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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에서의 바울 2002-05-31 18:52:34 read : 24453
사도행전 17 : 16 - 21
지난 화요일 오봉산을 올랐습니다. 산 위는 여기 저기 눈도 있었고 잠깐 쉬면서 내려다보는 산 아래는 평온해 보였습니다. 온갖 희로애락이 얽혀있는 사람사는 곳이 그렇게 평안해 보였습니다. 문득 '세상만사가 한치 건너서 좀 여유있게 바라볼 수만 있다면 달리 보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 塞翁之馬)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할 수만 있으면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과거보다 삶의 여건이 좋아졌는데도 불평은 더 많아졌습니다. 100년전 미국사람들은 꼭 바라는 것으로 16개를 꼽았는데 살기가 훨씬 좋아진 지금은 오히려 바라는 것이 92개로 늘었습니다.
바네트 깁슨의 저서 '행복한 하루'의 한 구절입니다. 「행운의 손바닥에 얼마나 많이 쥐게 되었느냐 하는 것은 그대의 행복과 관계가 없다. 그대의 마음 속에 감사한 생각이 없으면 그대는 파멸의 노를 젓고 있는 것이다. 제발 부탁이니 다른 공부보다 먼저 감사할 줄 아는 방법을 배우라. 감사의 예술을 터득할 때 그대는 비로소 행복을 찾을 것이다.」
오늘 본문은 아덴에서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아덴에 대하여 같이 생각합니다. 흔히 '종교'하면 예루살렘을 말하고 '정치'하면 로마를 말하고 '철학'하면 아덴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아덴은 당시 철학의 중심지였습니다. 전세계에서 배움에 굶주린 사람들이 모여드는 최대의 교육도시였습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헬라철학을 해야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사람들이 철학을 깊이한다해도 헬라철학자들이 시작해 놓은 철학체계 이상은 넘어서지 못한다고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헬라철학이 세계철학사의 커다란 바탕이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모두 아덴에서 있었습니다. 아덴은 철학뿐 아니라 과학, 문화, 예술의 중심지 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당시에 가장 학문적으로 발달되고 문화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아덴에 먼저와서 아직 베뢰아에 있는 실라와 디모데가 오기를 기다리며 아덴을 돌아보게 됩니다.
1.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분히 여기는 바울(16-17)
"16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17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아덴을 돌아보던 바울은 분노했습니다. 아덴에 우상이 가득했습니다. 아덴에는 당시 그리스 전체에 있는 우상들을 다 모은 것보다 더 많은 우상이 있었다고 하고, 아덴시 안에 있는 신상이 그 시에 살고 있는 헬라사람들의 수보다 많았다고 하니 짐작이 되지요? 아덴에서는 사람보다 우상을 만나기가 더 쉬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온통 아덴시가 우상으로 뒤덮혀 있다 해도 지나친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모여사는 철학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아덴이 우상으로 꽉차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깊습니다. 아무리 교육, 경제, 문화가 뛰어나다할지라도 사람의 근본적인 속성은 타락한 상태입니다. 아무리 철학과 사상으로 외양을 치장한다할지라도 사람의 내면은 언제나 죄의 지배아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까운 나라 일본을 봅시다. 일본은 경제대국입니다. 그들의 전자제품은 세계 제1의 품질을 자랑합니다. 일본차가 거대한 미국의 구석구석을 달리고 있습니다. After service는 또 얼마나 잘합니까? 이런 일본도 구석구석에 우상단지와 부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고합니다. 주머니에 부적넣고 다니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뿐 입니까? 중국이나 홍콩에 가면 이상한 향냄새가 진동합니다. 발리(Bali)에 가면 집문앞에서, 장사하는 가게에도, 심지어 운행하는 차에도 귀신 먹으라고 밥을 차려 놓아요.
그 옛날 피라미드를 만들었던 애굽사람들. 피라미드 보셨지요? TV의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피라미드는 현대인들에게도 불가사의로 남아있습니다. 어떻게 그 큰 돌덩이들을 쌓아올렸는지 현대의 건축공학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런데도 그토록 과학이 뛰어났던 애굽사람들이 섬겼던 것들이 뭔지 아십니까? 벌레들이었습니다. 애굽에 내렸던 10가지 재앙들에 등장하는 것들은 바로 애굽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이었다고도 합니다. 우상숭배는 과학적인 사고와는 별개인 모양입니다.
남의 나라 얘기 해서 뭐합니까? 사업시작하며, 공사시작하며 돼지 머리놓고 입에 돈 넣어주며 절하지요? 성공하게 해 달라고. 공사장에서 사고나지 않게 해 달라고 돼지 머리에 절하는 것(웃으며 죽은 돼지 머리가 비싸다지요?)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뿐입니까? 병원에서 최첨단 의료장비를 들여놓고 고사들이지요? 최첨단 의료장비와 고사 - 아니로니칼 하지 않습니까? 지금도 선거철이 되면 점쟁이 집 앞에 유수한 사람들이 몰려들고 박사학위가 있어도 주머니에 부적이 버젓이 있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당시 최고의 지성, 최고의 철학과 문화의 도시에 우상이 널려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많이 배워 안다는 것과 우상숭배와는 별 관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많이 안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와 약점을 더 많이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부많이 한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잖습니까? '공부하다 보니 더 모르는 것 뿐이더라' 자기의 한계를 알게되니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의지하려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간의 타락된 상태는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머리가 좋다고 해서 감춰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을 때 죄인된 우리는 의로워집니다. 아덴 사람들은 철학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엇지만 그렇다고 철학이 교육이, 예술이 인간을 죄인된 신분에서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아덴사람들이 우상숭배에 빠져있던 근본적인 이유였습니다.
바울은 후에 로마에 보낸 편지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지적합니다.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마음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愚蠢)하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과 금수(禽獸)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이런 모습을 보고 바울의 마음 속에 분이 일었습니다. 격분했다는 말씀입니다. '분'이라는 헬라말 '파록쉬네토(παρωξυνετο)는 마음 속에 고통이 있을 정도로 분통이 터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최고 지성의 도시에 가득찬 우상을 보고서 느낀 바울의 분노? - 어떤 분노입니까? 바울의 분노는 하나님의 영광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죄와 우상과 타락에 대한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이 느낀 거룩한 분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보다 물질이 우선시 되는 세상, 공의와 정의보다 힘있는 자들의 입김이 가난한 자들의 삶을 억압하는 세상, 환자들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일부 잘못된 의사들의 행태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일말의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다면 올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왜곡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요 '열린 무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호되게 꾸짖으며 내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신앙에 위배되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분노는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너무 나약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옳지 않는 일을 앞에 두고서도 관여하기 싫어서 그냥 눈감아 버리지는 않습니까? 좋은게 좋은 거라고 세상과 타협하며 사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신앙은 세상의 욕심에 대하여 언제나 '아니오'라고 말할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불의와 우상숭배를 지켜보며 눈감고 묵인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우상에 대하여 분노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불의와 우상숭배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말할수 있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회당에 들어가 날마다 변론했습니다. 변론이란 희랍어로 '디엘레게토(διελεγετο), 강의입니다. 2절에 강론과 같은 뜻입니다. 어떤 것을 증명하려고 애썻다는 것입니다.
왜 사도행전을 쓴 사람은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하지 않고 변론했다고 했울까요? 뭔가 아쉽기도 하고 뭔가 개운치가 않은 분위기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그 다음에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2. 쟁론에서 말장이로.(18)
"18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爭論)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변론을 하던 바울이 드디어 아덴에서 당시에 유명하던 철학자들을 만났습니다.
18절에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이 나오지요. 먼저 에비구레오 철학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에비구레오는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os B.C 341-270)에 의해서 시작된 철학입니다. 이 철학은 현재적인 쾌락추구를 우선합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죽음은 어떤 것입니까? 생각하기도 말하기도 싫어합니다. '살아있을때는 죽음이 보이지 않고 죽을때는 이미 현실과 죽음에서 떠나 있으니 걱정할 것이 뭐가 있느냐?' 그럴듯하지요? 이들은 고통없는 행복, 고통없는 쾌락을 세상사는 동안 추구해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 최종적인 목표로 여깁니다. 신을 믿기는 믿었는데 인간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인간을 간섭하지도 않으니 있기는 있지만 없는 것과 같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있지요? 선과 악의 구별이 없어요. 도덕성이 없어요. 세상 정치 사회 문화에 전연 관심이 없어요. 이 세상 사는 동안 어떻게든 나 혼자만 쾌락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성도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에피쿠로스 철학은 그 옛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주위에서도 많이 보지 않습니까? 철저하게 현실적이고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쾌락주의, 우리나라 어른들이 부르는 노래중에 가장 에피쿠로스 철학과 가까운 노래가 뭔지 아십니까?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 대부분의 범죄가 현실적인쾌락추구에서 옵니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도덕적 개념이 없어요. 내돈 가지고 내가 즐기는데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거지요.
스도이고 철학은 스토아(Stoa) 철학인데 제논(Zenon B.C.340-265)이 시작한 학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스토아 철학은 에피쿠로스 철학과 반대되는 것이 많습니다. 스토아 철학은 신은 자연이고 자연은 신이라는 범신론을 주장합니다. 세상 모든 것은 인간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되는 것으로(여기까지는 우리신앙과 비슷하지요?) 인간에게는 아무런 자유가 없고 다만 신의 의지에 따라 정해진 운명을 살아야만 한다는 운명론을 주장합니다.(여기서 우리와 완전히 다르지요) 스토아 철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금욕주의'입니다.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에 비해 스토아 철학은 철저히 정욕을 억제하고 쾌락을 멀리하라고 - 그래야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노라고 주장합니다.
성도 여러분.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죄송한 이야기지만 철학이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바울이 철학자들과 만나서 쟁론했어요. 쟁론이란 '쉬네발론(συνεβαλλον), 한마디로 돌던지며 싸우는 것처럼 말싸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흐름을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아덴을 돌아다니면서 널려져 있는 우상을 보았을 때 분노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철학에 능통한 바울이 자신의 철학적 지식을 가지고 기독교를 변론했습니다. 변론이 발전되어서 뭐가 됐습니까? 논쟁이 되었습니다. 변론과 논쟁으로 바울은 그들이 복음에 굴복하도록 애썼지만 그게 쉽게되지 않았습니다. 다음시간에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철학적인 주장으로 사람을 굴복시키고, 구원시킬 수 없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논쟁에 대한 반응은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 이 말쟁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뛰어난 철학실력으로 자신들과 논쟁하는 바울을 아덴의 철학자들은 '참 훌륭하네' '그래 맞아' 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말쟁이' 취굽했습니다. 말쟁이란 '스페르몰로고스(σπερμοχογοσ) - 본래는 곡식을 쪼아 먹는 새를뜻하였으나 후에 쓰레기를 주워모으는 사람을 가리켰으며 나중에는 다른 사람의 사상을 얻어듣고 그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것인양 도용하는 사람을 가리켰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을 사기꾼이나 떠벌이 정도로 취급했어요. 또하나는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것을 듣고 어떤 외국의 낯선 신을 전하는 사람 정도 취급을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론가지고 논쟁으로 예수 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아셔야 합니다. 설혹 논쟁에 이겼다해도 '예수 믿는 사람 말은 잘해 ' '예수 믿으면 벙어리도 말하게 된대'하는 비아냥 듣게 됩니다. '회개하고 주예수 믿어라'단순하게 전해야 하는데 철학적으로 복음을설명하려하고ㅡ 철학적으로 논쟁에서 이겨 예수 믿게 하려 한다면 계산착오입니다. 때로 논쟁에서 이겼다해도 기분나빠서(졌는데 기분이 좋겠어요?) 예수 안 믿어요.
예수님은 부끄러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은 십자가를 부끄러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강력한 이론도, 최고의 권력도,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하는 군사력도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앞에서는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능력입니다. 성도 여러분. 안 믿는 이웃들을 사랑으로 용납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이기는 겁니다. 져주는 것이 지혜로운 전도방법입니다.
후에 바울은 이 경험에서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딤전6:20)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딤후2:23)
3. 새로운 것에만 관심이 있는(호기심만 많은)아덴 사람들.
"19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교가 무엇인지 알수 있겠느냐? 20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는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당대의 아덴 철학자들과 바울이 쟁론을 하니까 사람들이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데려갑니다. 아레오바고는 일종의 법정입니다. 당시 아덴에서 종교적, 윤리적 문제가 생기면 이곳에서 재판했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던 곳이었고 당시 통치자들이 대중들과 만나 대화하던 곳이었는데 바울은 죄수로서 재판받으러 온 것은 아니었고 바울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듣고자 함이었습니다. 청문회 비슷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19절에서 21절에 내용이 나와있지요.
네가 말하는 새 교(敎)가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우리가 듣기에 이상한 것을 말하니 그뜻이 무엇인가 알고 싶다.
아레오바고에는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일로 세월보내기를 즐기는 아덴 사람들과 외국에서 온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잇었습니다.
바울이 얘기하는 복음의 핵심과 진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바울이 하는 말이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므로 새것에 대한 호기심이었다는 말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호기심은 막을 수 없나 봅니다. 호기심은 좋게는 많은 발명과 발견으로 이어집니다. 제임스와트(James Watt)는 주전자 물이 끓으면서 뚜껑이 움직이는 것 보고 증기기관을 만들어 냈지요. 뉴턴(Newton. I.)은 사과가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호기심은 좋고 유익합니다. 그러나 호기심이 꼭 좋은 쪽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지마시오'하면 더 보고 싶지요. '미성년자 관람불가'하면 더 보려고 하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화살표가 그려져 있고 '이쪽으로 오시오'하고 쓰여있어 호기심에 가보았더니 다시 화살표로 이쪽으로 저쪽으로 표시가 되어 있어서 계속 따라가 보았더니 마지막에는 이런 글이 쓰여있었습니다. "이 바쁜 세상에 왜 쓸데없이 이리저리 헤매고 있습니까? 바보같은 사람" 졸지에 그 사람은 바보가 되었습니다. 호기심은 때로 사람을 사람을 바보로 만듭니다.
당시 아덴에는 유대인도 있었고 헬라인도 있엇고 철학에 관심이 많은 외국인들도 몰려 살고 있었는데 매일같이 모여서 논쟁하기를 즐기고 새로운 것이 있다면 모두다 그런것에 시간을 보냈습니다. 삶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실천없는 주장, 사상, 새로운 이야기에만 정신이 빠져있었습니다. 새것! 좋지요. 그러나 너무 새것만 좋아하지 마세요. 새것 좋아해서 낭비하는 것 얼마나 많습니까? 휴대전화 - 조금 편하다고 조금 모양이 새롭다고 아직 쓸만한데 그냥 버리고 새번호로 새 모델로 바꾸지요? 일부러 옛날의 불편한 것 고집할 필요는 없지만 쓸만한 것 버리고 새것만 찾아 다니는 것 문제 아닙니까? 1989년 처음 태국에 갔을 때 안내하던 여행사 직원이 가방에서 손바닥 보다 큰 전화기꺼내서 국제전화 거는데 - (지금의 휴대폰에 해당합니다) 그렇게 신기해 보일 수가 없어요. 그런 전화는 잃어버릴 염려가 없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구닥다리지만 전화거는 것은 매일반 아닙니까? 해아래 새것이 어디 있겠어요?
새로운 것 좋아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에 빠져 사는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어야 할 하나님 말씀이 있지요. 이사야 40장 8절 말씀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상이나 문명은 계속 새것으로 교체됩니다. 교체된다는 것은 이전 것은 계속 시들어간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러나 이땅에 영원한 것이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만 영원합니다. 호기심 많고 새것 좋아하는 사람 - 헛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브리서13:8)
정리하면서
아덴에서의 바울은
아덴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자기가 배웠던 철학적 지식으로 기독교와 예수를 변론하다가 논쟁까지 했습니다.
논쟁으로는 상대방을 설득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말쟁이라 조롱만 받습니다.
당시 아덴의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들.
지금도 물질과 육체의 쾌락을 좇아사는 사람들 많이 있지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이 아니라 복음 바로 그 자체입니다.
복음은 어떻게 전해야 합니까? 아덴처럼 철학사상도 풍부하고 우상도 많은 곳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논쟁을 통해 복음 전하는 방법은 지양해야 합니다. 다음 주에는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를 중심으로 그 내용과 복음을 전하는 방법과 자세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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