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건강 문제로 병원에 출입하는 동안 몇 가지 삶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혈압으로 인해 많은 불편함을 겪으면서 들은 의사 선생님의 공통된 말씀은 마
음의 평안과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서 적당한 운동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말씀
이었습니다.
마음의 평안!
그것은 일상의 생활에서 무엇보다 귀한 삶의 근간이면서 축복된 생활의 출발
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안이 사람의 생각대로 되는 것
이 아님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느끼고 경험하기도 합니다.
종종 목사로서 자괴지심에 얼굴을 들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목회를 하면
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이래저래 견딜 수 없는 화가 나는 일들을 당하면서
그 순간의 마음 자리를 잘 다듬지 못해서 실언을 하기도 하고 실수를 하기도 한
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답을 주시는 말씀
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도중에 광풍을 만나자 제자들
이 두려움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예수님이 광풍을 꾸짖으시므로 잔잔하게
된 사건입니다.
이 본문이 주는 교훈은 먼저 신학적으로 두 가지로 조명합니다.
한 가지는 말씀 한 마디로 폭풍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의 권능이며, 다른 한
가지는 제자들을 두려움과 공포로 몰아 넣었던 광풍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주해의 초점은 첫째는 자연계를 섭리하시
는 예수님의 권능과 둘째는 어떤 풍랑의 상황에서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결론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은 주무시지 않는,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에 주님이 깨어 계시면 어떤 삶의 풍랑도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삶과 신앙의 풍랑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여정에 풍랑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생활을 하
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는 불신자나 차이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36~37절 말씀을 보면 그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
라.”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운행하고 있었는데 광풍이 일어났다
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는 언제나 광풍이 일어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풍랑을 만났고, 사도행전 27장에
서는 선장이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면서 항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식의 반란을 통한 풍랑을 만나기도 했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
벳느고는 믿음을 지키다가 칠 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에 들어가야 하는 환난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37절의 상황을 교회나 개인의 삶과 신앙의 위기로 적용해
보면 더욱 이해가 쉽습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 목사는 행복하게 목회를 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이
상한 기류가 흐르면서 교회가 둘로 나뉘어지고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고 목
사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신실한 성도들의 가정에서도 기업이 성공적으로 경영되어 정부로부터 표창도
받고 주위에서도 모범기업이라 칭찬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부도의 광풍을 만나
게 되어 파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모범적으로 잘 하던 사람이,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 받으면서 공직
생활을 하던 사람이, 주위 사람들에게 가장 행복한 가정이라고 칭송 받던 가정
이 어느 날 갑자기 풍랑을 만나게 되어 그 삶이 파선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상황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삶의 풍랑입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경험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하나의 과정입니다. 다만 그 환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의 차이가 있
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에 이 같은 광풍이 일어나고, 개인의 삶과 신앙생활에 이 같
은 광풍이 불어닥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가 문제 해결의 답이 되는 것입니
다.
영적 119를 호출하라.
일상생활의 위기를 만날 때 요즈음은 남녀노소 무론 하고 119에 전화를 합니
다. 그 내용은 정말 천태만상입니다.
중앙 119 구조대의 기능은 “전문인력과 첨단장비를 운용하여 대형재난현장의
지휘 및 조정, 통제, 재난현장 조기수습을 목적으로 하며, 국외 사고현장 자국
민 사상자 발생시 국가차원의 인명구조에 투입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비행기 추락사고 현장, 아파트 붕괴사고 현장, 산불진화 현장, 각종 산악사
고, 긴급환자 이송, 전국 각종 교통사고 현장에서 119 구조대원의 감동적인 활동
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엊그제만 해도 충남 천안시 신당동 장모(57)씨가 집 처마 밑에 매달린 말벌 집
을 없애 달라며 119에 신고해서 해결한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었는데 그렇게 작
고 큰 사건 사고의 현장에는 항상 119 구조대가 있었습니다.
즉 환난과 재난의 위기 시에는 119를 부르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것입니
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위기에서는 어디에 긴급전화를
하는 것입니까? 즉 영적 119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상황처럼 개인과 교회에 불어닥친 광풍의 재난 시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은 영적으로 재난을 당할 때 긴급하게 호출해야 할 영적 119에 대해서 이
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모스 5: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
라.”
시편 50:15절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편 18:2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
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
로다.”
시편 59:16절입니다.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그렇습니다. 환난 날에는 주님을 불러야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38절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
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다시 말씀드리면 환난을 당할 때 주님을 깨우는 것이 살 길임을 나타낸 생명
의 메시지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개인도 마치 광풍처럼 밀어닥친 환난을 당할 때 주님을 깨우려
하기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풍랑을 잠잠케 하려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의 인터넷 목양 칼럼에서 읽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고
자 합니다.
서울의 한 교회에 목회를 잘하시는 목사님이 계시는데 이분은 청년 때에 망나
니 생활을 하였는데 어머니의 눈물어린 기도로 아들은 변화를 받아 눈물로 회개
하고 신학교를 마치고 시골교회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목사님이 전도사 시절 안타깝게도 청년시절의 잘못된 모든 것을 정리하면서
도 담배만은 끊을 수 없었습니다.
사택이 예배당과 함께 있었고 화장실도 함께 사용하게 되는데 어느 날 새벽기
도 한 시간 전쯤에 일찍이 일어나 화장실에서 습관처럼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마침 그 교회의 한 분뿐인 장로님이 다른 날보다 일찍이 교회 오셨습니다.
전도사님은 이런 시간에 누가 오랴 생각하고는 문을 잠그는 것을 잊었고 장로
님은 무심코 이런 시간에 누가 화장실에 있으랴 하고 문을 열었는데 그만 그 장
로님은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보았습니다. 장로님은 말없이 문을 닫고 교회당 안
으로 들어갔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이 되어도 전도사님이 나오실 줄 몰랐습니다. 그 다음날이 되어
도 그리고 주일이 되어도 전도사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온 교회는 전도사님을 찾느라 난리가 났지만 장로님은 말없이 대신 예배를 인
도하시며 교우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장로님에게 전도사님의 전화가 왔습니다.
“장로님 저 사임하겠습니다. 저는 자격이 없는 전도사입니다.”
내용인즉 사건이 있던 그 날로 기도원에 들어와서 담배를 끊게 해달라고 기도
하고 있지만 여태 끊지 못하고 못 참아서 조금 전에도 한 대 피웠다고 고백하면
서 백천 번 생각해도 자신은 전도사 자격이 없다면서 사임을 청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 장로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렇습니다.
“ 전도사님, 교인들 아무도 모릅니다. 전도사님! 담배끊기가 힘들면 피우세
요. 교인들의 소리는 제가 막아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이 청년 전도사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렇게도 끊을 수 없었던 꿀맛 같은 담배가 그만 역겨워지며 냄새조차도 싫
어져 버렸습니다.
그 장로님의 사랑의 목소리에 그만 녹아 버린 것입니다.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
킨 것입니다.
그 후 그 전도사님은 그 교회에서 신학교를 다 마치고 목사가 되었고 이제는
서울에서 목회 하시면서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칼럼 뒷 부분에는 그 아름다운 이야기의 반대 이야기, 곧 교회에 환난
이 닥치게 되었을 때 주님을 깨우려 하지 않고 사람의 방법을 사용하다가 교회
가 몰락한 이야기를 싣고 있었습니다.
한편의 칼럼을 읽으면서 많은 깨달음을 받았습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삶의 풍랑과 신앙의 광풍을 만날 때 우리는 주님을 깨워
야 합니다. 그것이 평안을 누리는 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
39절입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
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여기의 ‘잠잠하라’(Σιώπα, 시오파)는 문자적으로는 ‘침묵하라’ ‘조용하
라’는 뜻인데 이는 바람을 향한 명령형으로서 “지금 당장 그 부는 것을 그치
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고요하라’(πεφίμωσο, 페피모소)는 “말하지 말라” “재갈을 물리라”
는 뜻인데 풍랑이 이는 바다를 향한 완료 명령형으로서 “더 이상의 활동을 중지
하고 그냥 그 상태로 있으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주 잔잔하여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크나큰 잔잔이 형성되다”라고 원문해석이 가능한데 이는 “언
제 풍랑이 있었느냐는 듯 완전한 평화의 상태가 이루어짐을 시사하는 것”입니
다.
오늘날도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다양한 풍랑이 일어날 때 바로
이 말씀을 깊이 깨달아 주님이 평안케 하는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각양각색 자기 주장을 내세우면서 마치 자기가 환난을 평안케 할 수 있는 능력
자가 된 듯 말이 많고 주장이 강하면 반드시 더욱 환난의 물결이 높아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오직 주님만이 모든 것을 평화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
음을 믿고 주님을 깨우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다양한 풍랑이 일어날 때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주님을 깨
우려 하지 않고 말을 많이 하고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하는 경우 파선되지 않은 경
우가 없는 것을 봅니다.
진정한 평안은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아주 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
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
지도 말라.”
그리고 잠언 4:23절에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
라.”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에서 분명하게 정리할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의 살고 죽는 문제, 나아가 삶의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마음
의 평안에서 시작되며 그 마음의 평안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곧 주님을 믿는 믿음의 마음에서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40절에서 믿음에 관한 권고를 하셨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
찌 믿음이 없느냐.”
즉 믿음이 있으면 두려움도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어떤 환난도 풍랑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의 깊게 새겨 볼 말씀은 “어찌 믿음이 없느냐”인데 마가복음의 여
러 사본 가운데 권위 있는 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에는 ‘아직까지’(οὔπω,
우포)가 첨가해 있는데 공동번역에서는 이에 대하여 ‘아직도’라고 번역하고 있
습니다.
“아직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용어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그렇게 입었으면서도, 모태신앙이라 하면서, 귀한 직분
을 맡은 지도자로서 ‘아직도’ 믿음 없는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봅
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풍랑을 만납니다. 그리할 때 누구나 도움을 요청하
게 되고 도움을 받아 평안하게 되기도 하고 잘못되어 파선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이 풍랑을 만날 때 우리가 도움을 구할 영적 119는 주
님이십니다. 곧 주님을 깨우는 믿음 있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환난 날에 주님을 부르면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주님이
우리의 삶을 평안케 하십니다. 이 은혜가 성도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기
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