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준비하는 삶 2002-09-23 16:04:54 read : 3785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복음 5:45-47절 // 02/09/22
10여년전만 해도 제일 힘들고 인기 없었던 직업 중에 하나가 '보험설계사'였습니다. 사실 '보험설계사'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지 그 당시만 해도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보험 아줌마'정도로 불리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보험설계사라는 직업은 할 일 없고 시간 많은 아줌마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젊은 사람들 중에는 보험에 대해 상당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라이프 컨설턴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과거엔 보험을 들게 하기 위해 친척을 찾아다니고 아는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사정 사정을 해 겨우 한 두건 보험에 들게 했는데 요즘은 라이프 컨설턴트들의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보험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만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서 우리에게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안전장치라는 사실이 잘 알려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스스로 보험에 가입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왜 스스로 보험에 가입을 하려는 것입니까? 사람들마다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항상 맑은 날, 좋은 날만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날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아무런 대책도 없이 있다가 그런 상황을 만나게 되면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없습니다.
러시아를 여행 중에 러시아 국내선을 타고 사할린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보니 솔직히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날 우리일행이 탄 비행기는 마치 우리나라에서 어느 시골길을 다니는 직행버스 수준이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못한 것 같았습니다. 창 쪽에 앉아 있던 신목사님은 계속해서 바깥 바람이 비행기 안으로 들어온다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기 전에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난 어느 집사님의 얘기가 러시아 비행기를 타고 사고를 만나면 속된 말로 '개죽음'보다 못하다는 말을 하면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었지만 비행기를 타고 보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비교적 깨끗하게 청소는 되어 있었지만 내부의 모든 시설이 낡았습니다. 비행기가 조금만 흔들려도 앞자석 뒤에 고정되어 있는 식탁이 앞으로 '툭' 하고 떨어지곤 했습니다. 착륙을 알리는 승무원의 안내 방송이 있었고 비행기가 하강을 시작하는데 갑자기 김창호선교사님이 눈을 감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왜 갑자기 눈을 감고 기도하느냐?고 물었더니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착륙 안내방송을 듣고도 기도를 하지 않는 우리가 믿음이 좋은 건지, 아니면 안전하게 착륙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김창호선교사님이 믿음이 좋은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하시는 말씀이 며칠 전에도 비행기가 떨어진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오 주여!'라고 외쳤습니다. '제발 이곳에서 이런 식으로 순교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뜻하지 않는 일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텔레비전에서는 수재를 당한 사람들의 생활상이 보도되곤 합니다. 러시아에 있을 때 수해에 대한 얘기를 잠깐 들었지만 이렇게 심각한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수재를 당한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습니까? 콘테이너 박스 한 칸에 가족들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더욱 힘든 것은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냉기가 땅에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잠을 자도 자는 것 같지 않고 마실 물도 부족한 실정이라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물론 많이 복구되고 가장 최악의 상태는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올 겨울 그분들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시간을 보내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 인생에 불어닥친 최악의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만약 제가 러시아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만났다면 저의 가정뿐 아니라 우리교회로 봐서도 최악의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수재를 겪는 사람들이 마실 물도 없고, 콘테이너 박스 한 칸에서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것도 최악의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태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궁극적으로 최악의 상태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가 최악의 상태이겠습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태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참 파란만장한 역사였습니다. 수많은 외침이 있었습니다. 주변국가들이 얼마나 이 나라를 많이 침공했는지 모릅니다. 이 지역은 근동지역에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열강들이 서로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던 장소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겠습니까? 마치 한반도가 열강들이 패권을 다투는 각축장이 되어 있는 것처럼 그렇게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 유대민족입니다. 그들은 나라를 잃어버린 설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포로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라를 잃어버리거나 포로 생활 속에서 오는 지치고 힘든 일들에 관해서는 이골이 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일을 만난다 하여 자신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최악의 상태를 만났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두려운 것은 경제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두려운 일에 대해 나름대로 대비책을 마련해 두고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보험에 가입해서 만일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 대비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비책을 마련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모세였습니다. 모세가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때 그들이 그토록 존경하고 영웅대접을 했던 모세가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셨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 되었던 땅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마침내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모세가 자신들 곁에 있고 모세가 편을 들어주면 자신들은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보통사람도 아닌 모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아끼시고 좋아하셨던 모세가 변호해준다면 안될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그들은 무탈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45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만약 하나님께 자신들을 고소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지금 자신들과 충돌하고 있는 예수가 고소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고소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그토록 믿고 따르는 모세가 너희를 고소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해석을 한다면 '너희들이 붙들고 있는 율법이 결국은 너희를 고소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그들이 38년된 병자를 고친 예수를 탄핵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로 하여금 자리를 들고 가게 한 것은 명백하게 안식일 규정을 어긴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으로 그렇게 예수님을 비판했습니다. 그 율법이 자신들을 견고하게 세워주는 시금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붙들고 있는 율법이 하나님의 심판대앞에서 오히려 너희를 고소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수년 전,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사람들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고 야단법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위기를 극복하자며 금모으기 운동도 하고, 긴축재정에 구조조정까지 단행하면서 많은 실업자를 양산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때가 위기는 위기였습니다. 70년대 오일파동 때보다 더 심각한 위기가 초래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런 위기들이 우리 인생 가운데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아니 이런 위기를 맞이했다가 그것을 극복하며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정말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최대의 위기, 최악의 상태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맞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 죽음 이후에 찾아오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최종적인 인생의 결산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고3학생들의 수능시험이 있습니다. 사실 수능을 치루기 전에 수많은 모의고사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모의 고사에서는 잘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좋은 성적을 거두면 기분이 좋을 것이고 성적이 좋지 못하면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대학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수험준비를 마치고 치루게 되는 수능을 통해 어느 대학 어떤 과를 가게 될 것인지가 결정되어집니다. 그것은 내가 수능을 위해서 그동안 어떻게 준비해 왔느냐?와 상관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한 사람은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것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최대 위기의 순간입니다. 이때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죽음 이후에 찾아오게 되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이 의지할 것이 없거나 철떡같이 믿었던 것이 오히려 자신을 정죄하는 수단이 되어 버린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가끔 우리는 보험회사들이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으려 한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보험을 들었는데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면서 이런 경우에 보험금을 지불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는다면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한마디로 완전히 배신당한 기분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죽음이후에 찾아오게 되는 하나님의 심판이야말로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위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전장치로 모세의 율법을 택했습니다. 아니 율법을 지켜 행하면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 규정을 정해서 그 규정을 어기지 않으려 했습니다. 십일조도 열심히 하고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구제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들 중에 어떤 이들은 아직도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에 대해 선택하는 안전장치가 선한 행실이나 도덕적인 삶에 두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재의연금을 많이 기탁한다든지, 아니면 사회복지시설에 투자를 한다든지, 그렇게 해서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려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뭐라고 합니까? 그것이 오히려 너희를 고소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그런 것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대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 46절과 47절에 보면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궁극적으로 그들이 모세를 자랑했지만 모세를 믿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말 모세를 믿었다면 모세가 그리스도에 대해 한 말을 모두 믿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도대체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을 말했단 말입니까?
창세기 3장 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임을 그들은 믿어야 했습니다.
창세기 49장 10절에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한 말씀이 역시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씀임을 믿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모세가 쓴 모세오경에는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증거하고 있고 그분이 성경의 중심임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모세를 진정으로 믿었다면 모세가 한 말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어야 했는데 그들이 모세가 증거한 예수를 믿지 않았으니 결국 그들이 존경하고 있다고 말한 모세도 믿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우리를 안전하게 해 주는 장치는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데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심판하실 기준에 대해 말씀하신 곳이 많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2장 6-8절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사람이 어떤 행위를 했느냐? 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 사람의 신분이나 도덕적 가치관이나 외적인 조건으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살았느냐?를 통해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목사니까 괜찮겠지, 나는 평생동안 예수를 믿었는데 설마…"가 아니란 얘기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참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영생을 얻는 방법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바른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바른관계를 그의 아들이신 예수를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나아갈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처럼 율법을 가지고 있다거나 그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무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그 사람을 심판하는 기준이 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심판이 주어질것인지 이 사람에게는 이런 심판, 저런 사람에게는 저런 심판이 주어지는 기준이 되는 것이 율법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심판을 받는다고 해서 동일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 사람의 수준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무서운 벌을 받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가벼운 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가장 무서운 벌을 받는 사람은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죄를 범한 사람들입니다. 그저께 성범죄자 명단이 공개되었습니다. 거의 같은 시각 미국에서도 인터넷을 통해 그 나라에서 성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명단이 공개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번 공개가 있은 직후 죄에 대해 이중처벌하지 않는다면 법 정신을 살려 신상공개는 이중처벌이나 마찬가지다 하여 공개를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성범죄자를 공개하면서 죄를 지은 사람의 인격보다 선량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의 안전이 우선이다라는 생각으로 그 명단을 공개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공개하는 것보다 좀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공개였습니다. 그런데 왜 성범죄자들에 대해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입니다. 성범죄는 한 가정을 파괴하고 나아가서 우리사회를 병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무겁게 처벌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것이 얼마나 악한 일인지 알면서도 행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죄짓는 일에 '악하고 악하지 않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쨌든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거나 행한 행동은 처벌이 강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앞에서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율법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사람에게 벌을 주면 얼마나 큰 벌을 줄 수 있겠습니까?
러시아 여행중에 놀라왔던 것 중에 하나는 여행객들이 물건을 자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여행객들만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빈번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어떤 분이 이해가 되도록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공산주의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공산주의란 네것 내것이 없습니다. 즉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것이 없다'는 것을 좀 확대해서 설명하면 '네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을 보면 가져단다고 해서 크게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오랜 세월동안 그런 의식 속에서 살아온 그들이기에 쉽게 고쳐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무조건 중한 벌로 다스리겠습니까?(이건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알고 있는 사람과 모르고 있는 사람은 차이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수준에 따라 달리 적용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을 드린다면 목사가 하나님앞에 심판받는 기준과 평신도가 심판받는 기준은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만큼 적용되는 수준도 까다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교회에서 장로나 권사의 직분을 받은 사람이라면 집사나 평신도와 똑같이 하나님께 심판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교회에서 장로나 권사로 세움을 받은 만큼 더 철저하게 하나님께 책임문책을 당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자기 임의대로 선별작업을 거쳐 어떤 것은 용납하여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자기에게 얼마나 엄격하고 적용되는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직분에는 집착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자신에게 적용되어지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신들에게 엄격하게 적용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으로 인해 자신들이 의로와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 그것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려서 그것을 지켜서 의로와지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앞에 나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그 율법을 지킴으로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해져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교만과 부패함으로 이끌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훗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자신들을 변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정작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율법이 오히려 그들을 고소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이 정말 모세를 믿었다면 모세가 예수에 대해 한 말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신뢰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38년된 병자를 고친 사건을 두고 안식일을 범하였다고 말하면서 시비를 거는 것은 결국 예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이런 행위는 그들이 존경하고 믿어온 모세를 믿지 않는 행위라고 주님은 그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가장 두려운 것은 직장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이 부도가 나서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 버리게 될까봐 아둥 바둥하면서 살아가지만 실제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명절날 제사 지내지 않았다고 이웃 사람들이 '조상도 몰라보는 자식'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죽음이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 하나님 앞에 좀 더 떳떳하게 서 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안전하게 설 수 있게 해 주는 장치가 아니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요즘 보험에 드는 사람들이 참 많아졌습니다. 어떤 일을 만날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준비하려는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자신의 죽음이후의 세계에 대해 준비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어떻게 되겠지' '좀 더 시간적인 여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차일피일 미루어 둡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내 종말의 때를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를 불러가실지 그 때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날 잠을 자다가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놓아두고 주님 곁으로 가야하는 인생들입니다.
그런 연약안 인생이 우리들인데 의외로 배짱이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준비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앞에서 러시아 비행기에 대해 잠깐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결코 러시아를 비하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러시아는 우리의 주요선교 대상국입니다. 그러므로 나쁜 의도에서 하는 말씀이 아님을 생각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러시아에서 현지 선교사들의 안내를 받아 여러 도시를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블라디보스톡에서 차를 타고 약 2시간 30분정도 지나 우스리스크라는 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한국 선교사들이 비닐하우스를 통해 영농기술을 그들에게 전수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영농단지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블라디보스톡에서 그곳으로 가는 동안 안내하는 선교사님께 자동차 보험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우리는 책임보험과 종합보험체계가 잘 이루어져 있어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 보험회사에서 다 처리해 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에 굴러다니는 차들 중에 90%이상은 무보험차량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우리가 타고 가는 차도 보험에 들지 않은 차라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옆에 있던 손잡이를 한번 더 꽉 잡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참 배짱도 좋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어떻게 보험도 들지 않고 차를 몰고 다닐 수 있을까? 그렇게 차를 몰고 다니면서도 불안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죽음이후를 준비하고 있습니까? 아직 살아갈 날도 많은데 벌써부터 죽음을 생각하면 어떻게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단 말인가? 라고 말씀하고 싶어십니까? 죽음 이후를 준비하지 않는 인생이 얼마나 불안한 인생입니까? 왜냐하면 죽음이후에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 최대의 위기는 갑자기 사업이 어려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 최대의 위기는 자녀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 최대의 위기는 누군가에게 속아서 사기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위기는 내 인생 자체가 도난 당하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속아서 내 인생이 도난 당하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위기입니다. 어떻게 도난당합니까?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죽음이후에 나에게 다가올 심판을 의식하지 않고 지금 좀 편하게 사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곧 내 인생을 도난 당하는 것입니다.
이번 추석명절은 의외로 교통이 혼잡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연휴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고향에 가는 것을 포기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런 이유 때문에 이번엔 고향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참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를 운전하면서 몇 시간씩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고향에 가지 않으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음 한쪽에는 서운하고 허전한 마음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죽음 이후를 준비하지 않고 산다면 우리의 육신은 편할는지 모릅니다.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고 가족과 함께 여기저기 다니면 얼마나 좋습니까? 봉사하지 않고 예배만 드리고 교회생활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다면 간섭하는 이도 없고 얼마나 편합니까? 그러나 편한 것이 평안을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잘 압니다. 편한 것이 내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믿었던 모세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오히려 그들을 고소하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율법으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오직 주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미래를 준비하고 계십니까? 죽음이후에 하나님 앞에 서게될 여러분의 모습을 한번 그려보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정답을 알면서도 답안지에 오답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선생님께 반항을 하는 사람이거나 뭔가 불만이 있는 학생입니다.
만약 우리들 중에서도 미래를 준비하지 않고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면 결국 그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사람이며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사람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닌 것처럼 보일는지 몰라도 지금은 편할는지 몰라도 결국 유대인들이 우려했던 일을 현실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여러분의 삶이 미래를 준비하고 영원한 생명 안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