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2002-01-06 18:25:19 read : 21123
2001. 1. 14. 이사야 43 : 18 - 28
I. 말씀을 향하여
제3의 파도의 저자 엘빈 토플러는 그의 책 서문에서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암울하기에 이것이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이 책을 씁니다.”
이제 막 시작이다. 새해가 훤히 열리고도 이제 두 주일 째를 맞이했습니다. 과연 새해에는 희망을 가져도 좋은가? 아니면 지금 누리고 있는 분복마져도 무너지지나 않을까? 염려가 교차되고 있습니다.
어느 외국인 선교사 한 사람이 한국에 온지 1년이 채 되지 못했습니다. 송구영신예배를 인도하기 위하여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한국말은 서툴지요. 정성껏 준비한 노트를 보고 더듬거리며 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마 1년 2년 3년 하는 것은 배웠지만 한해 두해를 배우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친해하는 교우여러분! 오늘 우리는 송구영신예배를 드립니다. 이 밤이 지나면 이년이 가고 새년이 옵니다. 새년은 어떤 년일까? 기대를 해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년도 저년도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년을 맞아도 잘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새년과 함께 잘 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 새해에는 우리가 참으로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왜 없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징벌을 받아 파멸되는 순간, 회개하고 용서받아 새 일을 하게되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 - 하나님께서 채찍을 들어 징벌을 가합니다. 아파서 울며 회개하지요. 또 하나님께서 용서를 해 주십니다. 이 과정은 이스라엘 민족의 공식처럼 되풀이한 악순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이 깔고 있는 배경 역시 이스라엘의 죄악상입니다.
인류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 시대가 부패하더라도 그 전통이 올바로 서 있으면 타락한 시대를 바른 전통으로 돌이킬 수가 있습니다. 비록 잘못된 전통을 지녔다 할지라도 시대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 바른 정신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면 바른 전통을 세워갈 수 있는 것도 보게 됩니다.
국가나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 지도자들이 타락했다 할지라도 국민들이 올바로 살아있으면 그 민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역으로 국민들이 아무리 타락했다 할지라도 지도자들의 정신이 똑바로 박혀있으면 나라를 반드시 반듯하게 이끌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27절 “네 시조가 범죄하였고 너의 교사들이 나를 배역하였나니” 지도자들의 타락상을 볼 수 있습니다. 22절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하였으며” 백성들이 부패했습니다. 조상들이 범죄의 씨를 뿌리고 민족의 지도자들이 흙탕물을 일으키는가 하면 백성들이 죄를 먹고 마시는 시대가 바로 이 시대였습니다. 이는 필시 망국패가, 망신의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그 결과 첫째, 28절 “성소의 어른들이 욕을 보게 하였다”라고 말합니다.
남쪽 어느 지방에 가면 “수고했습니다” 인사대신 “욕봤습니다” 그럽니다. 그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욕봤다는 얘기는 더럽힘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여자가 정조를 유린당했을 때 이런 표현을 쓰지요. 그러니까 범죄의 결과로 성소의 어른들이 짓밟히고 유린당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백성들의 타락을 많이 보고서도 지도자들이 회개를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느니라. 나팔을 불어야 할 때에 자장가를 불러댔습니다. 평안하다. 모든 것이 병들고 썩어 문들어 졌는데도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덮고 평안을 선포하고 살아갔습니다.
둘째로, 야곱이 저주의 옷을 입고 이스라엘이 비방거리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멸망하게 생겼습니다.
저주의 옷이란? 아담과 하와가 멸망하고 영광의 옷을 벗어 던지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야 될 백성들이 비방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될 이스라엘이 저주와 징벌을 받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비방거리가 되었다는 말은 또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성민이라고 자부하던 사람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이방족속들과는 다르다고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이방인들에게 포로로 개처럼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이방족속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저 사람들의 꼴 좀 보라고. 성민이라고 자부하는 저 작자들의 저 꼴 좀 보라고. 비방하고 조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소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할 때 언제나 영광과 칭송 대신 비방과 조소, 수치를 당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멸망과 저주, 수치와 비방의 소용돌이 속으로 아침햇살처럼 신선한 복음이 들려옵니다. 희망의 메시지가 오늘 본문에서 선포되어지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 수재, 천재들을 모아서 새 일을 이루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의 정결하고 의로운 자들을 불러모아서 새 하늘과 새 땅을 펼쳐 가시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이 말은 죄의 전통에 물들어 있고 죄악된 공기속에 살아갈 수 밖에 없고 죄를 먹고 마시고 수치와 비방 거리가 된 내 백성들을 불러 모아 새 일을 행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잘나지 못했지만 못나 보이지만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한가지 사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새 일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이 행하신 새 일이 무엇입니까? 그 대답이 25절에 나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 일은 저주의 백성을 축복의 백성으로, 비방거리들을 영광과 칭송의 자식으로, 멸망의 자식들을 영생의 자식으로 바꾸어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 간섭하시고 그것을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시는가? 그 이유가 대단히 놀랍습니다. 내가 잘났기 때문에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향기로워서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소중하고 귀하고 귀해서 용서하시겠다고 오늘 본문에서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용서의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시고 능하시고 전능하신 그 분에게 용서의 원인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자식이 벌거벗고 길거리에 뛰어 다니면 내가 수치스럽지요. 내 자식들이 더러운 옷을 입고 더러운 행동을 하고 이 골목 저 골목 헤매고 다니면 어머니에게 수치가 되겠지요. 그래서 아이를 깨끗하게 씻기고 새 옷을 갈아 입히고 단정하게 만들어 세상에 내어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치의 옷을 입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채찍에 맞아 피 흘리고, 울고 실패하고 실패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행복하고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용서하는 것이 내 속성이기 때문에 내 자녀를 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내 본성이기 때문에 나는 너희를 용서하노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내 허물을 도말하리라”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이유도 놀랍습니다만 그 방법 또한 놀랍습니다. “도말하고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여기 “도말”은 기록된 죄를 지워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기억지 않겠다는 것은 녹음된 테이프를 불태워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완전한 사죄의 은총이 있습니다. 이것 만이 완전한 용서가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새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용서보다도 더 큰 새 일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랑보다 더 큰 새 일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영원히 멸망받을 수 없는 저 지옥의 백성들을 건져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삼으시는 구원의 역사보다도 더 큰 새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교회에 기도를 많이 하더니 하나님하고 직통 전화를 놓고 하나님하고 직접 통화한다는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그게 사실인가? 아닌가 궁금해서 아이를 불렀습니다. “얘야, 너는 하나님을 만난다며? 하나님을 만나면 목사님 몸에 점이 하나 있는데 어디에 점이 있는지 하나님께 물어 볼래?” 조금 있다가 아이가 돌아오더니 “목사님 등뒤에 큰 점이 두 개 있데요.” 깜짝 놀랐습니다. 정확하게 맞았어요. “한번 더 하나님께 물어보려무나. 얘야, 목사님이 굉장히 소중히 여기는 보물이 하나 있는데 그 보물이 뭔지 물어볼래?” 아이가 기도하고 오더니 “목사님께서 할아버지 때부터 물려받은 성경 책 한 권, 그걸 소중히 여긴다고 하나님이 말씀하네요.” 목사님이 또 깜짝 놀랐습니다. “얘야, 한번만 더 물어보려무나. 목사님이 기도할 때마다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목사님을 못내 자신감 있게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죄,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죄가 뭔지 하나님 앞에 한번 물어볼래?” 아이가 기도하고 오더니 “하나님 앞에 목사님 죄가 무엇이냐고 물어봤더니 하나님께서 이미 목사님이 회개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용서하신 죄를 아무리 기억해 내려고 해도 기억이 안 나신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허물을 알고 계실 수 있지요. 우리의 약점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알고 계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나님은 알고 계시죠. 그러나 한번 하나님 앞에 고백한 죄, 하나님이 용서 해 버린 죄, 기억 할래야 기억할 수 없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지라”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세상의 재미있는 일들 기억하지 않아야지요. 포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왔으면 포로의 근성을 버려야지요. 우상 앞에 죄 짓던 일을 씻어 버려야지요. 잘못된 과거, 집착증 환자들, 과거 회상주의 자들은 하나님의 새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18절 본문은 시작하면서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미 내가 새 일을 시작했는데 너는 왜 과거로 돌아가려 하느냐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작년에 있었던 실패의 경험을 기억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번 실패했다고 영원한 실패자 인양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10년전에 저지른 허물과 실수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용서받았으면 하나님도 잊어 버렸으면 여러분도 믿으시고 잊어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너의 죄 사해 주사 기억 아니 하신다. 너의 죄 사해 주사 기억 아니 하신다.
불쌍한 사람들아 오라 하신다. 너의 죄 사해 주사 기억 아니 하신다. 할렐루야!
목사가 부부싸움을 잘 할까요? 잘 못 할까요? 저도 부부싸움을 잘하지 않습니다만 가끔 한번씩 합니다. 그런데 부부싸움을 할 때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게 있더라구요. 과거에 한번 싸우고 지나 간 것, 서로 용서한 것, 과거의 허물, 고칠 수 없는 아픔들, 그것은 제발 끄집어 내서 꼭꼭 씹지 말아야 하겠더라구요. 그리고 나면 그 상처는 지워지지가 않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용서해 버리는 것입니다. 실수와 허물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용서의 복음이요 속죄의 기쁨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과거로부터 해방 받았으며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실패의 쓰라린 경험, 지난 날 내 기쁨과 행복과 평강을 빼앗아 갔던 모든 죄책감, 이 시간 십자가 밑에 다 묻어 버리고 새해를 힘있게 출발하시기를 부탁합니다.
영국에 어느 정신병원에서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의 95%가 하나님의 용서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까지도 이용하셔서 새 일을 만들어 가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실수까지도 이용하여서 하나님의 새 역사를 감당하게 해 주십니다.
마귀는 우리 과거의 실패를 자꾸 들춰냅니다. 처녀시절에 실수를 들춰냅니다. 어린시절에 상처받은 것을 자꾸 생각나게 만듭니다. 이전에 쓰라린 경험이 자꾸 나를 꽁꽁 묶어서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은 과거를 잊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희망을 약속해 주십니다. 성령이 오면 환상을 보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꾸게 되는 것입니다. 연필 끝에 지우개가 달린 것은 실수한 자국들을 지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둘베는 말하기를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이다”고 얘기했습니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를 성공으로 바꿔갈 수 있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갈 수 있습니다.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꿔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에 존경하는 인물이 누굽니까? 물어보면 “야곱”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별로 닮고 싶지 않은 인물이 누굽니까?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야곱”이라고 얘기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우리가 야곱을 닮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약점을 지적할 때에 우리는 속이 상하는 거지요. 야곱의 약점을 우리 모두가 가졌기 때문에 야곱을 닮고 싶지 않은 것 뿐입니다.
형을 속였습니다. 눈먼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리고 축복을 가로채고 하란으로 도망가다가 루스라는 광야에 이르자 해가 서산에 져서 더 이상 여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을 지붕 삼고, 이불 삼아서, 돌멩이 하나를 베개 삼아서, 잠을 청하는데 그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나는 이제 내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구나. 고향 땅에서도 버림을 받았구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이제는 될 수가 없구나. 나는 어디 가서 살아야 한단 말인가? 인생에 나 홀로 떨어진 고아가 되어 버리고 말았구나.’
고독한 그 밤에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좍 내려온 것 아니겠습니까? 하늘의 천군천사들이 그를 감싸더니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겠다. 네 뜻을 이루고 돌아올 때까지, 네가 성공하고 돌아올 때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내가 너를 지켜 줄 것이니라.”
잠에서 벌떡 깨어나 하나님을 향하여 울며 찬송했습니다. 나 혼자 도망가는 줄 알았는데 이 길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고 계셨구나. 이 빈 들판에 나 혼자 누워있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이 자리에 함께 계셨구나. 여기가 빈들이 아니로다. 성전이로다.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로다. 돌 베개를 세워놓고 하나님 앞에 찬송하고 경배하게 된 것입니다. 실패의 자리가 도약대가 돼 버리고 만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실수까지도 이용하시고 나의 허물까지도 들어 쓰실 때에 우리는 새 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내 안경에 먼지가 묻었다고 나는 버리지 않습니다. 안경에 때가 끼었다고 나는 망가뜨리지 않습니다. 사랑 많으신 우리 하나님, 우리 인생에 먼지 묻었다고 우리 인생을 폐기처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실수가 있고 허물이 있고 약점이 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모자라는 것 채우시고 약한 것 강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용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예수님이 함께 계시고, 성령님이 능력 주시니, 할렐루야 삼위일체 하나님 찬양! 이 한해동안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며, 승리의 행진을 계속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전의 실수도 잊어버려야 하지만 옛날에 트로피도 십자가 밑에 묻어버려야 합니다. 시집오기 전에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몹시도 사랑을 받은 사람이 시집가서 잘 못 살 때가 있어요.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사랑받던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어린 신앙일 때에 사랑을 받던 사람들이 이제는 남들 사랑하는 성숙한 신앙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늘 어리광만 부리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과거를 잊어버려야 됩니다. 상패를 잊어버려야 됩니다. 사랑받던 일을 잊어버려야 됩니다. 칭송받던 일을 잊어버려야 됩니다. 트로피를 십자가 밑에 묻어버려야 됩니다. 그래야 만이 더 나은 자리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로 승리의 자리로 새 역사의 자리로 우리가 달려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 일을 생각하지 마라.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여기 “생각”이란 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새해에 부정적인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것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성공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성공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미움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먼저 상처를 받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픈 욕망이 일어나는 사람은 사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잘못된 생각은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못된 전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나라에 유명한 마술사가 자신의 사랑을 거절하는 미인에게 당신은 일 주일이 지나면 내 사랑을 거절했다는 이유 때문에 바짝바짝 말라서 죽게 될 것이오. 이 마술사의 말이 진짜인 줄 알고 유언을 써 놓고 일 주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가 그냥 죽어가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존재할 뿐이다.”
맥아더 원수가 한국군 사령관으로 임명을 받았을 때 그는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했습니다. 상륙작전이라는게 배 한 척만 침몰하면 그것으로 실패할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한 작전이지요. 그가 상륙작전들을 연구해 보니 지구상에 500번 정도의 상륙작전이 있었는데 그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노르만디 상륙작전을 제외하고는 499번이 실패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부하들이 그 작전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때 맥아더 원수는 대답했습니다. “1/500의 확률의 아니라 1/1000의 확률이라 할지라도 이 작전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하나님이 이 작전과 함께 하시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노르만디 상륙작전이 성공했다고 하면 인천 상륙작전도 성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전세계에 있는 자유 우방국들과 함께 우리는 전진해 가게 될 것이다.”
여러분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 성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앞에 넘실대고 있는 요단 강이 무엇입니까? 홍해가 무엇입니까? 인천 앞 바다가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전진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는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좀 작은 생각을 큰 생각으로 바꾸십시오. 대범하게 역사를 펼쳐 가십시오. 약한 생각을 강한 생각으로 바꾸십시오. 추악한 생각들을 선한 생각들로 바꾸십시오. 미움을 잊어버리고 사랑을 계획하십시오. 실패를 잊어버리고 성공을 생각하십시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미래를 잊어버리십시오. 어제를 잊어버리십시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도다.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새 역사를 이루어 가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전진해 가십시오.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한 마을에 어린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폐쇄된 철길을 건너야 했습니다. 마을 아이들이 철길을 건너가다가 중간쯤 가서는 밑을 내려다 보고 그냥 어지럼증이 있어서 빠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동리에 통통하게 생기고 배가 볼록 나온 아이는 끄떡없이 철길을 두벅두벅 잘 걸어간단 말이예요. 원인을 알아보았더니 아이들은 철길을 건너가다 밑을 내려다 봐서 무서움증 때문에 밑으로 빠지는데 이 아이는 배가 볼록하게 나와서 밑을 내려다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앞만 보고 똑바로 걸어가다 보니까 절대로 떨어지지 않고 철길을 잘 건너게 되었다고 합니다.
파도가 출렁이는 배에서 밑을 내려다 보면 파도에 파도에 빠지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래로 떨어지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위를 내다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새 역사가 펼쳐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새로운 사랑의 운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교회에 새로운 아름다운 사역의 운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업에도 새 희망을 가지고 전진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네 입을 채우리라. 입을 여는 것만큼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름대로의 행복한 삶을 살아오신 분, 만족한 삶을 살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까? 신령하고 좀 더 좋은 목표를 세우십시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나쁜 포도주를 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중에 더 좋은 포도주를 주십니다. 사랑 많으신 우리 하나님 좋은 것으로 우리와 함께 시작해 주십니다. 살아가는 자국마다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마지막에 가장 좋은 것을 우리를 위하여 준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새 역사를 이루는 사람들의 결국이 무엇입니까?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죄책감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축복의 잔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수치와 비방대신 감사와 찬송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잃어버리고 낙심과 절망가운데 있던 백성들, 강가에 모여서 녹슨 거문고를 닦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원망하고 상처를 주고 받던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격려했습니다. 서로 축복했습니다. 서로 기도했습니다. 감사와 찬양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은 능력이 있습니다. 감사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한해동안 불평대신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원망의 지난날을 묻어버리고 찬송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개울 창을 내려다보던 눈을 열어 저 높은 곳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은 아름다운 자리를 바라보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때 성령이 우리에게 오면 환상을 보고 꿈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난 후 일본의 해군 장교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돌아와 보니 사회가 부패되었고 무질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방탕하고 또 타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죠.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피 흘리고 싸웠단 말인가?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싸웠단 말인가? 불평과 원망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점 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손이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손가락을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병원에 가 진찰을 해 보았지만 원인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때 정신과 의사가 당신은 밥을 먹으나 잠을 자나 일어나나 누구를 만나나 하루에 천번이상씩 “감사합니다”란 말을 하십시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감사합니다.” 사건이 있을 때마다 “감사합니다.” 일어나도 “감사합니다.” 아무도 없을 때는 하늘을 바라보고 수없이 “감사합니다”를 반복했습니다. 오랜시간이 지나갔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어린아이가 풀 빵 두개를 “아빠, 이거”하고 내미는데 “얘야 고맙다”하고 자기도 모르게 마비된 손을 쑥 내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 봐라 얘야. 내가 빵을 받았다. 아빠가 손으로 빵을 받았네. 감사하구나. 고맙구나.” 온 몸의 마비가 점점 풀려지게 되었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송은 예방제가 됩니다. 해독제가 됩니다. 방부제가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아무리 어려움이 있다 7할지라도 세상이 썩고 오염되었다 할지라도 여러분을 유혹하는 시험의 불길이 강하고 거세다 할지라도 감사와 찬송은 이 모든 것을 물리쳐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21절)
러분 우리의 환경과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크리스챤이 절망한다고 하는 것은 절망을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나에게 힘이 없다고 낙심하는 것은 힘의 원천인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나에게 과거의 죄가 있다고 포기하는 것은 십자가 위에서 보혈을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희망의 눈을 뜨고 기대의 고개를 들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가정이 새로워지고 사업이 새로워지고 우리의 신앙, 영적인 성숙들이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내 허물을 도말하리라. 기억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이제 새 일을 행하리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반드시 이 한해 마지막에 여러분이 역사의 마지막 종점에 서 있을 때에 반드시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 할렐루야.
 |
 |
|
 |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 김효자 /사업자번호831-29-0156/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 /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4394-4414 /E-mail:v919@naver.com |  | Contact Webmaste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