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영 목사 /사진 송경호 기자
새문안교회(담임 이수영)는 지난 117여년 동안 한국의 모체교회로서 뿌리 깊은 신앙과 강인한 선교정신, 교회 연합의 선구적 역할등, 민족역사 발전에 책임감있는 교회로서 부흥해 왔다.
이수영 목사는 "새문안교회는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 조화와 포용력을 지닌 어머니의 마음, 맑고 시원하게 흐르는 물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고 말했다. 실지로 새문안교회는 그동안 한국 기독교 117여년의 맥락을 지켜온 산증인이며 표준이 됐고, 이제 새문안교회만의 교회가 아니라 한국인 모두의 교회로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교회, 앞서 세워진 교회로서 민족과 한국교회 전체를 위해 복음의 횃불을 높이 들고 앞서 나가는 교회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수영 목사는 "새문안교회는 117년 전통을 지닌 개신교 중에서 제일 오래된 역사의 교회이며, 한국 전체를 생각하는 어머니 교회로써 한국교회에 모델을 제시하는 교회 사명을 다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가장 모범적이고 한국교회의 좋은 방향을 제시하는 '어머니 교회'로서, 많은 일을 하기 보단 건강한 신앙인을 만드는 것에 목표로 둔다"고 말했다.
이수영 목사는 '보통 목회', 기본을 잘하자는 철학을 주장한다. 이 목사는 "보통 목사는 우선 겸손하고, 욕심이 없고, 정직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목사들을 보면 잘못된 생각으로 교만해 지기 쉽고,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품는 경우가 있다고 전한 이수영 목사는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거짓말을 하고, 교회와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합리화시킴으로 한국교회는 공신력을 상실케 됐다"고 말했다. 그는 "먼저 목사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덕목을 갖고, 하나님께서 은사로 큰 사역을 할 수 있게 하시며, 모든 목사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것은 ‘기본을 잃지 않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또 이수영 목사는 민주적인 목회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민주적인 목회란 목사 혼자 다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회원들, 재직원들의 의견을 잘 수렴해 모든 결정을 민주적인 방법으로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고,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에 힘써야 하며, 함께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목사 혼자 독주하고 군림하는 그런 교회가 되어서는 안된다며, "새문안교회가 한국 전체 교회의 모형이 되고자 한다"고 전했다.
새문안교회는 학원 선교 사역활동을 최근 시작했다. 교목을 경신고교와 정신고교, 대광고교에 세우고, 세 학교에 부교역자 4명을 파송해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다. 이 목사는 이 일이 우리나라 공교육이 무너져 학교교육을 바로 잡고 나라 미래를 내다볼 때,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교목은 성경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 상담과 교육에 전폭적 지원을 하게된다. 그는 "기독교 학교 만이라도 바른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이 일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또 직장인들을 위해서 새문안교회는 매주 목요일 '직장인 정오예배'를 드린다. 350명 정도 직장인이 모인 가운데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으며, 신앙적인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새문안교회의 선교사역을 살펴보면 태국에 '한, 태 기독교교육센터'를 세우고, 태국의 복음화를 지원하고 있다. 8000평 부지에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교회, 선교관을 세웠으며, 작년 말에는 교육관을 건립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훈련 받은 사람은 사회에 나가서 지도자로서 당당하게 인정받고 활동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렇게 새문안교회는 태국에 희망을 줌으로 선교발전을 도왔다.
한편으로 국내에서는 베트남인들을 위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주일 6부예배는 베트남인들을 중심으로 예배 드리고, 의료 선교활동도 함께 병행하고 있다. 또 그들에게 생활비를 전적으로 지원하고, 그들이 우리 청년들하고 어울릴 수 있도록 베트남어로 청년 대학생 중심 5부예배를 드림으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이밖에 새문안교회는 '1교인 1선교지 갖기 운동'을 통해 러시아와 중국, 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인 한 사람이 한 선교지 선정해 매일 선교지와 선교사를 위한 기도와 헌금을 하고 있다. 북한선교를 위해서도 '1개인 1통장 갖기 운동'을 추진할 예정이다. 당장은 자유로운 북한 선교를 할 수 없으나, 통일 후 북한 재건의 재정적인 지원을 위한 '북한 선교통장'을 미리 준비하고 있다. 또 중국에 숨어지내는 탈북자들을 돕기 위해 자매가정을 맺고, 참여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한편 이수영 목사는 최근 대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교회의 현실을 지적하고, 교회사명에 대해 설명했다. 이 목사는 "교회사명은 우선 대내외적으로 선교, 봉사인데, 요즘 교회들은 자신들만을 생각한다"며 "이런 자기 교인만을 위한 교회가 되지말고, 사회에 대한 책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상을 건강하게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교회가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사회 속에 어려운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인색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또 최근 교계내 문제가 되고 있는 기독교 정당 창당과 관련, 이수영 목사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4·15 총선의 유권자들의 태도에 관련해 이 목사는 "투표를 할 때 무조건 당이나 지역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고 깨끗한 사람들을 뽑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기독교 정당'의 등장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의 정치활동 반대'가 아님을 강조했다.
다만 "이미 기존 정당 속에 개신교와 천주교가 각각 40%, 25% 모두 65%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지적하고, "이로 미뤄봤을 때 사실상 기독교 정당 창당의 명분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설혹 기독교 정당을 창당한다해도 정치권의 부패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경우 이는 교인들 뿐만 아니라 대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의 뜻을 밝혔다.
김진한·최원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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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없는 신앙은 맹목적이다
신앙성장에 지름길은 없다
우리는 신앙 성장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이에 답하기 위해 우리에게 또 다른 물음이 필요하다. 앞의 질문은 어떻게 다음의 질문과 다른가? 우리는 토플 성적을 50점 올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체중을 5㎏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런 종류의 성장과 신앙의 성장이 같은 맥락에 놓일 수 있을까?
가령 성경 10독이라는 목표를 세운 후 각고의 노력으로 이를 이뤄낸다면 신앙 성장이 보장되는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신앙 성장이 여타의 다른 성장들과 뚜렷이 차이 나는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성장의 목표를 세우는 주체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성경 10독을 하는 것은 우리가 세우고 달성할 수 있는 목표이지만, 성경적인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목표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롬 8:29)는 말씀처럼,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뤄지는 것이 우리를 향해 세우신 하나님의 목표이다. 우리의 신앙 성장은 얼마나 하나님의 목표에 다가갔느냐 하는 것으로 판가름난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분의 말씀으로 빚어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신앙의 외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과 꼭 일치하진 않는다. 성경 10독으로 교회에서 큰 상을 받았다고 해도 거짓말하고 도둑질하는 일상의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면, 이는 신앙이 조금도 자란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나의 목표를 이루는 것을 신앙 성장이라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른 성장이 이뤄지기 위해선 말씀이 필수적이다. 말씀 없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올바른 성장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 없는 신앙은 맹목적 신앙(blind faith)이 될 수 있다. 종교개혁자 칼빈이 이런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만일 믿음이 말씀을 떠나면 그것은 넘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말씀을 빼고 나면 믿음이 남지 못한다”(「기독교강요」 Institutes, Ⅲ.ii.6). 말씀이 빚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말씀으로 거듭나고 재구성된 신앙인이 되는 것이 신앙 성장의 목표다.
삶에서 붙들 말씀을 가져라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비참한 형편이 무엇인지 분명해지지 않은가? 다름 아니라 말씀에 따라 자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머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라지 못하면서도 외적 지위가 자라간다면, 이는 더욱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스라엘의 전권(全權)을 가진 위치에 있으면서도 말씀이 막혀 버린 엘리 제사장의 형편이 그것을 잘 말해 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말 힘든 상황은 주변에서 어려움과 난관이 몰려오고 남이 나를 몰라주며 외로움과 무력감이 짓누르는 순간을 만나는 것 그 자체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들면 그런 것들은 아무 문제도 안된다. 진정 비참한 것은 붙들 말씀이 없는 것을 말한다. 성도들은 매일의 삶에서 낙담, 무기력, 좌절, 절망적인 생각, 유혹, 세상과 사람이 정도 이상으로 커 보이는 상황 등 다양한 난관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 때마다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관점 속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들을 해결할 수 있다. 스스로 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는 나, 세상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주인이신 그분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분명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
말씀의 유익을 위해 우리는 매일의 양식같이 말씀을 취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급받지 아니하고선 우리는 세상과의 싸움에 임할 수 없다. 그대로 세상에 먹히기 십상이다.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이 허기진 몸으로 일하러 나갈 수 없는 것처럼, 성도가 말씀의 공급 없이 일하러 나가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런 순간마다 우리의 귀에 영적 알람이 울려져야 한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집에서든 일터에서든 수시로 말씀의 공급을 위한 통로가 열려 있게 해야 한다.
언젠가 프랑크라는 네덜란드 친구와 동학사 쪽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숙소를 정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같이 배낭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저 친구는 뭘 꺼내려나, 뭐 먹을 걸 가져 왔나’라고 했더니 두 사람은 똑같이 성경을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행동이 어쩌면 그렇게 일치했던지 서로 바라보며 크게 웃음을 지었던 적이 있다. 여행의 배낭 속에도 성경을 가장 먼저 챙겨 넣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는 마음의 결단을 담고 있다.
성경을 읽는 자세가 중요하다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사귐은 성경을 매개로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잘 읽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 우선 읽는 자세가 중요하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교회들에게 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 위해 요한이 죽은 사람처럼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린 것을 알 수 있다(계 1:17). 주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의 자세를 말해 준다. 단순히 활자로 된 책을 읽는 자세가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의 위엄 앞에 꿇어 엎드린 자세로 말씀을 들어야 한다.
또한 성경을 잘 읽기 위해선 해석의 훈련이 필요하다. 말씀은 역사와 문화를 초월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 속에서 주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랜 역사의 흔적들을 조심스럽게 들춰보면서 성경을 읽게 된다. 성경을 잘 배우면서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과정을 무시한 과도한 영해나 직해 등은 때로 위험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스프라울(R. C. Sproul)이 지적한 ‘행운의 손가락’(lucky dipping) 방식의 오류도 이런 데서 기인한다. 성경을 놓고 아무 곳이나 펼쳐 손가락으로 찍은 후 그것을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졸업을 앞두고 결혼을 걱정하던 한 여대생이 남편감을 위해 기도하던 중에 ‘행운의 손가락’을 사용해 스가랴서 9장 9절 말씀을 짚어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이 말씀을 놓고 나귀 탄 남편감을 기대하는 여대생이 있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겠는가?
이런 방식의 성경 읽기는 결코 깊이 있는 신앙 성장을 이루지 못한다. 과거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으로 성경 읽기를 사모해 까막눈이었던 할머니·할아버지들이 한글을 깨우쳤던 일을 기억한다면, 오늘 우리는 말씀의 깊이에 나아가기 위해 해석의 훈련을 기꺼이 즐거워해야 한다.
이것에 대한 또 다른 유익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줄 아는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진다는 점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좋아하는 말씀만 선택적으로 취하려고 하는 영적 편식에 빠져 있다. 그래서 항상 신앙이 개인주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말씀에 따라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말씀이 펼쳐 주는 하나님 나라의 전체 시각을 나의 것으로 삼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자기 신앙만 겨우 유지하는 초보적인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돕고 양육하는 지도자의 차원으로 성장할 수 있다. 말씀 없이 신앙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엇으로 다른 사람들을 먹일 것인가?
우리 신앙의 성장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의 성장을 말한다. 그럴진대 우리는 먼저 말씀으로 자라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비참함과 위험성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주린 영혼이 돼 말씀을 갈망하며 그 속사람이 말씀으로 철저히 바뀌고 말씀 위에서 든든히 자라 가는 신앙인이 돼야 한다. 지금 당장 우리는 말씀 없이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결단해야 한다.
글·최승락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이며 저서로 「말씀 사역의 본질과 능력」이 있다. /빛과 소금 사진·김종욱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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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교회 교인들 즉각 항소해
동대문교회, 서기종 담임목사 유죄 판결 음모였다?!
간통 혐의로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동대문교회 담임목사 서기종씨는 현재 2주째 강단에 서지 않고 있는 상태. 그러나 교인들은 담임목사의 복귀를 적극 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3일 임시당회에서 제명된 바 있는 이선규 성도에 따르면 "현재 담임목사 서기종씨는 2주째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은 상태다"며 "그러나 교인들의 적극적인 복귀 요청으로 금주 예배에 강단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서기종씨의 강단 복귀와 관련, 이선규 성도는 "교회도 교단도 작은 자의 외침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며 "서기종씨 예배 중단에 관련된 청원서 제출이 저지받고 있는 현실에 암담함을 느끼고 있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한편, 지난 22일 임시당회를 열었던 동대문교회 교인들은 "담임목사를 둘러싼 음모와 모함을 밝혀낼 것"이라며 "교인들은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동대문교회를 유지·발전시켜 나갈 것이다"고 밝혔다.
현재 동대문교회 교인들은 지난번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서기종씨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으며 현재 3월 항소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이와 관련, 동대문교회 관계자는 "1심에 불복. 항소 재판 등을 걸어 판결을 지연시켜서 시간을 벌고자 하는 것"이라며 "진실은 밝혀질 것이다"고 덧붙였다.
수개월 전 이야기이다. 모 지역방송으로 전출된 아무개 PD가 김 목사에게 사신(私信)을 보냈다.
"그 동안 사장님의 그 깊으신 뜻을 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FEBC(극동방송의 영문 약칭)의 종사자라면 꼭 지방근무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개 PD를 아는 필자로서는 분명 이 글이 자기 감정을 누르고 작위적으로 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 목사는 의식한 건지 안 한 건지 이것을 직원 예배 시간에 들고 나와 읽어주고 말았다. 그러면서 희색이 만연한 채 한 마디 했다. "이 친구, 지방 가더니 많이 좋아졌어." 앞으로도 변함없이 지방 근무시키겠다는 뜻의 다른 표현처럼 들렸다.
개연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근간에 이루어진 인사발령에서 아무개 PD가 혜택을 입었다는 후문이다. 또 개연성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모 지역국으로의 인사발령을 받기 직전에 그 PD는 사장의 친인척 관계로 알려진 다른 PD와 생방송실에서 주먹다짐이 오가는 육박전을 한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지방 발령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왜 아무개 PD가 자존심을 굽혀야 했을까. 사실 충성 편지 아이디어는 C 부서장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C 부서장은 아무개 PD에게 전화를 걸어 사장에게 충성 편지 비슷한 것을 보내라고 권유했다. 직원들의 의기를 북돋으며 상처를 싸맬 길은 생각하지 않고 얄팍하게 사장에게 아부하는 법이나 가르치는 C 부서장. 안타깝게도 C 부서장도 자신이 터득한 극동방송 안에서의 살 길이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표면적으로는 아무개 PD는 극동방송의 '지방사 순환 근무' 원칙에 적용된 케이스이다. 이는 90년대부터 시작된 극동방송의 지방국 증설에 따른 인사 정책의 일환이라는 설명이다. 극동방송에서는 지방사 근무를 필수적으로 이행해야 한다. 그래야 승급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같은 일괄적인 원칙이 직원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태어나 몇 십 년 동안 살아온 근거지를 떠나 원위치로 돌아올 기약도 없는 지방근무를 하라고 하면 과연 좋을까. 게다가 언제 다시 돌아오는 것은 고사하고, 언제까지 있어야 할지도 불분명한 지방근무. 가까운 일가친척은 물론이요, 자신이 속했던 처소와 인적 인프라를 모두 떠나 직장 하나 때문에 지역을 전전하는 것.
이것을 아무런 문제 제기없이 수용하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바른 본분인가. 현격한 집 값 차이로, 또 자녀 교육문제로 야기되는 실존적인 삶의 문제까지 모두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지방근무가 좋은 것일까.
일체 군소리 없이 따르도록 만든 일사불란한 시스템
김장환 목사는 그런 면에서 탁월한 경영자이다. 잦은 지방 발령으로 인해 불거질 수 있는 각종 불만을 수면 아래로 완전히 잠재웠기 때문이다. 만약 필자가 추후에 사업을 하게 된다면 김 목사 식의 경영방식의 상당부분을 빌리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 같다. 전에 있던 기독교TV에서도 사장이 김 목사를 다각도로 벤치마킹하려 했던 것을 기억한다.
철저하게 이해관계 속에 형성된 조직을 이렇게 송두리채 장악하는 것은 비단 경영자뿐 아니라 모든 조직의 리더들이라면 꿈꾸는 모형일 것이다. 김장환 목사의 조직 장악능력에는 지방사 근무라는 좋은 카드가 있다. 이 카드로 여러 사람 '개조'시켰다. 능력은 있는데 사내 문제에 있어 다소 비판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 직원을 지방 한 번 보내면 전형적인 'FEBC맨'이 돼 돌아온다는 믿음이다. 일명 '코스 요리'.
친인척 및 최측근 직원은 지방사 근무에서 배제..."불공평" 시비
또 하나의 문제는 형평성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사장 친인척 PD는 지금 중앙국 요직을 맡고 있다. 심지어 입사 선배 여럿을 아랫 직원으로 둘 만치 고속 승진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력에는 단 한 번의 지역국 근무기록이 없다. 그 '좋은' 지방 근무를 왜 그만 빠져야 했을까.
또한 경리를 총괄하는 D 국장. 그 역시 숱하게 지방을 순회한 타 국장과는 달리 입사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지방국 근무를 하지 않았다. 물론 이들에게도 지방 근무를 시키라는 주장은 아니다. 이들이 누리는 부인이 차려주는 따뜻한 밥 먹고, 자녀를 돌보며, 행복한 가정 생활을 모두가 동일하게 누리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F 씨, 러시아, 제주, 대전, 목포, 속초 근무...10년 새 5번 발령 받아
반면, 다른 PD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는 입사 이후 10년이 지났다. 지방 근무만 두 번 했다. 가까운 곳도 아니다. 서울에서 선발돼, 잘 근무하다가 목포로 한 번, 그리고 지금은 속초에서 일하고 있다. 물론 그가 자원한 것은 아닌 것으로 파악된다. 다 상명하달의 발령 뿐이었던 것이다. 계속 회사를 다니려면 이삿짐을 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도 F 간부 앞에서는 감히 명함도 못 꺼낸다. 10년 전부터 지금까지의 그의 발령과정을 보면 기가 막히다. 하바로프스크(러시아), 제주, 대전, 목포, 속초까지. 2년에 한 번 꼴로 국내외 지역국을 돌았다. 시쳇말로 '그만 두라'는 이야기를 제대로 못 알아들은 것일까. 경영자는 조직 장악을 생각한다. 그러나 힘없는 사람들은 사람이 도구화되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 이 간극을 좁히는 노사간 노력 속에 건강한 경영문화가 꽃피울 수 있다.
가족들과 생이별 시켜놓고 '가정의 평화' 강조하는 극동방송
참 희한한 일이긴 한데, 그런 김 목사가 항상 가정의 화목을 이야기한다. 극동방송의 사규에 실제 이런 내용이 포함돼 있는지는 불분명 하나, 재직 시 "이혼하면 퇴사"라는 '불문율'이 추상같이 살아 있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 지금도 그런 내규는 유효할 것이다. 사생활 문제까지 '제도'로써 규제하겠다는 발상은 시대착오적이긴 하나, 어쨌든 가정을 원만하게 지키라는 취지는 고무적이다.
그러나 김 목사의 또 다른 원칙인 지방근무는 가정의 화목을 깨는 무게 있는 요인을 제공한다. 당장 집 값, 자녀 교육 문제 등등 근거지에서 철수해 지방으로 가기 위해 선결해야 할 고민이 많다. 같이 가면 금전적인 손해, 따로 가면 주말 부부 신세를 각오해야 한다. 지방에서 서울로 옮길 경우에는 어마어마한 집 값 때문에 아예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떨어져 있으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외도를 하게 하는 요인도 제공할 정도이다. 독수공방 신세로 살아야 하는 직원들은 불규칙적인 생활로 인해 병치레를 하는 경우도 있다. 약 먹는 남편, 자녀를 보며 과연 '화목한 가정'이 영위될 수 있을까.
물론 혹자는 선교사적인 각오가 없는 사람들이나 느끼는 세속적 고민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쩔 수 없는 고난이 아니라 강요된 고난이란 점에서 문제가 있다. 왜 극동방송에 입사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고난을 강요당해야 하는가. 지도자의 발상만 바꾸면 해결될 문제를 왜 '운명적이며 신권적 고난'이라고 이야기하는지.
지금과 같은 체제에 순응한다면 해법은 하나다. '김장환 목사의 조직장악 시스템'아래에서는 직원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동화돼야 한다.
김장환 목사의 불도저식 리더십 한계에 봉착한 듯
지방 근무. 사실 미시적이며 지엽적인 문제이다. 문제는 김장환 목사의 리더십이다. 구태에 의존해 21세기를 지배하려는, 또 모양상으로는 지배가 되는 것으로 믿고 있는 신념은 이제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김 목사는 스스로 물러날 날이 있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물러나는 순간, 극동방송으로부터 얻는 모든 형태의 기득권을 내려놓을 것이라고 믿는 종사자들이 얼마나 될까. 그의 영원히 비우지 않는 욕심은, 다수의 직원들에게 '터널 끝은 더 이상 없다'는 절망감만을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는 식의 박정희 식 독재논리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의 자리를 피폐하게 만들었는가. 이런 사람을 도구화하는 김장환 식 경영은 이제 청산돼야 한다.
인본주의를 배제하고, 복음주의를 신앙의 기조로 삼는다는 극동방송. 과연 1인 지배 체제 속에 다수의 생활인들이 사장의 명령에 의해 생계를 저당 잡히고, 그런 가운데 사장의 리더십을 추종하지 않으면 그 조직 내의 생존이 사실상 불가능한 이런 시스템을 복음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인본주의는 이런 전형에 갖다 붙이는 말은 아닐까.
한 사람의 지도력만이 조직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그 강박관념은 조직의 미래 지향성을 가로막는 것이다. 지방근무. 이것은 극동방송의 현실을 읽는 작지만 중요한 근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