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스탠포드대학과 마운르 시온병원이 1992년도 공동으로 지난8년 동안 3천5백명의 건강한 남자들을 대상으로 성격과 질병 발병률과의 관계를 연구했다. 영구결과 성질이 급한 사람은 느긋한 사람보다 심장마비 증세가 2-3배 높다는 것이었다. 미국 심장협회의 의견 역시 느긋한 성격을 가지는 것이 혈압이나 핏속의 콜레스테롤 농도를 낮추는데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조급한 성격을 고치려면 웃으며 살 것,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을 것, 작은 실수를 꼬집지 말 것, 친구에게 전화나 편지를 할 것, 그리고 인생은 미완성임을 항상 생각한다고 했다. 한 사람이 육체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있어서도 느긋한 인생관을 가지는 일이 필요하다면 예수를 믿고 그 삶이 거듭나고 영생을 얻는 일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풍파를 겪어본 사람들은 풍파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좋은 것인가를 압니다. 병을 얻어 병상에 누워 본 경험을 가진 사람은 건강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사업에 실패하여 빚쟁이에게 쫓기고 가정의 행복이 깨어져서 큰 풍랑을 겪으며 온갖 처절한 경험을 했던 사람은 안정된 생활이 얼마나 중요하며 평소에 씀씀이를 줄이는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히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모두가 인생을 큰 굴곡없이 살고자 원하며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고 안정을 원합니다. 가정이 안정되기를 바라며, 사회가 안정 되기를 바라며, 나라가 안정되기를 바라며 세계가 안정되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때로는 슬픔과 실망의 풍랑이 우리를 무자비하게 내려칩니다. 어떤 때는 정신차릴 여유도 없습니다. 숨이 콱콱마킬 정도로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옛부터 인생을 항해와 같다고 했는가? 그러기에 그 어떤 사람도 일생 동안 한번도 인생의 폭풍을 만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은 망망대해요, 인생 여정도 일엽편주와 같아 인생고해(人生苦海)나 인생항로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일엽편주로, 세상을 바다로 본다는 것인데 특히 믿음의 성도님들은 인생이라는 조각배를 타고 천국으로 긴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 바다에는 고요하고 순하며 잔잔한 때도 있지만, 때로는 크고 작은 광풍이 일어 풍우대작하고 큰 물결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사랑과 미움의 광풍이 있는가 하면 만남과 사별, 이별의 광풍도 있고, 실패와 성공의 광풍도 있습니다. 이런 광풍을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항해란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순풍에 돛단 듯이 평안히만 갈 수 있다면 무슨 걱정과 근심이 있겠습니까만은 평안히 갈 수 없는 항해이기에 아픔이 있습니다. 때로는 폭풍을 만나고 암초에 걸리고 짙은 안개 때문에 방향을 잃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항해에도 표류하거나 파선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추위와 한발 때문에, 갑자기 쏟아지는 우박 기근과 질병, 전쟁과 홍수와 같은 풍랑이 있습니다. 실직과 실패 승리와 패배 등 개인과 가정적으로 당하는 풍랑도 있습니다.
우리는 풍랑을 알기에 풍랑이 없는 것을 바라고 기대하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 바라는 욕구 가운데 강한 욕망 중의 하나가 삶의 평안입니다. 혹시 어려움이 있을 때 빨리 어려움이 지나갔으면, 슬픔이 지나갔으면, 아픔과 고통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고 바라는 평안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고통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어제도 겪었고 오늘도 겪을 것이며 내일도 겼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고통이 멈출 날들을 기대하면서 삽니다.
내일은 풍랑이 그치겠지 이렇듯 심한 폭풍이 그치기를 기다리면서 오늘까지 세월에 속아 살아 왔고 또 앞으로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때로는 풍랑이 그치기를 바라다가 풍랑 속에 빠져 죽는 허다한 인생의 씁쓸한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풍랑이 빨리 끝나면 좋겠는데 사실은 인간이 당하는 풍랑 같은 괴로움은 죽음이 올 때까지 그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달픈 날들이 지나고 나면 언젠가는 쨍하고 볓들날처럼 좋은 날이 오리라 기대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쓰디쓴 날이 다하면 달콤하게 느껴지는 그런 날이 온다고 믿고 기대속에 삽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괴로움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인생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했듯이 사실 인생살이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네 인생살이가 이처럼 풍랑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바람과 풍랑에 묻혀 침몰 당해야만 합니까?.
부새의 시 가운데“저 산넘어 행복이 있다고 말하기에 아! 님따라 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돌아왔네 저 산너머 행복이 있다고 말 하건만--”사실이 그렇습니다. 마치 바다에 풍랑이 그칠 날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날을 기대하면서 날마다 귀한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바다에 풍랑이 일듯이 이 세상은 환란이 있습니다. 무엇 하나 소원이 이루어지면 이제 더 이상 바랄 것 없을 것 같지만 어디 그렇습니까? 갈수록 태산이 아닙니까? 걱정이 그칠 날이 없고 문제는 계속되지 않습디까? .
그렇다면 언제까지 풍랑이 그치기를 바라고만 있겠습니까? 기다리면서 산다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하고 찾아 나설수도 없습니다. 하도 세상이 위험하고 유혹도 많고 시험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넋잃고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아닙니까? .
본문에서는 제자들은 풍랑과 싸우며 애를 태웠습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인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제자들을 이처럼 사경에 이르게한 풍랑은 무엇입니까? 우리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풍랑을 만났고 지금도 만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풍랑은 어인 일입니까? 저는 이 시간 갈릴리 바다를 여행하는 중에 풍랑을 만난 제자들 일행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져 주는 몇가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그 좁은 바다에도 풍랑은 있다는 사실입니다.
갈리리 바다는 큰 바다라기 보다는 호수와 같은 작은 바다입니다. 그래서 갈리리 호수, 게네사렛 호수로 불리워지기도 했습니다.
남북의 길이가 20Km, 바다의 깊은 곳은 200m 정도, 평균 높이 90m,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에는 그 유명한 요단강이 흘러 들러와서는 남쪽으로 흘러 나갑니다.
그런데 이 같은 조그마한 호수에 바람으로 말미암아 물결이 일고, 큰 풍랑이 넘실거렸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자신의 인생의 삶이 때로는 한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100년을 산다는 학이나 거북이에 비하면 기껏 살아보아야 70, 그것도 강건하면 80뿐이라고 했습니다(시편90편10절). 그것 마저도 수고와 슬픔이요 신속하게 날아가 버립니다. 정말 잠깐입니다.
그 잠깐에 불과한 그것도 손바닥만한 넓이의 인생의 항해나마 고요한 때가 없으니 참으로 가련하기 그지없는 인생들입니다. 자식이 많으면 나뭇가지에 바람잘 날이 없다고 하듯이 파도 없는 날이 없고, 잔잔할 때가 없습니다. 큰 파도와 작은 물결은 매일 계속됩니다.
그 짧은 한 평생을 평안히 살다가 죽는다 할지라도 그짧음이 한이 된다는데 그 짧디 짧은 기간이나마 가난과 질병과 이별과 고독과 슬픔과 죽음과 실패와 탄식의 연속이니 우린들 어찌하겠습니까?.
종교개혁자 ‘칼빈’은 인생항로야 말로 예측하기도 어렵고 풍랑이 그치지 않음을 이렇게 말했습니다“나는 우리가 우리 앞 길을 내다보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에 의하여 배우게 되었다.
내가 안일하고 고요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느끼는 그 순간,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인생은 왜 이처럼 괴로운가?”과연 세상은 덧없는 곳이고, 인생은 괴로운 존재인가? 이처럼 탄식하는 인생의 문제는 예로부터 많은 철인들도 풀지 못해 고민해 온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고해(苦海)라 말하지 않습니까?.
파라문 교도들은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통하여 울면서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아! 너는 왜 괴로운 세상에 왔느냐? 차라리 무가 나으니라”면서 축하가 아닌 생을 저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 왕도 말하기를“죽는 날이 낳는 날 보다 났다”고 하였습니다(전(7:1).
그렇습니다. 세상의 삶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가뭄이 오고, 홍수가 오고, 추위가 오더니 더위가 오고, 전쟁과 불황이 옵니다, 도산과 부도가 납니다. 죽음과 질병이, 고통과 슬픔이 계속 됩니다. 사업의 실패, 친구의 배신, 마음이 맞지 않는 부부의 문제, 이웃과의 불화, 서로간의 미움 질투, 시기와 다툼, 정신적인 고통 등 말로 헤아릴 수 없는 불행이 연속극 상영하듯이 줄줄이 뒤따라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겨우 백년도 못산다는데 무서운 시련과 시험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호수와 같은 갈리리 바다에도 풍랑이 있듯이 우리의 인생에도 풍랑이 있습니다. 짧디 짧은 인생의 삶에도 풍랑이 있음을 잊지 말고 매사에 작은 일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2. 제자들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행하다가 풍랑을 만났습 니다.
여러분!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가는 길에 풍랑을 만났다면 억울할 것도 없고, 불순종의 댓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가버나움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으니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순종했는데 풍랑을 만났으니 어떻게 합니까?.
이 세상에는 상선벌악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원리입니다. 악한 자가 고생하고, 악한 자가 중병을 당하고, 악한 자가 잘못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기에 선은 악보다 더 나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악을 행하는 사람보다 잘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순종했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습니까? 진실하고 충성된 자가 모진 풍랑을 만나 헤어나지 못한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악인의 길이 형통하고 패역한 자가 복을 받음은 웬 일입니까?(렘12:1).
악하고 모진 사람이 고생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의인이 환란을 당하는 것은 무슨 연유입니까? 불량한 자가 중병과 고생당하는 것은 그의 죄값이겠지만 , 진실한 성도가 애타해야 하는 것은 웬 일입니까?
물론 모든 의인이 다 환란을 당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악인 다 형통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의문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싶어하는 문제인 것 만은 사실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하나님은 왜 거짓말 하는 자가 활개를 치고 다니며, 진실한 자가 수난을 당하는 것을 못 본체 합니까?.
못되고 악한 마음을 품고 유혹한 자는 보디발의 아내였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자는 요셉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자는 아벨인데 그 좋은 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가인이 휘두르는 무지한 칼에 죽어야 했습니다. 불의한 헤롯이 죽어야 마땅한데 그가 오히려 요한에게 모든 것을 덮어씌워서 요한의 목을 베었습니다. 진리가 매맞고 불의가 세상에서 활개치며 지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3. 인생 풍랑은 예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고 있었는데 풍랑은 바로 이때 찾아 왔습니다. 예수의 사람들은 예수를 떠나서는 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살 가능성,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있으면 자기 자신을 의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매달립니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마저 희미해 지고 힘이 부닥히면 그때 비로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 그 호홉이 끊어지면 당일에 그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3-5).
전적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신앙은 세상의 것을 완전하게 포기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평안하고, 건강하며, 물질의 풍부함과 행복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 때문에 아쉬운 것이 없다고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그것들은 언젠가는 여러분에게 크나큰 화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 보면 축복이 감사해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고마워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 보다는 험한 풍랑 헤어나지 못해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그 얼마입니까?. ‘에크하르트’는 말하기를“그대를 완전에로 태워다 주는 가장 빠른 발의 짐승은 고난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과 역경은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이 세상에서 걱정근심 없이 편하게 살 때는 모두가 무신론자가 되었다가도 위험한 항해길에서 풍랑을 만나면 그때는 자신도 모르게“오! 마이갓”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인은 형통하고, 순종하는 자의 길에는 풍랑이 일고 그것도 좁은 인생길에까지 찾아 오는 풍랑이 야속하기도 하고 순종의 길에 웬 풍랑이야 하면서 원망스럽기조차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잘 못 얻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자포자기하거나 도가 지나치면 하나님이 어디있으냐면서 결국 교회를 떠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인간의 좁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만은 다 알고 계십니다. 믿습니까?.
4. 풍랑은 하나님을 만나는 좋은 기회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인생의 깊은 고뇌를 풀어주지는 못합니다. 현대인들은 오늘이 중요하지 내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내일의 면류관 보다는 오늘의 평안에 대하여 더 관심이 있습니다.
고난은 축복에로 이르는 관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경험해 본 사람의 간증일 수는 있지만 현재 풍랑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사람에게는 별로 힘이 되지도 않고 오히려 사탕발림의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배들은 오늘도 험한 풍랑 속에서 허둥대는 우리들에게 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도 에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들은 새힘을 얻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갔습니다.
제자들도 풍랑을 만나 큰 고생을 하고 있었을 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내니 두려워 말라, 안심하라”고 맣씀하셨고 그때 풍랑은 잔잔해졌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만나면 이 세상 풍랑은 어느 순간에 잔잔해 집니다. 예수님이 찾아 오시면 광풍은 멎고 맙니다.
우리는 풍랑을 원치 않습니다. 안전한 인생 항해를 원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풍랑을 만나 사경을 헤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라도 낙심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가“주님께서 가까이 계시사 도우시려고 오시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우리가 고난 당할 때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칠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 던져졌을 때 그들만 있은 것이 아니라 천사가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모리안 산으로 갔을 때 주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풍랑 많은 인생 살이에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어느 사이엔가 우리 곁에 오셔서 구원의 손길을 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고오는 세대에 있어서 풍랑만난 인생에게 예수는 무엇하고 계신가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풍랑 중에서도 주님을 모시고 사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젊은 의사가 알프스 몰불랑 정상을 정복했다. 알프스 등산로의 출발지점 샤모니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환영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그 의사는 정상에 깃발을 꽂고 하산하던 중 베이스켐프에 도착하자 그만 긴장이 풀리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귀찮아지고 안전을 위해 감았던 로프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로프를 풀어버리고 안내원의 도움 없이 자기가 앞장서겠다고 했다. 안애원은 위험하다고 만류했다.
“선생님, 아직 몽불랑 정복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샤모니에 무사히 도착하기까지 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의사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그들은 하산하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못해서 앞서 가던 의사는 급경사에서 미끄러져 굴러 떨어졌다. 그를 도와줄 장비가 없었으며 더구나 그가 로프를 풀어 버렸기에 안내원은 발만 동동 구르며 지켜보아야 했다. 앞서가던 의사의 시체는 비탈 아래 기슭에서 발견되었다.
자기를 환영할 준비로 바쁘던 그 시각, 의사는 자신을 지탱하던 로프에 실증을 느껴 그것을 풀어버린 뒤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정복한 그 산자락에 묻히고 만 것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는‘로프’처럼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그것에 싫증을 느끼지만 영원한 안식처에 도착할 때까지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인생항해에 있어서 믿을 수 있는 인도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이미 항해를 마치신 분입니다. 주님은 이미 모든 풍랑과 고난, 역경 죽음까지 승리하신 분입니다. 주님은“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이미 죽음과 음부의 권세까지 이기신 분이 아니십니까?
주님은 이미 인생항로에서 갖는 고난과 역경을 친히 경험하셨기에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시고 도와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믿음직한 인도자가 아니십니까? 주님을 나의 인생항해의 인도자로 모시면 안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도와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이 시간부터 주님을 여러분의 가정의 주인으로 모십시요.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업의 인도자로 추대하십시요, 그러면 여러분의 사업이 튼튼할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풍랑을 혼자 만나면 감당하기 어렵지만 주님과 함게 당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 배에 함께 계시면 거센 파도가 일어나도 말씀 한마디로 바람은 그치고 풍랑은 잔잔하여 영원한 목적지 하늘 나라에까지 안전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5. 주님과 함께 항해하면 폭풍 중에서도 평화로운 항해를 할 수 있습니다.(평화를 얻습니다)
1) 슬픔의 폭풍 속에서도 평화를 줍니다.
요한복음11장에“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는냐?”고 하셨습니다. 죽음의 어두움이 변하여 영원한 생명의 영광을 안겨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슬픔의 폭풍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2) 생의 모든 문제의 폭풍 속에서 평화를 줍니다.
걷잡을 수 없는 의심과 긴장, 그리고 불분명한 태풍이 우리에게 닥쳐옵니다.
그런 때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알지 못하고 당황하게 됩니다. 혹 어떤 때는 생의 기로에 서서 어느길을 택해야 될는지 알지 못하고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주님을 찾으면 주님은 우리에게 갈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3) 근심의 폭풍 속에서 평화를 줍니다.
평화의 적은 근심입니다, 나 자신을 위한 근심,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근심,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근심, 등 수 없이 많습니다. 근심은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때에 갖게 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 이십니다, 주님은 광풍속에서도 우리에게 펴화를 주십니다, 이 주님을 온전히 의지합시다.
한 주간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는 말씀을 부여잡고 주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다가 풍랑 속에서 건짐받고 평화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