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함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2002-11-21 10:28:36 read : 6045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11/03 // 골 3:12-17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사전적으로 말씀드리면 두 가지로 대별 됩니다.
첫째는 소리, 빛깔, 모양 따위가 마음에 즐겁고 기쁜 느낌을 자아낼 만큼 고움
을 뜻합니다.
둘째는 하는 일이나 마음씨 따위가 훌륭하고 갸륵함, 또는 착하고 인정이 많
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름다움을 “신의 선물”이라 했습니다.
플라톤은 “자연의 가장 우수한 것”이라 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쓸데없는 것을 정화한 것”이라 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꽃'이라 했습니다.
R. U. 존슨은 “신의 미소”라 했습니다.
J. 키츠는 “영원한 기쁨”이라 했습니다.
나름대로 모두 타당한 뜻풀이이며, 여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들이 좋아하거나 원하는 대상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서 아름다움은 곧 ‘좋은 것'입니다.
한문을 보면 아름답다는 美는 양(羊) 밑에 큰 대(大)자가 받쳐진 글자입니다.
이 한자어의 뜻은, 고대 중국인들은 양고기를 맛있는 고기로 여겼기에 양고기
를 많이 먹을 수 있는 것을 가장 좋은 일로 여겼고 여기에서 아름다움이라는 뜻
이 파생된 것입니다.
영어 뷰티(beauty)는 ‘아름다운'이라는 뜻의 고대 프랑스어 ‘bellus'에 어조
사 ity가 더해진 것으로, ‘bellus'는 ‘좋은'이라는 뜻을 가진 bonus와 어원이
같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말 ‘아름다움'은 ‘아름답다'가 명사화된 말입니다. 아름답다
는 ‘나(我)'를 뜻하는 고어 ‘아'에 접미사 ‘답다'가 붙어서 된 말입니다.
즉 ‘나’다운 모습이 ‘아름다움’이라는 말입니다.
나다움이란 자기 만족, 혹은 마음 상태가 좋은 것입니다.
마음의 좋음, 마음의 만족은 곧 감사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움입
니다.
미국의 소설가 L. 월리스는 “바라보는 사람의 눈 속에 있다”고 했고, 영국
의 철학가 D. 흄은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온 세상을 헤매 다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
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 보아도 그가 찾고 있는 아름다움은 발견할 수도 없을 뿐
더러 숲으로 가 보아도, 냇가로 가 보아도, 꽃밭으로 가 보아도 어디에도 보이
질 않았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을 헤매 다니다가 결국 길에 풀썩 쓰러져서 말했습니다.
“아, 대체 내가 찾는 아름다움은 어디 있을까?”
그 아름다움은 정말 어디 있을까요? 그것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4:23절에서는 무엇보다 마음을 잘 관리 하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착하게 하고 있으면 오가는 사람들도 착해 보이기 마련입니다.
괜스레 불량배 행세를 하면 어김없이 불량배들이 다가와 시비를 걸고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모이
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기도하는 사람이 모이게 됩니다.
찬양 잘 하는 사람에게는 찬양하는 사람이 모입니다.
봉사 잘 하는 사람에게는 역시 봉사자들이 모입니다.
구제와 선교를 잘 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선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모이게 되
어 있습니다.
종종 시그너스 호텔에 프로축구 선수단이 숙박을 할 때가 있는데 여중, 여고
생들이 선수들에게 사인 받으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야단법석을 떠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 시간에 학교에서 가정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역시 동류의 친구가 많아
지게 되는 것입니다.
손버릇이 나쁘면 그 또한 손버릇 나쁜 아이들을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럼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자기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
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가 찾고자 하는 아름다움이야말로 세상을 돌아다닐 필요
도 없이 당장 눈앞에 보일 것입니다.
용혜원 목사님은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렇게 시로 표현했습니다.
사랑은 가난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청결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독점이 아니라 나눔입니다
우리 사랑은 꽃꽂이같이
좋은 것들로만
장식하는 잔인한 작업일 수는 없습니다
아름다운 꽃꽂이일수록
생명을 잘라내어
조작된 아름다움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래 머물러 향기를 발할 생명이
며칠 간의 눈요기가 되는 일은
괴로운 일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대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즉 거짓된 만들어낸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들어낸 사랑은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감사함이 없는 조작된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런 경우는 아름다움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감사의 표현이며 감사는 인간의 지고한 삶의 모습입니다. 참 아름
다운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는 그 내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삶
12~14절 말씀의 내용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의 삶
의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삶의 내용이 곧 아름다움인데 그 아름다움이 곧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감사함이 충만한 삶입니다.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는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
은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옷을 입는다는 말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옷은 남에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할 옷에 대하여 소금과 빛의 옷을 강조하셨습니
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옷을 입음과 같아야 하
는 것입니다.
둘째로 옷은 그 사람에게 어울려야 합니다.
우리가 입는 옷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입습니다 . 양복 입고 갓을 쓸 수
는 없습니다. 수영장에서 등산복을 입을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격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셋째는 자주 세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욕망으로 더러워진 우리의 마음도 인격도 삶도 말씀으로
세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는 옷을 입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
다. 그래서 소금이 만일 맛을 잃으면 무엇에 쓰리요 세상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
이라 했습니다.
어떤 옷이라 했습니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옷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거듭난 성도의 감사의 생활 덕목들입니다.
감사함이 없는 마음으로 결코 이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13절입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
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의 내용입니까?
용납이 무엇입니까?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 주는 것입니다. 아량을 베푸는 것
입니다.
혐의가 무엇입니까?
원문의 의미는 실수 또는 원망을 뜻합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말씀은 ‘서로’라는 말입니다.
네가 실수를 했다면 나도 언젠가는 실수를 할 수 있음을 전제하는, 다시 말하
면 인간은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할 수 없다는 의미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의 실수를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감사의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근간이 어디입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그
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했습니다.
서로 용납하는 삶, 곧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 실천되는 삶에서 아름다움
이 연출되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이것이 복음적 삶입니다.
복음적 삶이란 곧 이해와 용서와 관용과 사랑의 삶입니다. 그것은 감사함의 삶
이며 그 표현이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사랑을 입은 성도의 삶이 이보다 어떻게 더 아름답게 표
현될 수 있습니까?
이 아름다운 성도의 삶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곧 감사함입니다.
가정하여 이 복음적 삶의 반대적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삭막합니까?
감사함이 없는 얼굴, 감사함이 없는 언어, 감사함이 없는 행동은 생각만 해도 일
그러진 마음을 갖게 합니다.
사랑은 이 모든 것, 곧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입어야 할 옷을 입고 그 모
든 것을 흐트러지지 않도록 매는 띠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충만한 삶
15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몸으
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하는 마음이란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생각과 삶의 목적을 가지고는 감사함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할 때 감사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생각으로 가득하면 성령으로 충만하여 모든 것이 감사함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생각으로 가득하면 육신적 소욕으로 충만하여 모든 것에 만족
함이 없습니다.
부동산 투기에 열심을 가진 여전도회 회장 집사님이 헌신예배 인도를 담당하
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주님 생각으로 충만했으면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은
혜로운 예배를 인도했을 터인데 평소에 육신적인 소욕으로 충만했기에 예배 인도
를 하는 중 찬송가를 부를 시간에 엉뚱한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성도 여러분 찬송가 102동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그리고는 목청을 돋우어 102장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여기 저기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회중들은 속으
로 안타깝게 말합니다.
‘찬송가 가사대로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여러분 심령에 주의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성령으
로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요 육의 생각은 사망이라 했습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 감사
가 있습니다. 사망이 있는 곳에는 감사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감사함이 없는 성도의 삶은 이미 영적으로 죽은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
다.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을 주장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만한 삶
16절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
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진정 감사함의 삶이란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만한 삶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만한 삶에서 표현되는 것은 필연적으로 감사입니다. 그것
은 언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활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추수감사절을 Thanks giving이라고 합니다. 즉 감사와 드림이
하나로 된 용법입니다. 마음과 행위의 조화를 뜻하는 말입니다.
불평은 가장 빠른 전염병입니다.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희한하게 불평 잘 하는 사람이 쉽게 다가와서 함께 합니
다. 그것은 타락한 성품의 소유자의 몫입니다.
타락한 성품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책임 전가입니다.
“이번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아? 저 사람 때문이야”
“아담아 왜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었느냐?”고 하나님이 물으셨을 때
“하나님이 주신 여자 때문입니다”고 변명하고 전가합니다.
“하와는 왜 그랬느냐?”고 물으셨을 때 “뱀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랬습니
다”고 변명하고 전가합니다.
그것이 타락한 성품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리는데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
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사변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언어구사가 아닙니다. 신화도 아니고 이야
기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그리스도인들에게 밀어닥치는 위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
스도의 말씀이 없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자리에 엉뚱한 것들이 자리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옷을 입고 내용은 전혀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 인간적
인 소리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신기한 것은 사람들이 그런 말에 귀를 기울
이는 것입니다.
바울은 일찍이 이것을 경계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3~5절입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
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
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
나느니라.”
그리고 디모데후서 4:3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
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
라.”
말씀이 충만하지 못할 때 오는 필연적인 내용을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디모
데에게 일깨우면서 교인들을 잘 지도하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교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기도원 출입을 잘 하는 성도들의 약점이 무엇인
지 아십니까?
대부분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개인적인 핸디캡이 있는 사람들이 기도생활을
남달리 하면서 영감을 얻어 처음에는 신실하게 믿음생활을 잘 하다가 결국 그리
스도의 말씀이 아닌 자기의 사욕이 자기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
을 옷 입은 것처럼 하면서 자기 소욕을 이루는 일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면 교회는 어머니와 같다고 역설했던
것입니다.
어머니 품을 떠난 자식의 정상적인 성장은 거의 불가능한 것을 우리는 가정생
활을 통해서 얼마든지 경험하게 됩니다.
말씀이 여러분을 주장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야 진실로 감사함이 노래됩니다. 거기서 진정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
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감사함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 감사함이란 마치 기차가 레일을 달리듯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충만한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만한 삶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그렇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