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는 참 애매하게 끝나는 성경입니다. 끝절, 4장 11절을 보세요.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죄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
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끝이 납니다. 답이 없습니다.
결론이 없습니다.
'요나가 듣고 크게 깨달았더라' 하는 말이 들어가야 온전하게 끝나는 것 같은데
그런 말이 없습니다. 질문으로 끝납니다. 미완성교향곡 같습니다.
신구약성경 예순여섯 권 가운데 이렇게 끝이 나는 성경은 요나서 하나뿐입니
다.
이렇게 끝나는데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요나서가 의문형으로 끝나는 것은 '네가 대답해라!'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
다. 하나님은 수천 년 전에 요나에게 질문하면서 동시에 오늘 우리 모두의 하
나 하나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니느웨도 아꼈다. 유 목사야, 아무개 장로야, 아무개 권사야, 아무개 집사
야, 아무개 성도야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대답해 보아라'
요나서의 끝부분은 이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니느웨도 아끼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첫째, 하나님이 니느웨를 아끼셨다는 사실에서 많은 교훈을 얻어야합니다.
니느웨는 앗수르 제국의 마지막 수도입니다. 아주 중요한 고대 도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매우 오래된 도시입니다. 니느웨라는 이름은 창세기 10장에 벌써 나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서울인데 앗수르라는 이름은 창세기 2장에 벌써 나옵니다.
창세기 2장 14절에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만으로는 니느웨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기원전 6,7 세기에 니느웨라고 하면 침략을 일삼는 세력의 중심지였습니다. 앗
수르 사람들은 '앗수르'라는 수호신을 극도로 숭배했는데 앗수르신은 전쟁신,
군신(軍神)이었습니다.
이 앗수르는 유다와 이스라엘도 자주 침공했고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
니느웨가 어떤 곳인가 이해하려면 지혜로운 비유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
의 모스크바 같은 곳이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은 모스크바가 관광 대상지 가운데 하나이지만 1986년에 시작된 페레스트
로이카 이전에는 모스크바라고 하면 한마디로 해서 무시무시한 곳이었습니다.
붉은털복숭이들이 살고 있고 비밀경찰인 KGB가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
시하는 곳으로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의 중심은 크렘린 궁전인데 크렘
린이라고 하면 세계를 적화시키는 음모가 꾸며지는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올해가 영화 007 시리즈가 나온 지 40년이 되는 해라고 하는데 그 영화도 초기
에는 007이 소련의 정보조직들과 싸우는 내용이었습니다. 국내에 들어온 첫
번째 007 영화제목이 '애인과 함께 소련에서 오다'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오늘 아시안게임이 개막되는데 선수촌 안에 기독교관이 마련되어 여러 가지 선
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86 아시안게임과 88서울 올림픽 때 제가 선수촌 기독
교관 채플린의 한 사람으로 일했는데 88때 선수촌에서 CCCP라고 쓰인 유니폼
을 입은 선수들을 보면(그때는 소연방공화국 시절이었습니다) 일단 흠칫 놀랐
습니다. 그 다음에 '아, 이래서는 안되지' 했습니다. 그 때는 정말 그랬습니다.
선수촌 기독교관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아시안 게임에 온 북한선수들이나 임원
들이 기독교관에 오는 일이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86 아시안게임 때 중반 이후에 중국 선수들이 하나 둘씩 기독교관에 온 일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영화 보러 온다고 했습니다. 정확하게는 영화가 아니고
멀티 슬라이드 프로젠테이션이라고 슬라이드 여러 대를 가지고 동시에 상영했
는데 그것 보러 온다고 서로 눈치보며 쭈볏 쭈볏 하면서 오다가 하다가 나중에
는 슬며시 예배에도 참석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설교를 담당한 목사님이 안
오셔서 제가 땜질로 설교했는데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이번에는 북한선수나 임원들에게 그런 일이 있기를 바라면서 기도를 드립니다.
니느웨에는 악한 일이 많은 곳입니다. 얼마나 악한 곳인지는 나훔서를 보면 잘
압니다.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를 '피의 성'이라고 했습니다(나 3:1).
하나님도 니느웨를 악독한 성읍이라고 하셨습니다. 요나서 1장 2절을 보면 하
나님은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
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니니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니느웨를 아끼셨습니다.
그 니느웨를 아끼셔서 니느웨를 구원하시려고 요나를 파송했습니다.
요나가 도망을 치려고 하자 여러 가지 복잡한 과정을 거쳐 다시 파송했습니다.
니느웨에 회개운동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
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께 부
르짖으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4:11) 말씀하셨습니다. '나
는 니느웨를 아낀다' 고 분명하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니느웨를 아끼셨다는 것은 하나님은 정말 땅끝까지를 사랑하시는 분
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도저히 없어 보이는 사람과 민족과 나라까지 구원
하려고 애쓰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니느웨를 아끼신 하나님은 수지도 아끼십니다. 수지를 니느웨보다 더 아끼십니
다.
니느웨를 아끼신 하나님은 분당도 아끼십니다. 분당을 니느웨보다 더 아끼십니
다.
하나님은 서울을 더 아끼셔서 서울이 십자가가 아주 많은 도시가 되게 하셨습
니다.
저는 한 번 도시별 십자가 밀도를 계산해 보고 싶습니다. 인구밀도를 계산하듯
십자가 밀도를 계산하면 서울이 세계에서 십자가 밀도가 제일 높은 도시가 될
것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모스크바도 아끼셔서 모스크바에도 선교사들이 들어가고 교회들이 세
워지고 신학교들도 세워졌습니다.
니느웨를 아끼신 하나님은 북경도 아끼시고 바그다드나 카이로 같은 회교권 국
가의 도시들도 아끼신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저 사람은 참 밉다' 여겨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아끼신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저 사람은 틀림없이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저 사람은 지옥이 예약되어 있을
것이다' 한 걸음 나가서 '그랬으면 좋겠다' 여겨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을 아끼신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더 아끼십
니다.
11절을 보세요. 하나님은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
는 자가 십이만 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좌우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선악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선악도
구분하지 못하니 그런 사람들에게 신경 쓸 필요 없다' 하시지 않고 그렇기 때
문에 더 아낀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직 구원의 도리를 모르는 사회주의권의 주민들, 회교권의 주민들을
더 아끼시며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니느웨를 아끼셨다는 것은 한 마디로 해서 우리의 전도대상이 아닌
사람과 전도대상이 아닌 지역과 전도대상이 아닌 민족과 전도대상이 아닌 나라
는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아야합니다.
둘째, 우리는 요나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합니다.
요나는 허물이 많은 예언자입니다.
고기뱃속에서 회개하고 나와서 니느웨로 가기는 했지만 요나라고 하면 지금까
지도 그렇게 좋은 예로 쓰이지 않고 있습니다.
사명을 피해 도망가려고 했던 선지자, 속 좁은 민족주의자, 편협한 선민사상을
가진 사람, 이런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를 아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
가서 하나님이 니느웨를 아끼고 구원하려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다시스
로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거부
하거나 짜증을 내거나 피하는 것은 신앙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에 들어가서 '회개하고 구원 받으십시오'하는 전도의 메시지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멸망을 예고한 것입니다. 이것은 요나서에 나오는 유일한 메시지
입니다. 나머지는 요나의 행동에 대한 기록입니다.
3장 3절과 4절을 보면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큰 성이었는데 요나는 하
루 동안 다니며 외쳤다고 했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느웨
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를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3분의 1만 전도했습니다. 성실한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느 지역이나 아파트 단지를 대상으로 전도할 때 1/3 정도, 또는 반 정
도, 여하튼 다 하지 않고 남겨두는 것은 요나식의 엉성한 전도입니다.
요나는 사실은 니느웨가 무너지기 바랐습니다. 하나님이 니느웨 성에 재앙을
내리지 않자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하나님께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옵소서" 시위를 합니다.
'아마도 무너질 것이다' 하는 기대를 품고 초막을 짓고 지켜봅니다.
우리에게 이런 모습이 없습니까?
'저 사람은 구원받지 말았으면 좋겠다. 저 사람은 지옥에 가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고생 좀 했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저 사람을 왜 빨리 심판하지 않으
시나?' 하는 마음은 없습니까?
혹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옥
가기 원하는 그 사람을 당신보다 더 아끼십니다.
가나안 농군학교 설립자인 김용기(金容基) 장로님이 평생 드린 기도가 있습니
다. '김일성이 장로 되고 김정일이 목사 되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였습니다. 많
은 사람들이 싫어하고 저주하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김용기 장로님의 두 가지 기원 가운데 하나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는 이
루어질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요즘 북한의 놀라운 변화를 보게 됩니다. 저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긍정하거나
낙관적으로 보지 않지만 그래도 '김정일이 정말 제2의 고르비가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은 하게됩니다.
고르비는 고르바쵸프의 애칭입니다.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소련을 개방시킨
장본인이죠.
김정일이 '제2의 고르비' 소리를 들으려면 고르비가 한 좋은 일 가운데 제일 좋
은 일이 신앙의 자유를 주고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김정일이 제2의 등소평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갖게 됩니다. 중국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이 몇 있는데 진시황과 모택동과 등소평이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 등소평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쨌든지 간에 13억 중국 인구가 먹고살
길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북한 사람들의 식량문제, 정말 빨리 해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4장 2절에 요나의 기도가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
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
와여 이제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
게 나음이니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 저 보기 싫은 니느웨 성, 왜 멸망시
키지 않는 것입니까? 내가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라고 했는데
무너지지 않으니 내 체면이 뭐가 되는 것입니까?' 하는 내용입니다.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성서에 기록된 비성서적인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사람보다 박넝쿨을 더 아꼈습니다. 여기 박넝쿨이라고 한 것은 아주까
리인 것 같은데 벌레가 그 박넝쿨을 갉아먹어 그늘이 없어지자 죽겠다고 야단
을 쳤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보다 물질을 더 귀중하게 여기는 사례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
습니다.
하나님이 니느웨를 아낀다는 것은 니느웨의 주민들을 아낀다는 뜻입니다.
니느웨의 건물들을 아낀다는 뜻이 아닙니다.
니느웨는 오래된 도시입니다. 노아의 증손인 니므롯이 건설한 도시입니다. 창세
기 10장은 노아의 족보인데 노아의 둘째 이들이 함이고 함의 첫째 아들이 구
스입니다.
창세기 10장 8절에서 12절까지를 보면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
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
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
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니느웨에는 귀중한 유물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유
물들 때문에 니느웨를 아낀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거기 있는 생명들을 아꼈습니다.
3장 3절에 니느웨는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라는 히브리어 '이르 게들라 레 엘로힘'은 '하나님의 중요한 성읍'이라
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중요한 성읍'이라는 것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
들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요나 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계 만민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천하만민이 구원 받기를 원해야합니다.
성실하게 일해야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물질보다 사람이 더욱 귀한 줄을 알아야합니다.
셋째, 우리는 무엇보다도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여기에서 전도하고 하는 것은 타문화권 선교와 가까운 곳 전도를 모두 말합니
다.
우리는 타문화권 선교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오늘날의 니느웨는 북방지역이라
고 할 수 있고 회교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서 중점적으로 관심을 끄는 성경들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사회정의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실천을 강조한 야고보서가 교과서처럼 여겨졌습니다.
70년대 8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이 제일 좋아 한 성경은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
의 예언이 수록된 아모스서였습니다. 아모스서 5장 24절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는 말은 그 당시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었습니다.
세계화되고 이데올로기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는 지금은 요나서를 중요하게 여
기고 새롭게 읽어야 할 때입니다.
소돔 성을 위해 아브라함이 드린 기도를 우리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계획을 알려주고
소돔으로 떠나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18장 21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라고 기록되어 있
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그 곳을 멸하시겠습니까?'
의인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지요. 사십오 명, 사십 명, 삼십 명, 이십 명, 십 명,
무려 여섯 번이나 숫 를 줄이면서 간구합니다.
아브라함이 만일 조카 롯만 살리기 위해 기도했다면 '하나님, 어떻게 해도 좋사
오나(또는'하나님 어떻게 해도 나와 상관 없사오나') 내 조카 롯만은 살려주옵
소서'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소돔의 주민들을 위해 간절히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니느웨를 아끼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우리가 사는 곳들을 위해,
큰 도시들을 위해, 특히 방탕한 도시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끼시는 사람들, 수지 사람
들, 분당 사람들, 수도권 사람들, 강남 사람들, 한국 사람, 북한 주민, 중국 13억
인구, 구 소련지역 주민들, 우리도 아껴야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아끼시는 사람들을 아끼지 않는 것은 모순
입니다.
오늘 우리는 전도 나가는데 이것은 '하나님, 하나님이 아끼시는 사람들을 저도
아낍니다'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일입니다.
요나서 4장에는 '예비'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4장에는 세 가지를 예비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6절을 보면 박넝쿨을 예비하셨습니다.
7절을 보면 벌레를 예비하셨습니다.
8절을 보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습니다.
요나서 전체에 하나님의 예비를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1장 17절에는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폭풍도 요나를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비'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입니다.
노아를 위해서는 방주를 예비하게 하셨습니다.
이브라함을 위해서는 이삭을 예비하셨습니다.
이제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쳐질 이삭을 위해서는 숫양을 예비하셨습니다.
7년 대 흉년을 앞에 두고 있는 애굽 주민들을 위해서는 요셉을 예비하셨습니
다.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는 모세를 예비하셨고
모세의 뒤를 이을 여호수아도 예비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요나를 깨우치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이 여러 가지를 예비해
두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날 때 '아,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하신 일이로구
나' '아, 이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하신 분이로구나!' 알아야합니다.
어떤 성도가 이 곳으로 이사와서 저희 교회에 출석하면서 '하나님이 저를 위해
서 이 교회를
예비해 놓으신 것 같습니다' 하기에 '맞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중요한 것, 나도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예비한
존재들 가운데 하나임을 알아야합니다.
니느웨를 아끼신 하나님이 수지를 복음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아끼시는 수지
주민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분당을 위해, 수도권을 위해, 한국을 위해, 북한을 위
해, 북방지역을 위해, 세계를 위해 나를 예비하시고 목양교회를 예비하신 것을
알아야합니다.
예비 된 것은 때가 되면 예비 된 목적을 위해 쓰여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것은 용도폐기 됩니다. 쓰레기통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 폐기물은 재활용하기도
어렵습니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예비된 목적으로 쓰여야 할 때입니다. 전도에 힘쓸 때입니
다.
'나는 니느웨도 아꼈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은 오늘 요'나'에게 바로
나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는 전도대상이 아닌 사람이나 지역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네 하나님, 내가 미워하는 사람부터 전도하겠습니다.'
'네 하나님, 1/3만 전도하지 않고 성실하게 전도하겠습니다'
'네 하나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도록,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을 얻도록
기도하겠습니다.'
'네 하나님, 나는 전도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
닫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대답했으면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그렇게 사는 첫 출발로 가까운 곳부터 전도를 열심히 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