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부름심과 성도의 소명의식 2002-09-04 16:17:31 read : 30882
이사야6:1-8절
미국의 백화점 왕이었던‘존 와너메이커’에게 대통령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그의 탁월한 경영 솜씨를 가지고 장관직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이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대답했습니다“나는 교회학교 교사인데 내가 만일 장관이 되어 나라일에 바빠 내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대통령이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학교 교사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하자 ‘와너메이커’가 장관직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문 기자가 그를 만나 미국의 장관직이 교회학교 교사만도 못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그야 교회학교 교사직은 나의 본업이고 장관직은 부업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일평생 해야 할 교회학교 교시직이 본업이지 한두 해 하다 말 장관직이 본업이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부름받은 이 자리를 그저 한때 잠깐 경험해 보는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일평생 해야 할 본업으로 생각하며 강한 소명감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나님과 이사야 선지자 사이에 오고간 대화의 내용입니다. 두 분의 대화 내용은 매우 짧지만 그 속에는 참으로 중요한 의미들이 담겨있습니다.
두분의 대화 가운데 보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당신의 사명자로 선택하시는가?’하는 것이고 반면‘선택함을 받은 사람은 어떤 본을 보여야 하는가?’하는 두 가지 깊은 의미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호주 선교의 첫 걸음을 걸었던 초대 순교자‘윌리엄스’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복음의 전진은 중단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뜻으로 이 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이므로 나는 갈 수밖에 없습니다”하나님이 보내셔서 호주 선교사로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 의식입니다. 내가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보내 주셨습니다. 사명감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 믿고 주를 믿고 산다는 분명한 자의식입니다.
적어도 주님을 체험한 사람들은 이런 확고한 소명 의식이 있어야만 됩니다.
소명 의식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 뜻 안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해 주신 귀한 사명임을 늘 깨닫고 소명 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감당해야 합니다
내가 교회에서 교사로서, 찬양대원으로서, 구역장으로, 기관장으로서, 개인적인 사업을 하던 직장생활을 하든, 내가 무엇을 하든 간에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고 하는 분명한 신앙인의 소명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람을 보내실 때 분명히 뜻이 있어서 보내십니다. 그리고 분명히 필요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부르신 그 사람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특히 일꾼으로 쓰임받고자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을 만나 봐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체험이요 만남입니다. 이 만남의 관계에서 믿음이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 안에 소명 의식이 있습니다.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때는 남 왕국 유다 왕 웃이야가 죽던 해였습니다.
웃시야는 유대의 10대 왕으로서 부친 아마샤를 이어 52년 동안 나라를 통치한 선한 왕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선한 왕 웃시야가 죽자 백성들은 목자 잃은 양처럼 방황하게 됩니다.
당시 이사야는 왕 밑에 있으면서 왕의 총애를 받던 신하로서 왕을 잃은 슬픔은 이루말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가늘 수 없었던 이사야는 성전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이사야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 환상 속에서 본 것은 보좌에 앉은 왕의 모습과 그 옷자락을 성전에 늘어뜨린 제사장의 모습을 하고 계신 주님이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셨습니다.
당시는 국가적인 위기였습니다. 정치를 잘 했던 강력한 왕이 교만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데 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바로 그때에 주변의 다른 나라들은 세력이 점점 막강해져서 백성들이 불안해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이사야에게 바로 위기가 왔습니다. 환란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는 웃시야왕의 사촌입니다. 당시 이사야는 왕궁을 자유롭게 출입하는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이 죽었다고 하는 사실은 그의 정치적인 배경이 그만 끊어지게 되었다고 하는 일입니다.
개인적인 면에서 국가적인 면에서 이것은 분명히 위기요 환란입니다. 그러나 이 위기는 새로운 기회가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주 안에 사는 사람들은 위기가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환난을 통하여서 우리는 귀중한 진주를. 새로운 보화를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십시요.
그가 얼마나 크나큰 시련과 위기를 겪게 됩니까?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그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후에 보디발의 하인이 됩니다. 거기서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겠다는 그의 노력이 결국은 오해를 받게 되고, 그 결과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가 훗날에 형제를 구하는 영광이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요셉은 자신에게 되어진 일련의 모든 사건을 소명적인 부름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적어도 이러한 신앙의 깊은 자리에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환란을 당하든, 고난을 당하든, 위기가 닥치든, 아픔이 있든, 어떤 문제가 나를 도전해 오든지 모든 것들이 나를 연단시키고, 나를 새롭게 하시고, 나를 강하게 하시고, 나를 축복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부르셨습니다. 은혜를 주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사명을 맡기시려고 부르셨습니다. 한 세대에 귀하게 쓰임받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심은 곧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입니다.
이유없이 뜻 없이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3월31일 안수집사를 피택하고자 하는 일도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염려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이 세우시면 하나님께서 능력 주셔서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다만 우리 모두에게는 분명한 소명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1. 소명을 받은 사람은 먼저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먼저 사람답게 되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된다는 것은 실력이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뜻하며, 사람 구실을 한다는 것은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사명이란 무엇입니까?
사명에서의 사자(使者)는 심부름 한다는 使者입니다.
옛날에 파출소나 학교에서 잔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소사. 나라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대사. 특별한 심부름을 하는 자를 특사. 몰래 보낸 심부름꾼을 밀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은 천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심부름을 하는 자를 제자 또는 사도라 부름니다.
사명에서 명자(命字)는 목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명이란 심부름 받은 목숨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전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라는 사명을 받아 사명감으로 살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려면 죽고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병이라가 알에서 깨어나듯, 아이가 모태에서 나오듯, 이사야가 새 사람이 되듯이, 바울이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듯이 옛 사람은 죽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명자로 부르심은 받은 이사야는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주님은 높이 달린 보좌에 앉아 계셨고,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의와 진실과 사랑과 거룩으로 충만하시고, 지극히 높으시고,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보좌에 계셨습니다.
지금까지 이사야는 인간의 능력, 지혜, 귄위, 왕권 이런 것을 의지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진정 평화를 주고 안정을 주고 행복을 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적인 능력과 권위가 지금 흔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시편146편:3절)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홉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사야는 민족적인 위기, 개인적인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나라도 흔들립니다. 정권도 흔들립니다.
우리의 재산도, 권위도, 가정도, 자녀도, 흔들립니다. 때로는 그 모든 것들이 연기처럼 다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이 안개처럼 소멸되며 결국은 빈털터리가 되고 맙니다. 지금 위기 앞에선 이사야는 바로 이런 귀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얻었던 것, 자신이 붙잡았다고 생각했던 것, 인간적인 권위, 능력, 지혜. 이런 것들이 위기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왕의 죽음으로 인하여 남 유다의 백성들은 낙심과 슬픔 속에 빠져 있었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크신 영광으로 성전 안에 임재하신 하나님, 큰 권세와 능력으로 남유다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나라 전체가 큰 어려움과 슬픔을 당한 이때에 이사야가 발견한 하나님의 임재는 낙심 중에 처한 이사야 자신과 백성들에게도 큰 위안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난 날 우리 교회는 큰 시련과 위기 앞에서 온갖 거짓과 견딜 수 없는 상처로 얼룩져 왔습니다. 이제 교회를 위한 새로운 계획을 세워 실천하려는 이때 새롭게 세움받고자 하는 일꾼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놀라운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붙들고 있기 때문에, 어떤 두려움이, 어떤 도전도, 어떤 위기와 어떤 환란이 닥친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을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소명을 받은 장면을 생각할 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거룩한 옷자락이 가득한 이 성전에서 이사야와 함께 부름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죄 중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순간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아울러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을 때에는 결코 자신을 정확하게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찾아오셔서 어두운 우리의 영안을 밝히시는 때라야 비로서 우리는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자기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회개합니다.
전에도 이사야는 성전을 출입했지만 자신이 죄인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웃시야왕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을 보고 비로서 자신의 실체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의로운 줄 알았는데, 나와 함께 했던 사람, 강력한 왕이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왕이 어느날 교만해져서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는 것을 볼 때에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웃시야에게 벌받을 죄가 있다면 이사야 자신에게도 그런 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왕의 사건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자신의 교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을 바로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지난 날 이사야는 진실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왕의 친척이기에 왕의 비위나 맞추고 권력에 아부하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야했습니다. 거짓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성전에서 주님을 만남으로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고 회개하게 되고 비로서 참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답습니다. 죄인됨을 깨닫고 고백하기를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요, 죄인의 괴수라고. 자신 속에 하나님의 의가 하나도 없음을 깨닫고 고민합니다.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추악한 모습이 다 드러났지만 오히려 너무 기뻐 뛰면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임하게 될 때에 여러분의 모든 죄가 사하여지고 신령한 기쁨이 충만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사명감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지금까지의 신앙생활 자체가 헛된 것입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내가 주를 만나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게 뭡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주셨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주의 음성을 친히 듣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이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이 얼마나 기쁜 말씀입니까?
이 귀한 순간에 그 마음속에 새로운 음성이 들려 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음성이 그 마음속에 들려 옵니다. 전에 몰랐던 것을 이제는 깨닫게 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우리를 위해 갈꼬”라는 하나님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주여 내가 있나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시간 혹 우리는 변명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아직 어린 아이가 있습니다. 바쁜 몸입니다. 저는 가난합니다.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습니다. 남편이 믿지 않아서 어렵습니다. 아무개는 잘할 것 같으니까 그 사람 시키세요. 이런 저런 이유로 핑계하고, 변명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어떤 사람이 장터에서 말을 사려고 흥정을 하고 있습니다. 파는 상인에게 묻습니다. 이 말 타는 겁니까? 말을 팔려는 사람이 이 말은 등에 안장을 올려놓으려면 뛰고 차고 난리를 쳐서 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말 달구지는 끄는 말입니까? 이 말한테 달구지를 지우면 그냥 달아나 버립니다.
말 을 사려는 사람이 묻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팔려는 겁니까?
말 을 파는 사람이 하는 말이 말 모양이 좋지 않습니까?
스타일요, 스타일이 좋아서 팔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이 말과 같은 신자는 없을까요? 안장도 올려놓지 못하게 하고. 짐도지지 않고, 스타일만 갖추려는 성도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많으면 교회는 산으로 갑니다. 스타일이 밥먹여 줍니까?
모양만 성도인체 하면 무엇합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그리스도인 말입니다.
우리는 스타일만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종이요. 하나님의 계획을 위하여 선택된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 이것은 소명적인 관계입니다.
신앙은 소명적인 관계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소명적인 관계가 바로 될 때에 바른 믿음 생활이 이루어 집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사람을 보내지 않습니다.
특별히 사명감에 불타는 자원하는 사람을 기다리시고 그런 사람을 일꾼으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옥포교회를 위하여, 이 나라의 구원을 위하여 누가갈꼬 하는 사명을 분명히 주시면서 자원하는 소명자를 찾고 계십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는 함정을 파고 있는 저들에게. 사기의 함정. 강탈의 함정, 거짓의 함정 등 각종 함정을 파놓고 인생의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저들을 물리치고 함정에 빠져 있는 저들을 구원하기 위해 누가갈꼬.
세상 풍조가 밀려 오면서, 거짓 선지자, 거짓 교리가, 양의 탈을 쓴 이리를 추방하기 위해 누가갈꼬, 어두운데서 빛을 보고, 눌린 자가 자유를 얻고, 사로 잡힌 자가 놓임을 받게 하는 일을 위해 누가갈꼬.
교회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교회 질서를 파괴하는 자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누가갈꼬, 함정에 빠져 허우적 거리며 도와주기를 바라는 저들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며, 진리를 깨어쳐 주기 위해 누가갈꼬. 누구를 보낼꼬 할 때“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일꾼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안에서 소명받은 사람을 세우고자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누가 옥포교회를 위하여 일할꼬” 물으실 때“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옥포교회를 위하여 “누구를 보낼꼬 할 때, 누구를 세울꼬 할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고백하는 이사야와 같은 소명받은 일꾼들이 교회와 이 강산에 많이 나오기를 주의 이름으로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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