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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길 40년이주는 교훈을 기억하자” 2002-09-04 16:25:02 read : 36427
2002.6.2.
신명기8:1-10절
중국 초(楚)나라 패왕 항우(項羽)의 군대와 한나라 유방의 군사간에 전투가 벌어졌는데 머침내 초는 한의 대군에 의해 ‘해라’에서 패하여 포위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항우의 군사는 그 수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밤만 되면 사방에서 고향인 초나라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가 들려왔습니다. 이것은“장양”의 노래 작전이었는데 그것을 모르는 향우와 군사들은 초나라 백성들과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다 결국 한나라에 항복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방이 모두 적에게 들러싸여 누구도 도와 줄 수 없는 고립되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광야의 모습입니다.
광야는 고독하고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하고 한적한 빈들, 황폐한 곳, 버림받음 등의 뜻으로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우리 성도는 지금 이런 광야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다보면 좋은 때도 만나고, 때로는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는 나쁜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순탄할 때도 있고, 환난의 때도 있습니다.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습니다.
나의 소원대로 착착 이루어진 때도 있고, 앞길이 막히는 때도 있습니다.
내 소원대로 형통할 때라고 다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련과 고통 환난의 때라고 해서 모두가 해로운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기만 하면 그 때가 오히려 나에게 크나큰 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과거의 역사를 회상함으로써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며 내 생애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고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역사 공부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과거를 돌이켜 보면 좋았던 때라고 기억되는 때가 있고, 참으로 힘들고 어려웠던 때라고 기억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좋았던 때만을 기억하면 삶이 허무해집니다, 현재를 바라보면 실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게 되면 겸손해지고 감사가 솟아 오르며 자족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에 과거를 돌이켜 보는 일도 과히 나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또는 기억해서는 안 될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날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믿음을 얻는 다면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사 자기 백성을 삼으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절 말씀에 보면“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40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낯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40이란 수가 많이 쓰여짐을 봅니다.
교회마다 사순절이 되면 사순절 40일 특별기도회, 평소에도 40일 특별 새벽기도회, 40일 금식기도 등 40일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머문 기간이 40일 입니다(출24:18. 신10:10), 요나가 니느웨성의 회개를 촉구한 기간도 40일입니다(욘3;4).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했으며 시험을 받으셨습니다(마4:1-2). 주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지상에 계셨습니다(행1:3).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양육받은 후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보고져 했을 때 그의 나이 40세였습니다(행7:23), 그후 40년을 미디안 광야의 이드로의 양치기로 지내기도 했습니다(행7:30).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로 40년을 그들과 함께 광야에서 살았습니다(신34:7),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함께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민14:33),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로 먹이신 기간도 40년이요(출16:35), 그들의 옷과 신이 헤어지지 않은 기간도 40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광야생활 40년은‘가데스 바네아’로부터 비롯됩니다. 저들은‘가데스 바네아’서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서 살아야 될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됩니다. 가나안의 정탐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의견을 받아드려 각지파의 대표자 12명을 뽑아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장차 차지할 가나안을 두루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기간이 40일이었습니다. 그들이 40일간 정탐한 가나안의 보고를 하게 됩니다.
1) 다수의 열지파 대표들은“우리는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라는 보고를 합니다.
2) 그러나 소수의 두지파의 대표자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 라”는 보고를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기 다수의 보고와 소수의 보고를 놓고 투표를 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우리는 가지 않겠나이다”(민14:1-3)라는 슬픈 결정을 하게 됩니다. 이 결정은 저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도와준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는 10번째가 됩니다.
이처럼 저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열 번씩이나 크나 큰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1) 홍해에서 바로의 추격을 받았을 때“애급에 매장지 가 없어서 우리를 이곳으로 이끌어 내어 죽게 하느 냐”고 하면서 원망했습니다(출15:24).
(2) 그들은 홍해를 건넌 후 3일 길을 지난 후 광야에서 물어 없으므로 마라에서 쓴 물 때문에 모세를 원망 했습니다(출15:24).
(3) 신 광야에서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원망했습니다.
(출16:2-3).
(4) ‘르비딤’에서 물이 없어 원망했습니다(출17:1-3).
(5) 시낸산에 올라간 모세가 기다려도 내려오지 않자 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므로 범죄했습니다(출32:1-6).
(6) 그들은 ‘가데스’로 행진해 오면서 세 번이나 배반 했습고(민11:1-4), 민14:1-4절에보면, 또 두 번이나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모세가 10가지 재앙으로 강퍅했던 바로에게서 간신히 구원받아 출애급한 선민의 백성들은 그 크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열번씩이나 배반한 것입니다.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저버린 저들을 한 사람도 축복의 땅‘가나안’에 들여 보내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 수 사십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그 40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찌니, 너희가 나의 싫어버림을 알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민14:34).
그 후 40년 이스라엘 백성은 마지막 20세 이상 된 자가 죽어 묻힐때까지 광야에서 방황해야만 했습니다. 너무나 무서운 죄값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출애굽할 때의 모든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가데스바네아’에서 불신앙의 보고에 동참함은 물론, 하나님을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살아 남은 사람은 단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이렇게 비참했습니다. 불신앙은 모든 비극의 원임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광야의 40년 동안의 고된 훈련의 과정을 거친 저들은 이제 요단강 동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태어난 제2세대들에게 광야생활을 회상함과 동시에 율법을 반복하여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명기는“제2의 율법”입니다.
신명기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행하신 일들과,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한 후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하는가를 모세가 백성들에게 회상시킨 책입니다. 즉,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준비의 책인 것입니다.
그토록 힘들고 어려웠던 광야의 생활은 이제 끝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요단동편 모압 평지에 있습니다. 그들은 오래지 않아 가나안을 향하여 요단을 건널것입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40년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하신 것을 기억하라”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40년의 광야생활에 대한 회고요.
둘째는-앞으로 들어갈 가나안의 생활에 대한 전망입니다.
이 두가지는 지난 광야생활 40년을 마무리짓는 의미에서 필요하고, 또 언약의 땅에서의 새 생활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지난날을 회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큰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과거에 대한 회상은 우리의 신앙성장에 거울로서 매우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2) 지난날의 일들을 돌아본다는 것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3) 우리는 지난 과거를 돌아봄으로서 그들의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수를 되풀이 않 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실 수가 오늘의 우 리들에게 경고가 되기 때문입니다.
(4) 인생은 너무나 짧고 불확실하기 때문에 회상은 필 요 합니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인생 앞에 무 슨 일이 닥쳐 올지 우리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 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지나간 과거뿐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모든 일들은 쉽게 잊혀지고 사라져가기 마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과거를 기억하고 회상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 여기 광야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의미가 있습니다.
1) 광야는 영적 연단을 의미합니다.
시험은 예수 믿는 사람이 당하는 영적 전투입니다.
남편이 믿지 않음으로 오는 핍박, 부모님이 믿지 않아서 따르는 여러 가지 고통 등은 우리가 광야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광야는 가치관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과거에 그렇게도 좋아 보이던 것이 좋지 않게 보입니다. 과거에 가치있게 생각되던 것이 무의미하게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허무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세상에서는 아무리 살펴 보아도 위로 받을만한 것이 없고 진정한 평안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가치관을 우리가 인생의 광야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3) 광야는 나그네 생활이 주는 피곤을 의미합니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홈 스위트 홈‘즐거운 나의 집’의 작가인“존 하워드 페인”그는 한평생 아내를 얻지 않았고, 집도 가지지 않은 상태로 이 지구 위를 헤매었다고 합니다. 이 노래도 그가 프랑스 파리에서 글자 그대로 한푼도 없는 처량한 신세에 놓였을 때 지은 것입니다. 그가 1851년‘크러크’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정의 기쁨을 자랑스럽게 노래한 나 자신은 아직껏 내 집이라는 맛을 모르고 지냈으며 앞으로도 맛보지 못하고 말것이오! 그는 이 편지를 쓴 1년 뒤‘튀니스’에서 사는 집도 없이 길가에 쓰러져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려고 할 때에 피곤이 옵니다. 죄가 우굴거리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도성에서 진통을 겪는 일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광야이며 나그네 생활입니다.
이 세상은 사단의 지배아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사형장입니다. 이런 곳에서 성도들이 아무리 시원한 생수를 찾아 보아도 쓴물을 내는 마라만 있을 뿐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오아시스와 같이 보여도 달려가서 먹을 수 없는 쓴물입니다. 그것이 나그네 인생입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전1:8) 전도자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광야의 가치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광야를 피하기 위한 도피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이 편하고 기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움은 사라지고 자신이 바라는데로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시험이 있습니다. 곤고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의 의미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행복을 위한 도피처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고난을 피하는 샛길도 아닙니다.
자기의 유익만을 위하여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통하여 산산이 부서뜨리시고 다시 만드십니다.
그런 뒤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축복을 받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속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재물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까?
재물에 대한 욕심이 깨어지도록 광야로 내몰 것입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향한 야망이 우상이 되어 있습니까?. 이것이 깨어지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핑크(A. Pink)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서도들을 광야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1) 광야의 시련을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무가치한 가를 발견하게 해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한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를
광야의 삶을 통해서 체험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 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광야와 같은 시련이 없이는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광야 길에서 당하는 시험과 고통, 우습게 여기지 마십시요.
경제적으로, 건강으로 여러 가지 진통을 겪고 있을 때 값싼 동정에 못이겨 금방 가위를 들고 가서 짜르려고 하지 마십시요. 하나님께서는 그를 더 큰 위험에서 막아 주시고 믿음의 날개로 세상을 날며 살도록 하시기 위하여 허락하신 시련인지 누가 압니까?.
2.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 다.
(1)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 로 하여금 겸손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교만한 이스 라엘의 콧대를 꺽기 위함이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광야에서 겸손을 배우는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는 너를 낮추시며---”
(2)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나약함을 알게 하기 위 함이었습니다. 교만한 인간은 자기자신의 실상을 모릅니다.
사람들은 웃을 때 보다 눈물을 흘릴때에 더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사람들은 행복한때보다 어둡고 캄캄한 역경의 때에 자기자신의 초라함과 무력함을 더 알게 됩니다.
(3) 이스라엘의 속마음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여 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하셨습니다(2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없이는 아무도 위대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4) 그들로 하여금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은 회개토 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죄속에 살아야 할 자들이 아니라 선민의 백성들로서 구별되게 살아야 할자들입니다.
(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신 목적은 그 들로 하여금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도록 하기 위함이 었습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못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들을 광야로 내몰았습니다.
(6) 그들을 교훈하고 가르쳐서 신령한 하늘의 복을 받 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으니”(신8:16)라고 말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이요 축복입니다“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 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히12:6).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계셔서 이곳에 옥포교회를 세우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한 것처럼 지난 날 우리 교회도 방황하면서 숱한 애환을 간직한채 106년의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106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위기의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셨듯이 옥포교회의 등불을 끄지 않으셨습니다. 옥포교회의 설립자이신 하나님은 이 교회가 어지러웠을 때에도 흩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3. 광야에서 얻는 영적 유익이 있습니다.
1) 기도하게 만듭니다.
모세와 백성들이 부르짖었습니다. 고난과 시련은 마 치 바람과 같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요.
2) 영의 눈을 뜨게 합니다
모세가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셨습 니다. 광야의 시련은 육신적인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 었습니다.
3) 십자가를 반견하게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눈이 열렸을 때 그는 한 나무를 발견했습니다. 그 나무를 꺽어 마라의 쓴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았습니다. 그와같이 고난과 시련 을 통하여 십자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4) 쓴물이 단물로 변하는 은혜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문제 해결의 놀라운 체험을 얻게 합니다. 문제를 해 결할 수 있는 방법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 의 쓴물이 있는 샘물 바로 곁에 단물로 변하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고난을 통하여 쓴 맛을 주던 문제들이 단 맛을 내는 축복으로 바뀌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믿습니까?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 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이제 광야길 40년을 방황했던 이스라엘의 장래를 전망하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가도 가도 끝이없는 방황의 길만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게도 소망은 있는것인가? 지겨운 광야생활은 이제 끝나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가야 할 광야의 길은 남아 있는것인가?.
오늘 본문이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광야길에 지친 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른다”는 것입니다(7절).
고난의 광야길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여기 가난안 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땅에는 시내물과 샘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천국의 놀라운 축복을 말합니다. 즉 교회를 통하여 얻는 영생수를 의미합니다.
또 저들이 머물 가나안 땅은 밀과 보리와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하였습니다(8). 그 땅에는 배고품이 없고 모자람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은 철과 동의 산지라 하였습니다(9). 본문의 마지막 절에서는 이같은 복된 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
광야의 길 40년 동안 고된 훈련의 과정을 잘 끝낸 저들에게 이와같은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굶주린 그들에게 먹을 것이 있고, 갈급한 저들에게 샘물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얽매여진 그들에게 자유가 있고, 범죄한 그들에게 구원의 축복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각하면, 나그네 인생이 광야같은 세상을 마치면 영원한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을 예표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함께 이처럼 엄청난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실 축복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예벤에셀’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광야에서의 방황을 빨리 끝내십시오.
더 이상 지체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신앙생활 하면서 광야에서 배회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는 한데 심령이 불꺼진 사막과 같습니다.
우리의 심령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사실이 깨달아질 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광야의 생활을 빨리 청산하고 가나안 땅처럼 심령에 젖과 꿀이 흐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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