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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삶 2002-06-06 13:47:33 read : 24732
누가복음 17:11-19 동영상 설교 보기
2002. 1. 20.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지금도 경상도에서는 허물없는 사이에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어이, 이 문디이!" 별로 싫지 않으시지요? 자식이나 친구가 잘못을 했거나 한심하다고 생각될 때 자주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좀 이런저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문동(文童)이의 잘못된 발음이라 해석합니다. 즉 공부하는 아이라는 해석입니다. 아시다시피 영남지역에는 예로부터 학문을 중시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공부를 많이 시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공부하는 아이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또 많은 사람들은 이 표현이 가까운 사람을 ƒ문둥병자„로 비하하는 친근한 표현으로 여깁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경상도 지역에 문둥이가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역설적인 표현은 우리 한국에서 아주 발달했습니다. 아주 독특한 것으로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표현법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런데 순수한 한글단어인 '문둥이'라는 단어가 자주 다르게 사용되기도 합니다. 한자로는 나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에는 서양의 영향으로 인해 한센씨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슷한 예로 눈먼 자를 장님이라 부르다가, 봉사, 소경, 맹인, 나중에는 시각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 명칭이 자꾸 바뀌어야 합니까? 이는 병자와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멸시가 담겨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문둥병자를 한센씨병 환자라 부르더라도 그들에 대한 편견과 멸시가 사라지지 않으면 매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가지 않아 문둥병을 또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불러야 하는 악순환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이해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사람으로 사랑해 줌으로써 삶에 대한 희망을 불어 넣어주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의 사회적인 선을 넘으면서 문둥병자들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 넣어주기 위해 여러 가지 관습의 선을 넘으셨습니다. 사회공동체에서 격리된 자들을 향하여 나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사랑 그 자체요 또한 희망 그 자체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지키는 지리적인 선을 넘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살던 당시 갈릴리 지역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갈 때 바로 남쪽에 위치한 사마리아를 거의 지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 해서 아예 이방인 취급을 했고 접촉조차 꺼렸습니다. 오히려 갈릴리 사람들이 더 많은 이방인의 피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배경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에 대한 편견과 질시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면 매우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요단강을 건너 먼길을 돌아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부러 갈릴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사마리아와의 접경지역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 보통 유대인들의 눈으로 볼 때 상당히 경계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그 길을 스스로 택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나름대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는 자발적으로 버림받은 사마리아인들을 찾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선을 넘어 복음은 계속 퍼졌습니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안에서 내적인 경계를 넘으셨지만, 그의 일꾼 사도 바울은 팔레스타인을 넘어 이방땅 유럽에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미국의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선교사는 큰 바다를 건너 이 땅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지리적인 선을 넘어 복음은 전파되어 왔습니다. 이 길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는 전파되는 것입니다.
지리적인 선에 대한 강박감은 우리 한국사람들에게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일본 사람들은 대외갈등이 있다면 우리 한국사람들에게는 대내적인 갈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적 혹은 경쟁상대를 외부에서 찾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찾는 정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영호남의 경쟁적 갈등과 배타적 성격이 그러합니다. 남북한의 문제가 서로 해결되기 어려운 배경에도 이러한 정서가 깔려있습니다. 회사 내에서도 상사에 대한 부하사원의 비난이 그러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교회 안에서도 나타나곤 합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의 정서가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이러한 정서를 고쳐나갈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의 선을 넘는 위태로운 듯한 여정을 계속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회적 차별의 선을 넘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갈릴리와 사마리아 접경 지역의 어느 한 촌을 들어가실 때 문둥병자들을 만나셨다는 점에서 잘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을 만났다면, 그 자리를 피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따르면 그들을 만나는 것조차 부정해 진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모습을 벤허(Ben Hur)라는 영화를 통해서도 잘 보시지 않았습니까? 유다(Judas)라는 주인공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문둥병에 걸리자 감옥에서 동리 밖의 동굴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유다가 그들을 데리고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가자 많은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쫓아내던 모습입니다. 이렇듯 문둥병자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당시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선을 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문둥병자를 만나면 대개 피하게 됩니다. 물론 여러분들 가운데 나환자 촌에서 봉사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꺼리실 것입니다. 저도 청년 때 저의 집에 문둥병자가 찾아와 볼펜을 팔 때, 값을 빨리 지불하고 문을 닫아버린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문둥병자들 입장에서 볼 때 소외되고 괴로운 사회적 차별에서 벗어나 정결한 자들의 사회로 복귀하려는 강한 욕구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시 관습대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이는 율법에 따라 문둥병자가 병에서 나음을 입었다 싶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미 자기가 치료하시겠다는 의지를 여기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너희가 문둥병을 앓고 있지만, 치료될 것이라는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제사장에게 가 보이면 그 동안에 깨끗하게 되리라는 사실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는 문둥병자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의 삶을 가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 당시 사회적 관습으로 볼 때 용납할 수 없는 선을 넘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이제 예수님은 가장 엄격한 선을 넘고 계십니다. 이는 종교적인 선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장의 권위를 대신 행하시는 모습입니다. 이는 당시 최고의 기득권층에 있던 제사장들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를 보내실 때 고치심의 약속이 전제되어 있었고 그 치료의 선언은 제사장이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치료를 확인하자 그 가운데 한 명은 제사장에게 가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뒤돌아 예수님에게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당시의 종교적인 관습을 벗어나는 과감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종교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제사장보다는 실제로 영적인 권위를 가진 예수님께 찾아와 무릎을 꿇고 진정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진정 종교적인 선을 이 문둥병자도 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께 제대로 응답하는 것이요 순응하는 모습입니다.
이때 예수님도 종교적인 선을 넘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는 실제로 예수님은 열 명 모두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기대하셨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얻은 사람도 오직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것도 당시 소외될 대로 소외되었던 사마리아 출신 문둥병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를 위하여 여러 가지의 선을 넘으시면서 질시와 위험을 감당하시면서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을 향하여 가던 열 명의 문둥병자들 가운데 아홉 명은 자기들의 피부가 깨끗해짐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더 빨리 제사장에게 뛰어갔을 것입니다. 그래야 깨끗하다는 판정을 받고 그들의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종교적인 선을 넘지 않으려는 유대인 문둥병자들의 보통 생각이었습니다. 이들은 한 명의 문둥병자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사마리아 문둥병자에게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러한 선언은 제사장도 말할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선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심으로써 하나님으로서의 권위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이러한 선언을 통해 사마리아인은 더욱 큰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자리에 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구원에 참여한 것으로 만족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마도 아홉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진정 사마리아 문둥병자에 해당하는 사람은 구원의 단계를 올라가 성화에 단계에 오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거룩의 단계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도 정말 선을 넘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진정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선을 넘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열 명에 한 명 꼴뿐입니다. 가장 소외되었던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자신을 낮추고 소외되었고 어렵운 위치에서 구원받는 자만이 이러한 자세를 가졌었습니다.
십분의 일에 속하는 것의 중요성은 구약성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아브라함은 지나가던 천사들을 대접한 일이 있습니다. 그들은 죄로 가득한 그것도 동성애를 비롯하여 음란의 죄가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가던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영역을 넘어 이 지상의 영역으로 들어온 자들이었습니다. 왜 그러한 선을 넘었습니까? 바로 사람들의 죄가 너무 지나쳐 하나님은 더 이상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로 가는 천사들을 대접하고는 자기의 조카 롯이 걱정되어 이렇게 물었습니다. 창세기 18:22-33을 보면,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쉰 명을 찾으면 멸망시키지 말 것을 하나님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 아브라함은 다시 요청했습니다. 다섯 명을 줄여 마흔 다섯 명이 찾아져도 멸망시키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 역시 긍정적인 대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요청하기를 여섯 번이나 해서 열 명으로 줄였습니다. 하지만 그 열 명도 찾지 못해 소돔과 고모라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유황불로 인해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 멸망 당시 그 성을 빠져나온 사람은 롯과 그의 아내 그리고 두 딸뿐이었습니다. 오직 네 명만이 탈출하였습니다. 그들만이 멸망의 선을 넘어 구원과 생명으로 인도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쉰 명 즉 오십 명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았습니다.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사람이 의인이었다면 그 성들은 구원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십분의 일에 속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지금도 스스로 선을 넘어 우리 가운데 응답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부르실 때 이에 응답하는 자가 은혜와 축복에 참여하게 됨은 성경 전체를 통해 계속 외쳐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범주에 들어있음을 우리는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저는 금요심야기도회에서 자주 이러한 표현을 합니다. 기도모임에 참여하시는 분은 이 교회의 영적인 기둥을 바쳐나가는 분들이다. 기드온의 삼 백 용사와 같이 이 교회를 위해 영적인 싸움을 감당하는 군사들이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금요심야기도회에 모이는 수는 우리 대구제일교회에 속한 교우들의 십분의 일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수입 가운데 십분의 일을 떼어 드림은 정말 힘든 결정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자신이 열 명 가운데 진정한 감사를 드릴 줄 알았던 사마리아 사람같이 자신을 하나님과 예수님께 드리는 표현입니다.
이외에도 십분의 일로 따질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를 하나 하나 열거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열 명 가운데 한 명이 되는 십일조에 속할 때 진정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아름다운 선언을 들을 것입니다. 이러한 선언을 들을 때 우리는 희망의 삶을 영위해 나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고 또한 넘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대구제일교회에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사람만이라도 과감히 선을 넘어 죄인을 찾아나서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우리 교회에 희망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희망이 있습니다. 그들로 인해 다른 아홉 사람에게도 혜택이 주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이번 2002년 한 해에는 과감히 선을 넘어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은혜를 받고 이웃의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소망을 던져주는 사람들이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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