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 상상력 2014-06-05 22:46:08 read : 655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폴 스캇트 윌슨 / 서병채 옮김
1. 들어가며
P. S. 윌슨의 「설교와 상상력」은 커뮤니케이션의 두 가지 측면을 다룬다. 좋은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성경 본문과 설교자의 커뮤니케이션이 있어야 하고, 청중과 설교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있어야 한다.
두 사이에서 커뮤니케이션이 효과적으로 일어나기 위해서는 ‘스파크’가 생겨야 하는데, 스파크는 ‘상상력’에 의해 가능하다. 상상력은 언어라는 도구를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이 책은 상상력은 연주가가 천부적인 소질에 상관없이 기술을 배워야만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듯이, 설교자는 상상력을 연구하여 습득해야만 플룻 소리처럼 청중의 관심을 이끄는 설교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설교에 있어서 상상력은 어떤 역할을 하며, 그 중요성은 어떠한가? 상상력은 어떻게 훈련될 수 있고 어떤 식으로 연습되어야 하는가? 요일별로 구분하여 상상력과 설교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 보자.
2. 상상력은 배우는 기술이다.
일요일에는 상상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상상력을 연마할 다짐을 하는 날이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 말씀을 좋은 방법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 매주 대하는 본문을 흥미롭게 대할 수 있을까? 상상력으로 접근하면 가능하다.
상상력은 어떻게 가능한가? 많은 사람들이 상상력을 예술가의 일로 연결하려 하거나 천부적인 은사라는 측면에서 생각한다. 상상력은 길러진다. 연주자들의 연주 능력이 기술을 연마함으로 가능해지는 것과 같다. 타고난 재능이 어떻든, 아름다운 연주는 열심히 연주를 연습해야만 나올 수 있다. 마음의 상상력도 배워서 사용될 수 있는 기술이다.
그리고 상상력을 사용한 기술은 신앙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상상력은 믿음에 의해서 고무되고 믿음은 상상력에 의해 강화된다. 마음은 인격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상상력은 마음에서 나와서 다시 마음으로 돌아간다.
그림 언어의 효과에 대해서 크래독은 “상상력이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한 바 있다. 머리로만 생각해온 스타일은 가슴(마음)으로 생각하는 스타일로 바뀌어야 한다. 설교자는 상상력을 경험과 성경을 통해서 얻기 때문에, 그들의 상상력을 성경과 분리시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상상력이란 설교자가 잘 연결되지 않는 두 아이디어를 접목시키는 것이다. 대개 우리는 상상력을 언어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언어라기 보다는 그림이며, 상상력이란 그림을 그리는 듯한 능력으로 생각하기 쉽다.
상상력이란 그림이나 정신적인 감각 이미지가 포함된 언어 없는 신비일 수도 있다. 그림같은 이미지는 새로운 어휘들을 발견하도록 해준다. 상상력을 통한 어휘 발견은 다양한 훈련을 통해서 가능하다.
언어는 생성하고 소멸하는 특징을 갖는데, 상상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사실이다. 구원, 구속. 성육신. 복음, 십자가와 같은 신학적인 말이 수많이 말들이 반복되지만 회중에게는 깊이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설교자의 언어 갱신이 절실하다. 언어 갱신은 신앙 갱신이다. 상상력은 언어를 갱신하고 갱신된 언어는 신앙 갱신에 있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준다.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새롭게 한다. 상상력에 기초한 언어의 갱신은 설교의 중요한 임무다.
3. 성서본문과 우리의 상황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상의 불꽃
월요일에는 신학을 위한 두개의 재료는 성경본문과 삶의 경험과 언어라는 생각을 하는 날이다. “성서 본문을 가지고 설교준비를 한다는 것은 마치 저녁바람을 타고서 멀리서 들려오는 플룻 소리와 같아야 한다.” 우리는 음악 소리를 들으려고 긴장하고 귀를 세우고 호기심을 느끼고 그 소리의 달콤함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마음의 상상력은 성서와 경험에 의해 생긴다. 우리는 설교에서 성경 본문과 자신의 삶 사이에 연결이 있기를 바란다. 성서 본문(그 자체의 상황)과 우리(우리의 상황)사이에 균형있는 대화가 있도록 하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다. 성서 본문과 우리의 상황은 두 극으로서 병렬로 또는 반대로 서 있기 때문에 마음의 상상력은 불꽃처럼 일어날 수 있다.
많은 설교자들이 상상력이 가미된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상상적인 설교 본문’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오해다. 상상적인 설교 본문이 따로 있지 않다. 거의 모든 본문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놀라운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다. 문제는 어떻게 본문으로부터 상상력있게 아이디어를 끄집어 내느냐에 있다.
힘차고 상상력이 있는 설교에서는 성경 본문과 우리의 상황이 양극으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기에 우리가 본문을 우리의 상황과 관련해서 주석을 제대로 한다면 반드시 불꽃이 일어난다. 스파크는 그 불꽃은 본문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성서본문과 우리 상황 사이에서 일어난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본문이 선택되자 곧 주석책으로 간다. 우리의 상상력은 탐구할 기회를 필요로 한다. 가능하다면 본문의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확인해야 한다. 특별한 단어나 구의 의미 또는 뉘앙스가 원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신선한 이해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친숙한 주석을 열어보기 전에, 성서의 다른 책을 비교해보기 이전에, 이 본문을 가지고 지난번에 어떻게 설교했는지 확인하기 이전에, 이 본문의 의미가 무엇이며 또 어떤 교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하기 이전에, 이야기를 상상해봄으로(상상력을 발휘), 본문의 어떤 생동감을 다시 가져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야기를 상상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선입관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증인의 심정으로 이미 준비된, 그리고 즉각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 아니며 어떤 기간의 지식을 가지고 이야기에 접근하는 것도 아니다.
좋은 문학서적을 읽으면 창조력이 점점 더 늘어나게 되고 어휘나 단어 사용에 있어서 상상력을 점점 더 쌓아올리는 효과를 가져온다. 훌륭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과 시인들의 섬세함을 통해서 더욱 설득력 있는 자료를 만들 수 있다. “짧은 이야기는 설교의 첫 사촌이다.”(F. B. Craddock)
우리가 본문에 접근할 때에 마음의 상상력을 돕기 위해
1) 질문이 나타나도록 허락해야 한다. 우리의 질문은 해답을 얻기 힘들 수 있다. 염려할 것은 아니다. 질문의 기회가 주어지기 전에 상상력의 가능성을 잘라 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2) 질문은 해답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질문은 해답의 가능성을 허락하는 것이다. 질문은 해답의 전주곡이다.
3) 창조적인 사람은 가장 작은 가정에도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작아보이는 질문이라고 꺾지 않는다.
질문을 하거나 본문의 특별한 의미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가능한 짧게 묻고 짧게 기록해야 한다. 선입견은 본문을 대하기 전에 이미 생긴다. 선입견이 생기기 전에 우리 생각 속에 떠오르는 질문을 떠 올려야 한다.
짧지만 최조의 질문은 새로운 감상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그런데, 성경본문을 주의 깊에 보지 않으면 본문이 열어 놓은 상상의 가능성을 닫아버리게 된다. 성경 본문을 유심히 관찰하는 일은 힘있고 상상력 있는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면 어떻게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주해할 것인가?
본문에 대해 충분히 기초를 깔아놓은 다음에 주해를 해야 한다. 본문에 대해 아주 강한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주해라 는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적용되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들려진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자세다. 우리는 상상력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본문을 자유롭게 펴 놓아야 한다. 우리는 본문을 펴 놓고 본문으로부터 창조적으로 듣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1) 본문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들,
2) 본문이 기록될 당시의 문화 양상,
3) 저자의 개인적인 신학 또는 세계관을 이해해야 한다. 이 이해는 오늘의 사회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여 오늘로 전달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서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성서적 설교를 위한 주해의 목표는 우리 자신을 본문의 판단 아래 굴복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고 상황들을 주해 과정에서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석가들이 얘기한 것에만 집중하여 우리의 상상력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아주 작은 주해라고 기억하여 상상력의 재료로 사용해야 한다. 설교자는 성경을 읽을 때 의혹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성경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경을 올바로 그리고 깊이 이해하기 위한 질문을 말한다.
성경에는 왜곡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잘못되었다. 성경에서 상상력을 끄집어내고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기 위해서는 성경의 왜곡을 부정하고 참된 진리임을 믿어야만 한다. 성경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비평 도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한 본문에 대한 여러 견해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성경 본문을 심리학적으로 이해한다든지 도덕주의적으로 이해하면 성경 본문의 의미를 왜곡할 수 있다. 설교의 반 이상은 도덕적(윤리적)이라는 말이 있다. 성경 본문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상상력을 갖고 접근하기 위해서 성경본문 자체를 깊이 연구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도덕적이거나 틀에 얽매인 사고, 또는 선입관을 가질 때 설교자는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할 기회를 막게 되고, 청중은 지루하고 의미를 알 수 없지만 반복되는 단어를 들어 식상하게 된다.
4. 두 개의 아이디어 : 율법과 복음, 심판과 은혜
화요일에는 율법과 복음, 심판과 은혜의 구도를 생각한다. 지금까지 율법과 복음, 또는 심판과 은혜에 대해서는 많이 연구되고 논의 되었다. 그러나 설교학적인 측면에서는 두 개념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강단에 선 설교자는 아직도 두 개념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하지 못한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부담 을 주며 뭔가를 하라고 요구 한다.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율법과 복음 사이에 어떤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본회퍼가 말한 것처럼 율법이 제외된 설교는 값싼 은혜를 전하는 것이다. 격려의 말이나 낙천주의를 위해서 율법을 삭제시키는 것은 세속화로 가는 지름길이다.
성서의 모든 본문은 율법과 복음, 심판과 은혜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설교자는 율법의 기능과 역할을 주의 깊게 다루되, 설교에 있어서 ‘율법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일에는 열심을 내야 한다.
‘좋은사람들은 일찍 죽는다’, ‘힘은 정의를 만든다’, ‘만약에 열심히 일한다면 성공할 것이다’, ‘성공이란 것은 정상에 도달하는 것이다.’는 표현을 자제한다. 설교 전달에 있어서 율법적인 행동(좌우로 마구 흔드는 손가락, 지적하는 손가락, 들어올리는 주먹, 분노, 고함을 지르든지 또는 변함없는 목소리들)을 지양해야 한다. 명령하는 어투, 곧 ‘~해야한다’, ‘깨달아야 한다’ 등을 제거해야 한다.
율법적인 용어들은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겠다. ‘해야 한다’보다는 ‘하는 것이 좋다’, ‘깨달으시오’보다는 ‘우리는 지금 봅니다’ 또는 ‘그것은 우리에게 분명합니다’로 하는 것이 좋다. 이런 말들은 초청식이고 확언하는 스타일이지 결코 꾸짖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힘을 빼기보다 용기와 힘을 준다.
5. 이야기로 상상을 전달한다.
수요일에는 교리를 어떻게 경험 속에서 불꽃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떠오른 상상을 전달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좋은 설교자는 상상력을 통해서 사람들의 고통과 문제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한다.
마음의 상상력이란 성서와 경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경험과 교리사이에는 불꽃이 일어난다. 갑작스런 경험을 통해서 기독교 교리를 깨닫게 되면 불꽃은 성공적으로 상상력의 불을 낼 수 있다. 이런 경험과 불꽃은 설화체 설교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이야기의 예술은 청중을 포함시키고 청중의 응답을 불러 일으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예수님은 교리를 설교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으시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성경 본문에 나타난 교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현실에서 경험된 언어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전달해야 하고, 설교자는 교리나 이야기를 다룰 때에 가능한 추상적인 단어들을 피해야 한다.
6. 설교자는 목자이면서 예언자다.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에는 목회자요 예언자로서 어떻게 중요한 이슈를 다루면서 회중을 돌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부분적인 의미로 우리의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다. 목자의 역할이다. 설교자는 예언자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반드시 다루어야 할 문제를 언급해야 하는 일이 예언자에게 주어졌다. 교회의 회중을 위한 설교자는 목자인 동시에 예언자가 된다. 예언자와 목자가 해야 할 사이에는 긴장감이 있다. 양육을 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촉구해야 하는 일 사이의 긴장감이 있는 것이다. 예언자와 목자의 역할을 확대시킬 필요가 있는데,
1) 우선, 설교자는 목자로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교리를 확장해야 한다. 좋은 목자는 현재 있는 회중만 보지 않는다.
현재의 회중만 청중으로 이해하고 섬김과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전달하는 내용이 편협해질 수 있다. 설교자는 먼저 간 사람들, 비록 다른 곳에 있지만 오늘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아직 있지는 않지만 앞으로 올 미래세대의 사람들과 함께 있다. 이런 인식을 할 때, 설교에 있어서 목자의 기능과 교리를 전달하는 예언자적 기능이 조화될 수 있다.
2) 설교자는 악(evil)에 대한 교리를 넓혀야 한다. 사회에 존재하는 조직적인 악은 교회에도 있는 현실이다. 어린 아이들이 학대받고 있는 것, 구타 당하는 아내, 약자가 피해를 당하는 일, 수 백만 명이 굶어죽는 현실. 비록 자신의 교회에는 없어도 전 세계로 눈을 돌려보면 그들은 교회의 구성원들이다.
설교에 있어서 악에 대해 철저하고 넓은 이해를 가질 때, 현재의 청중을 향한 설교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넓고 철저하게 다뤄질 수 있다. 예언자는 인간 사회가 간직해야 하는 꿈을 전달한다. 악몽에서 벗어나 꿈의 실현하도록 돕는다.
설교자는 악의 상황에서 꿈을 꾸고 그 꿈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는가 살펴 보고 그런 이야기들을 모은다. 그런데 삶의 현장에서 꿈을 갖고 꿈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예언자적 역할이 목회적 역할과 분리될 수 없다.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이 악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목회자로서 그들을 돌봐야 한다. 따라서 목회직과 예언자직은 함께 어울려 가는 것이다.
사회적인 악이나 곤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다룰 때와 같이, 예민한 이슈를 다룰 때는 직설적으로 전달하는 것보다 이야기가 더 효과적이다.
이야기란 것은 종종 어떤 적대감과 증오심이 없이 어려운 이슈를 듣도록 해주는 그런 방법으로서의 기능을 하는데, 특히 만약에 우리가 어떤 사람의 실제 경험을 이야기의 소재로 사용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마음 깊이 영향을 받게 된다. 이런 면에서 이야기는 교리보다도 덜하지 않다.
오히려 더 예리하게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다윗 왕에게 다가가서 그의 문제를 지적한 나단의 이야기에서 이런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양을 가진 목자와 양을 뺏는 악한 주인의 이야기는 다윗의 머리 속에 정확히 꽂혀서 자신의 문제를 드러내 놓고 통회하도록 했다.
소렌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간접적으로 대화하신다”는 내용을 다룬 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가 갖는 힘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예수님께서 어려운 이슈들을 다루는 방법 중에 자주 사용하시는 것은 바로 이야기였다.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우리도 스승과 같이 예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
목회자요 예언자로서 설교에 있어서 사회 정의에 관한 주제를 다룰 때는 먼저 실제로 그 일에 포함된 사람들의 직접적인 이야기들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다음, 그들의 경험에 대한 반응을 들어야 한다. 만일 설교자 자신이 그 문제에 포함되었다면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듣고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그런 후에 이야기로 설교하면 교리는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큰 호소력으로 접근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설교에서 목회와 예언적인 이슈들을 어떻게 다루셨는가? 어디에서 분노하는 것을 선택했는지, 언제 그의 신발의 먼지를 털었는지, 그리고 누구의 발을 씻기려고 했는지? 예수님은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얘기를 하셨다. 어떤 사람이 로마정부로부터 부름을 받고 먼길을 떠난 시사 이야기를 하셨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시사 내용이 실제로 청중이 아는 것이었으므로 청중은 ‘그것이 사실입니까?’는 식으로 질문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언급하신 사건이 실제 사건이었고 청중이 익히 아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는 호소력을 주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문제를 일으키는 이야기들과 연결시킨 아이디어들이었다. 예수님께서 그의 설교에서 목회적이고 예언적 중요성을 가진 어려운 이슈들을 다루실 때, 교리를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
산위에서 가르치신 8복, 이혼과 간음에 대한 교훈 등이 그것이다. 예수님은 간접적으로 교리를 다루기도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와 같다’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의 설교에서는 청중들에게 의식적인 수준에 영향을 끼치는 간접적인 이야기를 자주 사용함으로서 교리 전달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중요한 이슈를 전달할 때, 청중들에게 의식적인 연결이 될 수 있도록 커뮤니케이션에 신경을 써야 한다.
제기된 이슈들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1) 좋은 영화나 책을 언급할 때 감질날 정도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영화나 책을 성도들이 보려하지 않을 것이고, 다룰 이슈의 관심을 일으키는 제 기능에 충실하지 않게 된다.
2) 이슈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두 세 그룹 정도로 나뉜다.
3) 이야기를 전개할 때는 주인공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의 이동을 따라야 하고 다른 주인공을 무분별하게 등장시킴으로 원 주인공의 이야기가 약화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4) 특별한 행동이나 인물의 특징을 그려볼 필요가 있다.
5) 설교 전체가 이야기로 채워질 필요는 없으므로, 이야기를 너무 빡빡하게 채우려는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
6) 성경 본문이 교회의 이야기를 한다고 이야기도 교회의 생활에서만 끄집어 낼 필요는 없다. 본문의 이야기와 우리 자신의 삶 사이의 거리가 크면 클수록 우리가 창조해 낸 ‘스파크’는 더 능력있게 나타날 것이다.
7) 생활 속의 다양한 경험에서 이야기를 선택한다.
8) 개인적인 이야기를 사용하는데, 사적인 이야기와는 구별된다.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설교자의 인품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배제시켜야 한다.
9) 허구보다는 실제 이야기를 해야 한다.
7. 맺으며 : “설교와 상상력 그리고 설교자로서의 나”
「설교와 상상력」은 설교에서 상상력이 갖는 중요성을 체계적으로 살피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좋은 설교자는 교리와 설교 사이, 성경 본문과 설교자의 교리 사이, 설교자의 생각과 청중의 삶의 현장 사이에서 ‘불꽃’을 일으킬 줄 아는 사람이다.
불꽃은 어떻게 생기는가? 상상력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저자는 율법과 복음, 심판과 은혜를 구분하여 설교의 두 중심 틀을 언급하고 있다. 율법적인 설교를 지양해야 하지만 두 중심 주제를 너무 인식하여 본문을 대할 때 두 중심 구조 틀에 얽매이지 않을까?
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두 개념 사이의 스파크가 일어나야 한다는 논리를 ‘언어 숙달을 통한 상상력’이라는 관점에서 불꽃이 상상력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처럼 성경 본문과 설교자,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상상력이 중요한데, 이 상상력은 개발될 수 있는 기술이다.
연구하고 습득해야 한다. 상상력은 언어에 대한 깊고 폭넓은 이해로 가능하며, 언어의 갱신은 상상력의 갱신을, 상상력의 갱신은 설교의 생신을 낳고 언어의 갱신이 신앙의 갱신을 일으킨다. 청중은 자기 속에 들어온 언어의 개념이 달라질 때 신앙의 갱신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언어의 능력을 최상으로 발휘하여 언어를 잘 사용해야 한다. 설교자는 성경 본문에서 단어를 듣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다시 듣고 이해하며, 독서 등을 통해서도 언어 갱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특히 설교는 그 자체에 예술적인 것을 갖고 있으므로 예술을 배우듯이 설교의 기술, 그 중에서 표현하는 언어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나 역시 설교자요 훈련받고 있는 사람으로서, 언어의 갱신이 일어나도록 끊임없는 연습으로 해야 하겠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세계를 위한 언어를 특별한 방법으로 지키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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