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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적인 교육
2002-03-25 17:34:23   read : 37253

고린도전서 4:16-21 // 2002. 3. 3.

자녀를 기르는 부모는 누구나 자녀 교육에 관심이 큽니다. 부모는 자나깨나 자녀를 걱정하고, ‘어떻게 교육할까? 어떻게 가르쳐야 저 아이가 귀한 사람이 될까?’하는 것이 관심 사항입니다.
교육이 없으면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교양을, 매너를, 지식을, 학문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배워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교육은 가정의 문제뿐 아니라 국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교육이 없는 국가는 망한다. 교육을 하지 않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국가의 미래는 청년 교육에 있다.”라고 했고, 디오게네스도 “국가의 흥망성쇠는 소년들의 교육에 달려 있다.”라고 했습니다.
교육이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쓰며 연구하는데, 교육은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교육의 대가들, 교육학 박사들이 프로그램을, 프로젝트를 계획하여 교육하지만, 실패하고 또 실패하니 고치고 또 고치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모든 것이 어우러져 교육이 되기도 합니다만 교육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자녀를 많이 둔 아버지입니다. 그러니 그도 ‘내 믿음의 자녀들을 어떻게 잘 양육할까?’하는 것이 큰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의 자녀들에게 편지를 쓰고 사람을 보내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교육을 배우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 즉 인간의 슬기, 인간의 지혜, 인간의 경험으로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by the Holy Spirit)으로, 하나님께 받은 감동으로 가르쳤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의 교육법이 곧 하나님의 교육법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자녀들의 교육 방법을 성경에서 찾을 때 지혜로운 교육 방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효과적인 교육 방법은 무엇입니까?
먼저는 부모가 자녀에게 본을 보이면서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로, 생활 방식으로, 인격으로, 삶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믿음의 자녀들에게 먼저 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권한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따라 합시다.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 말씀은 ‘나(바울)대로 살아라.’가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 방법대로 살려고, 예수님의 생활 방식대로 살려고 애쓰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 닮아 예수님처럼 살아라.’라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어느 정도 예수님 비슷한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의 말, 바울의 생활 방식 등 바울의 모든 라이프 스타일(life style)이 예수님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샘플(sample)이라고 했습니다. 화장품 샘플이 큰 통에 들어있는 화장품과 크기는 달라도 내용은 같듯이, 바울은 자신의 생활이 예수님과 비슷하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의 생활이 예수님과 비슷하니 그가 “내가 주님을 닮은 삶을 사는 것처럼 너희는 나를 닮아라.”라고 한 것입니다.
친한 친구 사이인 두 소년의 대화입니다.
“야, 나 우리 아빠한테 실망했어.”
“왜?”
“아빠가 출장가셨을 때 호기심이 생겨 아빠 서랍을 열어 보았더니 음란한 책, 음란한 사진, 여인의 나신 등 더러운 것이 가득했어. 아빠한테 실망했어.”
“그래? 너의 아빠는 점잖아 보이시는데….”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소년도 자기 아빠가 궁금했습니다.
‘내 친구 아빠는 그런데, 우리 아빠는 어떨까?’
그래서 아빠가 출근한 후 그는 아빠의 서랍을 열어 보았습니다.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서랍에 일기장이 있었습니다. 호기심에 일기를 읽어보았습니다. 거기에 기록되어 있는 아빠의 하루 삶이 얼마나 거룩하고 뜨겁고 귀한지…. 더구나 거기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나의 사랑하는 아들을 축복해 주세요.’라는 기도가 적혀 있었습니다. 아빠의 일기를 읽던 소년은 수천 볼트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떨었습니다.
‘아빠! 아빠!’
오늘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의 서랍을 열면 어떠하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의 지갑을 열어보면 어떠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수첩을 보면 어떻겠습니까?
예전에 저희 이웃집에 살던 아저씨의 수첩에는 58명의 여자 주소와 전화 번호가 기록되어 있었답니다.
영국 격언에 “아버지는 죽어도 아들 속에 살고 어머니는 죽어도 딸 속에 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사는 방식대로 아들이 살고 어머니가 사는 방식대로 딸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는 우리를 그대로 닮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먼저 교육해야 됩니다. 자녀를 가르치기 전에 나를 가르치고, 자녀를 고치기 전에 나를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텔레비전을 밤늦도록 보면서 “열심히 공부해라.”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담배는 몸에 해로워. 피지 마.” 나는 술을 마시면서 “술 마시면 안 돼. 머리가 나빠져.”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설탕을 너무 좋아하는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설탕을 너무 많이 먹으면 이도 상하고 위도 상하는 것을 아는 어머니가 아무리 먹지 못하게 해도 아들은 계속해서 설탕을 먹었습니다. 생각다 못한 어머니가 아들을 훌륭한 선생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설탕을 너무 좋아하는데 설탕을 끊도록 말씀 좀 해 주세요.”
“가거라. 그리고 보름 후에 오너라.”
보름 후에 어머니와 아들이 다시 선생님께 갔습니다.
“또 가거라. 또 보름 후에 오너라.”
또 보름이 지난 후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선생님께 갔습니다.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아들아, 설탕을 끊어라. 설탕은 몸에 해로우니라.”
“예, 끊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왜 30일 전에 설탕을 끊으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그때는 아무 말씀하지 않으시고 저희를 그냥 보내시면서 보름 후에 오라, 또 보름 후에 오라고 하셨습니까? 왜 이제야 설탕을 끊으라 하십니까?”
“나도 설탕을 좋아한단다. 내가 설탕을 즐기면서 어떻게 아들에게 설탕을 끊으라고 하겠느냐? 그래서 내가 먼저 설탕을 끊으려 했는데 처음 보름간은 실패했다. 그래서 아들에게 끊으라는 말을 못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끊을 수 있었다. 아들아, 나이 많은 나도 끊었으니 너도 이제 끊도록 해라.”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그 아들이 그 날로 설탕을 끊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 된 우리의 책임이 큽니다. 우리가 사는 대로 우리의 자녀가 삽니다. 우리가 돈을 쓰는 대로 우리의 자녀가 써도 됩니까? 우리가 가는 이발소에 우리의 자녀가 가서 그대로 이발해도 됩니까? 우리가 사는 한 달간의 코스 그대로 우리 아들딸이 가도 됩니까?
사도 바울은 떳떳했습니다.
“내가 경건하게 사는 것처럼 너희도 경건하게 살아라. 나만큼이라도 경건해라. 내가 기도하는 것만큼, 내가 성경 읽는 것만큼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면 된다.” 할렐루야!

교회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들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 생활로 가르쳐야 됩니다. 목사님들이 교인들을 설교로 가르치지만 생활로 가르쳐야 됩니다. 구역장님이 구역원들을 말씀으로 가르치지만 생활로 가르쳐야 됩니다.
참 귀한 교육은 생활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변화시키려면, 아내가 남편을 바꾸고 싶으면 자신을 바꾸어야 합니다.
인생은 거울로 푸는 것입니다. 거울 앞에서 내가 웃으면 그쪽도 웃고, 내가 화내면 그쪽도 화를 냅니다.
밤늦도록 술을 마시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만 생각하면 한심했습니다.
‘세상에! 어찌 저렇게 사는 남자가 다 있나?’
하루는 남편을 혼내 주려고 무섭고 흉한 마귀로 분장해 있다가 새벽에 술이 취해 들어오는 남편 앞에 나타나 “흐흐흐흐. 히히히히…….”하는 괴상한 소리를 냈습니다. 아내는 자기 남편이 질겁해서 졸도할 줄 알았는데, 남편이 “허허허.”하고 웃었습니다. 아내는 괴상한 목소리로 “왜 무서워하지 않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이 마귀 양반아, 내가 왜 무서워해? 내가 당신 누이동생을 데리고 사는데.”
아내가 보기에는 남편이 엉망이었지만, 남편이 보기에는 아내가 엉망이었던 것입니다. 아내의 잔소리가 얼마나 심하고 성깔이 못되었는지 마치 마귀의 동생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귀가 나타나도 놀라지 않고 “처남이 왔구려.”라고 한 것입니다.
남편에게도 문제가 있었지만 그 아내에게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내들이여, 여러분이 남편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말하지만, 여러분 자신에게 고칠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교육은 자녀 교육이나 교회 교육이나 사회 교육이나 모두 자신의 교육입니다. 문제는 자기에게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도둑질을 하고 깡패 짓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훔친 돈으로 무엇을 합니까? 거의 모든 청소년들이 그 돈을 유흥비로 씁니다. 쌀을 사 먹기 위해 등록금을 대기 위해 돈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유흥비로 쓰기 위해 훔치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우리 나라 어른들이 흥청망청하니 아이들도 그 길로 가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닦아 놓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바다 게 이야기를 알지 않습니까?
어느 날, 한 어미 게가 자기 새끼 게들이 노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다의 모든 벌레들이 앞으로 죽죽 가는데, 자기 새끼들만 옆으로 기는 것을 보니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새끼들을 다 집합시켰습니다.
“차렷! 열중 쉬엇! 차렷! 열중 쉬엇! 이놈들아, 모두 앞으로 가는데, 너희는 왜 옆으로 가느냐?”
그러자 막내 새끼가 “그러면 엄마가 시범을 보여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어미 게가 “보아라.”하며 시범을 보여 주는데, 어디로 갔겠습니까?
자기는 옆으로 가면서 아이들에게만 앞으로 가라고 하는 어미 게가 바로 오늘의 우리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당당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된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아라.”
우리 아버지들이 “아들아, 나처럼 되라.” 어머니들이 “딸아, 나처럼 살아라.” 학교 선생님들이 “얘들아, 나처럼 살아라.”하는 정도가 되면 우리의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다 잘 되는 것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습니다.
우리 모두 생활로 본을 보이는, 본으로 교육하는 귀한 교육자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바울을 통해 우리가 배우게 되는 효과적인 교육 방법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매도 들고 사랑도 들고 교육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함으로 나아가랴?”
고린도 교회에는 사랑을 받을 만한 교인도 많았지만, 교만하고 음행하는 교인, 심지어 자기 아버지의 애인과 음행하는 교인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매를 갖고 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매를 나쁘게만 보는데 그러면 자식을 망칩니다. 미국이나 유럽이나 매를 나쁘게 보다가 자식을 많이 망쳤습니다.
잠언 20장 30절에 말씀하십니다.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잠언 13장 24절에도 말씀하십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채찍 없이는 좋은 사람이 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잘 아시기에 매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이 화가 나도록, 자식에게 화풀이하듯이 때리면 안 되지만, 자식이 잘못했을 때는 자식에게 이해시킨 후 매를 들어야 합니다. “네가 이렇게 한 것은 잘못이니 맞아야 해. 너도 동의하지?”라고 말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교육하기 위해 때리면 자식을 옳게 만듭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의 사모님은 선한 여자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매로 교육했습니다. 거짓말을 해도, 주일에 잘못을 해도 때렸습니다. 그 자녀들이 모두 올곧게 자랐습니다.
그 딸이 어렸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의 딸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사모님이 회초리를 가지고 딸의 종아리를 때렸습니다.
“엄마, 왜 때려?”
“너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너를 못되게 만든 마귀 놈을 때리는 것이다.”
얼마 후 그 딸이 또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사모님이 채찍을 드니 딸이 소리쳤습니다.
“엄마, 마귀가 방금 도망갔어.”
그 딸이 나쁜 짓을 하고 싶어도 엄마의 매 때문에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올곧게 자란 것입니다.
사람은 별 수 없습니다. 매를 대지 않으면 바로 되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요즈음 아이들은 얼마나 맹랑한지 모릅니다. 옛날 아이들과 다릅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부모도 갖고 놀려고 합니다.
어느 보름 날 밤, 아빠와 함께 걸어가던 아들이 아빠를 불렀습니다.
“아빠.”
“왜?”
“하나님은 저 달 속에도 계신가?”
“물론 달에도 계시지.”
“하나님은 내 뱃속에도 계신가?”
아버지가 우물쭈물 하다가 “물론 네 배에도 계시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피자 먹고 싶대.”
요즈음 아이들은 머리 회전이 얼마나 빠른지 모릅니다. 그런 아이들을 우리가 어떻게 길러야 하겠습니까? 아빠 엄마를 두려워하도록 길러야 합니다. ‘잘못하면 아빠가 매로 때린다.’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도록 해야 합니다. 엄마도 두려워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매 맞을 짓을 했으면 때려야 합니다.
서울대학교의 한 교수가 아이를 때리면 절대로 안 된다고 했습니다.
아이를 때리지 않으면 아이를 망치게 됩니다.
저는 지금도 이규택 집사님을 잊지 못합니다.
제가 20년 전쯤에 충주의 한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었습니다. 충주 시가지가 다 얼어붙은 빙판 길인데도 밤이나 낮은 물론 새벽에도 성도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때 저도 불덩어리처럼 되어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때 이규택 집사님이 제일 앞자리에 앉아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그 집사님이 안수 집사님으로 병원 원장이었습니다. 집회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했는데, 한 주간 병원 문을 닫고 직원들을 다 데리고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아멘! 아멘!”하며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집사님 댁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받았는데, 집안에 실내 야자수가 즐비하고 집이 아주 으리으리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제가 말했습니다.
“집사님, 고맙습니다. 병원 문을 하루만 닫아도 손해가 엄청날 텐데, 이렇게 한 주간 문을 닫고 집회에 참석해 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 앞자리에 앉아 주시니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목회를 하면서 제일 고맙게 생각되는 분들은 제일 앞자리에 앉는 분들입니다.
제 말에 그 집사님이 “목사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지만, 오늘의 저는 우리 할아버지 때문입니다.”라고 하시면서 목사님이셨던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집사님이 어릴 때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다가 주일 예배를 빠뜨렸답니다. 낌새를 차린 할아버지께서 “규택아!”하고 부르시더랍니다.
“규택아, 이리 오너라.”
“예, 할아버지.”
평소 자기를 너무 사랑해 주시는 할아버지가 부르시니 달려갔습니다.
“너 오늘 예배 잘 드렸냐?”
가슴이 뜨끔했지만,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이 오늘 구약 성경을 가르쳐 주시더냐? 신약 성경을 가르쳐 주시더냐?”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너 예배를 빼먹었구나.”
“예, 할아버지.”
“왜 빼먹었냐?”
“애들하고 재미있게 놀다보니 까먹었어요.”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는데 할아버지께서 채찍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래? 종아리 걷어라.”
할아버지가 “주일을 범한 놈! 주일을 범한 놈!”하시면서 종아리를 얼마나 때렸는지 모른답니다. 팔딱팔딱 뛰면서 다시는 예배를 빼먹지 않겠다고 해도 피멍이 들도록 계속 때렸답니다. 그 후로 주일 예배를 빼먹은 적이 한 번도 없답니다.
요즈음 금요일이나 토요일이 되면 친구들에게서 전화가 온답니다.
“이 원장, 이번 일요일에는 골프 하러 가세. ○○도 오고, LA에서 ○○도 온대. 교회는 매주에 가는데 한 주만 빠지고 우리와 함께 골프 하러 가세.”
“그래? 그 친구가 온대?”
집사님의 마음에 가끔 ‘한 번 가볼까?’하는 생각이 생긴답니다. 그러면 할아버지가 나타난답니다.
“주일을 범한 놈! 주일을 범한 놈!”
그래서 친구들에게 “아, 안 돼. 안 돼. 못 가. 못 가.”라고 한답니다.
어릴 때 할아버지께 맞은 채찍이 오늘까지 주일을 지키게 한다고 그 집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할렐루야!
할아버지들이 손자를 얼마나 예뻐하는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고 하지 않습니까? 손자는 특별히 사랑스럽답니다.
5년 전쯤, 제가 서울 과천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의 김 목사님께서는 전도 챔피언이십니다. 어디에 가셔도 꼭 전도를 하시는 목사님이신데, 교회의 설교지나 전도지에 나와 있는 활짝 웃으시는 목사님의 사진 모습이 기가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저는 사진만 찍으면 그 표정이 얼마나 심각합니까? 방송국이나 신문사에서 “목사님, 제발 활짝 웃는 모습으로 찍어 주세요.”라고 해서 제가 얼마나 활짝 웃으며 찍는지 아십니까? 그런데 찍고 나면 심각한 모습이고, 그렇지 않으면 묘한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관심을 갖고 목사님께 말했습니다.
“목사님, 어찌 이렇게 활짝 웃으셨어요? 멋있는 작품이네요.”
“좋습니까?”
“활짝 웃으신 모습이 아주 귀하고 좋아요.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으셨어요?”
“지 목사님, 그 비결을 알려 드릴까요?”
“좀 알려 주세요.”
“손자 보고 찍으면 되지요.”
사진관에 손자를 데리고 가서 놀게 하고는 손자가 “할아버지!”하고 부를 때 “그래.”하며 찍으면 그렇게 활짝 웃는 표정이 된답니다.
손자는 그토록 귀하다는 말입니다.
할아버지이신 목사님이 그토록 귀한 손자를 피멍이 들도록 때리신 것은 평생 주일을 지키며 살도록 교육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매, 그 채찍이 평생 주일을 올곧게 지킬 수 있도록, 병원 원장이 된 후에도 주일을 지키는 것은 물론 병원 문을 닫고 부흥회에 참석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주일을 지키며, 병원 문을 닫고 부흥회에 참석하면 망합니까?
그 집사님을 보니 잘만 살았습니다.
매가 있어야 합니다. 무서운 매를 하나 만들어서 걸어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자녀들로 하여금 ‘내가 잘못하면 맞는다.’라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입니다.
교육학 박사가 무슨 말을 하든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성경대로 가르치면 됩니다. 교육학 박사라도 자기 생각대로 하면 자기 자녀 교육에 실패합니다. 그러나 교육학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도 성경대로 가르치면 그 자녀는 되는 것입니다.
매로 때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매는 사랑의 매라는 것을 아이가 알도록 해야 합니다. 남편에게 화난 것, 남편에게 혼난 것을 자식에게 화풀이하는 매는 오히려 역효과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늙어서 보자.’하게 됩니다.
자식이 맞으면서도 ‘나를 사랑하시는 아빠가 마음 아파하시면서 때리시는구나.’하는 것을 알도록 때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린 다음에는 싸매어 주어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말했습니다.
“부모는 한 손에 채찍을, 한 손에 사과를 들어야 된다. 때린 후에는 사과를 주라.”
바울은 오늘 본문에 “내가 매를 갖고 나가랴? 사랑과 온유로 나가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교만할 때, 회개하지 않을 때는 매를 맞아야 됩니다. 그러나 순종하고 회개하면 사랑을 받게 됩니다. 우리 자녀들이 매 맞지 않고 사랑만 받는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손에 매도 있고 사랑도 있지만, 우리 자녀들에게 사랑을 많이 먹이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매를 맞으면 안 됩니다.
따라 합시다.
“매 맞지 말자.”
하나님의 손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축복의 손이고, 또 하나는 매질하는 손입니다.
우리가 잘못하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매질하십니다. 건강을 치시고, 경제를 치시고, 자식을 치시고, 교통 사고를 통해 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살면 축복해 주십니다.
잘못했으면 빨리 회개해야 됩니다.
손에 잉크가 묻어도 빨리 씻으면 금방 지워지는데, 몇 시간이 지난 다음에 씻으면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운전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과속해서 경찰에게 걸렸습니다. 경찰은 자기에게 걸린 사람이 빌리 그레함 목사님인 줄을 몰랐습니다.
“10마일 오버했습니다. 법원에 출두하시오.”
법원에 출두한 빌리 그레함 목사님에게 판사가 물었습니다.
“당신이 10마일 과속한 것을 인정하시오?”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
“10마일에 해당하는 벌금을 물어야 합니다. 1마일에 1불씩 10불을 내시오.”
“예, 판사님, 내지요.”
판사는 앞에 있는 사람이 낯익은 얼굴이라 이름을 보았습니다.
‘빌리 그레함’
대통령의 친구이고, 미국민이 존경하는 목사님이었습니다.
“아이고, 목사님 아니십니까?”
“예, 죄송합니다. 저는 빌리입니다.”
“목사님의 벌금은 제가 대신 물겠습니다.”
판사가 목사님 대신 10불을 내더니 재판을 끝내고 그 도시에서 제일 좋은 식당으로 모시고 가 최고급 요리를 대접했습니다.
“뵙고 싶은 목사님을 법원에서 뵙게 되어 참 기쁩니다.”
다음 주일에 빌리 목사님이 “회개하면 그 벌금도 다른 사람이 내주고 좋은 음식도 오듯이,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다 용서하시고 더 크게 복을 주십니다.”라고 설교했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 하나님께 매 맞지 않고 사랑 받는 사람으로 삽시다.
우리도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가끔 실수합니다. ‘아이고, 하나님!’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서 빨리 회개해서 매 맞지 말고 사랑과 축복을 받읍시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매를 대지 않고 사랑으로 기를 수 있기를, 우리 자녀들을 참 복되게 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을 사랑해 주는 것이 최고입니다. 아이들을 사랑해 주고 많이 안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 아들이 고 3때의 일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저희 집에는 아이가 셋이니 아내가 도시락을 다섯, 여섯 개씩 준비했습니다. 도시락을 대여섯 개씩 싸면서 아이들을 깨우려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교회에서 늦도록 기도만 했습니다. 엄마는 집에서 도시락과 전쟁, 자식들과 전쟁인데, 애비인 저는 기도만 하는 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아침 늦게까지 기도만 했습니다.
어느 날 서울에 가려고 일찍 집에 가보니, 아내와 아이들이 전쟁이 붙었습니다.
“지금 몇 신데 아직 자니? 일어나라!”
“으아! 으아!”
1시, 2시까지 공부한 아이가 6시에 어떻게 쉽게 일어나겠습니까?
“여보, 매일 아침 이러오?”
“매일 이래요. 아침마다 아이들을 깨우기가 얼마나 힘드는지….”
제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도시락만 싸시오. 앞으로는 내가 아이들을 깨우겠소.”
그리고 아이가 고 3때는 제가 다른 시간에 기도를 했습니다. 새벽에 기도를 오래 하지 않고 일찍 나왔습니다. 기도만 중한 것이 아닙니다. 자식 교육도 중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죽든 말든 ‘나는 기도하리라.’하고 기도만 해서는 안 됩니다. 새벽에 기도를 많이 하지 못하면 다른 시간에 하면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조금 적게 하고 일찍 집에 가서 정신없이 자는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 준 다음 아이의 팔과 어깨를 주물러 주었습니다. 살살 주물러 주면 더 잘 자니 막 흔들면서 주물러 주어야 합니다. 막 흔들어도 만져 주면서 흔들면 기분 나빠하지 않고 잠에서 깹니다. “힘들지?”
“응.”
“계속 자고 싶지?”
“응.”
“계속 자면 망하겠지?”
그러면 아이의 얼굴이 달라집니다.
“그래, 우리 1년만 참자. 일어나라. 우리 아들 힘들지?”하면서 등을 두드려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 우리 아들에게 힘을 주세요.”하고 기도해 줍니다.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고 3의 권세가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 아이가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머니가 “일어나라! 일어나라!” 하는 것보다 아버지가 등을 두드려 주고 기도해 주면서 깨우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을 먹고 일어나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제 아들이 대학 입학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그 아들이 저와 제 아내 몰래 가출했습니다. 후에 아들이 이야기를 하는데, 날이 너무 추워서 돌아왔답니다. 날이 춥지 않았으면 아들이 돌아오지 않을 뻔했습니다. 그러니 날이 추운 것도 은혜였습니다.
그 아들이 1년 동안 공부를 더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 1년 동안에도 사랑으로 대해 주니 아들이 힘을 얻었습니다.
자식은 사랑을 얼마나 갈급해 하는지 모릅니다.
제 딸 경이가 어릴 때의 일입니다. 밥을 먹다가 갑자기 숟가락을 놓고 인상을 썼습니다.
“경아, 왜 그래?”
“반찬이 마음에 안 들어 못 먹겠어.”
그 당시 오뎅은 좋은 반찬이었는데 오뎅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이가 반찬이 마음에 안 들어 못 먹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머리 좋은 제가 딸 아이의 마음을 알지 못할 턱이 있습니까? 제가 무릎에 앉혀 놓고 밥을 먹이던 성찬이를 내려 놓으며 “성찬아, 엄마에게 가라. 우리 경이 이리 와. 우리 경이는 웃어도 예쁘고 화를 내어도 예쁘고. 우리 밥 먹자.”하고 경이를 무릎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밥을 떠 주니 한 그릇을 다 먹고 더 먹었습니다. 똑같은 반찬이라도 아빠의 사랑을 느낄 때 맛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는 사랑을 먹고 자라는 사랑나무입니다.
사랑으로 기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배워야 하는 효과적인 교육 방법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라는 것입니다.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talk but of power(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느니라).’
당시 아볼로 파라고 추측되는 사람이 말주변으로, 말재주로 교인들을 가르치면서 교만을 떨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바울이 말했습니다.
“웅변으로 가르친다고 교회가 되는 줄 아느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느니라. 하나님 나라의 교육은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에도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설교를 말재주로 하면 은혜가 됩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능력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빨랫줄로는 전등을 켤 수 없습니다. 전깃줄이 이어져야 전등을 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교육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의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본을 보이고 아무리 매로 교육하고 아무리 사랑해 주어도, 결국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도와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아들, 내 딸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길러 주세요. 하나님, 내 딸, 내 아들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잘 양육해 주세요. 저는 못합니다.’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모니카는 그렇게 하니 그 플레이보이, 여자를 셋 넷 거느리고 방탕하게 살던 어거스틴 그 플레이 보이도 결국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로 성자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약해도 기도는 강하고 기도에서 성령의 능력이 나가니 사람을 바르게 교육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자녀를 위해 최선을, 우리의 할 일을 다 합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맡기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부모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자녀들이 아름답게 자라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이 사회의 등불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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