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에서 엘림으로 2002-10-16 11:46:21 read : 466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출애굽기 15:22-27 // 2002-10-06
실망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아주 쉽게 경험되는 것입니다. 수 십 년 동안 모은 재산을 한 순간에 잃고 실망에 빠질 수도 있고, 출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 본의 아니게 기회를 놓치고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국가나 교회에 대해 실망하기도 하고, 남편이나 아내에 대해 서로 실망하기도 하며, 우리의 자녀에 대한 실망을 안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렇듯 실망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겪고 있는 실망스러운 사건 중에 우리의 마음에 깊은 상처와 충격을 주는 실망감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도움을 주었던 사람에게 오히려 비난을 받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버림받을 때, 우리는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됩니다. 단순히 마음의 상처뿐만 아니라, 인생의 목적마저 흔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성공된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실망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1. 어떤 사람이 실망하지 않습니까?
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마실 물이 없어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기 시작하자, 모세가 어떻게 합니까? 기도했습니다. 25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그렇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했을 때,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마실 물을 줄 수 있을까를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세가 왜 기도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모세가 학벌이 없었기 때문에 아는 것이 부족해서 기도한 것일까요? 지도자로써의 자신의 위치가 위협을 받게 되어 기도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학문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광야 생활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광야라는 곳이 어떠한 지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그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왜요? 염려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염려는 실망을 낳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문제 해결의 능력을 낳습니다. 믿으십니까?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믿고 깨달아야 합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염려는 오히려 자신의 무능력함만을 알게 할 뿐만 아니라 좌절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6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성도 여러분,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줄 알면, 더 이상 실망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심으로 바른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길을 알도록 합니다. 성도 여러분, 길을 알아야 목적지에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길도 모르고 출발하면 목적지에 이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망하지 않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세요. 주님도 십자가의 길에서 포기하고 싶었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끝까지 십자가의 길, 승리의 길을 걸어가실 수 있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⑵ (실망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인생의 “마라”가 있음을 받아드리는 사람입니다.
성공한 인생에도 “마라”가 있음을 받아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실패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불과 삼일 전에 엄청난 성공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성공이 무엇입니까? 홍해를 건넌 사건입니다. 그뿐입니까? 홍해 바다에 자신들을 뒤좇아 오던 애굽 군사들이 모두 수장되었지 않습니까? 이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22절로 24절 말씀입니다. “22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는 홍해 바다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수르 광야로 들어섰습니다. 그곳에서 사흘을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마라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이 있기는 한데,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원망이 드세 지기 시작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마실 물이 없었다는 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모세를 원망했던 진짜 이유는 홍해를 건넌 자신들에게 더 이상의 난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가장 큰 성공 뒤에 찾아올지도 모르는 실패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고, 뿐만 아니라, 그 실패를 받아드릴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구에게나 실패는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떠들어대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오히려 작은 일에 실망하고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다구요? 실패를 받아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인생에는 오직 성공뿐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 뜻대로 되는 것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피터 워터만(Peter Waterman)이 저술한 “탁월함을 좇아서”(In Search of Excellence)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IBM이나 3M과 같은 미국의 우수 회사들을 43개나 분석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 책이 출판된 이후에 아주 놀랄만한 일들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피터와 워터만이 이 책에서 분석한 43개의 기업 중에 14개의 기업이 이 책이 출간된 지 2년 뒤에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즈니스 주간지(Business Week)는 그 이유를 “변화에 역동적으로 반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변화에 역동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때로 있을지도 모르는 실패를 두려워한 나머지 현실 안주에만 신경을 썼다는 것을 뜻하는 것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성공에 만족해서 현실에 안주하려고 할 때에는 결코 그 성공을 지속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실망하지 않는 인생이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실패를 받아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실패는 창피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실패로 인해 좌절하고 주저앉아 있는 것이 창피한 일입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실패도 있어야만 합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입니다.
⑶ (실망하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마라”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실패는 있기 마련입니다. 이 말은 곧 실패를 경험하는 사람은 누구나 실망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한 것입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실패 앞에서 실망하고 좌절하느냐? 아니면 실패를 딛고 일어서느냐? 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하면 실망감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습니까?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인생의 마라라고 느껴지는 상황에 처하게 될 때, 그 자리를 빨리 떨치고 나와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문제에 계속 얽매어 있으면, 실망된 일에 계속 얽매어 있으면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7절에는 엘림이라는 곳이 나옵니다.
엘림이 어떠한 곳입니까? 다함께 27절 말씀을 봅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엘림은 광야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아주 풍요로운 곳입니다. 물샘, 즉 오아시스가 무려 열두 개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려나무가 칠십 주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광야에서 이만한 곳을 발견하기가 쉬운 일이겠습니까? 아니지요. 흔한 일일 수 없습니다. 정말 어쩌다 한 번 발견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엘림이라는 곳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바로 마라 근처에 있었습니다. 성서 지도책을 보면, “마라”라는 곳에서부터 “엘림”이라는 곳이 불과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림이라는 아주 풍요로운 곳이 가까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마라”와 같은 쓴 사건들로만 계속해서 점철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마라가 있다면 그 다음에는 엘림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마라에 머물러 있지 말고 엘림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마라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엘림으로 갈 수 없습니다. 인생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 삶의 풍성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인생의 마라를 떠날 때, 비로소 하나님은 인생의 엘림을 통해서 풍성함을 허락해주십니다.
리처드 바크(Richard Bach)의 저서, 「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 Seagull)」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주인공인 갈매기 조나단은 고독한 선구자였습니다. 갈매기들은 해변가를 조금 날아서 겨우 먹이를 찾아 먹고는 제자리로 돌아가 있다가 배가 고파지면 다시 가서 먹이를 먹는 일이 고작이었습니다. 그것밖에는 갈매기들이 더 이상 날아다닐 곳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갈매기 인생의 전부였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꿈을 가진 조나단이라는 갈매기가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더 높이 날 수 있어. 그리고 우리는 더 멀리 바라볼 수 있어.” 그는 친구들에게 미지의 나라를 향하여 가자고 속삭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갈매기들은 조나단을 미쳤다며 쫓아내어 그 사회에서 추방했습니다. 추방당한 조나단은 너무나 슬펐습니다. 그 슬픔은 그들의 사회에서 쫓겨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더 커다란 꿈을 모르는 데에서 온 것입니다. 고독한 선구자 조나단의 슬픔은 높이 날 수도 있는데, 멀리 갈 수도 있는데 친구들이 자기의 한계 이상을 거부하는 짧은 안목에 대한 슬픔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나의 삶이 마라와 같이 쓴 인생이라고 해서 슬퍼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그곳에 계속해서 머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 슬퍼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 님은 우리가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인생의 마라에서 떠나십시오. 지금 힘든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조금만 인내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마라의 쓴 물을 단 물로 만들어 주셨듯이 마라와 같은 여러분의 인생을 엘림에서처럼 풍요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2. 어떻게 실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까?
⑴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실망스러운 일을 경험하게 되더라도 그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복수하려고 한다거나 되받아 쳐서도 안 됩니다. 다시 말해, “그래, 감히 네가 날 배신해. 너 두고 봐라. 내가 널 가만히 두면 손에 장을 짓는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저주의 말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 원하시지 않습니다. 로마서 12장 14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너희는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성도 여러분, 단순히 저주하지 않고 참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축복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축복을 빌어주라고 했지, 저주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세가 어떻게 합니까? 25절 말씀을 보니까,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도록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저주를 통해서 자신의 분을 풀기보다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화나게 하면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들 대부분은 복수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보복을 시작하는 순간 하나님은 여러분을 보호하는 일을 멈추신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여러분의 인생을 지켜주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입니까? 당연히,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지켜주시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다른 사람을 저주합니까? 우리가 누군가의 불행을 원하고 있다면, 바로 그것 자체가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않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어느 날 물새가 참새에게 “참새야, 저 아래 땅위에서 허덕거리며 걸어 다니는 인간들의 모습을 봐. 저 아우성치며 허우적거리면서 살고 있는 인간들의 꼴을 보란 말이야”라며 말을 걸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참새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물새야, 아마 저들에게는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 모양이지!”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지금은 비록 내가 어렵고 힘들고 억울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을 확신할 수 있기에 결단코 다른 사람을 저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⑵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상처를 받으면 그것을 계속해서 생각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그 상처를 잊지 못하고 되새기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스라엘의 과오에 대해 반복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 차례 모세를 원망했었습니다. 모세가 바로 왕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줄 것을 요구하자,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역을 과중시켰는데,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찾아와 당신이 뭔데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서 더 힘들게 하느냐고 따지기까지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출애굽을 하고 나서 홍해 바다 앞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의 군사들이 뒤좇아 오는 모 습을 보자, “왜 우리를 광야로 이끌어내어서 이곳에서 죽게 만드느냐”고 따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그만 역경만 만나도 모세를 원망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모세라면 지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분명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여보시오. 이제껏 역경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았소. 분명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마실 물을 줄 것인데, 왜 이리 난리법석이요. 도대체 당신들은 언제쯤 하나님의 능력을 믿겠소.” 분명 모세도 이렇게 말할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과거 그들의 잘못을 들춰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의 불평 앞에서 묵묵히 기도했을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구나 실망스러운 일 때문에 얼마든지 불평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불평에 중독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불평이 우리의 삶 전체를 삼키지 못하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실망스러운 일을 겪게 되어도 그것을 마음에 품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에 품지 말라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그래, 이번 일에는 내가 잘못한 것이 없어! 그 사람이 잘못해서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한거야!”라고 계속해서 되풀이하면서 마음속에 각인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동정해줄 사람을 찾아 나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개 화가 나면 어떻습니까? 억울한 일을 겪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을 찾아가서 조언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실 조언을 얻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싶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실망스럽고 억울한 일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마음에 입력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자신의 억울한 사정에 동조해주는 사람을 찾아 나서는 안 됩니다.
⑶ 하나님께서 해결하도록 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25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성도 여러분,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실망의 원인을 직접 치유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 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문제를 직접 해결하실 수 있도록 모든 문제를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분명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는 내 능력으로 하고, 어디부터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불평을 토로할 때, 얼마든지 실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시기를 원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나무를 물에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나무를 물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쓴 물이 단 물로 변해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26절 말씀입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라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성도 여러분,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안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준비해 놓으시고, 다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망과 좌절을 선한 것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치료의 하나님이심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정리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실망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실망은 큰 성공 뒤에 아주 사소한 것으로 인해 야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으로 성도 여러분, 언제든지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고 그로 인해 실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실패를 받아드리세요. 그리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성도가 실패 앞에서 실망하고 낙담하여 영원히 넘어져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백성을 다시 일으켜 세우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나를 실망시키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저주하지 마세요. 그 일에 너무 연연하지 마세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아뢰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사랑하는 춘천중앙 교회 성도 여러분, 마라와 같은 실망과 좌절의 쓴 물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엘림의 풍요로움을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인생의 목적을 이루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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