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개혁 2002-11-22 10:15:13 read : 5068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열왕기하 23:1-3 // 2002. 10. 27.
1) 왕이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자기에게로 모으고 2) 이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거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무론 노소하고 다 왕과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3) 왕이 대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좇기로 하니라.
이번 주간에는 종교개혁기념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가 베드로 성전건축을 위해 돈을 필요로 했고 이를 위해 성경에도 없는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이에 마틴 루터는 당시의 교회 천주교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의 주장에 따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개신교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천주교회로 하여금 반성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종교개혁일은 개신교의 생일입니다.
우리는 개혁이라는 단어를 서로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무엇인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개혁을 반길 것입니다. 반대로 현재 모습 이대로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개혁을 거부할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은 서로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처럼 사람이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 살펴보면, 서로는 무엇인가 바뀌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면 서로 고쳐져야 할 부분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서 말하는 종교개혁은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든 개인이든 사회이든 사람의 관점에서 보지말고 한 번 입장을 바꾸어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주인되시는 하니님의 입장에서 운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람의 욕심에 의해 움직여졌다면, 교회를 그리고 개인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꾸어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준은 사람의 상황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훈을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적으로 하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시발점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종교개혁은 세상의 개혁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개혁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요시아왕의 종교개혁이 아닙니까? 그는 어떤 결정적인 계기를 맞이하게 되면서 개혁의 깃발을 들게 되었습니다. 그 계기가 무엇이었을까요?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요시아 왕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계명이 적힌 언약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어느 제사장이 헌금방을 정리하다가 은전 속에 파묻혀 있었다가 발견된 책이었습니다. 이전에 요시아 왕도 모르던 글이었습니다. 이전부터 있었지만, 하나님을 멀리하던 왕의 핍박을 피해 성전 헌금방 안에 숨겨져 있던 글로 여겨집니다. 아마도 신명기의 일부로 여겨진다고 학자들은 주장하곤 합니다.
그는 이 책이 과연 하나님의 계명을 담고 있는가 하는 의심도 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을 비롯하여 여선지자 훌다로 하여금 하나님께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그 책이 진정 하나님의 계명을 적은 언약책인지 우선 확인해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책과 하나님의 책이 아닌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권위에 있어 진짜 하늘과 땅 사이의 차이입니다. 요시아 왕은 그 책이 하나님의 계명으로 밝혀지자 그 책에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지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어떤 전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나 우리가 잊고 다른 길로 가던 것을 멈추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것이 개혁입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욕심에 따라 자기도 모르게 끌려가며 살곤 합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뜻과는 아주 멀리 아니 완전히 반대방향에 서 있곤 합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다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맞추어 살아가도록 자기 자리에 돌아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종교개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 읽지를 않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사실 많은 경우 목회자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좀더 들을만한 설교, 좀더 유식해 보이는 설교, 좀더 앞서가는 듯한 설교를 하기 위해 목회자들이 성경보다 다른 책을 더 많이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다가 언제간 금요심야기도회에서 제 스스로 깨달은 적도 있습니다. 저는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우리가 회개하여야 할 점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묻고 이에 대하여 기도합시다 라고 제안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 속에 들려오는 소리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바로 좀더 성경을 읽으라는 소리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그 다음 날 아침 바로 성경을 더 많이 읽었습니다. 그 전에도 읽었던 말씀이지만, 새롭게 느껴지는 감동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죠지 와싱턴도 그의 정치생활의 기준을 바로 성경에 두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하나님과 성경 없이 이 세상을 올바르게 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바르게 하려할 때 그 기준을 바로 성경에 두고 판단하였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결정과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주의깊게 사는 삶 자체가 바로 개혁적인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을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제공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개혁해 나가는 것은 항해할 때 나침반을 꼭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배가 폭풍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현명한 선장이나 항해사라 한다면 나침반을 보며 배를 움직여 나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지도를 보고 배를 움직였기에 가장 가까운 섬 혹은 육지가 어딘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의 영적인 나침반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이를 기준으로 해서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 방향을 잡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각 자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온화한 위로의 말씀이 마음에 다가 올 수도 있고,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따끔한 꾸중의 말이 다가 올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는 사람 그리고 교회가 바로 개혁의 대상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4:12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서 잘못된 영과 혼을 찌르시고 또 잘못된 마음의 생각과 뜻을 쪼아 내시는 능력을 보여 줍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교회는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달은 사람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개혁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골수와 혼과 영을 쪼개기도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내적 마음이 바꾸어 놓습니다. 이것이 바뀌지 아니하고는 외적인 것이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좀더 신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이 바뀌지 아니하면 절대로 겉으로 드러나는 개혁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개혁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동역자 Cooperatio Dei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한 요시아 왕과 백성들은 분명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되었습니다. 왕은 하나님의 언약의 책을 백성들에게 읽어주었고 그들은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그들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들 모두가 당시 종교적으로 잘못된 부분들을 고쳐나가는데,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기를 약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책에 기록된 내용들이 실천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개혁적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는 매일 매일 매 순간 순간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져 있지는 않는가 살펴보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럴 때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동역자 Cooperatio Dei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대구제일교회를 세우신 분들과 최초 교인들은 매우 개혁적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최초 세례교인이었던 서자명씨는 당시 의료선교사 존슨씨의 조수로 있다 세례를 받은 최초의 교인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는 서양귀신을 전한다고 생각할 때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매우 개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한 개혁자로 인해 한국교인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대구제일교회에 교인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매우 보수적이 되었다고 스스로 말하곤 합니다. 지금까지 내려오던 전통이 오늘날 우리로 진정 신앙생활하는데 지장이 된다고 한다면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전통이 시작되었을 때는 매우 개혁적이었는데, 상황이 바뀌어 개혁적인 힘을 잃어버렸는데도 그 전통을 고수하려 한다면 이는 어느새 보수화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보수화 된다는 것은 현재의 상태가 좋아 어느 것도 바꾸지 않으려는 자세를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영성에 있어서는 바뀌어야 할 부분이 없습니다만, 우리의 제도나 체제는 바뀔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바르지 않는 부분들은 바로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언약을 이루어 가야 하는데, 오늘 우리가 바꾸어 나가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개인적인 면에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욕심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번민과 갈등을 계속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는 것이 우리 각 사람에게는 개혁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번 기회를 통해 꼭 개혁하여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이는 재정통합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여러 부서가 재정을 합당하지 않게 운영해 왔습니다. 물론 그 부서가 일부러 잘못된 길을 스스로 걷게 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모든 헌금은 가능한 한 주일예배 시간에 담임목사가 기도하는 봉헌시간을 통해 하나님께 드려지고 그 헌금들 가운데 각 부서에 예정된 계획에 따라 배분되어 사용되고 집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건축을 위한 긴축재정이다 뭐다 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많은 부서의 재정이 동결되곤 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학교의 어린이를 위한 여러 부서들은 운영하기도 힘든 상황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사들이 자신이 속한 부서의 예배시간에 헌금을 드리게 되었고 이를 자체적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드리게 된 동기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몰아간 교회 지도자들이 잘못이 크다는 것입니다. 또한 찬양대에서는 협의되어 초청되어진 인원 이외의 사람들을 위한 많은 찬조금이 걷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공식적으로 많은 종류의 목적헌금이 있습니다. 하지만 십일조를 모든 제직들이 제대로 한다면, 이러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는 이를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큰 줄기를 잡아야 교회가 든든히 설 수 있게 됩니다. 만약 나무가 뿌리에서 한 줄기만 올라간다고 한다면 그 줄기는 더욱 굵어지고 든든해 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나무는 훌륭한 재목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뿌리에서 여러 줄기가 올라간다면 각 줄기는 가늘어질 수밖에 없고 든든히 설 수도 없을 것입니다. 도저히 재목으로 쓸 수 없게 됩니다. 교회를 굵은 줄기로 재목감 나무로 자라게 하는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하나가 올바른 재정사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법칙에 위배된 방법으로 사용된다면 교회는 올바로 자라지 못하고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교회성장학자 Carl George는 metachurch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메타는 헬라어로 변하는 것을 표현하는 접두사로 사용되었습니다. 교회가 변화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영성에 있어서는 변해서는 안되지만, 계속 바뀌는 사회적 체제와 필요충족요구에 적응하고 앞서 나가기 위해서는 교회도 체제면에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못할 때 교회에서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은 점점 더 떠나가게 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개혁을 감당했던 요시아 왕에게는 놀라운 명예가 따랐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킨 사람도 없을 정도라고 하는 놀라운 칭송을 받게 되었고 다윗 왕 이후 가장 훌륭한 왕으로 평가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우리들에게도 그러한 평가가 주어지지 않겠습니까? 그 평가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보다 더 바랄 것이 우리에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때 교회는 건강해 집니다. 아니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적으로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