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제단 2002-10-23 10:49:11 read : 5333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년 10월 6일
구약의 말씀: 창세기서 8:18 ~ 22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을 데리고 나왔다.
모든 짐승, 모든 길짐승, 모든 새,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바깥으로 나왔다.
노아는 주 앞에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집짐승과 정결한 새들 가운데서 제물을 골라서, 제단 위에 번제물로 바쳤다. 주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서, 마음 속으로 다짐하셨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4:7 ~ 8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은, 더러움에 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고를 저버리는 사람은,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가복음서 2:23 ~ 28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지 못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조차도 주인이다."
--------------------------------------------------------------------------------
오늘 성서 본문인 창세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인간들이 너무 타락하여 무법천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과 땅을 함께 멸망시키겠다고 하십니다. 준엄한 주님의 심판의 말씀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방주를 만들고, 아내와 아들들과 며느리들과 또 살과 피를 지닌 모든 짐승들 암컷, 수컷 한 쌍씩을 다 방주에 실어서 구원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이전을 살펴보면, 홍수가 시작된 때는, 노아가 육백 살 되던 해 둘째 달 열 이렛날이라고 합니다. 육백 한 살이라니 오래도 살았습니다. 홍수가 언제 끝났느냐 하면 노아가 육백 한 살 되던 해 첫째 달 초하루. 그러니까, 노아의 홍수 기간이 총 삼백 칠십 일 동안이었습니다. 비가 오기 시작해서, 땅에서 물이 완전히 다 빠지기까지는 1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땅이 드러나지 않아서 노아가 방주를 타고 물위에 떠 있은 기간은 150일 동안이었습니다. 150일 동안은 방주 안에서 살았고, 그리고 이후에는 물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이제 새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여 무법천지가 되었으니, 땅과 함께 하늘과 바다와 모든 것을 다 물로 쓸어버린다는 경고를 내렸고, 그 일을 실행하셨습니다. 홍수 다음에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너무나 처참한 홍수 때문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다시는 이 땅을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겠다.” 인간들이 아무리 타락한다 하더라도 홍수로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표시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인간이 타락해서 인간의 역사가 수만 번, 수천 번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홍수로 멸망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 처음 한 일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고 번제물을 바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바치는 희생제물의 향기를 맡으시고 그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홍수 기간 동안, 장장 150일 동안을 방주라는 이름의 감옥 속에 갇힌 노아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이제 막 감옥을 벗어나서 밝은 천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사람이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아마 두 가지 중에 하나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신앙심이 깊어서, 오늘 본문 말씀의 노아처럼, 제단을 쌓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 제물을 바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배고프고 목마르고 힘들어서, 제일 먹을 물을 찾고 먹을 것을 위해 땅에 파종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전자를 택했습니다.
사실 이걸 놓고 신앙이 있는 사람이야 신에게 감사할 것이고, 신앙이 없는 사람은 당연히 먹고살 준비를 먼저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치 않을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인간은 외부에서 강력한 도전이 닥쳐 올 때 굉장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힘센 도전이 엄습할 때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인간에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외부의 도전에 반발하는 심리적 기력도 있습니다. 두려움이 있지만 두려움에 그냥 좌절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보다 훨씬 더 큰 두려움이 있는데, 그 두려움이란 밖으로부터 오는 도전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부터 일어나는 도전입니다. 그 도전이란 다름 아닌 외로움입니다. 혼자 된 느낌입니다. 모두로부터 끊어진 나, 이야기할 상대도 없고 하늘도 없고 땅도 없는, 내버려진 홀로의 존재입니다. 외로움, 혼자 버려진 채로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이 사람에게는 가장 두려운 일, 두려움의 최고봉이라고, 심리학자들이 말합니다. 맞는 얘기 같습니다. 사실 두려움 중 가장 큰 것은 완전히 단절되어 혼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노아는 방주 속에서, 비록 가족들과 함께 있긴 했지만, 150일 동안을 외부와 단절되어 홀로 살았습니다. 노아가 방주 속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나는 왜 혼자인가, 다른 인간들은 다 어디 갔는가, 천지 만물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외롭고 두려운 생각 아니었겠습니까? 하나님조차도 함께 계시지 않는 듯한 갇힌 공간, 어두운 배 안에서 긴긴 날을 지내면서 혼자라는 생각에 왜 아니 두려웠겠습니까? 하나님과 같이 있고 싶은 심정, 세상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고 싶은 심정, 싸우고 울고불고 하더라도 함께 어울리고 싶은 심정, 그 심정이 노아의 심정 아니었겠습니까? 그래서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제물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 나는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나와 함께 계셔 주십시오.” 하는 요청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왜 받으셨냐, 제물에서 향기가 났기 때문입니다. 왜 향기가 났느냐, 노아가 바친 제물 속에 노아가 추구하는 인간미, 사람답고자 하는 심정,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다움 전체를 담아 바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셨습니다. 만일 노아가 인간을 담지 않은 제사를 드렸다고 하면, 만일 노아가 자기 전부를 바치지 않고 찬송만 불렀다고 하면, 노아가 습관에 따라서 헌금만 바치고 자신의 마음을 함께 담지 않았다고 하면, 설교는 했으나 설교 속에 설교자 자신의 진지한 고뇌와 신앙이 투여되지 않았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설교, 그런 헌금, 그런 예배, 그런 찬양, 그런 기도는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향내가 아니라 구린내가 날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신앙의 행위 속에 우리의 사람됨의 전부를 담아드릴 때, 하나님은 향내를 맡으시고, 그 행위와 그 예배를, 그 진심을 받으십니다.
예수께서도 마지막 십자가상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외마디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왜 나는 혼자 버려 두십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거든, 그 뜻대로 하옵소서.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 나를 받아달라는 것은, 내가 당신 안에 있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드렸던 제사입니다. 예배입니다. 나는 내 인간 전체를 당신께 바칩니다. 내 죽음까지도 바칩니다. 이 죽음도 당신 품안에 받아 주옵소서. 나는 내 전부를 바칩니다. 십자가는 나무 기둥이 아닙니다. 십자가에는 예수의 인간 전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서 부활의 사건을 일으키시고 만민을 구원하십니다.
인간이 바쳐지지 않은 예배는 하나님이 안 받으십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인간이 없는 예배라면, 오늘 우리 신앙의 삶이 인간이 없는 삶이라면, 그건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진실로 인간이 있는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이 복을 주셨고, 인간이 없는 인간의 역사는 패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헝가리에 갔다온 이야기를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명예학위를 받는다고 데브리첸에 있는 신학대학원에 갔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헝가리의 수도는 부다페스트입니다만, 헝가리 제2의 도시, ‘데브리첸’이라는 도시는 종교개혁의 수도라고 일컫습니다. 이 신학교는 364년 전에 건설된 학교로, 헝가리 사람들은 동유럽에서는 가장 오래된 신학교라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관심이 끌린 것은 그런 역사적인 자랑보다도, 저로서는 처음 파악한 헝가리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헝가리는 그 동안 유럽 역사의 격동 가운데에서 외적의 침략을 받아서, 나라 이름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5개국 중복시민”이라고 합니다. 그러고서 이제야 비로소 헝가리 시민이라고 불립니다. 이런 다섯 번의 불행한 역사 가운데서 가장 최근의 것은 “합스부르크 왕가”라고 부르는 오지리 출신의 왕가가 헝가리를 비롯해서 동유럽 전체를 점령한 일입니다. 그런데 합스부르크 왕가가 점령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왕가는 로마 카톨릭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종교개혁의 발상지로서, 루터의 종교개혁, 칼빈의 종교개혁을 이어받아서, 이 데브리첸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의 물결을 완전히 일으켜 놓았는데, 합스부르크 왕가가 침략함으로써 종교개혁의 위업은 다 무너지고, 드디어 다시 천주교로 환원되는 수난을 겪습니다. 천주교로의 강제 환원, 동시에 나라의 주권 상실, 이 두 가지 고통을 겪었습니다.
지난 세기 헝가리가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독립할 때, 마지막 국회가 부다페스트에서 데브레첸이라는 도시로 옮겨서 열렸는데, 바로 이 신학교 강당에서 국회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국회는 합스부르크 왕가에서의 독립을 선언한다는 결의를 하고, 독립선언서를, 그 학교 옆에 있는 그레이트 처치(Great Church)라는 이름의 교회, 우리말로 하면 위대한 교회, 그렇습니다, 소위 위대한 교회라고 자칭한 교회의 설교 단 아래에서 당시 헝가리의 지도자였던 쿠쉬시(kussuth)라는 사람이, 장로님이었는데, 그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헝가리가 독립하면서, 종교개혁의 불을 다시 지피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의 불씨를 다시 살리게 된 일은, 단순히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는 기독교의 한 종파로 바꾼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민족의 독립과 자존과 생명을 가져다준 총체적 전환이자 개혁입니다. 그 일의 센터, 중심이 바로 그 신학교이고, 그 옆에 있는 교회입니다.
지난주에 마침 제가 그 교회의 설교 단에 서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얘기를 듣고, 그곳에서 설교를 하면서, 제가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만, 1919년 독립선언서가 전국의 교회에서 낭독되었을 때, 각 교회 강단마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하나님을 향하여 이 민족에 독립을 주소서 하고 외치던 그때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를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남의 나라에 가서 말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섯 차례의 곡절을 겪고서 이제 제 나라를 찾았습니다만, 이 땅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땅에 임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복음을 듣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 감사의 축제를 지난주에 함께 드렸습니다.
그들은 정말 종교개혁 정신을 자기 민족 속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신앙의 선물, 자기들의 종교적 신념이자 민족의 자존이고 생의 의미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 동안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얼굴을 찾아 볼 수 없는 그런 공산주의 사회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공산주의 사회가 왜 무너졌느냐 하면,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 속에 인간의 얼굴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만들자고 노력했으나, 그 노력들은 군화에 짓밟혔고, 끝내 사람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은 망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체제는 사람의 얼굴을 가진 체제,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헝가리 교회가 추구하는 종교개혁의 정신입니다.
노아가 제물 속에 ‘인간’을 담아 바쳤듯이, 모든 예배 속에는 사람, 하나님이 만드신 그 사람이 담겨야 합니다. 사람이 없는 십자가, 사람이 없는 예배, 사람이 없는 교회, 사람이 없는 설교대,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있는 체제를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세계가 모두 인간이 담긴 현실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자유 민주주의 속에서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으면 우리도 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먹을 걸 주었더니 유대교인들이 반발했습니다. “어떻게 안식일을 위반합니까?” 예수의 답변입니다. “안식일이란 제도와 체제는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안식일 때문에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때문에 교회가 있지 교회 때문에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빠진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럼 인간 중심으로 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과 동시에 격려의 말씀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왜 사람이 있는 예배가 진실한 예배냐 하면,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시는 사람이 사람이지, 하나님이 빠져버린 사람은 사람이어도 진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적어도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창조주의 형상이 담긴 인간이 참된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과 그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향기롭다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인간의 향기를 가장 중요시하는 공동체, 그러나 그 인간 속에 창조주 하나님이 그 형상으로 함께하시는 공동체를 꿈꿉니다. 또한 그런 인간이고자 합니다. 그런 예배,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인간이 드리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런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그런 예배를 하나님께서 향내가 나는 예배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참여하는 모든 순서 속에, 기도와 찬송과 성만찬 속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임재하시는 예배, 그 예배를 우리가 오늘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지금 이 시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하나 하나가 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는, 인간의 향내가 나는 그런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