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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의 은혜
2002-05-03 17:40:11   read : 22314



마태복음 21:12-17



오늘은 마태복음 21장 12절에서 17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사역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사역의 은혜라는 제목을 조금 길게 말을 붙여 설명해 드리면 예수님이 하신 일 마다 우리에게 전부 은혜가 된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사역이 주는 은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신 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일, 예수님이 온갖 기적을 행하신 일, 십자가에 죽으신 일, 부활하신 일, 승천하시고 앞으로 재림하실 일의 모든 사역이 모두 은혜를 베푸십니다. 어느 것 하나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 극히 한 부분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주님의 사역을 생각하면서 왜 은혜가 되었는지를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부터 고난 주간이 시작됩니다. 오늘 주일을 가리켜서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9장 9절에서 메시아가 오시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고 예언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즉 부활하시기 한 주일 전인 오늘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신 날을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그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보았는지라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로마의 권세와 군인들을 다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왕으로 등극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귀 타시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아 주고 자기들은 그 가지를 들고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릅니다. 그 소리를 들으시면서 예수님은 첫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성전에서 되어진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역이 얼마나 그 때 당시 사람들에게 가슴 뿌듯한 은혜였는지, 오늘날 우리에게는 왜 은혜가 되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갱신의 사역이 주는 은혜 (12-13)
기독교는 흔히 개신교라고 합니다. 더욱이 장로교회를 개혁교회라고도 합니다. 한자는 고칠 改자에 새 新자를 씁니다. 새롭게 자꾸 고쳐 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번 고쳤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을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갱신이라고도 합니다. 다시 更자에 새 新자입니다. 다시 새롭게 하고 또 다시 새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개혁을 살펴보면 교리적인 개혁을 하는데 철저했습니다. 그러나 캐토릭교회 모든 제도와 행사에는 그렇게 개혁적인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즉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캐토릭교회와 비슷한 것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장로교의 창설자인 칼빈은 교리적인 개혁뿐만 아니라 제도적이며 행사하는 모든 일까지 완전히 개혁을 했습니다. 제도와 행사까지 개혁한 것은 우리의 생활까지의 개혁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리만 개혁되었다고 해서 다 끝났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생활이 날마다 날마다 갱신되어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2절에서 13절을 보면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하신 일은 두 번 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고난 주간의 첫날인 종려주일에 행하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30세에 공생애에 나서실 때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똑 같이 성전을 청결하십니다. 청결하신 끝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요한복음 2장에 있는 청결 사건 때는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라고 하셨고 오늘 본문에서는 똑같이 청결하신 후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장사하는 집과 강도의 굴혈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면 얼마나 다릅니까?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청결케 하기 위해서 첫째로 장사꾼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케 했을 때는 '장사하는 집을 만들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유월절이라는 명절이 되면 유대인들의 남자들, 심지어는 가족까지라도 참여할 수 있으면 다 같이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축제에 참여를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네들이 정성으로 바치는 양이나 송아지를 가지고 제물로 삼아 제사를 드립니다. 유월절에 바치려고 일년 동안을 키운 양을 저 멀리 500리 1,000리가 되는 곳에서 어떻게 끌고 오겠습니까? 팔아서 돈으로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외국에 나가 사는 유대인들도 유월절만 되면 전부 참여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월절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해외에서 돌아옵니다. 그네들이 어떻게 양을 끌고 오겠습니까? 돈을 가지고 와서 사야되지 않겠습니까? 장사꾼들은 머리가 얼마나 빨리 도는지 모릅니다. 이 때 대제상들과 함께 다른 집에서 양을 사다가 제물로 바치거들랑 어떻게 해서든지 불합격시키기로 결탁합니다. 그리고 결탁한 장사꾼의 양과 송아지를 사 가지고 가면 어떻게 생긴 송아지와 양이든 간에 다 합격을 시키자고 합니다. 그래서 양과 송아지를 끌고 성전 뜰에 들어 왔습니다. 그쯤 해 놓았으니 얼마나 장사가 잘 되겠습니까? 장사꾼들은 양과 송아지를 팔아 수입된 거금의 일부를 제사장들에게 떼어줍니다. 그리고 자기네들도 엄청난 이익을 보았습니다. 보통 장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때 예수께서 어찌하여 장사하는 집을 만들었느냐고 하신 겁니다. 이것만해도 좀 낳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장사꾼과 제사장들의 결탁을 해도 정도가 넘었습니다. 다른 집의 양이나 송아지는 사지 못하게 하고 내 집의 양이나 송아지만 사게 할 때에는 장사가 잘 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래서 양과 송아지를 성전 뜰에까지 끌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렇게 얼마쯤 하다 보니 장사꾼들의 머리에 또 다른 지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집의 양이나 송아지는 얼씬도 못하게 만들고 성전 뜰에 있는 양과 송아지만 사되 부르는게 값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 양이나 그 송아지의 값은 세배를 불러도 되고 다섯 배를 불러도 됩니다. 눈만 감으면 코를 베어 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쯤 되고 보니 춥고 배고프고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이것이 강도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장사의 차원을 넘어서 강도 짓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보시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몽둥이를 가지고 전부 내쫓아 버리십니다. 그 때 백성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박수를 쳤을까 상상해 보십시오. 그 동안 얼마나 속 터지는 일이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모두 내 쫓아 버리시고 성전으로 성전이 되게, 제사를 제사되게, 명절로 명절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백성들은 환호성을 질렀을 겁니다. 갱신 사역이 얼마나 그 백성들에게 은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어 버렸습니다. 왜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어 버렸습니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서 쓰는 돈을 교회에 나올 때 가지고 와서 그 돈을 그대로 헌금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당시 유대나라에서는 성전에서 헌금할 때 사용하는 돈은 달랐습니다. 성전에서 쓰는 돈이 따로 있고 세상에서 쓰는 돈이 따로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쓰는 돈을 가지고 헌금을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고 하더라도 받지를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쓰는 돈에는 로마황제의 화상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상시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헌금으로 받지도 않았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돈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헌금을 하려면 세상에서 쓰던 돈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꾸다 보니 역시 부르는게 값이 됩니다. 요즘 $값이 얼마나 올라갑니까? 그와 마찬가지였습니다. 많이 올려 받아 폭리를 취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폭리를 취하는 것이 강도 짓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비둘기를 파는 자의 의자를 둘러엎어 버리셨습니다. 가난하디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제물을 바치고 싶어도 너무 가난하기에 송아지나 양으로 드릴 힘이 없었습니다. 그럴 때는 양이나 송아지 보다 열 배나 스무 배로 싸디 싼 비둘기를 가지고 제물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비둘기를 사는 것입니다. 장사꾼들이 가난한 자에게서도 폭리를 취합니다. 강도 짓을 하려면 좀 있는 사람의 것이나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있는 사람의 것은 강도 짓을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떻게 그렇게 가난한 사람의 것까지 그렇게 약탈한다 해도 좋은 짓이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전부 내 쫓으십니다. 그리고 성전으로 성전답게, 예배로 예배답게, 제사로 제사답게, 믿음으로 믿음답게 하셨습니다. 그 때 그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그 사역은 얼마나 감격스럽고 은혜가 되었겠습니까? 이것이 갱신의 사역이 주는 은혜입니다. 우리도 이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으면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그 사역을 감사하면서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새롭게 갱신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은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새로워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은혜를 못 받았다는 증거요, 헛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의 갱신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들도 은혜를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미국 독립전쟁 때 펜실베니아에 피터 밀러라고 하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교회에 10년을 하루 같이 목사님을 괴롭히던 정말 원수 같은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차라리 교회에 안나왔으면 좋겠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교회로 갔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나와서 흠집을 찾아내고 또 만들어 수도 없이 괴롭혔습니다. 그 때 마침 독립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총사령관이던 워싱턴 장군이 간첩을 한명 잡았는데 그 못되게 굴던 녀석이 잡혔습니다. 밀러 목사님이 얼마나 속이 시원했겠습니까? 마음 속으로 그 놈 잘 잡혔다 라고 생각할만 하지 않았겠습니까? 군사 재판을 하고 사형 언도가 내려졌습니다. 이제 사령관의 싸인만 떨어지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밀러 목사님이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피터 밀러 목사님이 그 머나먼 길을 달려가 워싱턴 장군을 만났습니다. "사령관님, 내가 책임을 질테니까 살려주십시오" "목사님이야 목사님의 교인이니까 살려달라고 하겠지만 이런 못된 놈을 살려주면 안됩니다" "아닙니다. 극단적으로 말을 하자면 그 사람은 십년 동안 하루 같이 저를 못살게 굴며 괴롭힌 저에게는 원수라면 원수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요? 그런 사람입니까? 그러면 좋습니다"하고 싸인을 하고 그 사람을 밀러 목사에게 내주었습니다. 살아난 그가 계속해서 원수처럼 놀았을까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피터 밀러 목사님의 사랑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그 이전에 그 목사님 속에 계시는 예수님이 밀러 목사님을 통해서 원수 같은 그를 사랑했고, 그 사랑이 바로 그로 하여금 새로운 사람으로 갱신 즉 변화 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얻었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지면서 이런 갱신의 역사를 통해 은혜 받고 항상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갱신케 하는 사역은 이처럼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치유의 사역이 주는 은혜 (14-15상)
치유란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병을 고친다는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보이는 병이 있고 보이지 않는 병이 있습니다. 내적인 병이 있고 외적인 병이 있습니다. 속병이 있고 겉병이 있습니다. 우리의 속에서 누구도 모르게 앓고 있는 큰 질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크고 첫째 되는 병이 교만이라는 병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모릅니다. 교만은 자기가 자기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병입니다. 누구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고, 누구의 가르침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최고요, 자신이 표준이 되고 맙니다. 자기의 표준에 맞지 않으면 너도 틀렸고 모두 다 틀렸다고 합니다. 세례요한도 되지 못하면서 세례요한의 사명을 자기가 맡은 양 떠들어대는 것입니다. 소위 양심세력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사람을 차별합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언제 사람 차별하시는 것을 보셨습니까? 제가 언젠가 딸과 며느리를 절대 차별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딸을 위해서는 떡을 해 놓고 곰팡이가 나도록 오늘 올까? 내일 올까? 기다립니다. 며느리가 떡 먹는 것을 보면 하나만 더 먹어도 어떻게 그렇게 미운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 며느리는 저 집의 딸입니다. 내 딸은 저 집의 며느리가 아닙니까? 왜 차별합니까? 큰 병이요, 죄라는 것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아직 교만합니까? 예수님을 믿고도 아직 사람을 차별합니까? 큰 병에 들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 병은 예수님만이 고치는 병입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고치지 못했다고 하면 그것은 잘못 믿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바로 믿으면 교만 병도 고쳐집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병도 치유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4절에서 15절 상반절을 보면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제일 먼저 간 곳이 성전입니다. 여러분들도 어디를 다녀오거들랑 집에 가기 전에 성전부터 찾아와서 '하나님! 잘 다녀왔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할 일이 많은데도 성전을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성전 안에까지 소경과 저는 자들이 좇아 들어왔습니다. 그 때 당시 성전은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이 관리하면서 장애인들 즉 소경, 저는 사람, 귀머거리, 앉은뱅이 이런 사람들은 성전 안에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은 성전 안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어쩌려고 저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왔을까?'라고 놀라워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는 대제사장들 앞에서 보란듯이 시각장애인 즉 소경 된 사람을 말씀 한마디로 고쳐 주십니다. 눈을 번쩍 뜨니까 다른 사람과 다른 데가 전혀 없습니다. 그 전에도 차이가 있다면 나는 눈을 뜨고 살기에 좀 편하고 저 사람은 눈을 못 뜨고 살기에 조금 불편했던 것뿐입니다. 성전에 못 들어오게 하는 다리를 저는 사람들을 말씀 한마디로 쉽게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 전에는 뭐가 달랐습니까? 다른 것이 있다면 나는 두 다리로 뛰니까 편하게 살고 그 사람들은 그러지 못하니까 불편하게 살았던 것뿐입니다. 왜 사람을 차별합니까? 장애인들을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도 차별하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대신에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은 절대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장애인들을 정상적인 사람들과 똑같이 환영해 주셨습니다. 장애인들이 예수님 앞에 나올 때 예수님이 물리치신 적이 언제 있습니까? 다 고쳐 주지 않았습니까? 치유의 사역입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큰 병, 교만해서 남을 깔보는 마음 병을 예수님은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지금까지도 예수를 믿으면서 교만 병을 갖고 있다면 예수를 헛 믿은 것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으시고 이런 못된 마음이 병부터 먼저 고치시고 육신의 병도 예수님께 가지고 나와 고침을 받으십시오. 소경이라 하면 그 때는 못 고치는 병이었습니다. 다리를 저는 불구 또한 그 때는 못 고치는 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 고쳐 주셨습니다. 병원에 가서 고칠 병은 고치십시오. 그러나 병원에서 못 고치는 병은 예수님을 찾아 고침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 때 장애인들이 성전 안에서 고침을 받고 얼마나 기뻐 뛰었겠습니까? 그 때 받은 은혜와 기뻐했을 기쁨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이 곧 치유의 사역이 주는 은혜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의 소경은 아닙니까? 믿음의 절름발이는 아닙니까? 혹시 믿음의 장애인은 아닙니까? 빨리 주님께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병은 깊어질수록 더 중해집니다. 예수님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고침 받아 온전한 신앙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볼티모어라고 하는 도시에 좋은 호텔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호텔에 허름하게 차려 입은 사람이 와서 하룻밤 자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호텔에서 종사하는 사람이 그 사람을 보니까 남루한지라 이런 사람이 호텔에 드나들면 호텔의 인상이 좋지 못할 것 같아서 방이 없다고 했습니다. 허름하게 입은 농부 같은 그 사람인들 눈치가 없겠습니까? 방이 있으면서도 그러는구나 생각합니다. 할 수 없이 버림받고 나가서 싸구려 여관에 가서 하룻밤을 잤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농부처럼 허름하게 입었다고 거절하는 호텔이라면 부통령을 거절한 것은 너무 당연했다'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허름하게 차려입고 갔던 사람은 다름 아닌 부통령이었습니다. 부통령이 옷을 허름하게 입었다고 차별해서 받아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호텔이 잘 되었겠습니까? 또 잘 되기를 바랍니까? 그 호텔이 문을 닫은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어디 사람을 차별합니까? 그런데 믿는 사람이 그런다고 한다면 믿음이 병든 것이요, 마음이 병이든 것이요, 아주 깊은 병이든 것입니다. 그 병은 예수님만이 고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제대로 믿으시고 바로 만나셔서 고침 받아야 합니다. 즉 치유의 사역이 주는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셋째, 말씀의 사역이 주는 은혜 (15하-17)
본문으로 돌아가서 15절 하반절에서 17절을 보면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그들을 떠나 성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베다니에는 무엇을 하러 갔습니까? 유하러 가셨습니다. 누구의 집에 가셨습니까? 나사로의 집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아도 나사로의 집으로 갔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그렇게 그 많고 많은 고난의 날이 시작되는 고통스러운 날에도 나사로의 집을 찾았다 하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어린아이까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성전 안에 들어와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예수님을 향하여 찬미하는 것을 보고 믿음 생활과 성전 봉사에 두 번째 가라하면 서럽다고 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분하여 대들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경을 안 읽어보았느냐?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찬미를 온전케 하셨다는 말씀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느냐? 무슨 뜻인지 아느냐?" 아무도 대답을 못했습니다. "메시아가 성전에 임하는 날 어린아이들의 찬미를 기쁘게 받으신다는 뜻"이었습니다.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암시하는 사건입니다. 대제사장들은 그것을 모르기에 허튼 소리를 하고 딴 소리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정확하게 짚어 주시고 정확하게 깨우쳐 주시고 정확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말씀의 사역입니다. 대제사장들이 예수께 대들고 있는 그 때 어린아이들의 부모가 얼마나 마음이 조였겠습니까? 자기의 자녀들 때문에 예수님이 곤경에 빠졌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에 대제사장들이 한마디 대답도 못하는 것을 보고 박수치며 환호성을 지를 듯이 기뻤을 겁니다. 이것이 말씀의 사역이 주는 은혜입니다.
킬고르라고 하는 철학자가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수영장에 갔습니다. 수영을 얼마나 잘하는지 손과 발로 물장구를 치며 전진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하는지 아십니까? 다리 하나는 수영장 바닥에 짚고서 두 손과 한 발을 이용해서 물장구를 치면서 아버지한테 잘 하는 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것이 수영입니까? 물에 뜨지도 못하는 주제에 뜬것처럼 또는 뜬척 하였습니다. 오늘에도 뜬척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성경도 모르면서 아는척 하는 사람 말입니다. 성경을 배우라고 하는데 다 배운 것처럼 척하는 사람은 이 가운데 없습니까? 이렇게 척하는 사람들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입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말씀을 짚어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실 때 어린 아이들의 부모들이 크게 은혜 받았습니다. 척하는 교인이 되지 맙시다.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의 사역이 주는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종려주일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행하신 갱신의 사역은 참여했던 모든 백성들에게 너무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갱신 사역이 주는 은혜였습니다. 다음으로는 주님의 치유의 사역이 주는 은혜는 고침 받은 사람들의 것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치유의 은혜를 받아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의 사역이 주는 은혜는 어린이들의 부모의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말씀의 사역이 주는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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