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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힘을 얻는 교회 2002-06-06 13:57:06 read : 26780
이사야 40:27-31
2002. 4. 21.
27)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독수리가 죽은 동물을 뜯어먹는 모습을 보면 추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만 독수리는 위엄과 영광의 상징입니다.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는 진정 멋있고 아름답습니다. 아니 경외감마저 일으킵니다. 그렇기에 강하기를 원하는 민족이나 나라들은 독수리를 문장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독수리에 비교되고 있습니다. 그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올라감과 같다고 합니다. 신앙의 자세를 독수리의 비상(飛上)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멋있고 위엄에 차 보이는 독수리의 비상은 그냥 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는 많은 훈련의 고통을 거쳐 이루어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도 많은 고통을 통해 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의 자리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독수리를 관찰한 학자들에 의하면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가 둥지에서 나와 날아야 할 때가 되면 둥지에 날카로운 돌과 가시들을 가져다 놓는다고 합니다. 둥지에 더 이상 안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높은 절벽 위에서 뛰어내려 날개짓을 하며 날도록 유도합니다. 처음으로 날 때 제대로 날 수 있는 독수리는 많이 없습니다. 날개짓을 하며 뛰었을 때 날기는커녕 밑으로 떨어져 바위에 부딪히기도 하고 솔가지에 찔리기도 합니다. 약한 것은 그냥 땅에 떨어져 여우나 늑대에게 잡혀 먹히기도 합니다. 살아남은 독수리만이 하늘로 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데에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훈련과 고통이 있은 후에 하나님을 진정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힘을 얻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스스로 실족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범함으로 인해 깊은 시험에 빠지기도 하고 울며 원망 속으로 빠져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찢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의 순간들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을 비로소 쳐다볼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대구제일교회도 하루 아침에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난 100여 년 동안 많은 성상의 고초를 당해왔습니다. 그동안 신앙의 훈련을 해왔고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가는 모습을 체험해 왔습니다. 또한 성전을 지으면서 과도한 욕심도 있었고 시행착오도 있었고, 분열의 아픔도 있었습니다. 스스로 시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영광의 순간들을 경험하기도 했으며,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는 경험을 많이 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교회로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독수리의 가장 큰 특징으로 하늘 높이 힘차게 나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를 신앙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독수리의 그 큰 몸이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하늘 높이 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신비합니다. 어떻게 저 큰 몸을 하늘 높이 날게 할 수 있겠습니까? 독수리가 하늘 높이 날 수 있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약 80-90cm나 되는 날개를 활짝 펼치고 바람에 의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저 한 두 번만 날개를 움직여도 독수리는 아주 잘 날 수 있습니다. 이는 날개를 사용해 바람을 잘 타고 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힘의 바람이 그 큰 독수리를 아주 가볍게 하늘 위로 올립니다. 날개가 크면 클수록 더 높이 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오직 두려움이 없는 맹금류의 새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만드신 포식자 맹금류만이 가지는 신비입니다.
우리도 하늘 높이 날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바람을 잘 타야 합니다. 성령의 바람을 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를 더욱 더 하늘 높이 띄워줍니다. 그 바람을 타기 위해 우리에게는 믿음이라는 날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의 날개를 펴고 있으면, 하나님의 영 성령의 바람에 의해 우리는 하늘 높이 날아 하늘나라에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날개가 크면 클수록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의 세계에서 더 높이 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 믿음의 날개를 더욱 크게 펼칠 수 있을까요? 이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과 시련 그리고 신앙의 좌절을 이기고 하나님께 더욱 의지할 때 가능해 질 것입니다. 새는 바람을 이용하면 이용할수록 더욱 쉽게 하늘을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께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더욱 하늘나라 가까이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대구제일교회의 덩치가 크다 하더라도 별로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대구제일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날개를 가지고 성령의 바람만 타면, 힘들이지 아니하고 하늘로 높이 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날개는 그리스도 예수를 닮는 가운데 생겨나고 자랍니다. 과도한 욕심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 마음을 비움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스스로 높임이 아니라 오히려 낮춤으로, 오해가 아니라 이해로, 문제를 만들어 가기보다는 문제를 풀어가는 자세로, 분열이 아니라 화합으로 향하는 가운데 믿음의 날개는 더욱 커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성령의 바람은 아무리 큰 교회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올바로 가진 교회라면 아주 가볍게 날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그러하지만 성경 전체를 살펴볼 때 독수리는 구원의 상징으로 많이 쓰여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대변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데는 나름대로 성경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출애굽기 19:3-4를 보면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치도록 합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애굽에서 꺼내 광야로 해방시킨 사건을 소개하는데, 이를 독수리의 날개로 업어 인도한 것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는 물론 상징적인 설명이지요.
당시 막강했던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는 것은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어떻게 남자 성인만 해도 육십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 거기에 가족까지 포함하면 최소한 이백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해방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독수리 날개에 업어 옮기듯이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엄청난 능력을 통해 옮기신 것입니다. 진정 출애굽은 엄청난 사건이었는데, 독수리의 날개로 구원함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읽은 본문 역시 독수리가 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라 했습니다. 왜 이러한 비유를 사용하고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도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억압 가운데서 해방을 바라보던 상황에서 쓰여졌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때 선지자가 하나님의 해방을 전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옛날 자신의 선조들이 애굽에 가서 노예생활을 하던 때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27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이 자기들의 사정을 알아주지 아니하고 숨으셨느냐는 한탄이 이를 잘 표현해 줍니다. 또한 어찌 하여 자기들의 원통함이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느냐는 한탄이 이를 잘 표현해 줍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의 매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의 선조들을 독수리에 업어 구원한 것처럼, 자신들도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을 열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이 세상의 주인이시기에 그 옛날 기적과도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꺼내셨듯이, 자신들도 기적과도 같이 꺼내주시기를 바라는 기도가 여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2의 출애굽 사건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다시금 하나님이 해방시켜 주시기를 바라는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는 기적적인 해방의 은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사건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결국 그들은 해방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이란인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의 도움으로 인해 그들은 해방을 받았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얻은 해방은 아니지만, 그들은 그 뒤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역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해방받는 순간은 높이 올리워지는 영광의 순간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하심을 드러내는 승리의 순간을 맛보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내시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그들의 역사 속에서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아니 그러한 역사를 이루려고 매우 노력해 오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믿음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날도 그러한 일을 위해 노력하곤 합니다.
예를 들면, 40대 이상 되신 분들에게는 기억에도 생생한 엔테베 작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1976년 6월 27일 그리스 아테네 공항을 떠난 프랑스항공사의 비행기가 아랍 테러분자들에게 납치를 당했습니다. 거기에는 총 268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타고 있었고 특히 이스라엘 사람 102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비행기는 당시 독재자 이디 아민이 통치하던 우간다의 공항에 착륙해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협상을 요구했습니다.
그때 라빈 수상이 이끌던 이스라엘 내각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당시 30살의 요나탄 네탄야휴 중령이 이끄는 특수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레이더를 피하기 위해 저공비행을 해서 우간단 공항에 도착해서 불과 15-20분 만에 모든 작전을 마쳤습니다. 인질들을 구출해서 유유히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입니다. 물론 세 명의 인질이 희생되었고 작전 요원 한 사람이 희생되기는 했지만, 그 작전은 거의 완벽하게 끝났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세계의 언론들은 경악을 했었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작전을 비밀스럽고도 완벽하게 끝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었습니다. 당시 20살이었던 저도 그 소식을 접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작전이 끝난 후 어느 기자가 책임자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마음에 두려움은 없었습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동족 인질들이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 이 생각밖에 저는 아무 다른 생각을 한 일이 없었습니다.” 동족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구원의 역사를 수행했다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사상 뒤에는 그들의 조상들도 항상 어려움 속에 있을 때 좌절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의 손길을 기다렸던 역사가 깔려있습니다. 아마도 엔테베 작전을 누군가가 후에 역사로 기록할 때 이 역시 하나님이 구원의 독수리를 보내셨다고 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언제가 아프리카에서 자기들의 동포들을 이스라엘로 이주시키는데, 그 작전이 얼마나 긴박하고 감격스러웠는지 그 이주작전이 끝난 후 하나님의 독수리 날개에 그들을 태워 이스라엘로 이주하게 하였다고 고백한 적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독수리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를 상징합니다. 독수리는 항상 높이 날아 자기가 차지할 먹이가 어디에 있는가 찾는 것처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 하나님께 속할 사람들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고통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들을 찾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를 천하에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를 보여주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구원의 날개를 달아 하늘 높이 날 때 할 일이 있습니다. 이는 구원사역입니다. 아직도 상한 심령, 고통 가운데 있는 심령, 아니 죽어가는 심령들을 찾는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믿음이라는 날개에 실어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사역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독수리가 하루 종일 바람에 의지하여 하늘에만 떠 있을 수 없듯이, 우리 역시 평새 나만의 구원을 기뻐하며 떠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독수리는 자기의 먹이를 찾으면, 이 땅에 내려오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독수리와 같이 새 힘을 얻어 하늘 나라를 향하여 비상하는 우리도 하나님 나라에 함께 들어갈 심령을 발견하려 하고 또한 발견이 되면 다시 그에게로 가까이 갈 책임이 우리에게 있고 그들을 함께 믿음의 날개로 날게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대구제일교회도 좀더 교회의 방향을 구령사업에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이 큰 교회를 지어 놓은 이유는 바로 구원의 독수리로 사용되기 위해서 입니다. 구원의 방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는 교회를 치장하는 일이나 보이는 어떤 사업에 치중하기보다는 구령사업에 더욱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자라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영적으로 자라게 하고 죽어가는 심령을 살리는 일에 치중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구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헌당예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표현입니다. 비록 이 건물이 우리 신앙 자체는 아니지만, 우리 신앙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헌신이 보이도록 표현된 상징입니다. 마치 큰 몸을 가진 독수리가 하늘 높이 날 수 있듯이, 그것도 바람을 이용하여 아주 쉽게 날아오르듯이, 대구제일교회도 성령의 바람, 은혜의 바람을 받아 높이나는 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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