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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여기 있으니
    2002-11-22 10:11:41   read : 5057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년 10월 20일 // 요한1서 4:9-15

    1912년 1,500여명의 사망자를 내고 북대서양에 가라앉았던 초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의 처녀항해와 비극적인 침몰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 ‘타이타닉’은 신분차이를 극복하고 맺어진 두 남녀의 숨겨진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1990년대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탐사 작업을 벌이던 보물 사냥꾼과 과학자들은 궤짝 속에서 목걸이만 걸치고 있는 누드 그림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뉴스로 보고 알게 된 타이타닉의 생존자 101세 되는 로즈 할머니는 그 그림의 주인공이 자신이라고 밝히면서 80여년 전의 기억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여인은 무려 80년 동안, 단 4일간 사랑을 나누었던 잭에 대한 기억을 간직해 오고 있었습니다. 빙산과의 충돌로 배가 침몰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에 잭은 로즈를 부서진 배의 파편 조각 위에 올려줍니다. 그 잠시 동안 잭은 로즈에게 반드시 살아남을 것을 부탁하고 차디찬 죽음의 바다 속으로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잭과의 그 마지막 대화를 회상하면서 로즈 할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He saved me, in everyway that a person can be saved" 한국말 대사로 ‘그는 내 생명만 구해준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을 구원해 주었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자신 안에, 자신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로즈로 하여금 17살에 만나 단 4일 동안의 나눈 사랑을 101살이 될 때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며 ‘아직도 그는 살아있다’고 이야기 하게 했을까요?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짧은 만남이지만 진실로 사랑했던 사랑은 잊혀지질 않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도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고 떠올리면 여전히 따스함으로 다가오는 것이 바로 진실한 사랑입니다. 어느 때 보다도 우리는 사랑을 많이 말합니다.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와 드라마도 쏟아져 나옵니다. 사랑을 노래한 문학작품도, 대중가요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이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 외로움을 느낄까요? 사랑한다고 말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우리 마음속에 감동을 갖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심지어는 교회 속에서도 우리가 찾는 사랑은 찾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람 싸우는데 구경하던 한 사람이 말리면서 한다는 말이 길에서 왜 싸우느냐고 여기가 무슨 교횐 줄 아느냐고 하는 얘기를 어떤 분이 길 가는 도중에 우연히 들었다고 합니다. 일반인 눈에 비친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라 싸우는 공동체로 비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일화입니다.

    어쩌다 ‘야,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구나.’를 깨닫고 잡으려 하면, 오히려 그 사랑은 상처가 되어서 우리를 아프게 만드는 요인으로 남기도 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해서 방황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오늘 우리는 아닐까요? 그런 우리들을 향해 가슴을 찌르는 한 마디 외침이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사랑은 여기 있으니……. 당신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그런 사랑! 시간이 지나도 상관없이 가슴속에 남아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냉랭하고 험한 세상 살아갈 때에도 따스함으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그 사랑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해 방황하며 실망 가운데 있는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해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을 발견한 사람이 크게 외칩니다. ‘진정한 사랑은 여기 있습니다!’ 그 사랑 찾고자 자신이 직접 몸부림쳤기에 그의 외침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그를 변화시켜 사랑의 사도로 만든 그 사랑, 거치고 힘든 세상을 힘 있고 용기 있게 살아가게 하는 그 사랑을 발견했노라고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의 사랑과 다릅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그 마지막이 상처와 이별과 아픔으로 끝나는 사랑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 사랑은 구원입니다. 그 사랑은 생명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언제까지나 가슴속에 머물면서 살아 역사하는 힘이 있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의 삶을 변화시켰던 그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입니다. 10절 말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라는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즉 언어나 관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난 사랑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한 공개적인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또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신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셨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마음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글귀가 하나 눈에 띄었습니다. ‘21세의 비망록’이라고 밝힌 원태현님이 쓴 ‘알아 알아’라는 시입니다. 그 시는 짧게 두 마디로 되어있습니다.
    ‘넌 가끔 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 가다 딴 생각을 해!’

    ‘너는 나를 사랑하는데 가끔 나를 사랑하지, 나도 너를 사랑하지만 가끔 딴 생각을 해.’ 이 짧은 시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간 사랑의 허구와 거짓된 모습을 너무나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가끔은 딴 생각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적인 모습, 인간의 한계를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장 1절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생생하게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요 귀로 들은 바’라고 고백합니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4살이 채 안된 어린 아이를 야단치는 엄마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들은 그 어머니의 말 “난 너하고 다니면 굉장히 창피해, 왜 밖에만 나오면 엄마말도 듣지 않고 네 맘대로 하려고 그러니? 너하고 있으면 너무나 창피해!”가 제 가슴속에 박히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하나님 앞에 제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실패도 자주 하고, 하라고 명하신 일을 거역하기도 잘 합니다. 심지어 사탄이 보기에 죄를 행하고 나아가서 사람들 보기에도 부끄러운 일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 사탄이 주님께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김형준이라는 저 친구, 저렇게 퍼주어도 퍼주어도 소용없는데 왜 사랑하시지요? 죄 짓고 회개했으면 그만해야지 늘 같은 생활 반복하는 어리석은 저 인간을 왜 그토록 사랑하죠? 하나님 실수하셨어요. 저 보세요! 오늘도 하나님 것보다는 자기 것 찾는 저 비뚤어진 마음 좀 보세요. 투자가치가 있나요? 하나님 실수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김형준! 난 너를 보면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해. 내가 너를 얼마큼 사랑해야 네가 정신을 차리니? 내 아들까지 주었는데 너는 아직도 그 옛날 모습 그대로 가지고 있니? 옛날 회개했던 것을 오늘 또 회개해야 하는 네가 나는 정말 역겹고 지겨워! 너를 보면 정말 천사들과 마귀 앞에서 부끄러워 죽겠어!”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난 네가 죄를 지을 때 슬퍼하면서 너를 사랑해! 난 네가 믿음 안에서 살 때 기뻐하면서 너를 사랑해! 난 한번도 너를 버린 적이 없고, 한번도 너를 귀찮게 여긴 적이 없고, 한번도 너를 무시한 적이 없고, 한번도 너를 모른 척 한 적이 없단다.” 이 중요한 선포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릴 향한 그 사랑은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어디에서 나타났습니까? 그 사랑이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 독생자를 죽이면서까지 우리 죄를 사해주시는 그 사랑으로 나타났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배신했던 죄로 스스로 절망했으나, 자기 존재를 포기치 않고 여전히 사랑하시고 기대하시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느꼈습니다. 그는 특히 요한복음 마지막 장을 기록하면서 베드로를 찾아 오셔서, 배반한 제자를 용납하시고 죽은 그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워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가는 사랑, 십자가에 나타난 그 사랑이 베드로를 향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을 섬세하게 증거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고 만졌고 귀로 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이 찾는 그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은 여기 있으니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표현하시고 나타내신 십자가, 거기에 사랑이 있다고 증거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찾고 있는 바로 그 사랑이 아닙니까? 변치 않고, 내 삶 속에서 나를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 가는 그 사랑!

    두 번째 십자가에 나타난 그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서 나타납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전히 살아 역사하고 있습니다. 16절 말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느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자녀들과의 교제 속에서 이 사랑이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즉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그 주님의 사랑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나타난 그 하나님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구체화되고, 새롭게 경험되기를 오늘도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그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여러분의 삶 속에, 여러분의 맘속에, 여러분의 고백 속에 동일하게 경험되기를 주님은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십자가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볼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기록이 나옵니다. 주의 사자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지으라고 일러줍니다. 이사야 7장 14절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말씀하는데, 7장 14절 말씀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니 이는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늘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셔서 주님께 나아가 그분과 깊은 교제를 나누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에 주님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과 함께 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막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막은 나중에 성전으로 변하게 되면서, 성전 가운데 계신 다시 말해, 백성들 삶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백성들로 하여금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계약을 깨뜨린 백성들에 의해서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성전은 무너졌으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 우리 가운데 보내주셔서 여전히 우리와 동거하시기 원하시는 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주님이 십자가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오시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와 교제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함께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성령을 통해 증거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나타나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 증거는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와 이성으로 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비요나 시몬아 네가 잘하였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하는 이는 네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주로 시인하는 고백은 우리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나타나는 증거는 마음속에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떨칠 수 없는 감정입니다. 일평생 두려움을 떠날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한, 두려움은 우리 삶 속에 찾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우리의 용기를 꺾습니다. 믿음을 나누고, 낙심하게 만듭니다.

    요즘 저는 여호수아서를 많이 묵상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의 신세가 제 신세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 그에게 지도자의 위치가 주어졌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경험했습니다. 백성들 속에 있는 그 완고함과 불신앙을 보았습니다. 백성들 속에 인간적이고, 육적인 고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종, 능력의 종, 그 큰 모세도 흔들거리며 힘들어했던 백성들의 변치 않는 죄성을 보았고 앞으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지금까지 백성을 40년간 이끌어 온 것보다 더 많은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당장 요단강을 건너는 일부터, 건너자마자 난공불락의 요새 여리고 성까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이 그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습니다. 나아가 백성들과 해야 할 수많은 일들 앞에 자기 존재가 얼마나 연약한지 자신을 보았습니다. 두려워 벌벌 떨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모습이 저와 비슷합니다. 제가 동안 교회를 오고 나서 우리 교회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교회 구석구석 변화되고 새로워져야 될 부분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쉽게 변할 것 같지도, 어쩌면 영원히 변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그런 불안감이 제 마음에 찾아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참 많습니다. 우리 교회가 해야 될 일은 지금까지 해 온 것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일처럼 느껴집니다.

    북한이 핵을 가졌다는 구체적인 사실이 발표되었습니다. 우리시대를 낙관적으로 볼 수만은 없습니다. 저들은 아직도 호전적인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전쟁이든, 피해의 가장 큰 당사자는 남한과 북한입니다. 민족의 미래를 위협하는 일들 앞에서, 통일이라는 그 중차대한 일들을 앞두고, 특별히 고향을 두고 떠나와 이 땅에 교회를 세우며 언젠가 고향으로 복음 증거하러 가리라 결심했던 결심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전쟁의 아픔 속에서 평화적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지금까지 해 왔던 어떤 일보다 더 위험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이 일들을 어떻게 감당해야할까요? 저 자신을 바라봅니다. 저는 큰 교회를 담임하도록 훈련된 사람은 아닙니다. 여리고 연약합니다. 자주 두려워합니다. 여호수아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즉 두려움에 떠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신 주님의 ‘여호수아야 두려워말라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에게 명한 대로 내가 이루겠다’하신 말씀, ‘네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내가 모세에게 명한 그 율법을 지켜 행하면 내가 네 삶을 통해서 영광 받고 이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원하신 나라로 인도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의 메시지를 보았습니다. 그는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전진해 갑니다. 너무나 부러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기도할 때 제 마음속에 배짱인지 믿음인지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엉망진창으로 버려두시지는 않을 거야.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가 무너지고 잘못되는 것을 방치하시지 않을 거야. 나를 이곳에 보내셨을 때는 분명히 감당할 만한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실 거야.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을 함부로 하시지는 않을 거야’하는 생각이 기도할 때 제 맘속에 찾아옵니다. 많이 담대해졌지요?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바로 내 속에서, 나의 삶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능력과 은혜를 가지고 나타나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실패하는 여러분, 좌절하는 여러분, 죄를 지어서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는 여러분, 아무도 찾지 않는 여러분의 삶 속에 주님은 찾아가셔서 “사랑은 여기 있으니! 네가 찾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대학의 교수로 잠깐 있으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공휴일 날이나 소풍가는 날을 선생님들은 별로 안 좋아 하는 줄 알았습니다. “내일 공휴일인데 말이야”하면서 숙제를 내 주시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공휴일은 싫고 공부만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비쳐졌습니다. 그런데 대학에서 선생님이 되어 보니까 공휴일은 학생들보다 선생님들이 훨씬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학생으로서 좀 영악해져서는 가끔 교수님의 마음을 읽고 휴강을 유도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여호와께 가까이 함이 복이라’ 했는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누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했었습니다. 하나님은 별로 원치 않는데 내 쪽에서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 가까이 해서 아름답게 살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보다도 더 나와 교제하시기 원하시고, 나보다도 더 나와 함께 동거하시기를 원하시고, 자신이 가진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오늘 내 삶 속에 더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 나 보다도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내 안에 들어오셔서 십자가에 나타났던 그 사랑을 오늘 내 삶에 부어주시고, 나로 하여금 그 사랑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사랑이 오늘 여러분의 삶 속에도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발견할 때 여러분 자신이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내 가슴 속에도 있다고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주님의 이 사랑은 오늘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웃들에게도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11절 말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우리를 이같이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이 오늘도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십니다. 그 사랑을 간직한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에게 사랑을 증거하고 전달하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서 ‘마땅하다’는 ‘헬 오민’이라는 단어는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분명히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직도 가야할 길(The road less travelled)’의 저자, 스캇 팩 박사는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는 사랑 중에 감정적인 사랑을 생리적인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사랑은 세 가지 측면에서 진정한 사랑과 구분이 된다고 했습니다. 먼저 사랑에 빠지게 하는 것은 의지에 따른 행동이나 의식이 있는 선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만큼 사랑에 빠지기를 원하는 것,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랑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랑에 빠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닌 것은 노력 없이 얻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하는 행동은 훈련이나 의지적인 노력이 거의 필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 개인의 성장을 촉진시키는데 진심으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목적은 자신에게서 외로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성장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병들어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가슴 아픈 일들이 주위에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즘 20세도 되기 전의 필리핀 여성들이, 한국에 돈벌러 와서 바로 술집이나 매춘하는 현장으로 팔려 나가는 장면을 보셨습니까? 그 중에 탈출한 어느 한 소녀가 필리핀 대사관 직원들과 우리나라 사람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하고 있는 것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얼마 전 어느 한 신문에 그 소녀의 일기가 공개된 적이 있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매춘이라니요. 한국 사람들은 모두 섹스광인 것 같아. 오, 아버지! 어떻게 하지요? 우릴 여기서 빠져 나가게 도와주세요.” 자기 어머니가 집 사는 것을 돕겠다고 고향을 떠나 이국땅에 찾아온 소녀를 속여 술집으로, 매춘부로 팔아넘긴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입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사람을 인격이 아닌 수단으로 보는 병든 마음, 그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을 욕구 충족의 도구로 바라보는 병든 우리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이분들이 하루에 무려 18시간 일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18시간 일한다면 자는 시간은 3시간, 4시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밥 먹고, 씻는 시간 빼고 서너 시간 자면서 일하는 그들의 한 달 받는 돈이 70만원 내지 80만원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창원에 있을 때에 외국인 근로자에 관련돼서, 하나 맡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모임을 담당하는 목사님이 제게 심각하게 말씀합니다. “목사님, 제가 업주를 만나보면요,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낯 뜨겁고,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들 정도입니다. 저들의 파렴치한 모습을 볼 때,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정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눈물이 맺히면서 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업의 양심입니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외국인 노동자들로 인해 얻은 혜택을 우리도 나누고 있지 않습니까?

    ‘파파라치’란 말을 아시죠? 영국의 다이나 왕세자비를 죽게 만들었던, 유명인들 뒤따라 다니며 몰래 사진을 찍어 그 사진을 잡지사에 팔아넘기는 사람들, 그러나 한국에서는 지금 ‘카파라치’가 있다고 합니다. 카파라치는 교통법규 위반하는 현장에서 몰래 사진 찍어서 보상금을 타내는 사람을 말합니다. 최근 전주에 카파라치를 위한 학원이 개설되었습니다. 어느 지역에서 어떻게 사진을 찍으면 차번호판과 위반 현장을 잘 찍을 수 있는지를 강의하는데, 고발사건을 통해서 얻은 수입금이 전국 1,2위 랭킹을 달리는 사람을 강사로 초빙하는 등 지금 성업 중에 있다고 합니다. 이런 구상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교통법규를 위반하지 않도록 하는 데는 효과가 있을지 모릅니다만, 사람을 도구로 보게 만들도록 하는 그 정책을 위반한 사람들은 누구란 말입니까? 한개는 생각하고 두개는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입니까?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사람의 도덕성에 있습니까? 그 사람의 윤리성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죄인들을 향해서 사랑의 손을 뻗을 수 있는 이유, 사회에서 냉대 받는 사람을 향해서 사랑의 손을 뻗을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아름답게 나타날 수 있도록 우리가 서로 돕고 사랑하는 바로 거기에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경상남도 자원봉사대상 수상자로 선정된(국민일보 2002. 10. 9) 양태순씨(52)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났습니다. 이 분은 결혼 3년째인 1972년 한 건물에 살던 가족이 없는 할머니를 돌아보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결핵으로 생존가능성이 20%미만이라는 판정을 받고 한쪽 폐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다시 건강을 회복한다면 평생을 남을 위해 봉사하며 살겠다고 말입니다. 성공적으로 수술이 끝났고 이웃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83년부터 열심히 섬겼습니다. 무료급식소, 나환자시설, 민항기 추락사고 현장, 수해지구 그리고 인신매매를 당해 접객업소에서 온몸에 중화상을 입은 17살 난 소녀를 김해로 데려와 병원에 입원시키고 성금을 모으고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고 합니다.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간직하며, 이 사랑을 이웃에게 오늘도 나누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을 찾아볼 수 없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부 간에도, 부모자녀 간에도, 형제간에도, 이웃 간에도, 연인 간에도 진정한 사랑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 있나니!” 외치던 사도요한처럼 주님사랑을 마음에 다시 되새기며
    나를 구속하신 사랑을 오늘도 내 생활 속에서 체험하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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