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속의 말씀 2002-09-24 11:23:38 read : 4080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계 1 : 9 - 16 // 2002.09.22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여러분 한가위 추석 명절을 잘 지내셨습니까? 이 명절을 통해 아마도 실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 간의 만남일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조상께 차레를 지내는 것을 가장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 마음 속에는 헤어져 살고 있던 가족을 만나는 것을 가장 즐거운 일로 여길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조상님보다는 가까이 있는 부모-자식이 더 그리운 법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어려운 형편이라 할찌라도 무엇인가 싸줄 것을 마련하고 자식을 기다립니다. 또한 자식들은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 아무리 멀고 힘들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합니다. 바로 이러한 만남을 통해 서로 힘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명절 때 외로움과 고독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는 만날 가족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혼자 사는 고아나 노인들이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더욱이 이 땅에 와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저도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동안 명절 때마다 외로움과 고독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래도 그때 제일 가깝게 대해주고 만나주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울타리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느끼곤 했습니다.
여기에 고독감을 느꼈던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지리적으로는 밧모섬이라는 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일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죄수로 잡혀온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환란을 당하여 세상 나라 로마 제국에 속하기를 거부하였으나 예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아무리 보아도 하늘과 산 그리고 험한 파도가 치는 바다 밖에는 보이지 않는 고립된 밧모섬에 갖히게 된 것입니다. 영화 빠삐용에 나오는 스티브 맥퀸은 강한 의지와 집념으로 감옥으로 사용되던 악마의 섬을 탈출했지만, 나이 많은 사도 요한에게는 그러한 인간적인 의지도 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갇혀 있는 사도 요한은 정말 고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고독감은 추석을 맞이하여도 직장일 때문에 고향을 찾지 못하는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더욱이 사도 요한과 함께 한 그리스도인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가 사랑하던 일곱 교회들의 교인들과도 단절된 상태였습니다. 그 섬에 죄수들이 많이 있었을 찌라도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과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은 많이 있으나, 서로 통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없었기에 그는 또 다른 고독을 느껴야 했습니다. 바로 군종 속의 고독이라는 것이 이것일까요? 마치 왕따를 당해 학교에 가기를 싫어하는 학생과도 같이 혹은 나이 들어 자식에게 버림받은 노인과도 같이, 많은 사람 속에서 살아가지만 진정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음으로 인한 고독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고독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더욱이 바쁘게 돌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서 고독을 느낀다는데 더욱 문제가 있습니다. 가정과 직장 그리고 친구들 속에서 우리의 일상생활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바쁘게 살다보니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마음 속으로 밀려드는 그 무엇인가 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사는가? 내가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질문이 파고드는 순간 우리들은 내면의 허전함을 느끼며 고독을 체험하게 됩니다.
더욱이 추석을 맞이하여 고독감을 느끼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여성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찾아오는 가족과 친지를 위하여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집안일을 하고 나면 내가 시집의 일꾼인가 하는 소외감을 가지게 됩니다. 가족의 한 사람으로 스스로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밀려오는 허전함과 후회 그리고 고독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긴 병이 이름하여 명절기피증후군이 아닙니까?
좀더 의미있게 살아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고독의 문제가 좀더 강렬하게 다가올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심리학자인 에릭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을 통해서 인간이 고독을 못이기고 자아상실의 길을 걷게 되는 비극적 상황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D. 리즈만이 말하는 바와 같이, 고독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개 내면의 생활을 포기한 채 타인지향적인 사람이 되어 남들이 하는 대로 쫓아가기 때문입니다. 고독은 정신적인 면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지 못할 때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에게는 그리스도 예수로 인한 자아를 지키고 있었기에 세상이 요구하는 자아와는 다른 자아를 유지함으로 인해 당하는 고독이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 듯한 느낌을 가졌을 때의 영적인 고독감은 더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몸을 던져 봉사했건만 자기에게 주어진 결과가 밧모섬이라는 유배지에 보내졌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정말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중 삼중으로 그의 마음 속으로 밀려오는 고독감을 그는 감당하기 힘든 상태였습니다.
영적인 고독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다가옵니다. 그렇게 주님을 위하여 봉사하고 수고하였지만, 돌아오는 대가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오는 허탈감입니다. 이는 주님과 상관없이 떨어져 있다는 고독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더욱이 추석을 맞이하여 제사를 드리는 집에서 홀로 신앙을 지키는 분들에게 이러한 고독이 몰려올 때가 많이 있습니다. 가족과 친지를 위하여 그렇게 잘 하였건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건만, 단 한 가지 이유로 외톨이가 될 때 느끼는 고독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는 것 같아 느끼는 영적인 고독입니다.
그래서 16세기에 종교개혁을 이룬 마틴 루터도 인간은 혼자 있을 때 고독한 순간에 비로소 악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악한 영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알지 못하고 방황할 때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이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할 때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파고들며 그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 같은 길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그 길은 바로 파멸의 길이 되곤 맙니다.
한없는 고통과 고독 속에 던져졌을 때 육신의 눈으로만 바라보면 헤어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도 그 당시에는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립 속의 고독을 통해 사도 요한에게 점점 더 다가가셨습니다. 또한 그 반대도 성립됩니다. 사도 요한으로 하여금 점점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그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를 전하려 했던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는 바로 주님의 날에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의 날!’ 이름 그대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날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인으로 특별히 기억되어야 하는 날이요 온전히 주님께 바쳐져야 하는 날입니다. 바로 그 날에 주님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요한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 날을 이전도 많이 지켜본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밧모섬에서 당한 주님의 날은 사도 요한에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종된 사도 요한을 위하여 특별한 사건을 일으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고독감을 느낄 때마다 쓰러져서는 않될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 속에서만 볼 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독으로 인해 쓰러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영역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영역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 우리를 향한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주시려 합니다.
그래서 옛날 시편 121편의 기자도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물론 이 산은 그저 평범한 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서 있던 산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동산의 성전처럼 하나님이 계시는 집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보이는 건물 그 자체만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현존과 능력을 바라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이 시편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만나기로 정해진 날에 오르던 성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주님의 날을 맞아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매주 맞이하는 주일이지만, 진정 영적 고독 속에서 헤매며 이를 벗어나려 애쓰는 분들에게 오늘은 사도 요한에게 그러했던 것과 같이 특별한 주님의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날은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향하여 특별히 구별하는 날이기도 하면서 예수님도 우리를 위하여 특별한 계획을 드러내시고자 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날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나름대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 주님의 날은 우리 평생에 기억될 것입니다.
주님의 날에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진정 특별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우선 고립된 곳에서 깊은 고독을 느끼고 있는 사도 요한에게 주님은 자신의 모습을 다음과 보여주셨습니다.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머리털은 양털과 눈과 같이 희며, 눈은 불꽃 같고,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음성은 맑은 물 소리 같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며, 그의 얼굴은 태양 같이 힘차게 비추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여러분들은 느끼십니까? 이는 예수님이 이 세상의 주관자가 되심을 의미합니다.
당시 초강대국 로마 제국의 유약한 죄수의 몸으로 고독과 쓸쓸함을 느끼며 하나님이 자신을 외면한 것처럼 느끼고 있던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강하신 분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권력을 누루고도 남을 신적인 권위를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우리도 그러한 말씀을 듣고 환상을 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더 이상 보여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종말에 관한 모든 것을 이미 사도 요한을 통하여 보여주시고 이를 알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렇게 크고 엄청난 환상과 말씀을 아닐찌라도 그분은 오늘날도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이길 힘을 가지신 분이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하시는 분임을 알게 하십니다. 여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기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 사도 요한의 경우에 비하면 작을찌라도 하나님의 같은 원칙과 법칙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주님의 날에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우리도 주님의 모습을 봄으로써 힘을 얻고 또한 사명을 들음으로써 담대함을 얻고자 하십니까? 사도 요한처럼 주님의 날에 나를 부르실 때 그 분께 나의 눈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들려주었던 말씀과 보여주었던 환상과 같은 거대하고 큰 것은 아닐찌라도 여러분의 상황에 맞게 해결책을 만들어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법칙은 지금도 여전하며 유효합니다.
어느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남들이 볼 때 단단한 기반을 쌓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미래에 대한 남모를 고민이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기에 스스로 깊은 고독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때 그는 어느 주일 풍랑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의 사건에 대한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다에서 풍랑과 싸우는 제자들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으로 다가왔고 물위를 걸으시는 주님의 모습을 자신을 구하러 오시는 모습으로 여겨졌습니다. 자신도 주님에게 다가가기 위하여 물로 뛰어들어 어느 정도 걸으며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았지만, 금방 지금 자신의 걱정하는 모습이 물속에 빠져들어가는 베드로의 모습과 같게 여겨졌습니다. 자기를 구원해 달라는 베드로를 구원하는 예수님의 모습에 자신도 매달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서 그는 자신의 과대망상적인 고민을 덜게 되고 주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일을 통해 만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고민과 고독 속에 있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은 더욱 만나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바로 그러한 모습은 구약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까? 엘리야 선지자는 가뭄을 선언했을 때 삼년 육개월 동안의 가문을 경험했고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와 싸워 이길 때 무척이나 큰 승리감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금방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의 추격을 받고 목숨을 위해 피하여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광야에 나가 하룻길을 걸어 로뎀나무 아래 쉬게 되었고 죽기를 구하였습니다. 정말 고독했습니다. 자기만 남았다고 하소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사십 주야를 호렙산에서 기다리게 한 후 나타나셨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세미한 음성을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음성을 듣고 그는 그의 사역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도 또한 하늘로 올리우는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독은 과거에 대한 현재의 형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고독의 순간은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향하여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하는 순간이요 함께 하심을 확인하는 순간이요 진정 우리의 한계 이상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순간입니다. 우리로 고독 속에 몰아넣으실 때 우리는 오히려 감사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립시다. 아니면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바쁜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스스로 조용하고도 고독한 시간을 구별해 만드시기를 원하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좀더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듣고 그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로 이 세상에 굴복하고 속하게 함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