명 자신은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동안이나 누워있었는데 지금은 자기가 누웠던 자리를 들고 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금방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분명한 출발점은 과거엔 내가 소망도 없고 약속에 관해서는 외인이었는데 이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망도 가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잃어버린바 된 자였는데 이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는 그가 예수를 알지 못한 이유가 예수께서 그 자리를 피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왜 자리를 피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성경학자들마다 조금씩 견해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건대 왜 피하셨는가? 보다는 지금 이 사람은 분명 슬픔에서 기쁨으로 바뀐 상태이며 그 일로 인해 상당히 고무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그 기쁨을 안고 무엇을 했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병 고침을 받게 되었다면 무엇을 제일 먼저 할 것 같습니까?
그로부터 며칠 후 주님께서 이 사람을 다시 만납니다. 14절에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가 병 고침을 받은 후 찾아간 곳은 성전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가 왜 성전을 찾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이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병고침과 성전이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즉 병고침을 받은데 대해 감사하기 위해 성전을 찾게 되었는지 아니면 제사장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기 위해 성전을 찾았는지 분명한 사실을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가 병 고침을 받은 직후 성전을 찾았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음에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주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면 우리도 주의 전을 찾아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를 나가지도 않으면서도 자신을 가리켜 신자라고 말합니다. 비록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자신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교회에 나간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교회를 멀리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거듭난 심령들은 교회에 출석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병을 고치실 때는 베데스다 못가에서 그를 만나셨지만 그와의 두 번째 만남은 성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든지 주를 만나고 영접할 수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전도받고 예수를 영접할 수 있고, 가정에서 집안일 하다가 전도나온 사람에 의해 예수를 영접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어릴 적부터 믿는 가정에서 자라나 예수를 자연스럽게 영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형식으로 주를 만났던, 두 번째 주님과의 만남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즉 여전히 교회에 출석은 하지 않으면서 내가 신자라고 말한다면 정말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인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었던 사람은 그가 피로 사신 교회를 절대로 부정하거나 가벼이 여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사람을 만나서 하신 얘기가 무엇입니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죄를 범치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지금 그는 오랜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엔 그것이 전부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에게 심한 것은 질병이 아니라 죄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만약 죄에서 떠나지 않으면 더 심한 것이 그에게 생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더 심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어떤 분은 죽을병이라고도 하고 어떤 분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라고도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후자인 듯 합니다.
오랫동안 앓아오던 질병이 고침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입니다. 자신이 그동안 살아왔던 지난 38년의 세월은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육신이 병든 것으로 모잘라 마음까지 병들어 있었는데 고침을 받았으니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란 말입니다. 근본적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더 심한 것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아무리 병이 나아도 그 병의 근본원인이었던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 중에는 고작 질병이 나은 것을 만족하며 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가정의 역할이 중요시되는 때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래서 모든 것이 가족 중심이 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교회도 가정의 역할을 강조하지 않으면 부흥하지 않을 정도로 가족중심, 가정중심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왠만한 교회들은 모두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라는 표어를 내걸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족이 만족하는 쪽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주일날 봉사하며 주의 일에 충성하기보다는 가족중심으로 예배만 드리고 야외로 나간다든지 아예 한 두주 정도는 빼 먹어도 별로 마음이 쓰이지 않을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아무리 가족중심의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할지라도 죄 문제가 해결되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행복해 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설정되어 있지 않으면 잠깐동안은 그런 요소들이 우리의 가족을 기쁘게 해주고 나를 충족시켜 주는 것 같아도 그게 아니란 얘깁니다. 왜냐하면 잠시 후 더 심한 것이 나에게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38년된 질병을 치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주님을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성공여부를 지금 현재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 혹은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느냐에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인생의 성공여부는 우리의 마지막 날에 판가름납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보아도 부자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고 나사로는 실패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심지어 죽어서 장례를 치룰 때에도 부자의 장례행렬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의 애도속에 그의 장례가 치루어졌습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거적데기에 둘둘 말려 아무데나 버려졌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삶의 성공여부는 그 이후에 갈라졌습니다. 부자는 음부에 내려가 고통 중에 물 한 모금을 호소했습니다. 반면에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누가 성공적인 삶을 산 것입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거지 나사로입니다.
부자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행복한 살을 살기 위해 열심히 쫓아다녔을 것입니다. 가족을 중심으로 가족들이 좋아하는 일만 골라서 하면서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음부에 내려가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질병이 치유되어지는 정도가 아닙니다. 더 심한 것이 우리들에게 찾아오기 전에 우리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합니다.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여러분! 절대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은 인간다운 삶이 아니라 죄를 고백하고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다시는'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들 중에는 결심하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현실을 너무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직후 갈릴리로 돌아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먹을 것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은 믿음이고, 현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하다가는 굶어죽기 십상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우리들도 믿음과 현실 속에서 수많은 갈등을 합니다.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물론 정답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믿음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언제나 우리가 택하는 쪽은 현실입니다. 먹는 문제부터 해결하고 나서 기회가 오면 믿음을 발휘하겠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생각이 아닙니다. 주님의 생각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붙들기보다는 현실을 택합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어쩔 수 없었다'라고 변명합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어쩔 수 없어서 행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발휘하지 못하는 나의 연약함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믿음은 평소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그 믿음 때문에 손해 보는 날이 올 때 그 사람의 믿음이 어떠한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 때문에 손해 보느니 차라리 믿음을 저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손해를 보더라도 믿음의 행동을 고집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현실입니까? 믿음입니까? 믿음으로 손해보는 쪽입니까? 아니면 손해보는 것보다 믿음을 잠시 뒤로 미루는 쪽입니까?
이제 주님으로부터 죄를 범치 말라는 말을 들은 이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그가 누구인지를 말합니다. 15절에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좀 특이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분명 유대인들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자가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를 고친 이가 누구인지'를 말했습니다. 이제 고침을 받은 자에 의해 그가 누구인지 밝혀졌습니다. 유대인들과 주님사이에 피할 수 없는 한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율법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하셨기 때문입니다.
16절과 17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친 일이 결국 안식일 법을 어긴 행위로 간주하며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밝히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창조이래 단 하루도 쉬시지 않으셨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 바닷물의 들어오고 나감, 비가 오고 초목이 자라고 하늘의 별들이 운행을 하고, 그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은 한번도 쉬신일이 없습니다. 심지어 인간들이 말하는 그 안식일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을 하셨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이래 한번도 쉬신 일이 없습니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일을 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쉬셨다거나 잠시 휴가를 떠나셨다면 이 세상은 엉망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니 이 우주전체에서 벌써 사라져 버리고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주께서 병자로 하여금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것이 결국 안식일에 일을 한 것이 되어 안식일을 범했다고 말한다면 하나님도 안식일에 쉬지 않고 일을 하셨으니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의 대답은 너무도 명쾌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자신도 일을 한 것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결정하든지 그 결정의 몫은 자신들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병자로 하여금 일하게 한 것이 잘못되었다라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하나님도 잘못되었다라고 주장하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합니다. 대신에 분노가 마음에 쌓이면서 무서운 일을 계획합니다. 18절에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대한 주님의 명쾌한 말씀 앞에 할말을 잃어버렸습니다. 대신에 주님의 말씀에 또 다른 트집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로 말씀하셨다는 것, 즉 하나님과 동등되는 것으로 주장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주장에 대해 논리적으로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 했습니다.
참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셨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의사로 오셨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좀 더 나은 환경가운데 살게 하기 위해 환경운동가로 오셨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좀더 잘 살게 하기 위해 훌륭한 사업가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까? 아니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정치가로 오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입니다. 아버지께서 천지창조를 위해 일하셨습니다. 그것이 조금도 흐트러짐 없게 하기 위해 지금도 일하십니다. 그런데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부자 되는 것과 견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질병이 고침을 받는 것과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권력을 가지는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병이 낫고 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 용서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성취했다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은 어두운 암흑의 세계를 헤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으로 만족하는 인생을 추구하시겠습니까? 질병이 치유되어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죄 용서함을 구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까? 오늘 이 말씀앞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