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완연한 허물 2002-11-22 10:06:58 read : 5798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11.17 // 누가복음 15:11-32
마 24:14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종말에 대해서 이보다 선명한 말씀은 없습니다. 언제 종말이 옵니까?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면 끝이 옵니다. 예수님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전파될 것이고 그 결과로 반드시 주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선교학자가 말하기를 1세기에 예수믿는 한 사람이 360명을 전도해야 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360명중 1사람이 예수믿는 사람이었다는 것이지요. 10세기에는 220:1이었고, 15세기에는 69:1이었으며 19세기에는 27:1이었고 20세기 와서는 1950년에는 21:1, 1980년에는 11:1, 1990년에는 7:1, 전 인구의 1/7이 예수 믿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 성도 한 사람이 7명에게만 전도하면 세계복음화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Everybody, 모든 사람이 예수 믿는다고 말하지 않고 모든민족, 즉 부족과 종족에게 복음이 증거되면 세상 끝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세계의 모든 민족 수는 23,000이라고 합니다. 이 민족 수를 가지고 말하면 1세기에는 한 교회당 13개 종족을 책임져야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10세기에는 한 교회당 5종족, 15세기에는 한 교회당 1종족(그 당시에는 전 세계 교회수가 23,000개 였다는 뜻입니다), 19세기에는 10교회당 1종족으로 역전되었는데 20세기 와서는 1950년에는 33교회당 1부족, 1980년에는 583교회당 1부족, 1990년에는 1,662교회당 1부족만 책임전도하면 현재 미선교 1,200종족에게까지 다 전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같은 속도로 내닫는다면 교회가 합심협력만 한다면 21세기를 전후해서 전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고 예수님이 오시리라고 소망할 수 있다고 합니다.
눅 15장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이 절절이 비쳐 나옵니다. 처음에는 99:1이었다가 그 다음에는 9:1이었다가 세 번째는 1:1이 되었습니다. 세계복음화와 민족복음화의 관점에서 말하면 전에는 한 민족만 취급하다가 이제는 전 세계를 직면하여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민족을 1:1로 하여 선교하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탕자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돌아온 탕자는 죄인과 세리들이었으며 집안에 있던 큰 아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특권과 뒤에 하나님의 나라로 회개하여 들어온 이방인들의 입장 사이에는 약간의 긴장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먼저 믿는 우리들과 아직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 간에 상당한 벽들이 존재합니다. 오늘날 교회를 주도하시는 성령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먼저 예수 믿어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된 우리들에게 세계선교, 복음전도에 있어서 드러나는 허물들은 지적하고 계십니다.
첫째 허물은 교회의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그 자식 죽든지 말든지, 잘 먹고 뒤져라" 우리는 드런 마음을 가질 때가 있지만 아버지의 마음에는 그 아들이 항상 살아 있습니다(노장로의 6자식 이야기). G. B Shaw는 말합니다. "우리 인류의 최대의 적은 무관심이다. 그것은 비인간의 정수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인들을 용서하고 계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셨을 때 회개할 길을 마련하지 않으시고 회개의 복음을 말씀하셨겠습니까? 회개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둘째 아들이 자기를 믿고 돌아와 준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기쁨을 잔치로 표현합니다. "나는 기쁘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아버지는 잃어버린 자식에 대한 관심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 집 안에 있던 큰 아들은 아버지처럼 단순하지 못합니다. 그는 상당히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재산도 축내고 죄도 많이 지은 동생이 돌아왔는데 그렇게 까지 극성을 떨 필요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믿고 섬기고 있는 나의 특권은 뭐란 말입니까?" 아마도 철없는 이 아들의 불만은 이런 것들일 것입니다. 홧김에 말한 것은 대부분 틀린 말입니다. ① "내 친구와 파티 열도록 염소 새끼라도 준 적이 있습니까?" 큰 아들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생은 행방불명인데 벗들과 노는 것만 관심사라니요? ②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먹어버린 동생에 대한 적개심을 보세요. 그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제일 관심사가 달랐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그를 신랄하게 다루지 않고 평범하게 취급하십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의 기분을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말로 권합니다. 아버지는 집나간 자식이 돌아온 것을 반겨야 할 뿐 아니라 집안에 있는 자식도 다독거려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권면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고 "기쁨의 근원을 소유에 두지말고 존재에 두어야 한다"고 부드럽게 타일렀습니다. "네 동생이 마음도 몸도 몹시 괴롭다가 돌아왔는데 그를 위하여 소 한 마리를 잡은들 그게 뭐 대단한거냐? 너를 위해서는 내가 있지 않느냐"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내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 내가 네 아버지요 네가 내 아들이면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 단순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우리는 종종 잊어버리고 삽니다. 온 세상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산과 들, 도시와 빌딩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생명과 사랑, 좀더 신령하게 말하면 영원하신 성령, 창조의 근본이신 분이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로부터 나왔지 않습니까? 그것이 깨끗이 다 우리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것은 곧 나의 것입니다. 사랑은 내 것이 다 네 것이고 네 것이 다 내 것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전체를 묶어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세상 사람들이 너무 움켜잡고 담을 쌓고 사는 것을 슬프게 봅니다. 그것 움켜잡고 있으면 얼마나 움켜잡고 있겠습니까? 그 물건은 오래가지만 그것을 움켜잡고 있는 손은 곧 늙고 시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땅위에 사는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지만 최종적으로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입니다. 저 송도 앞바다도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고 광복동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광복동 거리에 펼쳐놓은 값비싼 옷들을 내 옷장 안에 안 걸어 놓아도 보고 좋으면 다 내 것입니다. 남의 옷을 보고 참 좋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옷은 내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오늘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셋방에 산다고 너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고대광실 높은 집에 산다고 네가 남보다 부자가 아니다. 너는 내 것이고 나는 네 것이다. 영원한 생명과 부가 내게 있다. 너는 그렇게 옹졸맞게 생각하지 말아라"
그 다음은, "그런데 네 동생은 나를 버렸고 나와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 내가 참 생명이고 영생인데 나를 떠났으니 죽은 것이 아니냐? 살아있어야 누릴 것이 아니냐? 참 생명을 잊어버린 그는 정말 불쌍한 존재다. 그런데 그가 다시 돌아와 영원한 친교를 누리게 되었으니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느냐?"고 타일렀습니다. 먹는 음식 끝에 마음 상한다고 별것 아니면서 작은 오해가 확대되면 의심이 생기고 기분이 나빠지는 것 아닙니까? 그 당시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어떤 반성을 했는지 너무 신랄하게 밝힐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오늘도 자꾸만 전도하면 일만 늘고 피곤해지는 것 아닙니까?"라고 생각하는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오 주님, 이 주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게 하옵소서"
복음적인 각 시대의 교회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회개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제가 좀 곡해했습니다. 아버지의 참 마음은 제가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처럼 자비하고, 아버지처럼 온전해지는 것이 아닙니까?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몸처럼 처신하겠습니다. 마음고쳐 먹겠습니다" 이 아들의 관심이 변했고 마음이 변했습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배웠습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아버지가 보실 때는 한 아들이 세상 전체처럼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볼 때 큰 아들이 함께있는 것처럼 보았습니다. 아버지께는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잠 30:15에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고 했는데 제가 딸이 둘 있어서 그런지 딸 둘 가진 교우가 많습니다. 딸도 좋지만 아들이 더 좋습니다. 저는 항상 두 딸이 헷갈립니다. 큰 딸이 작은 딸 같고 작은 딸이 큰 딸 같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의 눈에는 99마리 성한 양이 한 마리 잃어버린 양처럼 보였습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 속에서 자기와 자기 동생이 하나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한 사람을 인류 전체로, 나 자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보았고 하나님의 독생자처럼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돌아왔을 때도 그렇게 기뻐하실 것이고, 암소 한 마리를 잡아서 기쁨을 표현하실 분이십니다.
두 번째로 그는 아버지의 일을 배웠습니다. 아버지의 일은 오늘도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이 다시 자기를 찾아오도록 환경을 조성하였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께서 그 아들이 스스로 결단하여 아버지를 찾도록, 흉년도 보내고 쥐엄열매도 먹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꺼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손길이요 인내요 온유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의 외아들을 통하여 당신 아들의 죄를 속하고 영원히 의롭다 하시는 구속의 근거를 마련하셨습니다. 안으로 밖으로 모든 것을 준비하고 난다음 그 아들을 위하여 섭리하시며 그가 당신을 향했을 때 그를 위하여 준비한 모든 것을 그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큰 아들의 관심사가 변하고 마음이 변하자 마침내 아버지의 기쁨도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자기 중심의 기쁨에만 연연했지만 이제는 아버지와 함께 기뻐할 줄 알게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기쁨은 사람에 대한 기쁨, 생명에 대한 기쁨입니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기쁨, 죽었다가 다시 산 기쁨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소유에 대한 기쁨입니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을 때 나의 기쁨은 배가 됩니다. 더구나 아버지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나눌 때 나의 기쁨은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큰 아들이 자기가 기르던 염소 새끼를 가져다가 아버지 잔치에 보탰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02년 추수감사절이야 말로 우리 교회의 큰 절기입니다. 10년 숙제인 헌당을 가져온 마지막 교회당헌당 헌금주일이요 또한 돌아온 동생들을 위한 잔치날입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금년 추수감사절에 일생 일대의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커다란 감사를 한 번 드려보시기를 부탁합니다. 헌당의 장엄한 복이 우리 교회에 닥아오고 있습니다. 믿음과 부흥의 복이, 건강과 물질의 복이, 형통과 기적이 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가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입시다.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고, 그 한 사람이 나만큼 귀하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한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일의 초점은 항상 생명입니다. 영생이 있어 모든 것을 누리고 영생이 없어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언제든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인 까닭입니다(롬 6:23). 아버지의 기쁨은 사람찾은 기쁨입니다. 우리 기쁨의 초점을 아버지의 마음에 맞추고 그분의 기쁨에서 찾을 때 우리는 과연 아버지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누가 교회의 영적 수준을 평가합니까? 거저 아버지를 배우고 그 사랑과 일과 기쁨 속에 살다보면 영적으로 부쩍 자라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완연한 허물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안에 있으면서도 아버지를 이해하고 있지 못한 부분이 아닙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얼마나 우리 가까이 계신지요? 지금도 우리 교회 안과 밖에서, 우리 마음의 안과 밖에서 우리를 권고하십니다. "큰 아들아, 나는 둘째보다 네게 더 말하고 싶다. 너는 첫째고 저 애는 둘째가 아니냐? 나는 네게 기대하는 것이 있다. 네가 나를 닮았으면 한다. 네가 나와 같았으면 나는 더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내게는 네와 네 동생이 똑같이 하나란다. 네가 나처럼 네 동생에게 대해주었으면 한다. 나는 하늘에 있기 때문에 네가 아버지처럼 온전한 사랑으로 형의 역할을 해주기 바란다. 그러면 너를 통하여 나는 가정복음화를 이루겠다. 네가 나처럼 나의 잃어버린 영혼을 품어준다면, 1대1로 그렇게 해준다면, 2,030년이 되기 전에 세계복음화, 민족복음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큰 아들이 아버지처럼 될 때,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일, 아버지의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될 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안에서 우리 시대에 교회역사의 끝, 세계복음화의 종막을 선언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여자가 낳은 아들가운데 너보다 큰 자가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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