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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이 큰 구원 2002-05-28 14:06:14 read : 27033
히2:1-4 // 2002/04/14
희귀한 중병을 앓고 있는 리자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리자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섯 살배기 남동생에게 수혈을 받는 것이었는데, 이 남동생도 누나와 똑같은 병을 앓았으
나 기적적으로 나아서 그 병을 퇴치할 수 잇는 항체가 생겼던 것입니다. 의사는 리자의 남
동생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누나에게 피를 줄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잠시 머뭇거
리다가 길게 숨을 내쉬더니 말했습니다.
"예, 누나를 살릴 수 있다면 그러겠어요."
수혈을 하는 동안, 아이는 누나의 옆 침대에 누워 누나의 뺨에 차츰 혈색이 돌아오는 것
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이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미소도 사라졌습니다.
아이는 의사를 쳐다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지금, 제가 죽기 시작하나요?"
너무 어린 탓에, 아이는 의사의 설명을 잘못 알아듣고, 자기의 피를 모두 누나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병은 두 가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는 병이 있습니다. 눈병이나 감기는 그런 종류입니
다. 반면에 예방을 해야만하고 걸리면 큰일이 나는 병이 있습니다. 암이나 심근 경색이나 불
치병과 같은 병입니다.
영혼도 마찬가집니다. 믿음 생활을 하다가 걸릴 수도 있는 질병이 있습니다.
가끔 세상 적인 죄에 노출될 수 도 있습니다. 세상 적인 쾌락! 즐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별로 피해를 입지 않는 영적인 질병이 있습니다. 그러나 꼭 피해야 할
질병이 있습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꼭 피해야 할 질병이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합니
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꼭 피해야 할 질병을 명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경고를 분명히 들어보아야 합니다. 3절을 보세요.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구원도
무슨 구원이라고 하였습니까? 큰 구원입니다.
다른 것은 이해해도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방법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아니요! 아예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리고 예배
를 드리러 나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구원과 상관이 있습니까? 없습니
다. 그러므로 내가 구원받았는지, 받았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문 1절은 왜 우리가 구원을 등한히 여겼는지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다른 말로 말하면 구원을 간절히 삼가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삼가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의를 기울이다'라는 뜻입니다. 즉 구원에 대해서 우리
가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집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에 집중하는 것입니
다. 집중할 때 능력이 나온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1절을 보면 모든 들은 것에 집중하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들었던 모든 것!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히브리서 1장의 내용입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장 2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우리가 관심을 갖아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예수님에게 집중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 구원의 기준이 되거나 기
초가 되지 않습니다. 성도들에게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얻은 구원에 대한 신실한 반
응입니다. 성도답게 사는 싸움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5절을 보면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
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말씀합니다.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은 무엇입니까? 불 가운데서 얻은 구원은 불났을 때 뛰어 나온 것
같이 가난한 구원,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가난하거나 부끄러운 것이 없습니
다. 모든 구원은 영광되지만 상급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부끄럽고 가난한 구원이라는 표현
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구원을 등한히 여겼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
입니다. 이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는 것은 복음을 모른
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참석하지 않는 다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도 듣고 찬송도 합니다. 복음은 잘 압니
다. 설명도 잘 압니다. 그러나 자기자신은 어떻습니까?
복음보다 더 우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땅에 대해 우선적인 것이 많습니다. 어떤 경우
는 교회를 다니는 것이 후회됩니다. 세상의 쾌락을 맘대로 못하니까요. 소돔과 고모라의 시
대처럼 살지 못해서 안달이니까요.
정신 차려야 합니다.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병!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를 내게서
떼어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
런데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구원을 잘 지켜야 하는데 이유는 혹시나 해서입니다. 이것이 무섭습니다. 혹시나 흘러 떠내
려갈까 봐 걱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구원을 슈퍼마켓에서 사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하게 생
각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흘러 떠내려가다'란 단어는 '파라로멘'이란 헬라어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반지 같은 것이 손가락에서 빠져나간다'는 뜻입니다. 약속한 것이 빠져나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이지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천국과 지옥에 갔다 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
데 가만히 보니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흘러 떠내려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쉽게 생
각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에 빠지면 헤엄쳐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물에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미국에 '페리'라는 탐험대가 있었습니다. 남극에서 북쪽에 갈 목표를 정해놓고 계속해서
얼음을 사흘간 등반했어요. 북쪽에 다 왔다고 "야호!"하고 깃발을 꽂았는데, 인공위성에서
찍어보니까 한참 남쪽으로 와 있었어요. 알고 봤더니 한반도 땅덩어리 만한 얼음이 떠내려
간 겁니다. 이 얼음이 남쪽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는데, 자기들은 북쪽으로 간답시고 계속 등
반한 겁니다. 그리고 최고 끝에 가서 "야! 북쪽이다!" 라고 외친 것입니다.
지옥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죽어라 선행을 하고, 자기 생각대로 교회를 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자들이 다 떠내려가서 지옥에 간다고 말씀합
니다. 믿음 생활은 흘러내려 가지 않도록 헤엄쳐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문제는 큰 구원을 등한시여기는 자세가 문제입니다. 과
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구원을 우습게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구원을 엿 바꿔 먹는 신앙
생활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과연 내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진단해보기로 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눈병에 걸렸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결과입니다. 눈이 빨개졌기
때문입니다. 눈이 아팠기 때문입니다. 부어 올랐습니다. 이 외형적인 것을 눈병이라고 한 것
입니다. 모든 병은 증세가 있습니다. 증세를 통해 병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잘못 판단하면
위험해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확한 자기진단이 필요합니다.
나도 혹시 지금 떠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등한히 여기는 사람은 어떤 마음을 가질까요?
첫째 복음에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도 이런 분들은 졸고 있습니다. 관심이 없어요. 오죽
했으면 처음 설교할 때 선배 목사님들이 농담조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교회에 남자
들이 많아지게 하려면 선데이 서울을 많이 읽고 이야기를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야 남자
들이 졸지 않고 말씀을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러면 스포츠 신문이나 보아야죠.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사람들은 십자가 이야기를 듣기
싫어합니다. 복음이라는 소리가 진부합니다. 예수님의 소리가 불편합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의 입에서 '복음'이라는 단어가 몇번 나오고 있습니까? 교회 이야기 빼고 예
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나 나오고 있습니까?
설교를 들을 때 복음의 말씀에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까? 왜요?
우리가 복음을 듣기 위해서 나왔는 데 말입니다.
둘째 등한히 여기는 사람은 다른 영혼에 대해 무관심해집니다.
금주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김혜자 권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진정한 전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나운서가 나이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답을 안하는 것입
니다. 많아서가 아니라 자기가 앞으로17살부터 70먹은 노인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관객들이
선입견을 갖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야기를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게 삽니
까? 시청자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명절을 지낼 때마다 명절 증후군이 심하다는 소리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육신이
나 마음이나 영적으로 심각하게 손상을 입습니다.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할 때는 몰랐는데 친척, 형제를 만나보니 아파트 평수 늘렸대요. 아
이가 좋은 대학에 갔습니다. 진급했다고 해요. 남편이 해준 옷을 자랑합디다. 차도 큰 차로
새로 뽑았습니다. 그래서 부부싸움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안 그러십니까? 아니면 감사하고
요. 많은 분들이 영혼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왜 명절을 주셨을까? 생각해보면 전도집회 열라고 준 것
같습니다. 믿으십니까?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저야 제사를 지내지 않았지만 제사지낼 때 빨래 줄 걷는 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요? 귀
신 목이 걸리니까! 그게 귀신입니까? 사실은 선조 들의 지혜입니다.
남들 명절 때 빨래하는 사람 있잖아요? 그렇게 하지 말고 함께 즐기라는 것입니다. 하물
며 하나님께서 이런 명절을 주신 것은 영혼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하기 위해 주신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들을 만나면 저렇게 세상의 부만 따랐다가 예수님을 모르고 죽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안타까움이 없습니다. 저 사람이 지옥에 가는데... 예전에는 예수 안믿는 사람만 만나면 복음
을 전했는데... 사람의 영혼에 대해 관심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문제가 아
니라 바로 내가 문제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현실에 지나치게 집착합니다.
요사이 잡지 보십니까? 완전히 다이어트광고를 도배해 놓은 것 같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매일 다이어트 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있는 분이나 없는 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머 비타민 씨를 8알 먹어야 된데. 생식이 최고래, 살을 빼는데 물을 많이 먹어야 한데.
채소만 먹으래! 아니야 고기도 먹어야 살이 빠진데." 정신이 없습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해야죠. 그러나 이것만 이야기 할 때 문제가 있습니다.
구원을 잊어버리면 할말이 없습니다. 현실 뱃살 이야기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실을 바라보십시오,
현실은 가짜입니다. 언제이던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다릅니다. 현실의 기쁨
은 찰나이지만 구원의 기쁨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먼저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을까? 단순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주셨습니
다. 마귀는 구원받지 못했다고 우리를 꼬십니다. 그러나 값없이 주셨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확신만 있으면 됩니다. 구원의 확신은 결정적인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
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언제 아는지 아십니까? 임종을 앞에 두면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
한 자가 확연히 구분됩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유머가 있습니다. 삶을 잘 마치고 구원의 은혜를 받고 돌아가기 때문에
감사가 있습니다.
어떤 장로님이 돌아가셨는데 마지막에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얘! 막내야! 너 콧구멍에 코털 나왔다" "사실 거짓말이야!" 그리고 임종을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실력 있는 자 만이 유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멋있게 사는 분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둘째 구원의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처음 예수님을 믿고 나서 그 다음 변화가 없습니다. 성화가 이루어지지 못했
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자라는 것입니다. 마치 아기가 자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구원은 어떻습니까? 자라지 않으면 구원은 흘러 가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 후반부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
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공포적 차원이 아닙니다. 두렵고 떨림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받은 복의 큼을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12절
말씀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는 결론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무엇에 대한 '그러
므로'입니까?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 대한 '그러므로'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
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위엄의 하나님께
서 우리를 어떻게 대접하시고 어떻게 취급하시며 사랑하시는 가를 본다면, 우리는 감격과
영광과 거룩한 소름이 끼치는 차원에서 하나님 앞에 서야 된다는 말입니다.
NBA농구에서는 추첨을 통하여 한 사람을 선발해서 3점 슛을 던져 들어가면 백만 불을
주는 행사를 합니다. 백만 불이면 우리 나라 돈으로 얼마입니까? 하여튼 굉장히 많은 돈입
니다. 대신 딱 한번의 기회입니다. 두렵고 떨리지 않겠습니까? 연습하고 연습하고 연습했는
데 안 들어가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들어가면 백만 불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았
습니다. 지금 잘하면 백만 불의 백만 배를 받을 것입니다. 안하면, 실패하면, 그래도 천국은
갈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대강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시는가, 무엇을 주고 싶어하시는가, 이것을 제대로 안
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대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루라'는 단어가 현재 진행형입니다. 계속해서 이루어가야 합니다. 조금씩 바뀌는 것입니
다. 삶의 가치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던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금방이요? 아
닙니다. 천천히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의 가치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찾기 시작합니다. 감정도 바뀝니다. 우울하던 마음이 바뀝니다.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기도하고 나면 할렐루야가 나옵니다. 바뀐 것 없어도 말입니다. 그리
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흘러갈까 조심하십시오, 제일
중요한 구원입니다. 이것을 소유하실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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