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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의 증거 - 요한복음 1:19-28절 2002-04-11 19:09:29 read : 27996
본문:요한복음 1:19-28절
제목:세례요한의 증거
권투경기를 할 때 매 라운드마다 몇 라운드를 시작하는지 알려주는 라운드 걸이 등장을 합니다. 과거엔 그 일도 주로 남자들이 했었는데 너무 딱딱한 느낌을 준다고 해서 언제부턴가 여자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매 라운드가 시작되기 전, 늘씬한 몸매의 여성이 피켓을 들고 링 주위를 한바퀴 돕니다. 그리고 나면 곧 이어서 본 경기가 계속 진행됩니다.
우스운 얘기 같지만 어떤 사람이 권투경기를 구경하기 위해 갔다가 피켓을 들고 왔다갔다하는 라운드 걸을 보는 순간 한 눈에 반해 권투시합은 보지 않고 그 라운드 걸만 구경했습니다. 그날 시합에서 누가 이겼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고 라운드 걸의 얼굴만 아른 아른거렸습니다. 그날 이후 도저히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 수소문 끝에 그녀가 피켓을 들고 나오는 시합마다 쫓아다니면서 그녀를 응원했습니다. 피켓을 들고 나갈 때마다 그녀를 향해 환호의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습니다.
어찌나 열렬했든지 아무도 말릴 수 없었습니다. 남의 시선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환호를 했습니다. 그 라운드 걸은 그럴 때마다 어디 쥐구멍이라고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기가 주목받을 처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켓을 들고 나올 때마다 자기를 향해 환호하는 이 남자를 진정시키는 길이 무얼까? 생각을 하다가 결혼을 해주는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결국 이 라운드 걸이 그 청년과 결혼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 청년은 권투경기를 참 많이 구경했습니다. 세계타이틀 매치도 여러번 구경을 했습니다. 그녀가 등장하는 곳이라면 아무리 비싼 경기라도 표를 반드시 구해서 경기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오직 피켓을 들고 라운드에 올라오는 그녀에게 있었습니다. 그날 누가 시합하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녀가 피켓을 들고 나오기만 하면 대 만족입니다.
그런데 권투경기에 있어서 초점은 라운드걸이 아닙니다. 본 경기에 모든 관심과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라운드 걸이 등장하는 이유도 본 경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타이틀 매치를 할 때 세미파이널 경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계 타이틀 매치를 하는데 메인 이벤트에 앞서서 동양타이틀 매치나 한국타이틀 매치를 하는 경우가 종 종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세미 파이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미 파이널을 관전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관심은 그 날 벌어지게 될 메인 이벤트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의 관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세례를 주며 활동했던 세례요한은 세미 파이널입니다. 그는 메인이벤트가 아닙니다. 이 사실을 세례요한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조금도 거리낌 없이 자신은 메인 이벤트에 해당되는 사람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9절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요한의 활동무대는 광야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활동하던 요한에 대해 여러 가지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들은 어떤 얘기를 들었을까요? 그가 보통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에 대해서였을 것입니다.
사실 요한은 외모로 볼 때, 딱히 관심을 끌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약대털옷을 입고 석청을 먹으며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번쯤은 그런 그의 모습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외형적으로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관심이라면 주위에 이런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저 한번쯤 쳐다보는 정도로 말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보통사람과 외모를 달리 하고 있다거나 복장이 특이한 경우라면 몇 번은 쳐다보거나 관심을 가질 수 있지만 그 이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저는 한동안 머리에 노란 물 들이는 것에 대해 굉장한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여자가 아닌 남자들이 노란 물을 들인 모습을 보았을 때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언젠가 우리 학생들 중에 몇 명이 노란 물을 들이고 나타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습니다. 물론 저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한마디 해 주고 싶었습니다. "남자가 도대체 이게 뭐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괜한 말을 했다가 마음에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참았습니다.
그리고 한동안은 그 학생들의 머리에 굉장히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거부감이 별로 없습니다. 노란 물을 들인 사람들을 봐도 이제는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귀걸이를 하고 다니는 남자를 보아도 무덤덤하기만 합니다. 아니 어떤 사람의 경우는 차라리 그렇게 물들인 것이 자연스럽고, 더 세련되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요한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그가 이상한 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 정도라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그런 얘기가 전해질리 만무입니다. 설령 전해졌다 할지라도 적어도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대표단으로 구성해서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까지 파송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에 대해 이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쏟아내는 말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그의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를 들을 때, 듣는 사람마다 회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렸고 세례를 받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당시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마치 독설에 가까운 험한 말을 마구 퍼부어 대었습니다. 아무나 그렇게 독설에 가까운 말을 종교지도자들에게 퍼부어 댈 순 없습니다. 과거엔 잘못을 하고 파출소에 오게된 사람들 중에 되려 큰소리를 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큰소리를 치면 '저 사람 무슨 백이 있는 모양이지'하고 생각하면서 경찰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사람들은 혹 그가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가 정말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표단을 구성해서 요한이 있는 곳으로 그들을 파송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을 움직이고 감동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지 어떤 교육 프로그램이나 외적인 활동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이 세례요한의 외적인 어떤 복장이나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지내는 그의 생활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여기서 교회가 어디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실상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외적인 활동이나 프로그램에 집착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을 움직이고 변화시키기를 사모하고 기대하기보다는 그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데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있게 증거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증거될 수 있을 것인가?"에 열정을 쏟아 붓지 않습니다. 단지 포장되어진 외적인 모습, 그런 외적인 포장을 중요시할 따름입니다.
요즘 책을 펴내어도 가장 많이 신경쓰고 있는 부분중에 하나가 북 디자인입니다. 어떻게 깔끔하게 디자인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을까? 이것이 판매실적과 거의 직결되어 있다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요즘 사람들은 내용을 보기 전에 디자인이 깔끔한 책에 선뜻 손이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북 디자인이 잘 되어도 내용이 부실하면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내용이지 책 표지의 디자인은 아닙니다.
물론 사실 그렇게 하면 잠시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지 모릅니다. 책을 더 많이 팔수는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교회 내에 카페를 설치하고, 운동시설을 하고,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그곳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모으고 교회가 부흥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본질이 아니며, 교회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방향도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화려한 외적인 활동의 옷을 입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답게 선포되어지고 그 말씀 앞에 성도들이 회개하며 주께 나아오게 하는데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유대인들을 대표해서 "도대체 광야에서 세례를 주며 회개를 외치고 있는 이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그에게 찾아 온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누구냐?" 이 말은 세례요한이 어떤 가문의 사람이며 그가 지금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몰라서 물었던 질문은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소개를 합니다. 물론 요즘은 명함을 한 장 내 미는 것으로 자기 소개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명함을 받아들면 그 사람이 대충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적인 조건에 의해 결정되어진 그 사람의 모습일 뿐, 진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네가 누구냐?'라고 물었던 것은 세례요한이 어떤 가문에서 태어났는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정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맞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적어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세례요한이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인 것 정도는 익히 알고 있는 터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네가 정말 그리스도냐?, 네가 정말 메시야냐?'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물었을 때, 요한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20절에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그들의 질문에 대해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를 숨김없이 말했습니다. 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당시 요한의 인기는 상당했습니다. 아니 인기라고 표현하는 것보다 그의 영향력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의 영향력은 엄청난 파워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의 말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가슴을 찢고 통회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의 말 때문에 악한 자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가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야가 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야가 아니고서는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소유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세례요한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에 어쩌면 죽는시늉까지라도 하면서 그를 열렬히 추종하는 세력들도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광야에서 약대털옷을 입고 석청을 먹으며 살지만 실상 헤롯왕의 권세가 부럽지 않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광야에서만큼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주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들에게서 만큼은 '왕'과 같은 존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모는 그렇고 그래도 한마디로 세례요한은 이 당시 잘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기관리만 잘하면 헤롯왕을 능가하는 권세와 명예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런 사실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자기가 어떠한 사람이 되는냐? 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가 증거해야 할 그 분에 대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설령 자신의 인기가 몰락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 주변을 떠나간다 할지라도 할말은 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어 밝혔습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는데 뭐가 그리 대단하냐? 고 하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한 결단과 용기를 요구합니다. 더구나 지금 자신이 아니라고 하는 말 한마디 때문에 지금까지 자기에게 쏠렸던 관심과 애정이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가령예를 들어 요즘 인기 연예인들이 마약과 관련되어 여러 명이 구속되었습니다. 그들이 마약을 복용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에게 쏟아지던 관심이 사라질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마약이 나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마약에 손을 댑니다. 분명히 이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설령 인기가 없어져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우리사회에서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데에는 대단한 용기가 결단을 요구합니다. 때로는 나에게 돌아오게 될 손해와 불 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그런 용기를 내실 수 있겠습니까?
오래 전에 군사정권시절 많은 목회자들이 조찬기도회에 참석해서 군사정권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곤 했습니다. 분명 그게 아니란 것을 압니다. 그런데 아니라고 하면 상당한 불이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아니라는 말을 못하고 그냥 참석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자 또 다시 그들의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21절에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아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그들의 질문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엘리아나 되느냐? 아니면 네가 선지자라도 되느냐?"하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면 엘리아라도 되는지를 물었던 것일까요? 사실 그들은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성경에는 메시야가 나타나기 전, 엘리야가 오기로 예언되어져 있었습니다.
말라기 4장 5절과 6절을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적어도 그가 메시아가 아니면 그 전에 오기로 된 엘리야가 아닌가? 하고 물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이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메시지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그러니 그는 분명 엘리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대답은 이번에도 '아니라'였습니다. 물론 그는 약속된 엘리야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문자 그대로의 '엘리야'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추측건대 자신이 굳이 아니라고 말한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초점이 자기에게 맞추어질 것이 아니라 자신이 증거하는 그분에게 맞추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관심을 엘리야 역할을 하는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그분께 맞추기 위해 그는 아니라고 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이쯤에서 물러설 그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기에 온 목적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는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다시 묻습니다. 22절에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앞에서 언급했던 권투경기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질문을 던지고 있는 이 사람들은 마치 라운드 걸을 상대로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던 한 청년과 같습니다.
라운드 걸은 권투경기의 흥미를 돋구기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데 라운드 걸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면 본 경기는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지금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관심을 가지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자기보다 뒤에 오시는 분을 소개하고, 그분을 증거하기 위해 지금까지 광야에서 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또 다시 질문하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23절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자신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것처럼 주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 외치는 광야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과거에 임금이 자기 백성들을 방문하려고 할 때 그 마을에서는 임금이 그 마을로 들어오는데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도록 길을 닦습니다. 마치 군대에서 사령관이 시찰을 돈다는 얘기가 떠돌면 그때부터 부대입구 도로변에서부터 내무반까지 치약을 짜서 청소하던 것과 같습니다.
요한은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임금이 들어가는데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도록 걸리적거리는 것을 모두 치우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뜻에 대해 생각할 때, 단순히 자신을 겸손하게 표현하는 정도로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에 대한 회개의 촉구입니다. 주님을 모시기에 앞서 그 앞에 걸리적거리는 죄에 대해 먼저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 말씀은 동일한 은혜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있는 걸리적거리는 죄에 대해 하나님앞에서 회개하고 뉘우친 적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물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주의 은혜를 간구하며 눈물을 흘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여러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그때처럼 여러분의 잘못에 대해 혹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한 것에 대해 눈물을 뿌리며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혹 그 일이 까마득한 옛날의 추억으로 기억되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볼 때 먼저 무거운 것, 얽매이기 쉬운 죄, 이런 것들을 벗어버리라고 했는데 과연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의 대답에 대해 그들은 다시 물었습니다. 25절에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고 했습니다. 지금 그들이 요한의 대답을 듣고 화가 난 것은 그리스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닌대 어떻게 해서 세례를 주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결의식을 행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세례 주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장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전도사가 할 수 있는 의식이 아닙니다. 오직 목사만 세례를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목사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세례를 주고 성찬예식을 집례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당장에 그 사람 이단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단이라도 보통이단이 아닙니다. 차라리 삼단 사단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지 모릅니다. 요한은 분명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엘리아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들에게는 몹시도 못 마땅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이 그들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들은 아직도 '외치는 자의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요한이 세례를 준 것은 자기 뒤에 오시는 이의 더 큰 능력의 세례를 상징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세례가 주는 의미는 죄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로부터 자신들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렁이 담넘어 가듯이 어물쩡 죄를 짓고도 주께 고백하거나 회개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 그냥 넘어가 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죄에 대해 감각이 둔해졌습니다. 죄를 짓고도 자신의 가슴을 찢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또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도대체 무슨 죄를 얼마나 크게 저질렀길래 저렇게 우는가? 하면서 손가락질까지 합니다. 마치 자신은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처럼 말입니다.
여기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날마다 우리의 주께 불순종하고 말씀가운데 살지 못한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실상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냥 용서해 주시겠지 넘어가 버립니다. 아니면 아예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관심조차도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물로 세례를 준 것은 또 다른 깊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26절과 27절에 보면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를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요한의 물세례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세례를 상징하는 의미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수 있는 분은 그분 밖에 없습니다. 물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고백하게 만들었지만 성령을 그들을 변화시킵니다. 부패한 우리의 심령을 치료하고 변화되어진 삶을 능력있게 살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 바로 자기 뒤에 오실 그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죄에 대한 회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변화되어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변화없이 가나안땅을 차지하면 그 삶을 실패하고 맙니다. 그것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들에게 보여준 하나의 교훈적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무조건 달라고만 하면 안됩니다. 예수 믿고 나서 '이것도 달라 ,저것도 달라' 하나님께 달라는 것이 좀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분명 알아야 합니다. 변화된 모습없이 받기만 하면 결국 받은 것으로 인해 실패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죄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새로워져야 합니다. 한동안 집안 거실 바닥에 까는 모노륨 중에 나무결 모양이 유행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도 식당은 나무결 모양의 모노륨을 깔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말 그대로 무늬만 나무입니다.
그런데 요즘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전혀 변화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정말 무늬만 신자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인답게 새롭게 변화되어진 모습입니다. 심령이 새롭게 변화받고 그래서 삶도 변화되어진 그런 모습을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변화된 삶을 살고 계십니까?
뿐만 아니라 지금 세례요한은 자신을 그분과 비교해 볼 때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신발을 벗기려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일조차 감당할만한 가치가 없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오직 자기 뒤에 오시는 분에게 초점을 맞추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에 관해 증거하라고 보냄을 받았기에 자신에 관해서는 말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소리'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그분의 신들메를 감당할수도 없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관심과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의 초점은 어디에 맞추어져 있습니까?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여러분에게 아낌없이 자기의 목숨도 내어놓으신 그분께 있습니까? 정말 그분께 있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요한은 그분을 증거하는 일에 모든 관심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디에 관심을 쏟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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