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부모가 되라 2002-05-31 18:46:22 read : 24756
역대하 33:1-13
(남기성 교육담당부목사)
청소년들 중 73%가 아버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 중에는 "아버지와 나는 꼭 모르는 사람 같아요.", "아버지는 날 낳아주기만 했을 뿐 상관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청소년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버지의 생활이 대부분 직장생활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관계로, 가정에 대해서는 그만큼 소홀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육상담연구소(부산)가 최근 내놓은 청소년들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 분석 결과를 보면, 별문제가 없는 청소년들은 대체로 아버지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반면, 문제가 있는 청소년의 경우는 아버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연구소에서 만 6세 이상 고등학교 3학년까지의 학생 8백 32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전체의 73.4%나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머니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는 경우인 19.4%에 대해 무려 4배에 가까운 수치입니다. 이 조사에서 아버지의 이미지에 대한 표현은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모르는 사람 같다.", "너무 무능하고 속물이다.", "엄마를 때리는 사람이다.", "가정의 독재자다" 그런데, 이런 표현은 매우 양호한 표현에 속합니다. 어떤 학생들의 경우는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중 가장 양호한 표현은 "아버지와 나는 패고 맞는 사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많은 청소년들이 자신의 부모를 향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부모의 권위가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낸들 그러고 싶어서 그런 줄 아나. 나도 가족들과 행복하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바둥바둥 하면서 살고 있는 줄 아나. 다, 가족 부양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 아닌가!"라고 말하고 싶으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것을 볼 때, 아버지의 권위, 더 나아가 부모의 권위는 자식들의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가정에 대해 쓴 소박한 글이 있어 먼저 소개하고 오늘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가정을 이루는 것은 의자와 탁자와 소파가 아니라, 그 소파에 앉은 어머니의 미소이다. 가정을 이루는 것은 푸른 잔디와 화초가 아니라, 그 잔디에서 터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이다. 가정을 이루는 것은 자동차나 식구가 드나드는 대문이 아니라, 사랑을 주려고 그 문으로 들어오는 아빠의 설레이는 가슴이다. 가정을 이루는 것은 주방과 꽃이 있는 식탁이 아니라, 정성과 사랑으로 터질듯한 엄마의 기다림이다. 가정을 이루는 것은 자고 깨고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애정의 속 삭임과 이해의 만남이다. 행복한 가정은 골고다에 있다. 거기서 허물은 용서되고 미움은 사랑에 삼켜진다. 거기는 희생이 있고 자기를 종처럼 내어주는 곳이다. 거기는 비난보다는 눈물이, 주장보다는 포용이 있는 곳이다. 거기는 십자가가 있는 동산이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 자녀들에게는 단순히 좋은 주택(house)보다는, 좋은 가정 (home)이 더욱 필요합니다. 춘천중앙교회 모든 성도들의 가정이 이와 같은 가정이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은 특별히 "좋은 부모가 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어떤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까?
1. 먼저, 신앙의 본이 되는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
부모의 삶은 그 자체로써 자녀들에게 교육적인 파급이 엄청납니다. 문제는 좋은 본인가 나쁜 본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므낫세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누구입니까? 므낫세은 히스기야의 아들이자, 그의 후계자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히스기야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므낫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함께 2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향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누가 그랬다구요? 므낫세입니다. 그것도 기도의 사람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입니다. 므낫세가 어떤 일을 했습니까? 그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리고 바알을 섬기기 위해 제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별을 숭배하고 주님의 성전 안에 이방신을 섬기는 제단을 만드는 등 정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가장 악한 일들만 골라했습니다. 왜 므낫세가 이렇게 된 것입니까?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앗수르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고 죽음 앞에서 15년 인생을 더 연장받았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이 15년의 인생을 살면서 영적인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역대하 32장 24-25절에는 히스기야가 왜 영적인 암흑기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역대하 32장 24-25절 말씀을 함께 봅니다. "24그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된 고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이적으로 보이셨으나 25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치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
그렇습니다. 히스기야는 교만했습니다. 히스기야의 교만한 모습이 그 아들 므낫세에게 유전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보면, 히스기야가 덤으로 얻은 15년의 기간동안 어떠한 일을 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겨우 아들 하나 낳아 키운 것 뿐인데 그것도 유대 나라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을 배출했습니다. 왜 그런 불행한 결과가 찾아왔을까요? 히스기야의 믿음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면, 부모가 훈련되어 있지 않다면 자녀를 가르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부모가 신앙생활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자녀들에게 제대로 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녀들 가운데는 부모가 좀더 참된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들의 부모를 신앙의 모델로 삼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슈메이커라는 설교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논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보고서 신앙을 가지게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자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자녀가 성경을 공부하고 주님과 교제하며 다른 사람을 섬기기를 원한다면 그들에게 먼저 그런 모습을 직접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본을 보여야 합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기도생활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성경도 읽어야 합니다. 할 수 있다면 자녀들과 함께 성경읽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바람직합니다. 또한 생활면에서도 항상 성실하고 진실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속담 중에 "말을 물가로 인도할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속담이 맞는 말일까요? 아니면 틀린 말일까요? 저는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방법을 달리하면 말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말로 하여금 뜨거운 태양 밑에서 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은 갈증을 느끼게 될 것이고, 평소보다도 더 많은 물을 마실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먼저,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갈급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자 갈급해지면 하나님은 만나주실 것이고 그런 모습을 자녀들이 보게 될 때, 우리의 자녀들도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갈급한 심령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자녀들도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 생활이 병든 부모는 결단코 자녀들에게 본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이 병든 부모가 자식에게 어떤 모범을 보여준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적당하게 거드름을 피우면서 사는 부모에게서 자녀가 무슨 영적인 감화를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부모가 하나님 앞에서 습관적인 예배, 형식적인 예배만 드린다면 그 자식도 신앙교육을 형식적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입니다. 부모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자녀에게 모범이 되지 않습니다. 자녀들의 눈이 얼마나 정확한지 모릅니다. "우리 부모는 교회를 다니기는 해도 형식적으로 다닐 뿐이야!"라고 정확하게 집어낼 수 있어요. 성도 여러분, 자녀에게 본이 되는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가정 예배를 드리다보면, 먼저 부모로써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자녀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믿음이 더욱 성숙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가정예배를 단순한 기도회를 끝내서는 안 됩니다. 기도회 겸 가족토의 시간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온 식구가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앞에 놓고 진진하게 대화를 나누어 보세요. 그 때,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가르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됩니다.
2.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천사가 여러 해 걸려서 지상에 왔습니다. 그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세 가지를 골랐습니다. "예쁜 꽃", "갓난아이의 웃음"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천사는 그것을 바구니에 넣어 가지고 여러 해 지나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예쁜 꽃은 시들어 볼품이 없어졌습니다. 갓난아기는 자라서 천진난만한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한결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사랑을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모의 사랑을 우리의 자녀들이 얼마나 느끼고 있을까요? 요즘 우리의 자녀들을 보면, 부모의 사랑에 대해서 깊이 느끼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비행 청소년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그 단면입니다. 물론 비행 청소년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부모의 사랑을 느끼고 있지 못하다고 단적으로 말하기는 힘들겠지만, 만약, 우리의 자녀들이 힘들어하고 있을 때 곁에 있어만 주었더라면, 그리고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만 있었다면 비행 청소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모는 자녀가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어야 합니다. 특히 몸으로 가깝게 지내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시간을 충분히 함께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은 자녀 교육을 사격 훈련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사격은 거리가 멀수록 명중률이 떨어집니다. 가까워야 효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코치는 선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을수록 영향력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요즘 아버지들이 너무 바빠서 자녀들에게 건강한 정서교육이 잘 안 되고 있어요.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 아빠 ?? 바빠 ?? 나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라는 직업은 장거리 육상 선수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부모 노릇은 단 거리가 아닙니다. 마라톤입니다. 그리고 좋은 부모 노릇은 기본적으로 마음의 활동이지 머리의 활동이 아닙니다. 특히 현대 부모들은 옛날 어른들에 비해 잔소리가 너무 많아졌습니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대화의 유형은 대단히 위험하며, 큰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령관 유형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언제나 명령하고 지휘하는 대화방식입니다.
둘째는 도덕주의자 유형입니다. 자신만의 선악의 기준에 따라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대화방식입니다.
셋째는 만물박사형이 있습니다. "너는 모르지만 나는 다 알아. 변명하지 마. 내가 다 알아." 이런 대화 방법은 자녀의 기를 죽이는 역효과를 냅니다.
넷째는 판사형으로써, 항상 위에 서서 뭐든지 쉽게 판결을 내는 형입니다.
다섯째는 비평가로써, 이런 부모는 자기가 항상 옳기 때문에, "그런 멍청한 소리나 바보짓 하지 마라"고 지적합니다.
여섯째는 정신분석학자 형으로써, 언제나 상대방의 심리 분석에 심혈을 쏟는 사람으로서 자녀를 불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대화의 유형은 "위로형"입니다. 위로형의 부모는 "그래, 그 정도면 잘 했어. 괜찮아. 아빠는 너 보다 더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았어. 너는 더 잘 할 수 있어. 다시 한번 도전해 봐." 이렇게 말합니다.
21세기는 IQ시대가 아니라, "EQ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으로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부모는 자녀들이 실패와 좌절을 겪고 방황하게 될 때, 돌아와 쉴 수 있는 "항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마음속에 큰 감동 이 되는 것은 그 가정이 열린 가정이라는 점입니다. 둘째 아들이 어떻게 기꺼이 집으로 돌아오고자 결단을 할 수 있었습니까? 아버지의 사랑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부모는 자녀가 지치고 상한 몸을 언제나 쉴 수 있는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항상 사랑으로 가정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한 소년이 탄 경비행기가 정글에서 추락했습니다. 수색대는 며칠동안 숲 속을 뒤졌으나 소년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전단을 만들어 정글에 뿌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전단에 써넣을 마땅한 문구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때 인생경륜이 풍부한 한 노인이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지금 당신의 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고독일 것입니다. 아들에게 부모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세요. 그것이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전단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었습니다. "내 아들아, 우리는 너를 정말 사랑한다." 소년은 정글에서 아버지가 뿌린 전단을 받아보았습니다. 그는 굶주림과 추위, 고독과 절망에 거의 삶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단에 적힌 아버지의 글을 보는 순간, 삶의 용기가 솟구쳤습니다. 결국 소년은 며칠 후 수색대에 의해 구출됐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도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더 큰 절망 속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부모로써의 사랑을 보여주세요. 절망을 극복하는 최상의 묘약이 될 수 있습니다.
3. 적극적인 가치관과 비전을 심어주는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과 세상을 늘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의 삶은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납니다.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자신의 단점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콤플렉스가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부정적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양육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균관대 이영석 교수는 부모에게서 보일 수 있는 콤플렉스를 네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일류 콤플렉스"입니다. 자녀를 일류 유치원과 중·고등학교, 대학, 직장에 보내고 싶은 '일류욕망'입니다. 전적으로 나쁜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 자녀의 능력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류"만을 고집한다면, 자녀에게 많은 상처를 줄 것입니다.
둘째는 "체면 콤플렉스"입니다. '뭐뭐 인체'를 중시하는 문화속에서 자녀가 공부를 잘하면 목에 힘주고 공부를 못하면 기가 죽는, 즉 체면치레에서 기인하는 모습입니다.
셋째는 "보상 콤플렉스"입니다. 부모 자신이 달성하지 못한 꿈을 자녀를 통해 이뤄보고자 애쓰는 것을 말합니다. 자녀의 적성은 고려하지 않고 말입니다.
넷째는 "완벽 콤플렉스"입니다. 야단치고 혼내면 좋은 엄마 아빠가 아니란 잘못된 생각과 좋은 부모가 돼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참는 부모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현상은 대다수 부모가 지니기 쉬운 대표적인 콤플렉스라 할 수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이런 부모의 콤플렉스 때문에 우리 자녀들이 적극적인 가치관과 비전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실 이러한 콤플렉스가 생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신감의 결여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믿는 우리는 다릅니다. 콤플렉스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을 우리 스스로 체험하지 못하니까 자녀의 꿈을 짓밟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함을 체험하고 또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이라는 믿음만 있다면, 결단코 우리는 나의 욕심을 앞세우면서 자녀의 꿈을 짓밟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준다면, 더 이상 우리의 자녀는 꿈을 가질 수 없습니다.
히스기야왕의 한 순간 교만했던 모습이 므낫세으로 하여금 범하지 않아도 될 죄를 범하게 했습니다. 만약, 히스기야가 그의 아들 므낫세에게 끝까지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므낫세는 잠시라도 죄악된 길을 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세요. 므낫세가 회개합니다. 앗수르의 왕이 유다를 쳐들어오자, 므낫세은 그제서야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해졌습니다. 이점을 역으로 생각해본다면, 비록 히스기야가 한 순간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긴 했어도, 그래서 므나셋으로 하여금 잘못된 길을 가게 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경 앞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신앙이 여전히 므낫세의 마음속에는 살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자녀에게 참된 신앙을 물려줄 때, 우리의 자녀는 하나님 안에서 적극적인 삶, 용기를 잃지 않는 사람, 비전을 가지는 삶을 살 수 있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한때 미식축구 프로팀인 샌 디에고(San Diego) 차저스(Chargers)에는 피터 홀로한(Peter Holloha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장 볼을 잘 잡는 선수였습니다. 그래서 같은 팀원들을 그를 '달콤한 피터'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손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웠고 힘든 위치에서도 볼을 유연하게 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피터 홀로한은 커다란 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그렇게 잘하는 데는 또 다른 비결이 있었습니다. 피터 홀로한은 그 비법에 대해서 "먼저 공을 보라. 그리고 눈을 공에서 떼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운동장에서 어느 곳을 달려가든 항상 공을 먼저 주시하고 그 공을 손으로 잡을 때까지 눈을 공에 고정시켰습니다.
이와 같이 부모는 자녀들에게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룰 때까지 그 목표에 눈을 떼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의 자녀들이 목표를 이루는 과정 때문에 겁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의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수년 동안의 교육과 수련 과정을 보고 낙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여러 단계로 쪼개서 의과대학 공부, 인턴, 그리고 레지던트 과정 등으로 세분화하면 그 목표가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을 마음에 분명하게 새기고 한 번에 하나씩 성취하도록 하는 것 - 이것이 바로 부모가 자녀 곁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부모는 자녀들에게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끔 해야 합니다. 부모가 가지고 있는 일류에 대한 욕망이 오늘날 많은 자녀들로 하여금 마치 인생살이에서는 한 순간의 실패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가지게 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녀들이 실패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심하게 좌절하고 절망에 빠지며 재기를 꿈꾸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한 순간의 큰 실패로 완전히 좌절하는 것이 낫겠습니까? 아니면, 작은 실수를 통해서 배운 노하우(Know-How)를 통해서 큰 실패를 막는 것이 낫겠습니까? 당연히 작은 실수를 통해서 큰 실패를 막는 것이 낫습니다. 성도 여러분, 실패를 인정하는 부모의 모습이 자녀들에게 적극적인 가치관과 비전을 심어주는 지름길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사랑스런 자녀들은 하나님께 쓰임받을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젊은 요셉을 택하여 가뭄으로부터 그의 가정과 민족을 구했고, 모세를 선택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에서 해방시켰으며, 여호수아를 통해서는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하셨습니다. 그뿐입니까? 하나님은 소년 다윗으로 하여금 골리앗을 죽이게 함으로써 블레셋을 무찌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어떻습니까? 다니엘은 소년의 때에 하나님만을 섬김으로써, 이방 땅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민족의 위대함을 나타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실로 하나님은 젊은이들의 삶 속에서 큰 일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그들에게 꿈을 꿀 수 있는 공간을 통해 꿈을 꿀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그 꿈을 계속 추구할 수 있도록 돕는 좋은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 론
부모라고 한다면, 누구나 자녀를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사랑합니다. 또한, 좋은 부모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정작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고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단순히 사랑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기 위한 훈련,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아야만 합니다. 오늘날 가정에 문제가 발생하고 부모들의 권위가 실추되고 있는 것은 부모의 '무지함'과 '무례함' 그리고 '본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이 자녀교육 문제를 놓고 공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별것 아닌 자동차도 운전을 하려면 공부하고 훈련받아야 합니다. 하물며 자녀교육은 어떻겠습니까? 그냥 잘 자라주기만 바라고, 옆에서 기도만 하는 것으로 만족해하시겠습니까? 스스로 생각해보세요. 혹시, 자녀교육에 있어서는 무면허운전자는 아닌지 말입니다. 자녀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여주기 위해서 힘쓰세요. 몸과 마음으로 사랑해서 그들이 힘들 때 돌아와 쉴 수 있는 항구가 되어 주세요. 적극적인 가치관과 비전을 심어주세요. 이런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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