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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2002-07-15 16:42:12   read : 33721

요일4장 7-10절 // 2002.07.14.

사람을 향해 미워하는 마음이나 증오하는 마음이 아니라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은혜요 축복입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도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는데 있습니다. 세상에 모든 것이 변한다 해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신 십자가를 통한 주님의 사랑은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변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의 두 가지 욕망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사랑에는 두 가지 욕망의 뜻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주고 싶다는 욕망이고, 둘째는 빼앗고 싶다는 욕망이라고 했습니다. 또 사랑에는 조건 없는 헌신적인 사랑이 있는가 하면 조건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희생적인 사랑이 있는가 하면 이기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베풀어야 할 사랑은 주는 사랑이고, 조건 없는 사랑이고,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대부분이 품앗이 사랑이고,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희생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죄로 인하여 죽었어야 할 우리를 대신해서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 인간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셨고 희생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엄청난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칼 바르트는 그의 이중 예정론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택을, 축복과 생명을 예정하셨고, 자기 자신에게는 버림을, 저주와 죽음을 예정하셨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은총인가요? 저주와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축복과 생명을 예정하시고 또 자기 자신에게는 우리 인간이 당해야 할 저주와 죽음을 예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예정하시고, 자기 자신에게는 인간과의 사귐을 예정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의 몫을 자기가 취하는 대신, 자기의 몫, 곧 축복과 생명을 인간에게 주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낮추심으로서 인간을 높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정신입니다.

백혈구와 적혈구의 사랑 이야기

우리 몸 혈액 속에는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혈장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백혈구는 우리 몸에 어떤 이상한 침입자(병균)가 들어오면 얼른 그 침입자를 처리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백혈구가 그 침입자를 처치하는 모습을 보면 아주 큰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백혈구는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침입자를 처치할까요? 얼핏 생각하면 아주 강력한 방법을 쓸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백혈구는 침입자를 향해 절대 무력을 쓰지 않고 그저 그 침입자를 품에 푹 껴 안아버립니다. 그리고 아주 아주 깊은 사랑으로 그를 감싸줍니다. 백혈구에게 안긴 그 침입자는 백혈구의 사랑에 감동하여 그냥 녹아버립니다. 참으로 백혈구의 사랑은 놀랍습니다. 보기 싫든 지저분하든 가리지 않고 모두 다 껴안아줍니다. 우리 인간과 그 방법이 너무도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 사랑이 넘치는 멋쟁이 친구가 우리 몸 안에 살고 있습니다. 백혈구 같은 사랑이 언제나 여러분 마음속에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요일4장 7-10절) 2002.07.14.


사람을 향해 미워하는 마음이나 증오하는 마음이 아니라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은혜요 축복입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도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는데 있습니다. 세상에 모든 것이 변한다 해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신 십자가를 통한 주님의 사랑은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변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의 두 가지 욕망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사랑에는 두 가지 욕망의 뜻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주고 싶다는 욕망이고, 둘째는 빼앗고 싶다는 욕망이라고 했습니다. 또 사랑에는 조건 없는 헌신적인 사랑이 있는가 하면 조건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희생적인 사랑이 있는가 하면 이기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베풀어야 할 사랑은 주는 사랑이고, 조건 없는 사랑이고,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대부분이 품앗이 사랑이고,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희생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죄로 인하여 죽었어야 할 우리를 대신해서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 인간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셨고 희생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엄청난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칼 바르트는 그의 이중 예정론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택을, 축복과 생명을 예정하셨고, 자기 자신에게는 버림을, 저주와 죽음을 예정하셨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은총인가요? 저주와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축복과 생명을 예정하시고 또 자기 자신에게는 우리 인간이 당해야 할 저주와 죽음을 예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예정하시고, 자기 자신에게는 인간과의 사귐을 예정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의 몫을 자기가 취하는 대신, 자기의 몫, 곧 축복과 생명을 인간에게 주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낮추심으로서 인간을 높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정신입니다.

백혈구와 적혈구의 사랑 이야기

우리 몸 혈액 속에는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혈장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백혈구는 우리 몸에 어떤 이상한 침입자(병균)가 들어오면 얼른 그 침입자를 처리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백혈구가 그 침입자를 처치하는 모습을 보면 아주 큰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백혈구는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침입자를 처치할까요? 얼핏 생각하면 아주 강력한 방법을 쓸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백혈구는 침입자를 향해 절대 무력을 쓰지 않고 그저 그 침입자를 품에 푹 껴 안아버립니다. 그리고 아주 아주 깊은 사랑으로 그를 감싸줍니다. 백혈구에게 안긴 그 침입자는 백혈구의 사랑에 감동하여 그냥 녹아버립니다. 참으로 백혈구의 사랑은 놀랍습니다. 보기 싫든 지저분하든 가리지 않고 모두 다 껴안아줍니다. 우리 인간과 그 방법이 너무도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 사랑이 넘치는 멋쟁이 친구가 우리 몸 안에 살고 있습니다. 백혈구 같은 사랑이 언제나 여러분 마음속에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적혈구도 백혈구처럼 아주 사랑이 넘치는 친구입니다. 골수(bone merrow)에서 태어나 폐(Lung)에 가서 산소를 받아들여 자기 몸에 가집니다.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은 산소를 얻어야 생명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산소는 생명과도 같은 것인데, 적혈구는 언제나 생명의 산소를 풍성하게 품고 있다가 언제나 혈액 속에서 이리 저리 다니면서 산소가 필요한 곳이 있으면(cell) 아낌없이 다 주고 나옵니다. 자기 몫은 챙기지 않고 100% 다 나눠줘 버립니다. 그리고 4일쯤 살다가 비장(spleen)에 가서 조용히 숨을 거두게 됩니다. 자기 것은 조금 남겨두고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텐데 백혈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몸의 모든 것들은(세포 하나까지도)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존재는 하나도 없고 모두가 남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내가 상대를 위해 100% 봉사하고 상대가 나에게 100% 봉사하는 마음이 우리 몸 속에 있으므로 우리는 건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백혈구의 사랑은 모든 걸 사랑으로 감싸주는 반면, 적혈구의 사랑은 모든 걸 나누어주는 그런 사랑입니다. 이런 친구들이 우리의 혈액 속에 있고 그 혈액은 바로 우리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염려와 걱정으로 되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다는 것이 더욱 힘들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알려주신 것은 우리의 염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이 어떤 힘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는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 이야기 소설에 천사 미하일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하일이라는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알몸으로 세상에 쫓겨났습니다. 미하일이 어긴 하나님의 명령은 쌍둥이 딸을 낳은 어머니의 영혼을 거두어 오라는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미하일은 그 어머니의 영혼을 거두어 가면 가엾은 어린것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미래에 대한 염려에서 그것을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미하일 천사를 쫓아내면서 세 가지 과제를 줍니다. 첫째는 인간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는 것. 둘째는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것. 셋째는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사 미하일에게 이 세 가지를 다 깨닫게 될 때 하늘나라에 다시 불러들이겠다고 했습니다.

천사 미하일은 추운 겨울 어느 날 알몸으로 교회당 벽에 붙어서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세몬이라는 가난한 구둣방 주인의 도움을 받아 그의 집에서 함께 일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미하일은 구둣방 주인 세몬의 아내가 그에 대해 베푸는 배려에서 인간에게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후 구둣방에서 일하다가 어느 날 어떤 부자가 좋은 가죽으로 그가 신을 장화를 맞추고 돌아가서 바로 죽었기 때문에 그가 주문한 장화 대신에 죽는 사람이 신는 슬리퍼를 찾아가는 것을 보고 인간에게 자기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동안 세월이 흐른 후 한 여인이 쌍둥이 여자아이를 데리고 구둣방을 찾았을 때 미하일은 그 아이들이 바로 자기가 영혼을 거두어 가려고 했던 그 어머니의 딸임을 알게 됩니다. 그 어머니는 딸을 낳고 육 개월만에 죽고 그 쌍둥이 아이들이 다른 여인의 보살핌 가운데서 잘 양육되는 것을 보고 아이는 부모 없이는 살 수 있지만 하나님 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천사 미하일은 세 가지 과제와 관련된 것을 모두 터득하게 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 각자는 자신의 일을 걱정하고 애씀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 실은 오직 사랑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자는 하나님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 안에 계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다 깨닫고 나자 그는 다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우리 인간에게 본래 허락된 존재 양식은 사랑으로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게 한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 양식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고 그러한 삶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지게 됩니다. 그러한 삶에서 위로, 희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삶에서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게 되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사랑이 베풀어지는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이 경험되어 집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평화가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정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있는 곳에 진리가 있습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팔순이 되신 한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 분은 남편을 잃었는데 82세 되신 할아버지가 천국에 먼저 가신 것입니다. 그 할머니는 화가 났습니다. 왜 남편을 먼저 천국에 데려갔냐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화내기 시작한 할머니가 주위 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또 화를 내고 불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도 화를 내시니까 아무도 할머니 곁에 남아 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꼬마 손자가 할머니 곁으로 다가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질문이 있어요." 할머니는 성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뭐냐, 물어봐라." 손자는 할머니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천국에 먼저 가셨는데 할머니는 왜 혼자 남아서 화만 내세요?" 할머니는 더욱 화가 났습니다. "뭐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손자는 화난 할머니에게 "할머니 일주일 후에 다시 올 테니까 그때는 꼭 대답해 주셔야 돼요?" 그리고는 얼른 가버렸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꼬마 손자가 찾아왔습니다. "할머니, 저 왔어요." 그런데 "오냐!" 하며 뛰어 나온 할머니의 모습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손자는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할머니를 쳐다보았습니다. "할머니, 대답해 주세요." 할머니는 손자를 끌어안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그런 질문을 해줘서 고맙구나. 대답을 해주고 말고. 하나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더구나. "네 할아버지께서는 평생 사랑만 하고 사신 분이었단다. 난 그 사랑 밑에서 사랑받기에만 익숙해졌고 아무도 사랑할 줄 모르는 버릇없는 노인이 되고 만 거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할아버지를 먼저 데리고 가신 거란다. 충분히 사랑을 다하셨기 때문이지. 그리고 나는 남겨 두셨단다. 사랑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시려고 말이야. 내가 이 세상에 얼마나 더 남아 있을 지 모르지만 남은 시간 동안은 사랑만 하고 살련다." 그 할머니의 남은 여생은 팔십 평생 살아온 삶보다 더 풍성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1년 8개월을 사시면서 자기가 낳은 자녀뿐만 아니라 이웃 사람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누군가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산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순간에도 우리의 생명을 연장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 옆 사람이 함께 살아 있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이 나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를 내 곁에 남겨 두셨는가요? 그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나에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후회 없이 조그마한 것이라도 괜찮습니다. 눈빛을 통해서, 작은 선물을 통해서, 다정한 한마디 말을 통해서, 또 작은 서비스를 통해서 내 옆 사람이 살아있다는 기쁨을 누리면서 사랑의 통로만 되어라.

사랑의 작은 발걸음

사랑을 아주 조금밖에 경험하지 못했는데도 어떻게 우리는 사랑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랑으로 작은 발걸음을
내디딤으로써 우리는 사랑을 선택합니다. 미소, 악수, 격려의 말, 전화 한 통화, 카드 한 장, 포옹 한 번, 친절한 인사, 지지를 표시하는 제스처, 한 순간의 배려, 도움의 손길, 선물, 기부금, 한 번의 방문, 이런 것들이 모두 사랑을 향해 내딛는 작은 발걸음입니다.

각 발걸음은 밤에 타는 촛불과 같습니다. 그것이 어둠을 완전히 가시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둠 속에서 우리의 갈 길을 안내합니다. 우리가 걸어온 많은 사랑의 작은 발걸음들을 뒤돌아보면, 우리는 길고 아름다운 여행을 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한꺼번에 다 완벽하게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작은 걸음걸음이 우리를 옮겨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순간 순간이 힘겹고 암담하고 답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 있었어도 걸어온 걸음을 뒤돌아보면 걸음마다 은총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여행을 어떻게 어디서 할 수 있었을까요? 다 나에게 적합한 그 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할 일은 지금을 기쁨과 감사 속에 흔쾌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작은 걸음이 큰 걸음이 됩니다. 이제 기회 있을 때마다 사랑을 선택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삶은 없습니다. 내가 사랑을 선택하며 내딛는 작은 발걸음만이 있습니다.

사랑의 온전함 가운데서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받아 드리지 못하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 자체가 온전함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서로 용서하고 받아 드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랑 가운데서는 이러한 모든 것이 극복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이러한 사랑의 온전함이 서로 서로의 관계에서 다음과 같은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기를 강요하기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기울여 듣는다는 것은 사랑의 한 행위입니다. 우리의 시간을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할애하는 여유를 갖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주위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우리의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매우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생각할 때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고독한 사람에게 위로의 편지를 쓰든가 위로의 전화를 거는 것 모두 사랑의 행위입니다. 사랑은 항상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찾아오기를 요구하기 보다 먼저 우리가 그에게 찾아가는 것입니다. 슬픔을 당해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찾아가서 위로의 말을 해줄 수 있는 것, 장기간 병상의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와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일, 모두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아니하고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 재물을 대부분 우리와의 이해 관계 가운데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러한 이해 관계를 넘어서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 관계를 떠나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를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일은 매우 고귀한 일입니다. 우리의 기도 시간에 언제나 기억되어 그 기도에 포함되는 사람이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들인가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사랑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람은 확실히 사랑으로 삽니다. 죽을 사람도 사랑으로 인해서 살아납니다. 어찌 생각하면 사랑 없이 되는 일은 다 죽음으로 치닫습니다. 오직 사랑이 있어서 살고, 사랑이 있어서 의미가 있고, 사랑이 있어서 소생하는 힘을 얻는 것이고 사랑이 있어서 병도 치유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있을 때는 심지어 죽음도 아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고, 참 사랑에 감격하면 죽는 문제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위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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