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중의 법적 시비 2002-10-23 11:05:14 read : 5496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10.13 // 고린도전서 6:1-11
어느 책에서 재미나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독수리를 발견한 한 사냥꾼이 독수리를 잡으려고 활로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꼼짝하지 않고 한 곳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사냥꾼은 궁금해서 독수리가 주시하는 곳을 바라보니 뱀 한 마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뱀도 꼼짝하지 않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뱀이 바라보는 곳을 보니 개구리 한 마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개구리도 꼼짝하지 않고 침을 삼키며 무언가에 집중해 있습니다. 그곳을 보니 무당벌레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당벌레도 꼼짝하지 않고 한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당벌레가 바라보는 곳을 보니 진딧물이 있습니다. 사냥꾼은 갑자기 두려워졌습니다.
‘혹 나를 잡아먹기 위해 내 뒤에도 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뒤를 돌아다보니 사망의 사자, 죽음의 사자가 자기를 삼키려고 노려보고 있습니다.
결국은 이긴 자도 죽고 먹은 자도 먹히게 됩니다.
사람도 다 그렇게 끝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까지 얼마나 많은 음식을 드셨습니까? 아마 달걀을 수천 개는 드셨을 것입니다. 생선을 수천 마리나 드셨을 것입니다. 쌀도 몇 가마니를 드셨을 것입니다. 수박, 참외, 사과 등 일년 농사를 다 드셨을 것입니다. 배추를 밭떼기로 드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많이 먹어도 죽습니다.
사람은 특별히 죄 값으로 사망의 밥이 됩니다. 그런데 죄는 돈으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권세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실력으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노벨상을 받아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한 목사님이 학생들에게 설교하시면서 투명 유리관을 보여 주셨습니다. 거기에 맑은 물을 채운 다음 검은 먹물을 떨어뜨리셨습니다. 맑은 물이 새까매졌습니다.
“이것이 죄다. 이 죄 때문에 우리가 죽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목사님은 그 유리관에 표백제를 떨어뜨리셨습니다. 표백제가 들어가니 검은 물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아무리 새까만 죄를 지었어도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심으로 사망이 우리를 삼키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산다.”
목사님이 다시 먹물을 떨어뜨리셨습니다. 그런데 물이 새까맣게 되지 않고 하얗습니다. 그 물에 표백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을 믿어 새사람이 된 다음에도 살다 보면 실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살다 보면 또 죄 짓고 또 실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그 죄와 그 실수도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실수해도 구원을 받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할렐루야!
로마서 8장 1절, 2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결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
여러분과 저는 사망과 죄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사망과 상관이 없어서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하고 큰 소리쳐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신비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제 아침에 제가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어느 방에 있는데 사람들이 그 방문을 막 두드리며 문을 열어 달라고 했습니다. 문을 여니 사람들이 들어와서 “큰일났습니다. 이상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의 손이 몸에 닿기만 하면 누구나 죽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방문을 잠궜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문을 열지도 않고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방에 있던 모든 사람이 기절할 것처럼 놀라며 숨을 곳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서 오시오.”하며 그 사람에게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 사람과 악수를 했는데도 제가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제 앞에 엎드렸습니다.
여러분, 제가 슈퍼맨입니까? 그 사람이 왜 제 앞에 엎드렸겠습니까?
그때 제가 ‘아, 내게 성령님께서 계시는구나.’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깨니 꿈이었습니다. 그것이 현실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도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신비로운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슈퍼맨보다 더 강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하르낙이 말한 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이웃을 형제로 느끼며 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 식구입니다.
식구가 무엇입니까? 한 솥 밥을 먹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양곡 솥의 밥을 같이 먹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얼굴은 달라도, 이름은 달라도, 생각은 달라도 다같이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또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뵙습니다. 친정 아버지가 얼마나 편합니까? 친정 어머니가 얼마나 편합니까? 시집살이가 힘들어도 친정에 가면 편안합니다 친정에 가면 두 다리도 쭉 뻗을 수 있고 얼마나 편안한지 모릅니다.
교회는 친정보다 더 편한 내 아버지 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잘 되기를 얼마나 원하시는지 모릅니다.
맥아더 장군은 어머니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그렇게 훌륭한 장군이 되었답니다. 그를 사랑하는 그의 어머니는 그가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자 사관학교 기숙사가 보이는 곳에 방을 얻어 놓고 그곳에서 살았답니다. 그의 방에 불이 꺼질 때까지 “하나님 아버지, 제 아들이 지금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축복해 주세요.”하고 기도하고, 아침에 불이 켜지면 “하나님 아버지, 제 아들이 일찍 일어났네요. 이제 기도하고 공부 잘 하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했답니다. 아들을 위해 그렇게 기도한 어머니 때문에 우리 모두가 아는 맥아더 장군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머니보다 더 여러분과 제가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업가는 사업에 성공하기를, 의사는 훌륭한 의사가 되어 병원 경영에 성공하기를 원하십니다. 또 우리가 결혼하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 되기를 얼마나 원하시는지 모릅니다. 이런 하나님,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우리가 사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교회는 기쁨을 나누는 기쁨의 공동체, 사랑과 즐거움을 나누는 즐거움의 공동체입니다.
시편 16편 11절에 말씀하십니다.
『…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가 역사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사람들이 속죄함을 받고 신비로운 성령을 받고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움을 누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언제나 즐거움의 소리, 기쁨의 소리가 가득해야 됩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은사는 많이 받았는데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교인들끼리 돈 거래하다가 서로 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특별히 돈 거래라고 나와 있지 않지만, 상황을 보면 돈 거래가 거의 확실합니다. 돈을 빌려주었는데 빌려간 사람이 갚지도 않고 이자도 주지 않으니 멱살을 잡고 싸운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해결이 되지 않으니 나중에는 그 문제를 사회 법정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여러분, 이웃끼리 싸워도 보기가 좋지 않은데, 형제끼리 싸워 보십시오. 형제끼리 싸우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오래 전에 참 마음 아픈 현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모친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형제간에 칼부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싸운 줄 아십니까? 조의금으로 장례를 치르고 나서 얼마가 남았는데 장남이 그것을 챙기면서 “이것은 장남인 내 몫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차남이 “차남인 내가 한평생 어머니를 봉양했으니 이건 내 몫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장남은 상속권이 장남에게 있으니 자기가 가져야 한다고 우기고, 동생은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형이 칼을 뽑아 동생을 죽이려 했습니다. 동생은 도망을 가고 그 뒤를 형이 쫓아갔습니다.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 어머니가 그것을 보셨다면 얼마나 가슴 치셨겠습니까?
여러분, 돈 문제로 형제끼리 다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고기와 생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133편에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형제끼리 싸우면 마귀가 와서 그 집을 휘젓지만, 형제끼리 사랑하고 화목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의 피를 받아 한 형제, 한 가족이 된 것보다 예수님의 피를 받아 한 가족이 된 여러분과 제가 더 영원한 가족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정의 가족은 영원한 가족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 가족 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세상을 떠날 때 지옥으로 떨어지니 영원한 가족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 우리는 영원한 가족입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가족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천국의 양곡동 양곡 아파트에서, 호수는 다를지 몰라도, 영원히 함께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고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결국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런 우리 성도끼리 싸워 보십시오. 얼마나 아픈 일입니까?
이런 아픈 일이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서로 다투던 당사자들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그 문제를 사회의 일반 법정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당시 법정은 아테네 법을 따랐는데, 처음에는 쌍방이 변호사에게 문제를 의뢰하면 두 변호사가 의논하여 공정한 판사를 정합니다. 그래서 그 판사에게 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당사자들의 생각에 그 판정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상소를 합니다. 그러면 40명의 배심원이 재판을 합니다. 그 결과도 만족스럽지 못하면 또 상소합니다. 그러면 문제의 금액이 50파운드 미만일 때는 201명의 배심원이, 50파운드 이상일 때는 401명의 배심원이 재판을 합니다. 그 판정도 만족스럽지 못하여 다시 상소하면 시민들에게 존경받는 사람 1000명이 배심원이 되어 판단을 합니다. 그래도 만족하지 못해 상소하면 6000명이 모여서 판단을 합니다.
그러니 문제가 일반 법정에 나가게 되면 신문이나 라디오를 통해 알리지 않아도 그 일을 모든 시민이 알게 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자기들끼리 돈 문제로 싸우다가 법정에까지 왔으니 그 일이 도시에 다 퍼졌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러니 바울이 “너희는 세상을 판단할 자들이 아니냐? 그런데 어찌 그런 일을 가지고 법정에 가느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 28절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판단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천사보다 나은 존재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천사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히브리서 1장 14절에도 말씀하십니다.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지용수를 도와주라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셨는데 그 천사가 저를 잘 도와주지 않으면 제가 천사를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사를 판단하고 세상을 판단할 수 있는 성도인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판단을 받으러 세상 법정에 나간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더구나 고린고 교회에서 일어난 문제는 형사 문제도 아닌 사소한 문제, 금전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책망하는 것입니다.
본문 7절에 보면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라고 합니다.
“차라리 네 명예가 떨어지는 것이 낫고 물질에 손해 보는 것이 낫지 않느냐? 어찌 형제끼리 다투어서 교회의 영광을 떨어뜨리느냐? 주의 피로, 주의 이름으로,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고 깨끗하게 된 너희가 어찌 세상 사람들처럼 탐심을 갖고 물질 문제로 다투느냐?”하고 바울이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주신 말씀인 동시에 여러분과 제게 주신 말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편안하고 좋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예방으로 주신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는 언제나 웃음이 가득해야 됩니다. 교인의 얼굴에도 언제나 기쁨이 가득해야 됩니다. 마음도 즐거워야 됩니다. 교회에는 즐거움이 넘쳐서 교회보다 더 재미있는 곳이 없어야 합니다.
시편 84편 10절에 말씀하십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바다로 가면 신바람이 나는데, 골프장으로 가면 신바람이 나는데, 낚시하러 가면 신바람이 나는데, 여행갈 때는 신바람이 나는데 교회에 올 때는 신바람이 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교회에 올 때 신바람나고 좋아서 못 견디는 그 모습이 교회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교회의 신바람을 빼앗아 가고 즐거움을 빼앗아 가고 다투게 하고 싸우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안할 때도 언제나 교회를 지켜서 여우가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됩니다.
아가서 2장 15절에 말씀하십니다.
『…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여우가 포도를 많이 따먹기 때문에 포도원에 담을 쌓습니다. 그래도 어쩌다 담에 구멍이 생기면 작은 여우가 들어가 뛰어다니며 포도를 따먹는데, 포도가 없으면 이 포도나무 저 포도나무를 흔들며 다닙니다. 그러면 꽃이 다 떨어져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여우를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은혜가 있고 은혜의 꽃이 필 때, 축복의 열매, 생명의 열매, 전도의 열매가 가득하게 맺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여우 같은 마귀가 들어와서 교회를 휘저으면 꽃이 떨어져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여우가 다니면 포도원이 상처를 받는 것처럼 마귀가 지나다니면 교인들이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자나깨나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따라 합시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제가 설교하기 전에 녹음된 말처럼 항상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더러운 귀신아, 병마야, 흑암의 권세야, 물러가라!”라고 하는 것은 그냥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를 막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돈 거래하는 사람을 마귀가 사용합니다.
A집사님이 B집사님에게 일억 원을 빌렸습니다. 그런데 A집사님의 사업이 잘 안 되어 돈을 갚지 못합니다. B집사님이 A집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내가 지금 돈이 필요하니 일억 원과 이자를 주시오.”
“미안하오. 사업이 안 되어 줄 수가 없소.”
“아니, 그건 당신 사정이고 돈을 빌려갔으며 갚아야 할 것 아니오.”
“없는 걸 어떻게 주겠소?”
“아니, 이 자식이….”
여러분, 돈독이 오르면 집사님 입에서도 말 새끼, 소 새끼, 토끼 새끼가 나오게 됩니다. 멱살도 잡습니다. 그러면 마귀가 “좋다! 잘 놀아라.”하며 부추깁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는 얼마나 탄식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멱살을 잡고 싸워도 해결이 안 되면 법정으로 갑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말합니다.
“어느 교회에 이런 문제가 있대.”
“어느 교회의 어느 집사님이 사업이 안 되어 교인들의 돈을 떼먹고 도망갔대. 20억 원이나 떼먹었대.”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그래서 신협과 거래하고 은행과 거래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돈 거래하면 마귀가 그 사람을 쓰게 됩니다. 결코 돈 거래하면 안 됩니다. 돈 거래하면 마귀가 그 사람을 써서 여우 노릇하게 합니다.
보증도 서주면 안 됩니다.
잠언 22장 26절에 『…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언 6장 1절에서 5절에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스스로 구원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에게 보증을 서 주었으면 자지 말고 가서 겸손히 간청하여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듯, 새가 그물에서 벗어나듯 보증에서 도망쳐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보증한 이웃에게 사정해서 보증을 파기하고 나오라는 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정미소를 경영하는 한 큰 부자 장로님이 보증을 섰다가 알거지가 된 것을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하나님, 장로님을 왜 축복해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장로님이 불순종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증서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자기 마음대로 보증을 섰다가 망한 것 아닙니까?
아들에게도 보증을 서주면 안 됩니다. 사업하는 아들이 보증을 서 달라고 해도 서 주면 안 됩니다. 아들의 보증을 서 주었는데 아들이 사업에 망하면 아버지의 집도 빼앗기고 아버지도 거지가 됩니다. 그러나 보증을 서 주지 않았으면 아들은 망해도 아버지는 괜찮으니 아들이 아버지 집에 와서 밥 먹고 잠 잘 수 있는 것입니다. 사업하는 동생이 와서 보증을 서 달라고 해도 서 주지 않아야 됩니다. 보증을 서 주었는데 동생이 망하면 형도 같이 망합니다. 그러나 보증을 서지 않았으면 망한 동생이 형님 집에 와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재산이 100억 원 정도 되는데 사위가 보증을 서 달라고 하거든 사위에게 그냥 주는 셈치고 10억 원 정도만 서 주시기 바랍니다. 친구가 와서 보증을 서 달라고 하거든 친구에게 그냥 주는 셈치고 그 정도만, 한 1000만 원 정도까지만 서 주시기 바랍니다. 그 이상 보증을 서면 여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불행해지고 교회도 불행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돈 거래로 마귀의 시험거리가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로 이미 발생된 일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다고, 힘은 들지만 그 때는 하나님 아버지의 입장에서 사랑으로 해결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십시오. 둘째 아들이 유산을 일찍 받아 가지고 나가서 방탕한 생활로 그 돈을 다 쓰고 거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자식이 좋습니다. 망해서 돌아왔어도 자식이니 죽은 자식이 살아온 것처럼 반겼습니다. 새 옷을 입히고 새 신발을 신기고 반지를 끼워주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여 마을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며 기뻐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들에서 집으로 돌아온 맏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나는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하인에게 묻습니다.
“아니, 무슨 일이냐?”
“예, 작은 도련님이 돌아오신 것을 주인님께서 기뻐하셔서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맏아들은 화가 났습니다.
동생이 아버지께 자기 몫을 다 받아갔으니 이제 남은 재산은 다 맏아들인 자기의 것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왔으니 이제 형인 자기의 것을 먹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그렇습니다. 집에서 아버지를 이렇게 성실히 섬기는 자식을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아 주지 않더니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말아먹은 놈이 오니 잔치를 벌이다니, 얼마나 불공평한 아버지입니까?
맏아들의 말이 맞습니다. 맏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도 잘못이고 동생은 더 큰 잘못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맏아들은 든든하고 고마운 아들이고, 작은아들은 불쌍한 아들, 그러나 돌아와 주어서 반가운 아들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이 계속해서 자기 입장만 지키고 내세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버지와도 원수가 되고 동생과도 원수가 됩니다. 집이 하나가 되려면 형이 아버지의 마음을 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 나중에 내가 아이들을 낳았을 때 내 아들딸이 자라서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나?’하는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제가 전에는 미국에 가기만 하면 동생을 꾸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성이가 성찬이를 늘 꾸중하면 내 마음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큰아들 성이가 작은아들 성찬이를 늘 꾸중하면 제 기분이 좋겠습니까? 성이가 자기 동생 성찬이를 매일 책망하면 제 가슴이 아플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동생에게 무조건 잘 한다며 기를 살려 줍니다. 무조건 수고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동생이 예전보다 일을 더 잘 합니다. 제가 꾸중할 때는 일을 못하더니 잘 한다고 기를 살려 주니 더 잘 합니다. 제가 그렇게 하니 저의 어머니께서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결심했습니다.
‘동생이야 어찌하든지, 동생이 잘못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동생을 사랑한다.’
부모의 입장에 서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오래 전, 저희 집에서 사업할 때의 일입니다. 동생이 어떤 판단을 잘못해서 큰돈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일로 저희 집의 사업이 휘청거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동생을 나무랐습니다.
“아니,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해? 도대체 이게 뭐야?”
“형님,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하면 될 일이야?”
그 때의 대화를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제가 서너 번 막 야단쳤더니, 나중에는 동생이 대들었습니다.
“사람이 일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저는 저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뭐? 최선을 다했어?”
제 평생 동생과 그렇게 싸워본 적이 그때 말고는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게 막 싸우다가 기분이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니 언제 오셨는지 어머니가 사무실에 들어와 계셨습니다. 동생과 제가 싸우는 것을 보고 울고 계셨습니다. 제 등에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동생에게도 말했습니다.
“동생, 미안하네. 미안하네.”
동생도 제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딱 잊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굶지 않고 잘 살고 있습니다.
동생이 잘못했으니 제가 얼마든지 꾸중할 수 있는 일인데, 어머니 입장에 들어서니 꾸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이 둘뿐인데 그 두 아들이 서로 다투면 어머니의 간장이 찢어지니 다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끼리 거래하다가 손해를 보면 “나쁜 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는 나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상대방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한 사람이 요셉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연합하여 요셉을 죽이려다가, 구덩이에 빠뜨려 굶어 죽게 하려다가, 돈을 받고 팔아버렸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인신매매한 것입니다.
여러분, 형들에게 인신매매를 당했으니 요셉이 보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인신매매를 당한 요셉이 총리가 되었습니다. 왕이 요셉에게 반지를 주며 “네 마음대로 나라를 다스려라.”라고 해서 요셉이 80년간 왕처럼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우리 나라 총리와는 다른 왕권을 가진 총리였습니다. 그렇게 힘있는 총리 요셉 앞에 그의 형들이 양식을 사러 왔던 것입니다. 그 나라 총리가 요셉인 것을 안 그의 형들은 덜덜 떨며 파랗게 질렸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죽을 지경이 된 형들을 품어주었습니다.
“형님들, 나를 판 것 때문에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께서 우리 식구를 살리시려고 나를 이곳에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랑으로 형님들을 품어주어 아름다운 간증거리를 만들었습니다.
오래 전, 우리 교회에 오셔서 집회를 인도하셨던 김 목사님의 간증인데, 기억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교회 한 장로님이 어떤 안수 집사님에게 3000만 원을 빌려주었습니다. 그 당시 3000만 원은 큰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의 사업이 잘못되는 바람에 집사님이 돈을 갚지 않았습니다. 장로님은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며 모은 돈을 빌려주었는데 받지 못하니 나중에는 견디지 못하고 칼을 품었습니다. 칼을 휘둘러서라도 돈 받을 작정을 했습니다. 하루는 장로님이 가슴에 칼을 품고 집사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날, 김 목사님께서 늦게까지 남아 새벽 기도를 하시는데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칼을 들고 시근덕거리며 가고 있는 장로님 옆에서 마귀가 “가서 죽여라. 그런 놈은 죽여야 한다. 돈 떼먹은 놈은 죽어야 마땅하다.”하고 부채질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큰일났다. 살인 사건이 나겠구나.’라고 깨닫고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소리쳐 막 기도하셨습니다.
칼을 품은 장로님이 집사님 집에 도착하여 방문을 열려고 하는데 기도 소리가 들렸습니다. 차마 기도하는데 들어갈 수가 없어서 참으며 기도가 끝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이 “하나님, 우리는 죽을 먹어도 좋고 굶어도 괜찮은데 우리에게 귀한 돈을 빌려주시고 받지 못하신 장로님은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기도하더니 막 우는 것이었습니다.
장로님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희멀건 죽밖에 없는 밥상 앞에서 온 가족이 울고 있습니다.
‘돈을 떼였지만 나는 밥을 먹으며 살고 은행에 돈도 있는데, 이 집은 이렇게 어렵다니…. 한 교회에서 예수를 믿는 내가 ….’
장로님이 집사님에게 사업을 다시 시작하라며 3000만 원을 더 빌려주었습니다. 집사님이 정성을 다해 사업하여 마침내 대성해서 장로님의 돈을 다 갚고 장로님을 아버지처럼 섬기며 두 가정이 잘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사랑으로 어려움을 이겨낸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돈을 떼인 사람을 감동시켜 보세요. 여러분의 명예를 실추시킨 사람을 위해 기도해 보세요.
마태복음 5장 44절에 말씀하십니다.
『…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상대방에게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멍멍이 고기를 아주 좋아하는 한 분이 계셨습니다. 멍멍이 고기를 너무 좋아하다 보니 집에서 개를 길러 1년에 한 번씩 산에 끌고 가서 뜯어먹어야겠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마침내 집에서 기르던 개가 자랄 만큼 자라자 개를 데리고 이웃과 함께 산으로 갔습니다. 부인은 집에서 기른 개를 차마 먹을 수 없다며 닭을 사 가지고 갔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개는 꼬리를 흔들며 좋아했습니다.
개를 잡기에 좋은 장소를 발견한 주인이 미리 사 둔 나일론 줄을 개의 목에 걸었습니다. 그리고는 나일론 줄을 힘껏 당겼습니다. 개가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목을 졸라도 개가 금방 죽지 않고 한참 비명을 지르다 죽는 것을 저도 본 적이 있습니다. 개가 금방 죽지 않아 더 세게 계속 줄을 잡아당기는데 그만 나일론 줄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개가 삼십육계를 놓았습니다.
얼마나 허탄했겠습니까?
‘조금 더 굵은 줄을 살 걸….’
산에서 개고기를 뜯어먹으려던 꿈이 다 깨지고 말았습니다.
주인은 하는 수 없이 닭다리를 뜯어먹고 해 진 오후에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목에 나일론 줄을 건 개가 집에 먼저 와 있다가 주인을 보는 순간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며 막 기어오르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때 그분의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자기는 개를 잡아먹으려 했는데 개는 그것을 다 잊어버리고 자기를 보더니 좋아하며 꼬리를 치니 얼마나 미안했는지 “앞으로 내가 개고기를 먹으면 나는 개새끼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서 회개했답니다. 그분이 집사님이었던 것입니다.
집사님이 목사님께도 말씀을 드렸답니다.
“목사님, 이런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앞으로는 개고기를 먹지 않을 겁니다. 제가 만일 개고기를 먹으면 저는 개집사입니다.”
개가 감동을 주어도 사람이 변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것이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 돈을 빌려 가서 갚지 않는 사람이 나쁘지만 오히려 사랑으로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문제를 이기게 됩니다. 그래야 교회가 평화롭게 됩니다.
여러분 개인의 마음에도 늘 평안과 즐거움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 자신을 미워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미울 때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미워하여 가슴 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어떤 실수를 하여 나를 미워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왜 내가 그런 짓을 했지? 왜 또 그런 짓을 했지?’하며 자신이 자신을 미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됩니다. 내가 나를 생각해도 기뻐야 됩니다. 즐거워야 됩니다.
그리고 가정에도 즐거움이 있어야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교회에는 즐거움이 넘쳐야 됩니다.
나아가 남북한도 즐겁게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대전에 있을 때 잠깐 TV를 보니, 우리 응원단이 “우리는!”하니까 북한 응원단이 “하나다!”라고 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제 가슴이 찡해졌습니다. 남북한이 어서 하나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나라 남북한에 즐거움과 평화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양곡교회가 큰 몫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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