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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2) 2002-05-31 18:51:08 read : 25053
사도행전 17 : 22 - 34
들어가면서
헬라인들이 자주 하는 이야기 가운데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은 두 개의 자루를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하나는 앞에 달고 다니고, 하나는 뒤에다 매달고 다니는데 앞에 있는 자루에는 남의 허물을 계속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뒤에 메고 다니는 자루에는 자기의 허물을 집어 넣고 다닙니다. 뒤에 있는 자루가 눈에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허물은 자기에게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앞자루는 남의 허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의 허물만 보고 이러쿵 저러쿵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무분별한 비판은 상대방에게 심각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서로를 비판하게 되면 올바른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비판에서 오는 인간관계의 단절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인간이 직면한 최대의 위기는 "관계의 위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최대문제는 바로 무분별하고 공격적인 비판과 깊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비판은 인간관계를 무너뜨리고 나아가서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줍니다.
그러나 비판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건강한 목적을 위한 비판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역사 발전과 사회 발전을 위해서 건전한 비판은 꼭 있어야 하고 또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선입견과 감정을 떠난 비판은 당사자와 비판하는 사람 모두에게 좋은 것입니다.좋은 비판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 단계 더 발전하도록 하는 좋은 자극과 도전을 주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감히 바울의 설교를 조심스럽게 평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설교자체가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금기시 되어왔습니다. 또 바울은 기독교 역사가 낳은 최고의 신학자요 전도자요 설교가였습니다. 그런 바울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얘기한다는 것은 좀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강해를 하면서 이 부분에 와서 그냥 넘어가려니 좀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기에 인간이 범할 수 밖에 없는 실수와 한계가 있었습니다. 바울 같이 위대한 전도자에게도 실수와 시행착오가 있었다는 사실은 - 오해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의 시행착오를 즐기는 것은 아니니까 - 어떤 면에서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지 않습니까?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의 좋은 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과 시행착오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을 함께 찾아보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실제적인 도움을 받아봅시다.
1. 바울설교에서 배워야 할 점들
(1) 회중을 칭찬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22절) 22절을 봅니다.
"22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오늘 본문 22절부터 31절까지가 바울이 아덴에 도착하여 설교했던 내용입니다. 아덴은 '희랍의 눈이요 예술과 웅변의 어머니'로 알려진 도시였습니다. 헬라철학과 문화에 능했던 바울은 이러한 아덴에 대단히 흥분도 했고 기대감에 벅차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류 문화와 역사발전에 기여한 두 개의 큰 기둥을 든다면 하나는 헬라 사상이요 다른 하나는 히브리 사상입니다. 두 개의 기둥에도 정통한 바울이 그중 하나인 헬라사상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도시 아덴에 왔으니 어찌 큰 감회가 없었겠습니까? 바울은 은연 중에 자기가 배웠고 알고 있는 철학의 실력을 한번 저들과 당당히 겨루어 보고 싶은 마음의 충동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레오바고에 서서 당대의 내노라하는 철학자들과 변론하게 됩니다. 물론 바울이 전도의 방법으로 변론을 택한 것은 그리 바람직한 전도방법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변론에 앞서 아덴 사람들에게 다가갔던 방법은 참으로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호기심 많은 아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바울이 선택한 훌륭한 방법은 바로 '칭찬'과 '인정'이었습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凡事)에 종교성이 많도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바울이 아덴에서 많은 신전과 신상을 보고 한 말 같은데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칭찬'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일단 다양한 종교성에도 긍정적인 자세로 출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호기심 많은 모습에 대해 책망이 아니라 일단 '칭찬'과 '인정'으로 출발합니다. 바로 이점이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바울이 가지고 잇는 배워야 할 점입니다.
바울은 덮어놓고 아덴 사람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바울은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긍정하는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전투적으로 싸워야 할 상대로서가 아니라 구원해야 할 상대로 바라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싸워야 할 상대와 구원해야 할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른지를 아시겠지요? 싸움의 상대와는 철저하게 싸워야 하고 구원해야 할 상대와는 철저하게 마음을 돌이키도록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원해야 할 상대와 싸우려 한다면 어리석은 일 아닙니까? 아덴 사람들이 우상숭배 많이 한다고 버릴 수야 없지 않습니까? 바울이 3차에 걸쳐 그 많은 지역에 선교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와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간단하게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 중심입니다. 내 입장에서만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니 상대방에 대하여 칭찬할 여유가 없습니다. 상대방을 헐뜯고 깎아 내리기 바쁜데 어느 세월에 칭찬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교와 전도는 언제나 전투하듯 해서는 않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대상은 싸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랑의 대상이며, 우리가 기도해 주고 존중해 주어야 하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들입니다.
유명한 중국의 성도인 윗치만 니의 간증 가운데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중국의 예수 믿는 한 성도의 논에 물이 풍성하게 고여 있는데 마침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한 밤이 지나고 나면 이상하게 자기 논에 고여 있었던 물이 다 빠져 나가곤 했습니다. 그 성도의 바로 옆에 있던 이웃집의 논에서 밤새도록 그 성도의 논에 고여있던 물을 다 빼 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이튿날 이웃에게 가서 따지고 이웃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논에 고여있던 물을 다시 자기 논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자신의 논에 물을 다시 끌어왔지만 그 마음 속에 도무지 평안이 없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며 기도하던 이 농부의 마음 속에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날 밤 위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튿날 새벽녘이 되어서 자기 논의 물을 빼어서 이웃의 논에 물을 대어 주었습니다. 이일이 계기로 이웃집 농부는 감동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고, 좋은 이웃으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지 않는 이웃을 전도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덮어놓고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존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그들의 닫힌 마음이 열립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전도방법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2) 복음 전도를 회중의 관심사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23절)
. "23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바울은 자신의 설교를 시작함에 있어서 아덴사람들이 이해할 수 잇는 주제부터 시작합니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의 화두(話頭)는 '알지 못하는 신'(An unknown god)이었습니다. 당시 아덴에는 수많은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았던 아덴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 사상에 대단히 수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덴 사람들의 수용적인 태도는 그들이 섬기는 우상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자신들이 알지 못해서 섬기고 있지 않지만 분명히 또다른 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알지 못해서 섬기지 못했다 하더라도 섬기지 못한 것 때문에 화를 당할 수 잇다고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덴 사람들의 우상 중에는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우상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아덴사람들의 관심에서부터 설교를 시작합니다. 바울은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알고 잇었습니다. 바울 자신의 관심사를 전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신앙체험과 복음보다는 먼저 상대방의 호기심 관심을 가졌습니다.
우리도 이런 바울의 모습에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언제나 내 입장에서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내가 좋으면 상대방도 좋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내게 필요없으면 상대방도 필요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는 보통 사람들입니다. 좋은 인간관계,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는 상대방의 관심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남자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가정화목의 비결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만큼 고객의 취향을 잘 분석하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1월14일은 한해를 잘 계획하고 시작하라고 다이어리(Diary 日記帳)를 선물하는 '다이어리 데이'(Diary Day)라고 합니다. 2월14일은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발렌타인 데이'(Valentine's Day). 3월14일은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을 선물하는 '화이트데이'(White Day), 그래도 여기까지는 좀 알겟는데 4월14일도 있어요. 무슨 날인지 아세요? 이성친구가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 짜장면을 먹는 '블렉데이'(Black Day)라는 얘기를 듣고 참 별난 날도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혹시 11월11일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11월11일은 '빼빼로 데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저는 빼빼로 데이가 무슨 날인가 생각했데 알고보니 11월11일이 1자가 네 번 겹치는 날이라 과자 빼빼로를 닮았다 해서 붙인 이름이더라구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빼빼로 만든 회사에서 상품 팔려고 낸 아이디어 같은데요. 속보이는 상술(商術)이긴 하지만 참 기발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도 자신들의 물건을 팔기 위해 고객들의 취향과 관심에 대해 그렇게 연구하는데,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도 복음이 필요한 이웃들에 대해 연구하고 공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 준비없이, 열심만 가지고 전도한다고 전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대상에 대해 연구하고 기도하고 전도할 때 전도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3) 상대방 수준에 맞춰 전도했습니다.
어떤 교인이 기차를 타고 가다가 같은 교인이 앞자리에 앉아 같이 타고 가게 되었습니다. 서로 기도하고, 인사도 하고, 가다가 식사때가 되어서 한 교인이 도시락을 꺼내 먹고 있었습니다. 앞에 앉아 있던 교인이 생각하기를 같은 교인이니 조금 잡수시라고 인사라도 하지 않겠나, 나누어 먹지 않겠나 하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혼자만 먹는 거예요. 그래서 앞에 앉아 도시락 먹고 있는 교인 들으라고 혼잣말처럼 말합니다. '성경에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 같이 하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들은 도시락 먹던 교인이 대꾸합니다. '성경엔 다른 좋은 말씀도 있습니다. '십계명에 보면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혼자 도시락을 먹던 사람이나 그것을 보고 삐진 사람이나 피차 일반입니다. 수준이 맞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수준이 맞을 때 쉽게 친해집니다. 그래서 동향인들은 쉽게 친해지고, 직업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잘 모입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수준을 고려했습니다. 아덴은 당대 제일의 철학이 발달한 곳이었고 따라서 수많는 철학자들이 모여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라서 그 도시의 많은 사람들의 지적 수준도 대단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철학적 수준에 맞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레오바고 설교내용이 그렇습니다. 28절을 보면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헬라 시인의 시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덴 사람들의 수준에 맞춰 전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요즘 눈높이 교육이라는 TV 광고 보셨지요? 눈높이가 중요합니다. 교회학교 설교하는데 천지창조가 어떻고, 인간의 죄성이 어떻고, 종말이 어떻고 하면 아이들이 쉽게 이해하겠습니까? 새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하루에 30분씩 성경 꼭 읽고, 새벽기도, 철야기도 나오라 하면 어떻겠습니까? 성숙한 신앙인들도 어려운 것을 새신자들이 쉽게 감당하겠습니까?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그곳의 형편과 수준에 맞게 행동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겐 유대인들에게 맞는 언어와 행동을 했고, 이방인들에게는 그들에게 맞는 적절한 방법을 택했습니다. 아덴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철학적인 지식을 염두에 두고 철학적인 방법으로 다가갔습니다. 바울이야말로 눈높이 교육을 몸으로 실천한 위대한 교육자요 전도자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9:22절 후반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표준새번역) "…나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2. 바울 설교의 문제점들
(1) '알지 못하는 신'(An unknown god)의 정체
바울은 아덴사람들의 '알지 못하는 신'에서부터 자신의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아덴사람들이 말하는 '알지 못하는 신'은 기독교가 고백하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덴사람들은 바울의 말처럼 종교성이 많았습니다. 아덴에는 우상이 넘쳐났습니다. 사람의 수보다 우상의 수가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모자라 이름을 모르는 '알지 못하는 신'까지 만들었습니다. 아덴사람들이 섬기는 신 중에 혹시 빠진 신이 있다면 그 빠진 신이 진노할까봐 겁이나서 미지의 신까지도 섬겼습니다. 어떤 사람이 동남아에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예수 믿겠느냐?' 했더니 싑게 믿겠다고 대답하더랍니다. 기분이 좋아서 얼마후에 예수 믿겠다한 그 사람 집에 갔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 사람이 섬기는 신들이 많이 있는데 맨 마지막에 '예수신'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다른 우상들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기독교는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다른 우상과 함께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만, 세상사람들은 유일신 신앙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우상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그래서 아덴사람들도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이 있을까봐 '알지 못하는 신'으로 명명햇습니다. 좀 복잡하게 설명했습니다만 쉽게 정리하면 '아덴 사람들이 말하는 '알지 못하는 신'은 기독교신앙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을 들어 하나님을 변증하려고 했습니다. 참 무모하고도 힘든일입니다. 아덴 사람들도 확실치 않은 우상을 철학적 방법으로 하나님을 증명하려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아닌게 아니라 결국 바울의 변론은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전도는 결코 철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과 고백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분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인데 이 믿음은 변론을 통해 증명하려 했습니다.
(2) 철학적 전도의 한계 - 복음의 선포가 부족
바울은 아덴 선교에서 너무 그들의 지성을 의식한 나머지 철학적 방법으로 접근하여 변론을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복음은 선포입니다. 복음은 증명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그 자체가 능력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복음을 전하여야 했는데 변론했습니다. 철학적으로 이 경험 때문인지 그는 디모데전서 6장 20절에서 '변론을 피하라'라고 했고 디모데후서 2장 23절에서는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했습니다. 디도서 3장 9절에서는 변론은 무익한 것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아덴에서의 변론이 바울에게 얼마나 뼈아픈 상처와 아픔을 남겼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성경구절들입니다. 우리도 바울의 실수를 종종 되풀이하지는 않습니까? 상대가 학식이 높다면 우리는 그들의 지적 수준에 맞게 전도하려고 자기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전문용어를 써가며 복음을 전달합니다. 체계적이고 지적인 전도가 아니면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을 전도하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입니다. 전도는 꼭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복음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무슨 어려운 신학적이고 전문적인 용어로 설교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농부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쉽게 이해했습니다. 학식이 없던 백성들도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뜻과 천국의 비전을 선포하셨을 뿐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한 복음의 선언이 필요하지, 결코 철학적이고 전문적인 방법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음자체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아덴에서의 변론 이후에 바로 복음이 능력이라는 단순하지만 심오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후에 이러한 자신의 깨달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22-24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2:2을 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능력이라는 말로 '두나미스'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다이나마이트가 바로 이 '두나미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폭탄이 떨어지면 로마라고 하는 도시가 무너진다.'라는 무언의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죄악과 사치의 상징이었던 당시의 로마에 복음이 떨어지면 모든 것이 변할 것이라고 바울은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복음이 곧 능력임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연세대 총장이었던 백낙준 박사는 한국 교회사에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 아버지는 점쟁이었습니다.
길거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관상을 봐주고 돈을 벌었습니다. 어느날 길을 지나가던 한 집사가 백낙준의 아버지를 보고 한마디를 했습니다. "여보시오. 그런짓 하다가 당신도 망하고 자식들도 망할텐데 그 짓 빨리 그만두고 예수나 믿으시오." 그때 그는 눈을 흘기면서 '너나 잘 믿어라. 재수 없게 왜 떠들고 가'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잠을 자려고 누워있는데 집사님이 한마디 던진 말이 계속 귀에서 맴돕니다. '그런짓 하다가 당신도 망하고 자식들도 망해' 잠을 자도 그 소리가 들립니다. 드디어 그는 모든 것 을 다 청산해버리고 예수를 믿었는데 그 아들이 연세대 총장이 되었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지나가는 말 한 마디가 그렇게 위대한 인물을 낳았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의 능력 앞에 겸손해 집시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담대하게 믿지 않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합시다. 그 복음이 능력이 되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예수 믿으시요,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단순한 선포 - 선포에 능력 있음을 믿고 담대하게 전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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