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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산 제사
    2002-10-16 09:51:32   read : 5267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년 9월 29일 // 히브리서 13 : 15-16

    히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히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파이프 오르간이 장엄하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한 소년이 진지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졌고 초롱초롱한 두 눈은 십자가에 달려 고통 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윽고 조그만 입술이 움직입니다.

    "사랑의 주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저에게 음악적 재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재능을 통해서 저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을 더욱 더욱 찬양합니다."

    그의 기도덕분인지 그는 음악가로서 점차 유명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교제하기를 원했습니다. 각지에서 몰려온 재능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사사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이제 비엔나의 사교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성공한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태리 오페라는 왕을 비롯해서 모든 귀족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만만하였습니다. 음악에 관한 한 누구도 그를 따라올 자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사실 시골에서 올라온 한 청년이 비엔나에서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는 그의 명성은 영원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풋내기 시골 청년 하나가 이제껏 쌓아올렸던 그의 명성을 우습게 만들었습니다.

    그 청년은 무례했고 비도덕적이었으며 유치한 말과 행동을 거리낌없이 해댔습니다. 지위의 고하나 장소의 분위기에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교만하기 이를 데 없고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천재적이었습니다. 누구도 그를 무시할 수 없는 재능과 기술이 있었고 보통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음악적 감각과 풍부한 악상이 있었습니다.

    인기 정상에 있던 이 살리에르는 짤즈부르크라는 시골에서 올라온 천재적 음악가 모짜르트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인해서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런 무례하고 비도덕적인 인간에게 그토록 귀한 음악적 재능을 많이 주셨습니까? 저는 저 청년처럼 그렇게 나쁜 말을 하지도 않고 또 나쁜 장소에도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더욱 많은 재능을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

    그의 기도는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모짜르트의 등장으로 살리에르의 음악은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우습게 되어 버렸습니다. 살리에르 자신도 모짜르트의 악보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천재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평은 분노로 바뀌었고 마침내 그는 서재에 걸어 놓았던 십자가를 떼어 벽난로의 불꽃 속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그는 그의 원수인 모짜르트를 죽이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모짜르트의 성격과 그의 어려운 환경을 교묘히 이용하여 모짜르트로 하여금 과로하게 하고 그 과로로 죽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동료음악가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데 성공한 살리에르는 마침내 자신의 인격도 파괴되어 정신병동에서 비참한 죽음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합니다.

    이 스토리는 그 유명한 영화 아마데우스의 줄거리입니다.
    살리에르 (1750-1825), 그는 당시 비엔나에서 유명한 오페라 작곡가였다고 합니다. 베토벤에게 사사를 받기도 할 정도로 실력 있는 음악가였습니다. 그의 명성은 잘쯔부르크 촌에서 올라온 모짜르트에 의하여 충분히 손상을 받았습니다.

    당대 그 유명한 음악가가 왜 이렇게 비극으로 끝났을까? 하나님은 왜 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듯 보이실까요? 살리에르의 근본적인 문제는 과연 그 자신만의 문제였을까요?

    예배의 주체와 객체가 바꾸어진 비극

    살리에리의 비극은 자기 자신의 세속적 욕망과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자기의 재능을 더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자 하는 세속적 욕망이 그의 마음 가운데 숨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지만 혹시 우리 속에 이런 살리에르식의 믿음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통하여 나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자하는 숨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주체와 객체가 완전히 바뀌어진 비극이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설교자인 저에게 오는 유혹이 있습니다. 과연 오늘 아침 내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성도들은 은혜를 받았을까? 감동을 받았을까? 하면서 성도들의 얼굴 표정을 자꾸 확인하려는 태도입니다. 그것은 설교자이기 이전에 예배 자여야 함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혹시 대표 기도하는 분들이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보다도, 앞에 나와서 찬양하는 성가대원들이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보다도 여기 앉아 있는 성도들을 더 의식하며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하였다면 그것이 바로 살리에르식의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여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찾으시는 분은 설교 잘하는 목사를 찾지 않습니다. 기도를 유창하게 잘하는 성도, 맑고 화려한 음색을 가지고 찬양을 잘하는 가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우리는 먼저 예배 자여야 합니다. 나 자신을 감추고 오직 왕이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왕이신 하나님께 부복하고, 왕이신 하나님께만 영광돌리고 하나님만 높여 드리고 하나님만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이름만 존귀이 하는 예배 자여야 합니다.

    어떤 유명한 음악가가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여화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는 찬송가 대곡을 화려한 음색을 가지고 노래했습니다. 청중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찬양의 동기가 혹시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만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음악성과 음악적 재질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찬양은 연주는 될 수 있어도 찬양은 아닙니다. 찬송가를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다 찬송이 아닙니다.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당 안에 와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해서 그 행위가 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드리는 찬양,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드리는 기도, 그들의 예배만이 진정한 찬양이요, 기도요, 예배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23절을 보시면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예배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

    그러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 자는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 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영이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말씀합니다. 시편115편 17-18절을 보시면 "죽은 자는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그랬습니다.

    죽은 자는 찬양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사람,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습니다. 그가 기가 막힌 대곡을 불렀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았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을 지라도 영이 죽은 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자, 그 속에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비록 찬송가를 부르고 복음성가를 부르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찬양이 아니라 하나의 노래요,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는 연주일 뿐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누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을까요? 살아 있는 사람,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시편150:6절에 말씀하십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호흡이 있는 사람은 산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사람, 하나님의 백성, 그래서 참된 예배자만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은 생명이 있는 곳에만 장엄하고 웅장하게 울려 퍼집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는 찬양이 없습니다. 무서운 심판과 저주가 있는 곳에는 찬양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참된 예배의 실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상에 진행되는 무서운 심판과는 달리 하늘나라에서는 밤낮 쉬지 않고 찬송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찬송소리는 보좌 주위의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의 찬송소리요, 땅에서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의 찬송소리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고난과 박해의 파도가 높았던 그 상황에서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카타꼼이라는 지하 묘지 동굴에서 사랑하는 성도의 죽은 유골을 옆에 두고 그들은 간절히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곧 죽음이 닥쳐오고 무서운 핍박이 다가오는 줄을 알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높이높이 찬양했습니다. 거기에는 무슨 악기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악보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겁게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영이 살았고, 그들은 죽음도 핍박도 환경도 초월하는 살아 있는 성도, 생명 있는 성도였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리가 복음을 증거 하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얼마후면 그들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속에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까? 간수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습니까? 죽지 않고 살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영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대서양을 요한 웨슬레를 실고 오던 배가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배는 넘어질듯, 넘어질듯 좌우로 크게 흔들립니다. 그런데 갑판 위에 몇 몇의 사람들은 전혀 요동하지 않고 절대적 평안을 가지고 찬송을 하고 시편을 외우고 주님의 은혜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핍박받는 성도들이 하늘의 영구한 성을 바라보며 죽음과 고난과 핍박의 상황 속에서 일 성으로 힘썼던 일은 찬미의 제사를 올려드렸던 것입니다.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히13:15)

    구원받은 자, 하나님의 사람, 즉 산 자만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 성공의 제일 요인-살아 있는 예배자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 예배가 성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성공이 여러분의 모든 인생의 성공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임재 하시고, 예배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치유하시고, 예배를 통해서 하늘의 능력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으로 축복을 받았던 아브라함과 겨우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원을 받았던 롯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는 예배 자였습니다. 잠시 실수도 했습니다. 잠시 하나님의 마음을 실망하게도 하였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잠시 조금해서 하갈 사이에 이스마엘을 낳는 실수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복을 받고 복의 근원이 되어 수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고 세계만민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예배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배 자, 예배에 대한 철저한 훈련이 없었다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그 명령을 어떻게 순종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롯을 보십시오. 성경 어디에도 그가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는 예배자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풍성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승리하시는 삶이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예배에 성공하십시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예배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예배에 성공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예배의 형식을 바꾸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형식에서 탈피하고 열린 예배 형식으로 드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에 필요한 도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드럼도 있어야 하고, 신디도 있어야 하고, 프로젝트도 있어야 하고, 영상물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프로그램을 바꾸고 음악을 현대적인 음악으로 바꾸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러한 주장들이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요소들이 예배의 성공의 결정적 요인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될 때, 여러분의 모든 삶의 영역 속에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고, 주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정말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내 속에 있는 교만함을 다 토해내고 주님 앞에 진정으로 무릎을 꿇는 사람이 될 때 여러분들이 드리는 모든 예배는 그것이 주일 낮 예배이든, 저녁 예배이든, 삼일 예배이든, 금요일 순 예배이든, 새벽예배이든 그 모든 예배는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 자 그는 생명이신 주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산 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항상 주님의 임재 속에 살며 구원받은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7장37-38절을 보시면 한 예배자의 감동적인 예배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죄인인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붓는 모습입니다.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은 창기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의 감격으로 나와서 지금 예수님께 나와 감동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여인의 예배 속에는 감격이 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사랑의 거룩한 충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감격하고 감사해서 소중한 예물을 준비해서 예수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이 여인의 예배 속에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있습니다. 죄사함받은 감동의 눈물, 새 사람된 감동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의 예배 속에는 몰입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몰입니다. 이 여인의 사람들의 비난이나 분노나 조롱을 초월해서 온전히 예수님께 몰입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예배, 감동이 있는 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몰입하는 예배입니다. 예수님 안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는 예배입니다.

    이 여인의 예배 속에는 거룩한 입맞춤이 있었습니다. 예배는 입맞춤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자신의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여인의 예배 속에는 씻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을 머리털로 씻었습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머리털은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머리털을 드린다는 것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이 여인의 예배 속에는 경배가 있었습니다.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 위해서는 엎드려야 합니다. 이 여인은 엎드려 예수님께 경배하고 있습니다. 말없이 온 몸으로 예배하고 있습니다. 침묵으로 예배하고 있고 온몸으로 예배하며, 눈물로 예배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감격과 눈물과 몰입과 입맞춤과 씻음과 경배가 있는 예배가 살아 있는 예배,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1:14절을 보시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진정한 예배의 성공은 우리를 초월하여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만남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곧 삶의 놀라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예배를 드렸는데 변화가 없다. 그것은 성공한 예배가 아닙니다.

    변화를 가져오는 예배

    저는 여러분들이 예배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만남으로 얻는 것은 삶의 변화입니다. 미움이 사랑이 되는 변화, 분노가 용서가 되고, 절망이 소망이 되고, 어둠이 빛이 되고, 슬픔이 기쁨이 되고, 원망이 감사가 되는 구체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누가복음 7장에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 여인은 가장 슬픈 여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을 만남으로 그는 가장 기쁜 여인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밤이 무서웠습니다. 사람들이 무서웠습니다. 애정이 없고, 사랑이 없이 자신을 욕정에 사로잡힌 남성들에게 재물로 내어주는 일은 차라리 지옥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 하였습니다. 그렇게 조롱하고 비웃던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이고 측은하게 보입니다. 옛날의 자기 같은 사람들을 보면 돕고 싶고 사랑하고 싶습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예배당 안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예배가 아닙니다. 이 예배의 현장을 통해서 받은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이제는 성밖으로 나가서 주님의 은혜를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배가 우리의 삶이 되고, 삶이 우리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예배가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리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 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는 죽은 예배가 아니라 산 예배입니다. 의식과 형식을 따라 철저하게 예배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내 심령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뜨거운 주님의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예배입니다. 우리는 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무엇이 산 예배이겠습니까?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내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예배입니다.

    시험 보는 학생이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표현은 무엇입니까? 컨닝하지 않고 정직하게 보는 것입니다. 감독이 있던 없던 보이지 않지만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보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먼저 정직하게 서는 것입니다.
    근로자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일할 때 사장이 보든 보지 않든지 간에 정직하게 일하고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기업가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실하게 땀흘려 일하고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근로자들을 가족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어느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장님이 교회 안에서는 장로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교회 안에서 믿음이 좋으신 분으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노회 에서도 언론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가 경영하는 회사에서는 악평이 나있습니다. 내가 만약 종교를 선택하라면 기독교는 절대로 선택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은 분인데 왜 그는 그의 회사의 직원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할까? 아니 오히려 복음에 장애물이 되었을까? 예배당안과 그의 회사의 삶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분이 회사원들에게 믿음을 심어준다고 해서 매일 아침마다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 만약 예배에 불참하면 불이익을 받게 합니다. 겉으로 볼 때는 그 분이 얼마나 믿음이 좋은 분이십니까? 전 회사원들 예배를 드리게 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예배드리는 그 시간은 근무외 시간으로 인정하고 월급에서 제외시킵니다. 예배는 드리도록 하는데 그 예배 시간을 통해서 사원들을 책망하고, 극단적이고 편파적인 설교를 합니다. 사원들의 임금을 착취하고, 과도한 노동을 하게 하고 이윤이 남으면 근로자들에게도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주인 사장이 다 차지합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데모를 하면 경찰을 동원해서 사정없이 근로자들을 억압하고 가두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지난 군사정권 시절에 있었습니다.

    믿음을 강조한다고 해서, 교회 안에서 의식적인 예배를 많이 드렸다고 해서, 성경지식을 많이 안다고 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산 제사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선을 행하고 이웃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우리가 얼마나 이웃과 더불어 살며, 관계 적 존재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 자인가가 아닌가가 결정됩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은 해발 8848미터의 에베레스트 산이고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산악인 허영호 씨가 1987년 12월 22일 최초로 등정에 성공하였습니다. 그가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한 뒤에 쓴 글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가 8700미터 지점에 도달하였을 때입니다. 아직은 148미터-전 구간이 깍아지른 얼음절벽이고 보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더 소요될 것인지, 과연 살아서 정상정복에 성공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마침 이 8700미터 돌출 지점은 휴식을 취하기 안성맞춤이었습니다. 함께 휴식을 취하던 세르파(짐을 나르는 인부) 앙리타가 느닷없이 말합니다.
    "공연이 목숨을 걸고 정상까지 올라갈 필요없이 그냥 여기에서 사진만찍고 내려가자"고 말합니다. 돌출된 그 지점에서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에베레스트 정상에 있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정상에 등정한 것인양 내려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허영호는 세르파의 달콤한 말을 듣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목숨을 걸고 148미터를 몇 시간을 걸쳐서 오르고 마침내 정상 등정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크리스쳔이었는지 아닌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만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 그 상황에서 얼마나 정직하였습니까? 우리가 돈 만원에 대해서 정직할 수 있습니다. 백 만원에 대해서 정직하기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목숨을 담보로 정직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대개는 목숨을 얻기 위해서 정직을 버리고 타협을 합니다. 그러나 허영호는 목숨이 위태한 그 상황에서 정직하였습니다.

    하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목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도 보이는 사람이 없지만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주신 축복을 가지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사와 능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간절히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로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정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산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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