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2002-01-30 13:49:25 read : 29377
마태복음 : 14-17 (2002년 1월 27일 주일 낮 설교)
마 9: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마 9:1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마 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마 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지난 2001년 10월에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할 때, 실수로 UN이 지원한 식량 창고를 폭격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계 UN국가뿐만 아니라, 미국 자신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원인을 조사해 보았더니, 어처구니없게도 공습을 할 때 새 지도가 아닌 낡은 지도를 가지고 작전을 짰기 때문이었습니다. 새 작전은 새 지도를 가지고 짜야 합니다.
우리가 여행을 할 때는 항상 최신의 지도를 가지고 여행을 해야 합니다. 그동안 많은 변화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도로, 새로운 건물이 생겨서 옛날 지도를 가지고 가면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산업정책연구원(IPS)에서 국가경쟁력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는데, 현재 한국의 국가 경쟁력은 세계 24위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 한국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새로운 정책을 도입하면 11위까지 올라갈 수 있고, 장기적으로는 3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 있는 국가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일본식 전략, 잘못된 전략을 반복하면 중국이나 대만과의 경쟁에서도 밀리고, 일본과의 경쟁에서도 밀리게 됩니다. 새로운 전략을 세우지 않으면 세계 41위로 하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새로운 전략이란 투명한 구조조정 확립, 정경유착 근절, 부정부패 일소입니다. 이 세 가지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데 고름이 여기저기 터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현상들은 그러한 과정에서 나오는 해산의 고통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세 가지만 잘 해결되면 우리 한국은 세계 속에 한국으로 부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옛날의 낡은 사고 방식으로 황제 경영을 한다든가, 권력의 도움을 입어서 부를 축적하려한다든가 할 때는 다시 한국은 퇴보하는 국가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전통적 사고의 전환,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남과 의식의 변화가 중요합니다.
최근에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 셀러가 된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에서 저자는 생쥐들도 변화에 민첩하고 적응을 잘하는데, 안간만큼은 새로운 변화를 잘 수용하려들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어떤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비교 의식이나 소외감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특별히 21세기는 더더욱 새로운 변화에 대한 개방성을 요구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세관에서 일하던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와 함께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고 계셨습니다. 그 광경을 보던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묻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 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그 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여러분! 건강을 빼앗겼을 때, 사업을 빼앗겼을 때, 명예를 빼앗겼을 때, 그 때는 금식하셔야 합니다. 그 때는 금식하며 간구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랑이 왔을 때는 춤을 추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 세례요한의 제자들 그들은 아직도 때를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랑의 때를 모르고 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일주일이면 세 번씩 금식을 합니다. 그러한 행위들을 통해서 자신의 의를 내세우며 자랑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금식은 구약의 율법에서도 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일년에 대 속죄일 날만 금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이 명하지도 않은 금식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의 의를 내세웁니다. 그들은 시대를 읽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의 정죄 아래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신랑이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과 기쁨과 안식을 주시는 주님이 오셨습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참된 구원과 평강과 안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주님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데 신랑의 때를 읽지 못한 세례요한의 제자들, 바리새인들 그들은 아직도 옛날의 낡은 사고 방식과 전통에 갇혀서 금식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여러분!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우리가 시대를 읽지 못하면, 때를 알지 못하면 우리도 낡은 사고 방식과 전통을 고집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대를 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고착화된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익숙한 것으로부터 결별에 대한 두려움, 우리의 낡은 사고 구조를 바꾸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을 받을 때만이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 해방을 받지 못하고 낡은 옛것을 고집할 때 어떤 비극이 초래됩니까? 새 술이 낡은 부대에 담겨지면 부대가 터져서 술이 새어 버립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옛날 팔레스틴에서의 술을 담는 그릇은 양이나 염소 가죽으로 만든 부대였습니다. 이 부대는 처음에는 탄력성이 있고 신축성이 있기 때문에 포도주 같은 가스가 있고 온도에 따라서 부피가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고 하는 액체를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가죽부대는 탄력성과 신축성이 없어지고 부실해지기 때문에 물건을 담으면 터져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반드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새 술은 율법의 완성 자이시며, 옛 언약의 성취이신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 예수님을 담아내며,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유와 풍성과 능력을 맛보며 살며, 어떻게 하면 그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교회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새 술을 담을 수 있는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여기서 '새' 라는 말은 '새로운 시대' 를 의미하는 시간적인 의미와 '질적인 새로움'을 의미하는 공간적인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런의미에서 우리는 두가지 측면의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첫째는 시대적인 변화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21세기의 벽두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읽는 눈이 필요합니다. 이 새 시대를 한마디로 말씀을 드리면 변화의 시대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제3의 물결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도전을 주었던 앨빈 토플러의 이야기를 공감하실 것입니다.
제1의 물결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농경사회의 시대로서 3000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부지런하고, 땀흘리고, 많은 토지와 노예들을 거느리면 부자였고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제2의 물결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300년 동안 지속되어 왔습니다. 제2물결 시대의 특징은 얼마나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생산품을 가지고 있느냐가 부의 기준이었습니다. 많은 공장을 세우고 많은 노동자를 거느리는 시대, 생산자가 소비자를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소외 지식산업의 시대인 제3의 물결시대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20세기말부터 시작된 이 시대에는 많은 공장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부와 성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제4의 물결 시대 속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소외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제4의 물결 시대의 특징은 어떻게 그 많은 정보 중에서 내게 꼭 필요한 정보를 얻고 소유하느냐? 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그 정보를 통해서 유용한 사업을 벌일 수 있습니다.
과거 3000년 동안 변화되어지는 일들이 이제는 3년 동안에 변화됩니다. 오늘의 시대야말로 변화의 시대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복음을 담고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 복음을 구현해 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 교회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교회는 더욱더 생명력이 넘치며, 부흥의 결실을 거듭거듭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나 변화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교회, 자기 방어에만 급급한 교회는 결코 부흥하지 못할 것입니다. 엊그제 동문회 모임 때문에 서울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목회를 나누고 손을 잡고 합심하여 기도함으로 얼마나 영적인 유익을 얻고 힘과 위로와 도전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친구 목사님들의 말을 들으니까 계속해서 줄어드는 교회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깜짝 놀랐습니다.
서울에 몇 몇 유명한 교회들만 생각하면서 모든 교회가 자라고 성장하는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줄어드는 교회가 굉장히 많습니다. 천명이 모이는 교회였는데 3백 명으로 줄었다는 것입니다. 600명 모이던 교회가 10년 만에 300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400명 모이던 교회가 200명으로 7년 만에 줄었다는 것입니다. 부흥하는 교회도 있지만 줄어드는 교회는 더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줄어드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도시의 공동화 현상과 신도시의 개발로 인해서 이주하는 사람들 때문일 것입니다. 도심지에 있는 교회들이 그런 영향을 다 받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 지라도 교회가 줄어드는 중요한 이유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낡은 사고 방식을 바꾸지 않은 이유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변화의 시대 속에서 우리 덕일 교회가 준비해야 하는 새 부대는 무엇인가? 여러분 같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 교회는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교파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교파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만이 아직도 고집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단이 아닌 이상 사람들은 어떤 교회를 찾습니까? 그들의 필요를 민감하게 채워주는 교회를 찾습니다. 그들의 필요가 다양합니다. 그러나 본질적 필요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를 채우고,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미국에 어느 한 청년이 수북히 쌓인 눈 위를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먼 곳에 있는 교회를 향해서 걸어갑니다. 곁에 있는 사람이 하도 딱해서 묻습니다. " 여보 청년 여기에도 교회가 많은데 왜 하필이면 그 교회를 고집하며 고생하며 가고 있는가? " 청년이 대답합니다. "이 교회는 제가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교회요, 지금도 그 사랑이 있기 때문에 저는 그 교회를 가야 합니다." 교회가 사랑이 있으면 그 교회가 어디에 위치해 있든지 그 교회를 찾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원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장식이 화려하고, 최첨단의 시설을 갖추고 있어도 그 곳에 사랑이 없으면 사람들은 절대 몰려오지 않습니다.
미국 뉴욕의 부루클린에 ' 폴리머스' 라고 하는 교회가 있는데 여기에 1928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할머니가 예배 끝날 즈음에 손을 들고 말합니다. " 목사님 죄송하지만 딱 한번 마지막으로 부탁하는데 저 강단에 나가서 간증 좀 하게 해주십시오. " 하도 간절해 보여 허락을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강단에 올라오더니 조심스럽게 이야기합니다. "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68년 전의 일입니다." 68년 전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860년 9월19일, 그 날은 주일날이었습니다. 이 교회당 마당에 노예시장에 열렸는데 저도 노예로 팔려 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경매를 붙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딴 곳에 노예로 팔려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로, 어떤 집으로 팔라가게 되나, 내 운명은 어떻게 되나, 초조히 벌벌 떨고 있을 때, 방금 예배를 마치고 이 교회에서 나오시던 목사님이 나를 붙들더니 800불을 치르고 나를 사서 그 당장에 나를 자유하게 해주셨습니다. 듣자하니 그 날 예배에서 ' 우리가 어찌할 수 없지마는 헌금이라도 해서 노예 한 사람이라도 자유케 하여 줍시다.' 해서 헌금한 돈을 가지고 저를 사서 풀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저는 그런고로 이 교회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68년 동안 이 교회를 출석하고 이 교회를 위하여 기도함으로 한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나이 많아 죽을 때가 가까웠기에 이 간증을 꼭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
여러분! 사랑이 있는 교회는 떠나지 않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사랑의 목말라 있습니다. 사랑에 굶주려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권력가라고 할지라도 황제 같은 재벌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사랑을 공급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공급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중앙집권적 구조에서 지방분권적 구조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이미 그렇게 변화 되었습니다만은 더욱더 확실하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기구들이 있는데 그러한 기구들이 여러 기관과 그룹들의 사역과 활동을 통제하고 감독하는 기구가 아니라 그들이 더 활성화되고, 부흥하고, 성장하고 열심히 믿음 생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사람들을 지원해주고, 시설들을 만들어주고, 필요한 자료들을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변화의 시대에 우리 덕일 교회가 준비해야 할 새 부대는 오라는 구조에서 가라는 구조로 바뀌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찾아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잘 꾸미고, 시설을 잘 해놓아도 오라고만 하면 안 옵니다. 사람들의 현장을 향해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가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로 삼으라."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그 현장으로 가야 합니다. 열방과 족속과 백성가운데 사랑을 안고, 복음을 안고 가야 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관광시즌이 되면 편리한 교회 아무데나 갑니다. 겨울에는 스키 타러 가고요, 여름에는 산과 바다로 갑니다. 내 교회가 이제는 우리 교회로 바뀌어집니다. 주 5일 근무하는 회사가 많아지고 있고 앞으로는 학교도 회사도 주5일 근무제로 바뀌어집니다. 오는 교회가 아니라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있는 그 현장으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삶을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중에 드리는 순 예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가장 편리하고 가장 많은 순원들이 만날 수 있는 시간과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면 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 속에 나의 집은 가정의 교회가 되어 그들을 쉽게 만나고 접촉하고 초청하고 전도할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현장에서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섬기고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는 사건들이 여기 저기 벌어져야 합니다.
세 번째로 준비할 수 있는 새 부대는 예전적 예배에서 축제적 예배로의 변화입니다.
예배 자체가 즐겁고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성장하는 교회들을 보시면 명성교회, 온누리 교회 예배가 하나의 축제입니다. 무질서 한 것 같으면서도 질서가 있습니다. 예배 속에서 춤으로 추고 박수를 칩니다. 할렐루야 하면 성도들은 아멘합니다.
네 번째는 사회복지 사역이 필요한 때입니다.
변화 산에서 베드로는 변형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에 빠져서 여기 있는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자고 하였습니다. 그 동안 산 밑에는 귀신들린 사람을 어느 누구도 고치지 못하고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 한국교회는 초막 셋을 짓는 동안 초막 셋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본당, 기도원, 교육관이래요. 교회밖에 귀신들린 영혼들을 구원하지 못하였다. " 본당 짓고 교육관 짓고 기도원 지으면 이미 믿는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장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불신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은 문턱이 높아서 오지를 못합니다. 물론 우리 교회는 절대적으로 시급한 것이 본당과 교육관입니다. 그것은 현실적 필요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산 밑에서 신음하는 영혼들을 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산밑으로 가야 합니다. 이 성산에 와서 기도하고 예배함으로 하늘의 권능을 힘입어서 산아래 신음하는 영혼들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들을 사단의 사슬에서 구원해 내야 합니다. 그들의 아픔을 담당해야 합니다. 우리 덕일 교회는 불신자들, 병든 사람들, 사단의 사슬에서 고통받은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복지 사역이 구현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크게 두 번째로 새 술을 담을 수 있는 새 부대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질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마음의 변화입니다.
영국의 밀턴(John Milton ; 1608∼1674)은 “마음은 천국도 만들고 지옥도 만든다"고 했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타인에 의해 보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 1842∼1910)는 “마음을 바꿈으로써 그대의 삶도 바꿀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만 탓해서는 안됩니다. 환경의 변화를 바라기 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바꾸면 인생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1차 공격의 목표도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속에 부정적인 생각의 씨앗을 뿌리고, 열등감, 죄의식, 의심, 시기, 질투가 일어나게 합니다. 우리는 마귀의 공격을 당하면 마귀의 종이 되어 인생이 파괴되고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잠언 4장 23절에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까?
첫째는 불 신앙의 마음에서 신앙의 마음으로의 전환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선교의 역사에 중심이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철저하게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을 놓고 사람들은 해석을 두 가지로 합니다.
믿음이 큰 다윗과 같은 사람에게는 골리앗을 돌멩이가 비켜가기는 너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믿음이 없는 사울과 같은 사람에게는 골리앗을 치기에는 너무 컷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역사는 믿음의 사람들의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불가능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12명의 정탐군 가운데 2명만이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의 제자들에게 부탁했습니다. "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두 번째는 비전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하는, 길이 되신 삶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에는 분명한 한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선포와 가르침과 치병과 기적과 그 모든 행동은 인간의 구원에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그의 몸인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구원과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 이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고 그를 양육해서 그가 살고 있는 지역과 세상을 변화시켜서 어떻게 하면 곳곳에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 교회, 바로 사도행전적 교회가 되는 것이 우리 덕일 교회의 목표입니다. 바로 우리 교회는 이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야 하고 이 목표가 이끌어 가는 교회가 될 때 새 술을 담을 수 있는 새 부대로서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새들백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개척한지 이제 22년 째 되는 교회인데 미국에서 가장 급속하게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쳤습니다. 1980년 개척해서 15년 동안 무려 79번의 이사를 하면서 건물을 바꾸었습니다. 그런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릭 워렌 목사님이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교회는 철저하게 목적이 이끌어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전통에 이끌어 가는 교회는 과거만을 되풀이한다고 하였습니다. 인물이 이끌어 가는 교회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사람의 배경에 이끌려 간다고 하였습니다. 제정이 이끌어 가는 교회는 누가 얼마나 구원받았는가보다 얼마나 절약했느냐에 관심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프로그램이 이끌어 가는 교회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분량으로 양육하는 것에서 직책을 주어서 채우는 교회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행사가 이끌어 가는 교회는 굉장히 바쁘고 무엇인가 많은 일을 한 것 같은데 사실은 열매 없는 기쁨과 감격이 없는 교회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철저하게 목적이 이끌어가야 하는데 그 목적, 그 교회의 비전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모든 성도들이 철저하게 성경적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피흘려 주신 이 교회의 진정한 목적을 아시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적 가르침을 받으십시오. 묵상의 사람이 되십시오. 릭 워렌 목사님이 강조하는 교회의 다섯 가지 목적은 첫째 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예배입니다. 둘째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셋째는 가서 제자 삼으라. 현장 속에서 복음 전하고 양육하라. 넷째는 세례를 주라. 현장 속에서 양육한 사람들을 이제 공식적으로 교회의 한 가족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다섯째는 지키도록 가르치라.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말씀이 인격이 되고 삶이 되도록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덕일 교회는 이 다섯 가지를 다 포함한 중요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 예배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순 예배를 원리대로 적용하면 교회는 부흥합니다. 거기에는 역동적인 예배가 있습니다. 이웃을 섬기는 긍휼의 사역이 있습니다. 순이라는 그물을 통해서 이웃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관계전도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함께 삶을 나누고 격려함으로 배운 말씀이 지식이 아니라 인격과 삶이 됩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사역들이 있습니다. 전도훈련이 있습니다. 묵상훈련이 있습니다. 성경학교가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기구들은 순 예배가 더욱더 강하고 생명력 있는 순이 되게 하는 필요한 기구들입니다.
이러한 분명한 목적이 있는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고 서로 사기를 복돋웁니다. 좌절감을 줄입니다. 사역에 집중력이 있습니다. 많은 지체들의 협력을 가져옵니다. 새 술을 담을 수 있는 새 부대가 된 덕일 교회, 순 예배를 통해서 사람을 얻고 양육하고 그를 세우고 파송 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도행전 적인 덕일 교회의 비전이 선명하게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
 |
|
 |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 김효자 /사업자번호831-29-0156/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 /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4394-4414 /E-mail:v919@naver.com |  | Contact Webmaste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