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바꾼다 /전도전략 2003-07-10 10:14:54 read : 3666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영화<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존 키팅 선생이 웰튼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에게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키팅 선생은 수업 시간을 통해 학생들에게 인생과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러분은 말과 언어의 맛을 배워야 합니다. 말과 생각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말이란 참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말로써 생각하고, 생각을 말로써 표현한다. 언어란 단순히 기호가 아니라 공유(共有) 되는 체험이고 생각이며 느낌이다. 우리의 경험이나 생각도 언어화(言語化) 되기 전까지는 생존할 수 없다. 경험이나 생각을 어떤 것이라고 이름 붙일 때 비로소 우리의 경험과 생각은 기억되고 전달될 수 있다.
축복의 말을 전하자
현대는 언어의 중요성이 제대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우리는 말과 언어를 소홀히 여긴다. 지금은 이미지가 언어를 압도하는 시대다. 말보다 그림이 중요하고, 소리보다 영상이 중요한 시대다. 또한 언어가 학대받는 시대이기도 하다. 우리의 말은 점차 거칠어지고 황폐화되고 있다.
동네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말에서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정당 대변인의 말까지 제대로 된 언어의 맛과 아름다움을 누리기엔 너무 거칠어져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을 잘 다스리는 것이 지혜의 표지라고 가르친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언어를 다스릴 줄 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 3:2).
크리스천이 전파해야 할 언어 습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크리스천은 저주의 말보다 축복의 말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제일 먼저 주신 것은 그들을 축복하시는 말씀이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처음 주신 것도 복을 주시는 말씀이었다.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
우리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축복하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 아무리 상대방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아이를 축복하는 부모, 학생을 격려하는 교사, 이웃에게 복을 비는 이웃이 되도록 하자. 축복을 생각하는 것은 축복을 말하는 것보다 좋지 못하다. 상대방의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한 장면을 무척 좋아한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하고 돌아올 때,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했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창 14:19).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건넸던 축복의 말로 인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인생을 더욱 복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혈혈 단신으로 있을 때 복을 내리셨다고 말씀하신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혈혈 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사 51:2).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다
크리스천은 좋은 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또 삶에 찾아오는 좋은 자극과 만남을 표현하는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좋은 것에 대해선 당연하게 여기고 침묵하는 반면, 나쁜 것에 대해선 매우 상세하게 표현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좋은 기분과 감격을 표현하는 데 서툴고 나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익숙해 있다.
우리는 좋은 것들을 언어화하고, 나쁜 것들을 표현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말에는 자기 성취의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말은 선포된 대로 이뤄지는 경향이 있다. 불평과 원망의 말은 크리스천에게 적합하지 않다. 절망과 포기의 말도 하나님께서 금하시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민 14:2). 그들은 하나님께서 광야로 인도하셨음을 마음 속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의 불편함에 대해 곧 불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홍해를 건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 받았으며, 기적의 양식인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다.
하지만 그들은 좋은 감정들을 언어화하지 못했고, 마음 속에 있는 나쁜 감정을 언어화했다. ‘차라리 애굽 땅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계속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민 14:28∼29).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정적인 말을 들으시는 대로 행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언어 가운데 불신앙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제하며, 신앙적이고 긍정적인 말을 더해 보자. 세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언어를 찾아보자. 삶의 꿈과 희망을 반영하는 언어를 발견하자. 우리의 언어는 인격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지금까지 듣고 사용해 온 말들이 인격을 구성해 온 것이다.
우리는 좋은 사람인데, 어느 날 불쾌한 경험 때문에 갑자기 말이 거칠게 나가는 것은 아니다. 오늘 듣고 건넨 말들이 인격을 형성한다. 우리가 그 정도의 사람이기에 우리에게서 그런 말들이 흘러나간다. 말과 인격 사이에 우리가 인정하는 것보다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좋은 언어는 공동체를 세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을 관찰해 보면,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는 기능을 하는 반면에 어떤 말은 사람을 죽이는 기능을 한다. 한마디의 말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대단하다. 말 한마디로 평생 원수 관계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 무례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상대방의 마음에 증오의 씨앗을 뿌리기도 한다. 반면에 은혜로운 말 한마디가 하루를 빛나게 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유쾌하게 한다. 은혜로운 말은 상대방을 높여 주며 영혼을 소생시켜 준다.
무례한 말은 인격을 파괴하며, 상대방의 가능성마저 닫아 놓는다. “너는 그것밖에 못하니?”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그만 두는 게 낫겠다!” 이런 말들은 상대방의 영혼을 시들게 한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해 주고, 미래를 열어 주는 말이 좋다.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라.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너를 통해 큰 일을 이루실 것이다.”
우리가 건네는 위로와 격려의 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영혼을 건지신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좋은 언어는 인격을 세울 뿐만 아니라, 공동체도 세운다. 서로 상대방을 칭찬하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말이 좋은 것이다.
크리스천은 창조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사람이다. 바벨탑 사건 이후로 인류의 언어는 혼돈에 빠지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운데 생각과 말이 이기적이고 불신앙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은 언어의 아름다움과 능력을 회복하는 사람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언어를 통해서 인간 관계를 회복할 뿐 아니라, 언어의 능력도 회복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 크리스천의 좋은 언어 습관으로 하늘을 향해 교만하게 치솟던 바벨탑이 무너지고 서로를 향해 멋진 다리가 놓여지기를 기대한다.
글·장경철 서울여대 인문학부 교수이며 저서로 「축복을 유통하는 삶」, 「인생의 무의미를 논하기 전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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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을 앞둔 사람들 전도 전략
모든 영혼들이 귀한 것이지만, 개인이나 사회적 신분에 따라 만나기 쉬운 사람과 어려운 사람이 있다. 흔히 일반 병동을 찾아가 관계를 맺고 전도하기란 쉽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VIP 환자라 하면 특별히 생각하게 된다. 나름대로 VIP 전도라 함은 접근 자체가 어려운 사람으로서 사회적으로 내로라 하는 위치에 있어서 일반 봉사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환자를 병상에서 전도함을 말한다. 개인적으로 만나기 어려웠던 사람들을 다른 사람을 통해 소개받고 전도해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오게 된 경우를 소개한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려는 믿음으로
세상에서 성공 일변도의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복음이 들어가기란 그리 쉽지 않음을 보게 된다. 현실적으로 말기 암이라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있는 사람도 더러 있다.
어느 날 간이식 수술을 앞둔 한 기업의 회장을 전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마음에 부담이 컸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자 준비 기도한 후에 병실로 향했다.
처음 나를 바라보는 그 분의 눈빛이 어찌나 매섭던지, 아마 오랜 경험이 없었다면 금방 뛰쳐나갔으리라 생각하면서 병상으로 다가섰다. “병원의 원목입니다. 친구 분의 부부께서 얼마나 선생님을 사랑하시는지, 이렇게 제가 끌려 왔습니다”라며 접근하자, 그 분은 “저, 목사가 필요 없는데요”라고 대꾸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 아침에 중요한 수술을 앞두셨다는 말씀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이왕 왔으니 수술을 위해 하나님께 잠깐 기도해 드리고 가겠습니다”라고 제의하자, 그 분은 퉁명스럽게 “1분만 하시죠”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기도해도 좋다는 뜻을 담은 자존심 세운 표현임을 잘 알고 있다. “더 짧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후에 친구 부부와 함께 손을 잡고 주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그때 기도하던 중에 성령님의 강한 임재를 느끼며 주님께서 이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붕을 뚫고 병상을 달아 내린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이 분에게 친구를 통해 구원의 계획이 있음을 확신하면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분은 겉으로 강한 척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급박한 상황인지 깨닫고 절대자를 찾고 있는 그 분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것이다. 한참 동안 기도한 후에 젖은 눈빛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뒤로하고 내일 수술 전에 간단히 예배를 드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이튿날 그 분을 소개한 친구 부부와 함께 수술을 위한 예배를 드렸다. 준비된 말씀과 함께 초신자인 친구가 적어온 기도 쪽지를 부스럭거리며 꺼내 떨리는 음성으로 기도할 때, 방안이 환해지고 성령님의 위로와 사랑이 넘쳐나는 것을 경험했다.
그런 후에 그 분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병상에서 세례를 받았다. 간이식 수술 후 밀려오는 고통 속에서 주님께 의지하는 믿음으로 견뎌 내었다. 병상에 누워 고통을 겪으면서 의연히 ‘주만 바라볼지라’를 찬양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해갔다.
어느새 날카롭던 눈빛은 어린 아이 같이 부드러워졌고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질병은 그 분을 가족으로부터 분리시켰지만, 그 분은 죽음까지 초연히 받아들이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한 후에 떠났다. 그동안 영적으로 보살펴 주었던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은 철저함까지 보였다.
주님의 임재를 바라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한번은 어느 자매로부터 혼수 상태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당시 자매의 아버지는 89세로 임종 직전의 상태였다. 내가 사역하는 병원이 아니라, 일부러 시간을 내어 중환자실로 가는 마음은 온통 기도뿐이었다. 어떻게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가? 주님의 임재와 도우심을 바라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다가갔다.
믿지 않는 둘째 아들이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모습으로 자리를 내주었다. 산소 호흡기를 끼고 여러 개의 튜브가 몸에 부착된 상태에서 깊은 잠을 자듯이 누워 있었다. 눈을 감은 지 오래 되어 눈가에 이물질이 말라붙은 자국이 선명했다. 가까이 다가서서 손을 꼭 잡고 한 손으로 그 분의 어깨를 약간씩 쳐주면서 복음을 전했다.
마치 두 사람의 인격적인 만남처럼 대화식으로 전도했다. 지금 눈이 떠지지 않고 온몸이 움직이지 않는 답답한 처지에 있지만, 나의 말이 잘 들릴 것을 믿는다며 가족에게 이해를 구했다. 나는 따님의 부탁을 받고 찾아왔으며, 하나님께서 할아버지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이 세상의 시간은 끝나가고 있지만 분명히 새로운 세계가 준비돼 있다고 전했다. 그곳이 곧 천국이고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천국에 갈 수 있으며,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 이르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지난날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할 것과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마음 속으로 따라 하도록 했다. 허리를 구부리고 10분 정도 전도했을 듯하다. 이 10분간은 복음을 농축한 것으로 단번에 주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정열을 쏟아 넣었다고 할 수 있다.
기도를 마치고 땀을 닦으며 돌아서려는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딸이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인가 하고 돌아보니, 할아버지께서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엔 이슬이 맺혀 있었고 입가엔 약간의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마치 누가 이렇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는가 확인하려고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온 가족은 아버지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분명하다며 믿지 않던 아들들까지 신기하듯 나를 쳐다보았다. 딸이 기뻐하며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한참이나 우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확신하며 돌아왔다. 훗날 예수님을 영접한 할아버지는 갈 곳을 확실히 알았다는 듯 평안히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 가족의 요청으로 장례식을 도와 주었다. 할아버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통해 구원의 증거를 온 가족에게 보여 주고 떠났다. 이로 인해 할아버지의 슬하에 아홉 자녀들 중 믿지 않던 여섯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면서 전도 장례 예배를 드렸다. 참석했던 많은 젊은 남녀들이 감동을 받고 믿음을 가지겠다고 고백했다.
하나님께서 한 영혼이라도 소중하게 찾고 계신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전도 못할 것으로 여기고 거역해선 절대 안 된다. 기도와 순종만이 주님의 역사를 경험케 한다.
발인 예배를 인도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할아버지는 어느 큰 제약회사의 회장이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떠나신 할아버지를 깊이 추모했다.
글·김정숙 삼성서울병원 기독교실 원목이다.
빛과 소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