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있었던 수능고사 시험장 풍경을 보도하는 뉴스가운데서 후배들이 선배들을 격려하는 선전물중에 "선배님들, 능력을 보여 주세요"라는 프랑카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이 선전물은 월드컵 당시 "히딩크,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라는 문구를 빌려 온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나 이런 선전물은 인생의 여정에서 선배의 중요성과 능력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하는 문구였습니다. 선배가 왜 중요합니까? 선배는 후배가 따라가는 목표요 길잡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후배는 선배의 발자취를 따르며 더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선배를 넘어서야 할 자들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길에서 어떤 선배를 만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만나고 따르고 싶어하는 선배들은 능력있는 선배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능력에서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능력을 전수받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능력은 믿음의 능력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의 본문인 히브리서 11장은 바로 이런 믿음의 능력으로 우리보다 앞서 인생을 살아간 선배들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장입니다. 미국에 가면 스포츠 영웅들을 기리고 그들의 업적을 전시하여 후세에 남기기 위한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선배들의 명예의 전당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서론격인 1-3절은 우리의 선배들이 붙잡고 살아간 믿음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기록된 우리의 선배들이 보여준 믿음의 능력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의적인 평행문구를 사용하여 우리는 세가지로 대답할수 있습니다. (1.믿음은 바랄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합니다. 2. 믿음은 볼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3. 믿음은 할수 없는 것을 하게 합니다.)이 세가지 대답은 같은 의미를 반복적으로 강조하지만 좀더 점진적으로 의미를 발전시켜 나아가고 있기도 합니다.
1.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음이 희망이라는 말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믿음이 희망의 근거가 된다는 말입니다. 본문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용된 실상이라는 단어는 희랍어의 휘포스타시스(huipostasis/huipo=under, stasis=stand)로서 "아래서 받쳐준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받쳐주는 근거 혹은 기초가 된다라는 뜻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는 절망의 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이 절망의 벽을 넘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믿음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서 희망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그는 절망의 땅을 떠나는 모험의 결단을 내립니다. 믿음으로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을 바라볼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시대에서는 자식이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는 이미 아이를 가질수 있는 나이를 지났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4:18에 보면 아브라함이 바랄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왜냐하면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실로 우리들의 믿음의 조상 곧 믿음의 선배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선배가 그렇게 살수 있었다면 우리도 그렇게 살수 있다는 것-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부갑상선 기능 항진에 의한 각피 석회화증'이란 긴 이름의 희귀병에 걸린 청년이 있었습니다. 칼슘이 몸 안에서 과다 생성되어 축적됨으로 온몸이 석회처럼 굳어 버리는 병이라고 합니다.
여덟살에 다리를 절기 시작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리에서 누어버려 22년에 걸쳐 죽어가는 육신과의 싸움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을 거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와 사랑하는 어머니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도구가 되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불가능한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누워있는 채로 독학으로 영어와 한문을 배우고 한손에는 볼펜을 잡고, 또 한손으로는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한권의 베스트 셀러를 탄생시킵니다. 30개월여만에 원고 800장의 고통의 이야기를 탈고합니다.
그런데 SBS 휴먼 드라마에도 소개된 그의 이야기의 책제목은 뜻밖에도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였습니다. 박진식씨의 인생은 그대로 감동의 휴먼 드라마였습니다. 그러나 더 자세히 그의 인생을 들여다 보면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였기에 가능할수 있었던 믿음의 드라마였던 것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신앙인은 아니었지만 이 지독한 고통과 대결하면서 마침내 욥의 믿음을 갖게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됩니다. 믿음은 바랄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합니다.
2.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믿음이 곧 비전이라는 말입니다. 비전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하는 능력입니다. 믿음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능력일 뿐만 아니라, 미래를 창조하는 비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은 보이지 않는 땅이었지만 그는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땅을 볼수 있었습니다. 비전의 사람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보는바를 따라 행동합니다.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는 말씀에서 증거(elechos)는 '내적 확신'을 뜻하는 말입니다.
노아에게 홍수는 보이지 않는 미래였습니다. 그러나 다가오는 홍수를 믿음으로 보고 노아는 방주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의 눈에 비가 올 징조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믿음의 눈에는 온 세상이 물에 잠기는 모습이 보였고 그는 홀로 그의 가족을 이끌고 부지런히 확신을 가지고 방주를 준비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리고성이라는 존재는 무너질수 없는 성의 신화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믿지못해 하는 백성들을 이끌고 이 난공불락의 성을 도는 바보들의 행진을 확신을 가지고 계속합니다. 그의 눈에는 무너진 성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볼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월트 디즈니가 그의 꿈이었던 어린이의 놀이 동산 디즈니 랜드를 LA근교에 건설한후에 그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LA에서 겪은 시행착오의 경험을 살려 좀 더 넓은 곳에서 좀 더 과학적이고 좀더 자연 친화적인 놀이동산을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또다시 플로리다 디즈니 월드 프로젝트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디즈니 월드가 오픈되기 전에 그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디즈니 월드 개막식에서 유명한 인사 한분이 축사를 하며 오늘 월트 디즈니씨가 이 광경을 보지 못하고 먼저 간 것이 안타깝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어서 등단한 미망인이 이런 유명한 답사를 했다고 합니다. "조금 전에 축사를 하신분이 제 남편에 대한 여러 좋은 말씀을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수정할 것이 있습니다.
그분이 제 남편이 오늘 이 개막식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하셨는데 사실은 제 남편은 오늘 이 동산이 열리는 것을 보면서 일을 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가 보았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믿음은 이 비전의 산실인 것입니다.
3. 믿음은 할수 없는 것을 하게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음은 단순히 희망사항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지하다면 믿음은 반드시 구체적인 결과를 가져올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선진들 곧 선배들이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증거라는 말은 법적인 효력이 있는 증거라는 말입니다. 심증이 아니라 물증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어 번역은 여기의 증거라는 말을 good report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믿음이 좋은 성적 곧 좋은 결과를 얻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것들은 불가능한 상황속에서 성취된 좋은 결과들이었습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자기의 죽은후 그의 후손들이 시온의 땅으로 떠날 것을 유언하였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든 태어나는 아들들이 나일강에 던져지는 상황에서 그들의 아기를 목숨을 걸고 기르기로 작정합니다. 그들의 아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 아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는 엑소더스의 주인공이 되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모세는 그 백성들을 이끌고 마침내 애급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임파시블 미숀(impossible mission)을 성공적으로 감당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릴때마다 제가 자주 받는 질문의 하나는 성서적 믿음과 신념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념을 포함하지만 출발에 있어서 근거가 다르고 결과에 있어서 신념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대답드리고 싶습니다. 신념의 출발근거는 자신이지만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바로 눈에 보이는 이 거대한 세상을 만든 보이지 않는 힘이었던 것입니다. 3
절의 말씀이 이것을 가르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씀은 희랍어의 로고스(logos) 아닌 레마(rhema)라는 말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 곧 역동적인 살아있는 말씀이 바로 세상을 만든 것입니다. 그의 말씀안에서 세상이 빚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히브리서 11장을 공부하며 계속 확인하게 되겠습니다만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고 할 수 없는 일들을 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선배로서 믿음의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믿음의 능력을 보여줄 차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세대는 우리의 세대대로 우리의 선배들이 살았던 세대에 비교될수 없는 문제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문제들에 눌리지 않고 이 문제들을 넘어서서 비전을 실현하는 인생은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본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가능합니다. 믿으시면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믿을수 있단 말입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앞으로 오십시오. 이 위대한 세상을 창조하신 동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사람의 소리가 아닌 당신의주인되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 보십시오. 그는 당신의 죄와 절망을 십자가에서 대신하여 죽으시고 당신의 새삶과 희망을 위해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제 그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의 인도를 받으십시오. 그분의 말씀을 붙들고 행동을 시작하십시오. 오래지 않아 당신의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홍해 바다가 갈라 질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감사의 계절-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심으로 감사와 비전이 회복되는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의 저자 박진식형제가 그 고통의 긴 터널을 거쳐오면서 배울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두가지 교훈은 다른 것이 아닌 비전과 감사였습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지금 이 순간 세상 살아가기가 힘들다고 하여 절망하신 분이 있다면 제 이야기를 읽고 부디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저는 꿈꿀수만 있어도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참담한 현실에 처해 있을 지라도 살아 있는 한 꿈을 버리진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라고. 그리고 이 책의 끝머리 부분 '마침내 맞이한 내안의 신앙'이란 장에 보면 그가 참된 신앙을 갖고 깨닫게 된 가장 소중한 것은 감사였습니다. "내가 아픔으로 깨달은건 감사였다. 밥을 삼키기 힘겨워 졌을 때 단지 음식물을 삼킬수 있음에 감사가 우러나오고, 숨쉬기가 힘겨워 졌을 때 단지 고른 숨을 쉴수 있음에 감사가 우러 나오고, 중 장애인이 되었을 때 단지 한 손가락, 한 손이라도 움직일수 있음에 감사가 우러나오고,
온뭄이 중증의 돌인간이 되었을 때 단지 머리와 몸통만 정상이어도 감사하다는걸 뼈에 새겼다. 하나 덧붙이자면, 평형기관 마저 손상 되었을 때 나는 어느 생명체에게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 절절히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줄은 이런 고백으로 마무리고 있습니다. "--끝으로 제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 드립니다." 믿음이 그에게 꿈을 주었고 감사를 선물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동일한 믿음을 키우는 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