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내일에 맡겨라 2002-06-07 19:17:15 read : 25349
■ 설교자:박 종 화 목사
■ 설교일:2001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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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말씀: 창세기 2: 4 ~ 9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의 일은 이러하다. 주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실 때에, 주 하나님이 땅 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 한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
땅에서 물이 솟아서, 온 땅을 적셨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주 하나님이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주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서신서의 말씀: 베드로전서 5: 6 ~ 11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에서 스스로 겸손하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대적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그분의 영원한 영광으로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권세가 영원히 그분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 6: 25 ~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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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9. 1.
오늘은 교회력상으로 창조절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창조절은 푸른 색으로 상징되는 절기입니다.
구약성서에 보면 창조는 옛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창조의 역사는 완성을 향하여 오늘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갑니다.
20세기가 지나고 21세기가 되자, 사람들은 21세기는 새로운 세기일 뿐 아니라, 이 천 년대에서 삼 천 년대로 바뀌기 때문에, "뉴 밀레니엄"이라고 합니다. 새 천년! 시대가 바뀌고, 백 년이 바뀌고, 천 년이 바뀌면, 누구나 다 희망을 갖습니다. 새 천년, 새 세기에는 무언가 새로운 물결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희망! 이 한마디 단어가 세월의 바뀜을 운명적으로 말해 줍니다.
그런가 하면 21세기로 시작되는 미래의 세계는, 최소한 당분간은 불확실성 아래 놓여 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것은 미래를 진단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얘기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미래가, 희망이 있는 미래가 왜 불확실하다고 보는가? 사람마다 설명이 다릅니다. 그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았느냐 하면, 찬성이냐 반대냐, 흑이냐 백이냐, 위냐 아래냐, 남자냐 여자냐,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등으로, 무언가 모르게 이분법적 사고에 길들여져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사회는 이렇게 흑과 백이, 위와 아래가 명약관화하게 양분되어서, 어떤 한쪽으로 결단하고서, 그쪽에 서서 확실성이 있는 삶을 산다고 느낄 수 있게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택일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옵션이 있는 다양한 선택의 한가운데에서 사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를 평가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판단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명확하게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서, 선과 악이 확실치 않아서, 그래서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과거의 논리나 과거의 사고의 틀이 삶을 규정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고, 그래서 이름하여 불확실성의 시대인데,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21세기에는 삶은 더 행복해야 되겠는데, 좀더 복지화되어야 하겠는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불확실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제안은 이렇습니다. "불확실성의 시대가 되면, 그 불확실성을 친구로 삼으십시오. 불확실성을 친구로 삼으면, 거기에서 뭔가 확실한 미래가 열릴 것입니다. 불확실성을 적으로 삼지 마십시오. 불확실성이 위기라고 느낀다면, 그 위기를 기회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가십시오."
언제부터 우리는 이것과 저것을 반드시 가려야 하고, 둘로 쪼개놓아야 마음이 편하게 되었을까요? 창세기 역사를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 기록에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에, 에덴동산, 창조가 시작되는 곳에 사람을 살게 하시고, 많은 나무 가운데 특별히 두 개의 나무를 두셨습니다. 첫 번째 나무 이름은 생명의 나무, 두 번째 나무의 이름은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이 두 나무를 두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역사는 실낙원의 역사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실낙원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선악과 열매를 따먹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일을 인간이 하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선과 악의 구분을 사람이 하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흑백을 구분하려고 한 것입니다. 딱 규정지으려 했습니다. 세상을 나눠놓으려고 했습니다. 나눠놓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 되게 하십니다. 생명은 통전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역에 들어가서, 스스로 선과 악을 구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평생 악인으로 규정당합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성자로 대접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깡패로 낙인찍혀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살아갑니다. 가정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불안을 극복하고 만족해했습니다. 말하자면 안정심리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 역사를 다시 거슬러 가보면, 하나님의 창조 역사의 시작을 상징하는 것은 선악을 구분하는 나무가 아니라, 생명의 나무입니다. 창조의 처음,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는, 다시 하나님나라가 임하면, 미래의 종말적인 에덴동산이 다시 임하면, 그곳에서도 역시 울창하게 뻗어날 것입니다. 선악과나무는 생명나무 가운데 살아갈 모든 인류를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그 뜻을 따라 살라고 만들어 놓은 보조적인 나무였습니다. 그러나 생명에서 시작해서 생명으로 끝나야 할 인간의 역사는 선악을 구분하는 분석적 역사가 되었고, 인간은 그 가운데에서 고통하며 살아갑니다.
오늘이 창조절의 시작! 오늘 다시 선악과를 따먹은 실낙원의 역사를 벗어나서, 생명나무의 에덴동산의 역사를 시작해야 합니다. 선악과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에 시작된 역사는 어디에서 끝이 납니까? 예수에게서 끝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서 십자가라 이름하는 나무 위에 얹혔습니다. 십자가는 생명나무가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 때문에 생명나무는 인간에게 차단되었습니다. 이미 잘려 죽은 나무, 죽음의 나무, 십자가 속에 생명이 갇혔습니다. 생명의 주님이 거기에 못박히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면서 하시는 말씀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어떻게 죽음의 나무에 달린 예수 안에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겠습니까?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는 죽은 나무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인간의 죄의 역사 때문에 생명나무가 아닌 죽은 나무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 죽은 나무에서 생명의 주인이 몸을 찢기고 피를 흘립니다. 그러나 찢긴 몸과 흘린 피가 주의 창조의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부활의 생명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새로운 생명나무가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에서부터 시작하여 골고다 언덕에서 부활하신 부활의 십자가 나무, 이 두 나무 사이의 연속이 우리 신앙의 역사입니다. 그 가운데 있는 선악과를 따먹은 거역의 역사는 극복되어야 할 역사입니다.
실낙원의 역사가 극복되어야만, 다시 에덴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창조절은 생명나무를 중심으로 사는 역사가 다시 회복되기를 바라고 기도하고 실천하는 절기여야 합니다. 생명나무가, 골고다에서 세워진 새로운 생명나무가 오늘 여러분의 나무가 되시길 바랍니다. 태초부터 역사는 생명나무의 역사였습니다.
예수께서 오늘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아라. 소위 말하는 의식주는 걱정하지 말아라. 공중에 나는 새한테도 의식주는 내가 마련해 주지 않느냐. 들에 핀 백합화를 보아라. 길쌈도 않고 수고도 않지만,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영으로 살아가는 역사를 보아라. 하물며 영장이라 이름하는 사람의 역사를 하나님이 보살펴 주시지 않겠느냐?"
인간의 에덴동산에서 시작한 생명의 역사, 인간의 거역으로 끊어진 생명의 역사는 골고다 언덕에서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오시면 새로운 패러다이스가 이루어져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에덴동산과 골고다 사이, 그 사이에 우리의 삶이 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선악과나무의 역사가 아닙니다. 다시 돌아가는 생명나무의 역사입니다. 그 미래는 이미 예수께서 담보해주셨고, 다시 오시면 그 역사를 완성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내일은 우리가 만드는 내일이 아닙니다. 그 내일은 창조주 하나님이 약속한 내일입니다.
오늘 베드로전서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낙원의 역사 가운데서―괄호를 칩니다―잠시동안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의 손은 여러분이나 저를 온전케 하고 강하게 하고 기초를 든든하게 하여 새로운 생명의 창조 역사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내일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그 가능성에 헌신하십시오. 그리고 그 가능성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나무의 역사임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설교를 마치면 성만찬을 거행합니다. 성만찬의 대주제는 이렇습니다. "이것은 골고다 언덕에서 흘린 십자가의 피요, 찢긴 십자가의 몸이니, 너희는 이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생명의 몸을, 생명의 피를, 새로운 에덴의 생명나무의 양식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이 몸은 성탄에서 십자가까지만 아니라,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나무로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올 새로운 패러다이스의 생명나무까지의 총체적인 역사를 집대성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이 몸을 먹고 마십니다. 이 몸은 부활의 희망을 기다리는 골고다의 몸, 부활의 생명을 성취한 부활하신 생명의 몸입니다. 그 몸을 오늘 여러분은 고요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몸은 오늘도 약속하시고, 내일도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은 항상 진실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는 새로운 창조주입니다. 누구든지 이 몸에 동참하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어느 유치원에서 아버지를 모셔오라고 했답니다. 아버지를 모셔와서, 유치원의 상황도 설명드리고, 아이들도 어떻게 교육받는지 보여주려고 아버지를 오라고 했습니다. 소위 아버지 참여 수업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들이 많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각자 아버지를 설명하는 시간이 되어, 아버지가 오시지 않은 아이들부터 아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한 아이는 우리 아버지는 사업도 크게 하시고 돈도 많이 번다고 했고, 어떤 아이는 우리 아버지는 미남이시고 아주 신사이시라고 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이어서 우리 아버지는 이렇고 저렇고 한참 설명들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참석한 아이들 차례가 되어 한 아이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한참을 머뭇거렸습니다. 자기 아버지를 설명해야 되겠는데, 자기 아버지가 바로 앞에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는요…" 하다가 "여기에 계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앞에 있으니, 아버지에 관한 그 모든 소개와 설명은 빛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생겼는가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자랑을 해야 되겠는데 그 아버지가 앞에 계시니, 다른 말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설명해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는 부자이십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악을 박멸하고 선을 높여 주시는 분이십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질병을 고쳐 주셨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은혜로운 분이십니까? 마음대로 설명하십시오. 그런데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 골고다에 있는 십자가 나무 위에서 몸을 찢기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부활의 영광을 입고서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 어떻게 설명하시렵니까? 그 하나님, 예수 안에 나타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하나님이 지금 내 앞에 계십니다. 그 분이 내 옆에 계십니다. 내가 그분 안에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패러다이스를 선물로 받으십시오.
그 아버지를 멀리 있는 분으로 생각하고 맘대로 신학화하십시오. 맘대로 분석하고 사고하십시오. 그리고 학술을 만들어 내십시오. 그 학술의 이야기는, 그 논란의 이야기는 선악과를 따먹은 역사와 맥을 같이 합니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모든 이론적 설명은 이미 빛을 잃었습니다.
생명의 나무, 그 나무를 끌어안고, 그 나무를 앞에 두고, 옆에 두고, 그 나무 가운데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그 동안 선악과 때문에 있었던 실낙원의 역사, 실패의 역사는 더 이상 운명적인 것이 아니게 됩니다. 좌절과 실패를 넘어서, 골고다 언덕을 넘어서, 부활의 아침이 있는 새로운 에덴동산까지 우리는 힘차게 전진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시작되어서 종말에 이루어질 창조의 완성, 그 완성될 미래를 미래에 맡겨두지 마십시오. 멀리 두지 마십시오. 상상만 하지 마십시오. 그 미래를 지금 여러분의 가슴속으로 끌어오십시오. 바로 지금 그 미래를 오늘 삽시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성만찬이고, 이것이 예배입니다. 약속된 미래, 오늘 살아갑시다. 용기 있는 결단을 하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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