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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에 대한 증거자 - 요한복음 1:6-8절 2002-04-11 19:06:24 read : 25181
본문:요한복음 1:6-8절
제목:빛에 대한 증거자
아파트를 분양 받으려는 사람들은 필히 모델하우스에 가보아야 합니다. 투기가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살집을 마련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모델하우스에 가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델하우스에 가봐야 훗날 자신이 어떤 집에 살게 될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트를 분양하는 건설회사가 아파트를 짓기에 앞서 먼저 모델하우스를 지어서 분양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즉 그 건설회사가 앞으로 어떤 형태의 아파트를 지어서 분양하려고 하는지 알려 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델하우스는 실체를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그 모델하우스는 실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모델하우스의 역할은 아파트를 분양할 때까지입니다. 분양이 끝나고 아파트 공사가 시작되면 모델하우스는 대개 철거를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델하우스로서의 기능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모델하우스의 기능은 실체를 증거하는 역할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마치 모델하우스와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누굽니까? 세례요한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그를 가리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왜 그를 가리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을까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마치 광야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온통 거칠고, 척박한 광야와 같았습니다. 외치는 자가 없다면 그 척박한 마음을 기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척박한 마음을 기경하기 위해 요한이 외쳤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당시 사람들을 향해 '회개할 것'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외쳤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래 전에 이 사실을 내다보면서 그를 가리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6절에 "하나님께로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께로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왜 사도 요한은 세례요한을 가리켜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이 당시 성경에 대해 능통한 사람들은 참 많았습니다. 그 중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나름대로 성경에 관한 해석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성경을 잘 아는 자들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는지?"를 묻자 그들은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에 대해 성경에서 증언하고 있는 내용을 정확하게 말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토록 그들은 성경에 관한 한 정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 경배하러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을 많이 알고, 잘 해석한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아닌 모양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성경에 대해 박식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분들 중에는 엉뚱하고 황당한 얘기를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종교다원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이라든가 혹은 예수가 불제자라고 말하는 사람들, 심지어 신학까지 공부했다는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빛이 그들 가운데 비쳐졌지만 어두움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 빛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지식으로 아는 것과 성령께 감동되어지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만약 수 십년 동안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삶에 전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 것 같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곰곰이 따져서 생각해 보면 그 오랜 세월동안 예수를 지식적으로만 알고, 그분과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저는 요즘 우리 학생회에 일고 있는 조그마한 변화들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 학생들의 신앙생활을 들여다보면 기쁨도 없고, 패기도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것은 저만 느낀 것이 아니라 조금만 관심을 갖고 학생회를 지켜 본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 학생들에게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모습이 보여집니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찬양이 뜨거워지고 있고, 교회에 머물려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무언가를 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동안 이런 변화들이 그들에게는 없었던 것일까요? 생각건대 지금까지 우리 학생들은 부모에 의해 혹은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거의 습관적으로 주일이 되면 교회에 나와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에 대해 공과공부시간에 공부도 하고 혹은 설교시간에 설교를 듣기도 했지만 단지 지식으로만 알았을 뿐, 자신의 인생에 찾아오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일이 거의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억지로 찬양하고, 억지로 모였습니다. 억지로 하는 일에 무슨 기쁨이 있고,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또 교회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난번 찬양캠프를 다녀온 후, 여러 가지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그곳에 참석한 우리 학생들이 정말 기쁨으로 찬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면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이 그들로 하여금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입니다.
어디 학생들뿐이겠습니까? 우리들 가운데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자발적이지 못하고 끌려 다니듯,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오는 분들이 계시다면 자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을 점검해야 합니까? "과연 내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난 일이 있는지?"를 말입니다. 성령께 감동되어진 그 무엇인가가 내 안에 있는지를 반드시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그런 경험이 없다면 나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영혼일 수 밖에 없습니다. 빛이 비쳐지고 있지만 그 빛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영혼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와 상관이 없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에 출석했느냐? 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어떤 직분을 받았느냐?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내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요한을 가리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당시 성경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오직 성령께 감동된 사람,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을 선포한 사람은 요한 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본문 7절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역할은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자기로 인해 그 빛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믿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옛날엔 왕이나 세도가들이 행차를 하게 되면 행차하기에 앞서서 그들의 행차를 알리는 사람들이 먼저 마을에 들어가 나팔을 불고 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했습니다. 만약 여의치 못할 때에는 행렬 조금 앞에서 '쉬 물렀거라! 아무개 대감 납신다'하면서 그의 앞길을 예비하곤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의 왕림을 알리는 사자이며 증거자였습니다. 아니 세상의 빛으로 오시는 분을 증거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이 빛에 대해 증거합니다. 증거하되 조금도 거침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세례를 받으러 온 무리를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소리를 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하면서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게 될 것"이라고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증거자는 자신의 견해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을 보내신 분과 자신이 증거해야 할 것만 말할 뿐입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세례를 받고 또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심중에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말하기를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즉 그의 모든 행동은 결국 자기 뒤에 오시는 이를 증거하는 것에 불과한 것임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의 사역에 충실한 세례요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쯤되면 누구든지 높아지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고 있습니다. 또 자신을 위대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추종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일로 인해 자신이 높아지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증거하는 사람에 대해 말할 때, 자신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정도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노예들에게나 적용하는 말입니다. 즉 그분에 비하면 자신은 노예와 같은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자신에게 적용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인기에 영합하거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의 사역에만 충실하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분이 흥하는 일이라면 나는 쇠하여도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이 나보다 앞서나갈 때, 그 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습니까? 나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을 더욱 축복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십니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트집을 잡아 깍아 내리고 싶으십니까? 나보다 모든 면에서 한발 앞서가는 사람들을 볼 때, 그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해주려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진정으로 자리를 잡으실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 첫째는 왜 하나님께서 그를 빛에 대한 증거자로 보내셨는가? 하는 것과 사도 요한은 세례요한을 여기서 왜 그가 빛의 증거자라는 사실을 굳이 밝히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왜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빛에 대한 증거자로 보내셨습니까? 이미 여러차례 언급을 한 내용이지만 이 당시 모든 사람들이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강팍해질대로 강팍해져서 도무지 빛에 대해 깨닫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과거 요한이 활동했던 시대보다 나아진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생각하기엔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험악해졌고, 더욱 강팍해졌습니다. 이럴 때 빛에 대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이 어두운 마음과 캄캄한 세상을 밝혀줄 빛에 대한 증거자가 필요합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살던 시대를 가리켜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대 속에 빛들로 나타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빛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빛에 대해 증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대가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빛을 깨닫지도 못하고 발견하지도 못하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빛에 대한 증거자로 부르고 계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순종하는 마음으로 감사히 여기실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나를 목회자로 부르신다면 순종하겠느냐?는 의미가 아닙니다. 빛을 증거하는 일은 목회자의 몫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목회자만 빛에 대한 증거자로 세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성령의 감동이 그 속에 살아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 빛에 대한 증거자로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세례요한은 어둡고 캄캄한 세상을 빛 가운데로 인도하는 증거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빛의 증거자라는 것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그것은 내 삶의 중심은 오직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말하기를 자신은 이 빛에 대해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로 인하여 그분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가끔 저희 집 작은 아이가 밖에 나가서 놀다가 저녁 무렵이 되었는데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큰 아이를 시켜서 빨리 찾아서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찾으러 나간 녀석이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함흥차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기다리다가 하는 수 없이 제가 찾으러 나가보면 이 녀석이 문방구 앞에서 친구들이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을 보면서 넋을 잃고 있습니다.
제가 분명 큰 아이를 보낼 때는 작은 아이를 찾아보라고 내 보냈는데 이 녀석은 엉뚱한 곳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동생은 찾을 생각을 않고 자기의 흥미를 끄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린 채 그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일런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참되신 뜻을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 것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빛에 대한 증거자로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인하여 그분을 믿게 하려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메시지의 중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다면 그 어떤 것도, 또 무엇을 하더라도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좋은 대학에 가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대개는 그래야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출세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좋은 대학을 나오면 다른 사람들보다 세상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길이 빠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각을 달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출세하기 위해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거나 잘 사는 것이 전혀 소용이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대학을 가고, 잘 살려고 하는 그 생각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에 있다면 좋은 대학을 가려는 목적이 달라질 것입니다. 잘 살고자 하는 이유도 세상사람들의 그것과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은 그렇게 많이 공부를 해도 결국은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남에게 주게 될 것입니다. '공부해서 남 주냐?가 아니라 남을 주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출세해서 남 주냐? 가 아니라 출세해서 몽땅 남을 주자'로 바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에 중심을 잡고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가 흥한다면 나는 쇠하여도 상관이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입니다.
교회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성도의 교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교제가 얼마나 중요하면 우리가 매주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도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는 말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은 예수님이 빠진 성도의 교제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성도의 교제 속에 예수님은 없고, 세상적인 유흥만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회 합시다' '봉사합시다' 하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다가 어디 놀러간다든지 명절을 맞이해서 윷놀이 한판하자고 하면 다른 때보다 배로 많이 모여듭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렇게라도 모이면 다행이다'라며 우리 스스로를 위로하곤 합니다. "일단은 모여야 죽이 되든 밥이 되던 뭐가 될게 아니냐"고 말합니다.
물론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모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이는 것이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빠진 성도의 교제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잠시동안은 가까워질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그 친밀함은 얼마가지 못합니다. 윷을 던지며 유지하는 친밀함보다는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친밀함이 훨씬 더 오래갑니다. 식사하면서 유지하는 관계보다는 두 손 붙잡고 서로를 위해 축복해주는 말과 기도가 훨씬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를 뺀 상태에서 엉뚱한 곳에 집착하거나 정신을 파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를 보내신 분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내가 관심 있는 쪽으로만 생각을 집중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오직 자기를 인하여 그분을 믿게 하는데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믿게 하는데 여러분의 삶의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까? 세례요한은 초림의 주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고 그분을 믿게 하는 일을 감당했다면 재림의 주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고 그분을 믿게 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분을 믿게 하기 위해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혹 바쁘다는 핑계로 그것을 다른 사람의 몫으로 돌리려 하지 않습니까? 혹 여건이 좋지 못하다는 핑계로 나중에 감당하겠다고 미루어 놓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더 이상 핑계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더 이상 미루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용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그 일을 위해 우리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 8절에서는 세례요한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한은 빛이 아니라 오직 이 빛에 대해 증거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저와 여러분은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내 의지로 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색하던 끝에 진리를 찾아서 이곳에 오게 된 것이 아닙니다.
고민과 갈등 끝에 고행하는 수도사들처럼 이곳을 찾아오게 된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을 이곳에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가 여러분을 부른 것도 아니고, 강해설교가 여러분을 이곳에 있게 한 것도 아닙니다. 끈끈한 인간적인 정이 여러분을 이곳에 있게 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예리한 검보다 더 예리하여서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을 찔러 쪼개기에 합당합니다.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교회는 영광스럽습니다. 설령 그럴지라도 여러분을 이 자리에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을 생명으로 초대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즘은 성도들 사이에 신앙의 엘리트 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어떤 유명한 목회자가 시무하는 교회나 체계적으로 프로그램이 잘 짜여진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크고 훌륭한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에 대해 만족하게 생각하는 반면 또 어떤 경우엔 자신이 개척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 때문에 주눅이 들거나 떳떳하게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이름조차 밝히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앙의 엘리트 의식을 갖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더 위험한 것은 조그마한 교회에 다닌다고 위축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건 그곳에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크고 훌륭한 교회가 내 인생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고,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교회가 내 삶을 위축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또한 우리의 빛이 되시며 생명이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빛이십니다. 기차를 타고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면 답답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터널 저 끝에 찬란한 빛이 비취고 있고, 그 빛을 향해 기차는 힘차게 달립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두움의 터널 속에서 찬란하게 비취는 빛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아니 우리뿐 아니라 어둠에 속해 있는 사람, 그래서 한줄기의 강렬한 빛을 깨닫지 못하고 방황하는 영혼을 향해 빛 되신 그분을 증거하는 삶으로 우리를 드려야 할 때입니다.
세례요한은 빛에 대해 증거하는 증거자였습니다. 모델하우스와 같이 오실 메시야를 보여주고 그 빛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여러분 주위를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예수를 몰라서 어둠 속에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중에 여러분의 남편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중에 여러분의 아내나 자녀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으로 인해 그분을 믿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이 있으십니까? 세례요한처럼 빛에 대해 증거하는 모델하우스와 같은 인생을 사시려는 의지가 있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증거하고 믿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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