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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힘을 얻은 사람 2002-01-06 18:24:26 read : 22596
2001. 1. 7. 이사야 40 : 29-31
I. 본문의 배경 : 소년도 장정도 넘어질 수 있다
옛날에 고양이 한 마리가 새끼를 낳아 이름을 짓게 되었습니다. 잘도 생겼고 용감하게도 생겼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센 고양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힘이 셀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호랑이가 힘이 세겠지. 그래서 “호랑이 고양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보니 호랑이가 포수에게 쫓겨서 도망을 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다. 포수가 힘이 더 센가 보다. 그래서 “포수 고양이”라고 바꿨습니다. 그런데 또 보니 포수가 밥을 먹지 못하니까 힘을 잃어버리고 비실비실 한단 말이예요. 아 곡식이 더 힘이 센가 보다. 그래서 “곡식 고양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알아보니 곡식은 하늘에서 비가 내려오지 않으면 자라지도 못하고 열매도 맺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비 고양이”라 이름했고 비는 구름없으면 내리지도 못해서 “구름 고양이”라 지었다가 구름을 보니 바람에게 이리저리 쫓겨다닌단 말이예요. 그래서 어느날 “바람 고양이”로 바꾸었습니다. 바람이 부는데 보니까 다른데는 다 통과하는데 벽이 가로막혀 있으니까 도망가고 물러가거든요. 그래서 “벽 고양이”라고 바꿨습니다. 한참 지난 시간에 어느날 보았더니 벽이 다 허물어져 있고 이곳 저곳에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들쥐란 놈들이 벽에다 구멍을 내고 허물어지게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쥐 고양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쥐는 보니까 고양이한테 꼼짝을 못하거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고양이 새끼 이름을 “고양이 고양이”라 이름을 지었더랍니다.
우리 모두는 힘을 원합니다. 특별히 어려운 시대일수록 힘이 필요합니다. 돈이 힘이 될까? 지식이 힘이 될까? 또 권력이 힘이 될까? 그래서 권력 있는 사람들 곁에 사람들이 모여들곤 합니다.
이사야 1장부터 39장에는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멸망이 예언되기도 합니다. 본문 40장에 와서 급기야 희망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피곤에 지친 백성들,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 자포자기에 빠진 백성들 가운데 희망의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곧 이 말씀은 세상은 바뀌었는데 오히려 살기가 더 어려워질 때마다 우리 가운데 희망이 별로 보이지 않을 때에 들어야 할 메시지입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라.”
“소년”이란 피곤을 모르고 원기 왕성한 시절을 말합니다. 청년들은 여행을 하더래도 무박 3일입니다. 3일동안 잠을 자지 않고 여행을 해도 거뜬합니다. 당시 신흥국가 앗수르를 일컫고 있습니다. “장정”이란 경험과 인격이 완숙한 사람입니다. 이런 장정도 망할 수 있단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랜 역사와 힘을 가진 바벨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하고 있을 때에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해 있을 때에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래서 앗수르를 의지해 보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오랜시간동안 세계를 정복하고 있던 바벨론에 기대야 살아 남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때 선지자는 분연히 일어나 외칩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몽둥이를 드시면 바벨론도 앗수르도 망한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 영원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살아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오늘 한국교회도 힘을 많이 잃어 버렸습니다. 지난 세기 우리 민족이 일제치하에 고통받고 전쟁으로 피 흘리고 가난에 시달리고 있을 때에 교회는 그들의 희망이었습니다. 잠자던 민족정신을 일깨웠고 절망하던 백성들에게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이 일로 한국교회는 많은 부흥을 체험하고 대형교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교회성장은 중단되었습니다. 대형교회들이 오히려 빛을 잃어 버렸고 사회에 지탄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크면 안된다. 작아져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장정같은 대교회도 힘을 잃었지만 개척교회나 작은교회 - 소년교회도 별로 힘이 없어 보입니다.
지난 세기에 아름답게 쓰임 받던 그 교회들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아름답게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 마크를 붙이고 있습니다.
II. 새롭게 출발해야 할 때입니다
세상도 어려워졌고 교회들도 힘이 없고 그래서 포기하고 주저앉아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다시 힘을 내야 합니다.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 모든사람들이 망하게 생겼다고 울부짖고 있을 때에 벌떡 일어나 “그래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다. 앞으로 전진해 가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자리가 있다. 백성들아 꿈을 꾸라. 함께 달려가자”고 외치는 사람들이 적극적인 사람들이요. 창조적인 사람들이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언제나 전진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코도 옆으로 나온 것도 아니고, 뒤로 쑥 들어간 것도 아니고, 앞으로 튀어나와 있습니다. 귀도 앞에 소리를 듣도록 앞을 향하여 열려져 있습니다. 말은 언제나 앞을 향하여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눈은 앞이나 위를 바라보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기가 밝았는데 무대 위에 올라서서 자기 배역을 알지 못하고 허둥대는 배우처럼 후퇴하는 사람 없습니까? 머뭇거리고 주저앉아 있는 사람 없습니까? 전진하지 못하고 과거나 두리번 거리고 있는 사람 있습니까? 실패의 시궁창에 주저앉아 넋두리를 늘어놓고 있는 사람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전진해라! 새로운 시작을 해라!”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자들의 속담은 다릅니다. “시작은 곧 성공”이다. 첫 단추를 바로 끼워야 반듯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첫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삶을 주님 앞에 전폭적으로 의탁하고 새롭게 힘을 내고 용기를 내고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이 한해동안 여러분과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여기에 큰 건초더미가 하나 있습니다. 저쪽에도 큼지막한 건초더미가 또 하나 있었습니다. 노새 한 마리가 가운데 서 있었는데 두리번 거리다가 이 노새가 굶어 죽었습니다. 왜 건초더미 사이에서 굶어 죽었을까? 사인을 조사해 보았더니 이쪽 풀을 먹어야 될까? 저쪽 풀을 먹어야 될까? 망설이다가 굶어죽었더랍니다.
인생에 가장 큰 실패는 시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도전 없이 성공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큰 도전을 했다가 실패하는 사람이 훨씬 더 위대한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은 다음에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거기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리고 성을 중심으로 하여 많은 원주민들이 저들을 대적하기 위하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요단강은 마침 홍수 때를 만나서 요단강을 건널 길이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광야로 돌아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당황하고 쩔쩔매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종아 앞으로 전진해 가라” 넘실대는 요단 강을 두려워하지 말라. 저 여리고 성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가나안 땅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앞으로 전진해 가라. 믿음을 가지고 여호수아가 넘실대는 요단강에 첫발을 들여놓자 요단 강은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여리고 성을 돌자 여리고 성이 무너져가기 시작했습니다.
1년 10년동안 광야 같은 인생을 달려왔는데 여전히 시련의 강물이 넘실대고 있습니까? 바로 그 심정이 여호수아의 심정이었고 오늘 여러분의 마음일 것입니다. 믿음의 발을 내딛어 보십시오 전진하십시오. 새로이 시작하십시오.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지십시오. 믿음을 가지고 문제를 돌아보십시오. 주께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 주실 것입니다. 넘실대는 요단 강 물을 갈라 주실 것입니다. 전진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실패입니다. 초고성능 기관차라도 정지하고 있을 때에는 차 바퀴 앞에 주먹만한 돌멩이 하나만 놓아도 꼼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100km 200km 달리는 전차 앞에는 콘크리트 벽도 뚫을 수 있는 힘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힘을 내십시오. 가속을 붙여 가십시오. 전진해 가십시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될 지어다.” 믿음을 가지고 전진해 갈 때에 큰 산 같은 문제도 여리고 성 같은 문제도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가능해 지게 될 것입니다. 내 재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때에 미래를 펼쳐가게 될 것입니다.
III. 피곤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
1. 낙심과 피곤은 나 혼자 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많이 피곤에 지쳐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단어를 빌려서 현대인들을 표현하라고 한다면 “피곤한 사람들”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아이가 가방을 내팽개치며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엄마, 나 피곤해! 그게 요즘 아이들의 말입니다. 주부도 피곤하다고 합니다. 가장들도 피곤하다고 합니다. 젊은이들도 피곤하다고 합니다.
① 피곤이라는 말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요 심리학적인 것입니다. 문제는 피곤이라는 말은 육체적인 단어가 아니고 정신적인 단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리적인 단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좀 몸이 피곤해 있어서 얼굴이 헬쓱해 있으면 교인들이 나를 위로한답시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목사님 얼굴이 피곤해 보입니다.” 그러면 갑자기 피곤이 열배나 더 몰려옵니다. 아 피곤해야 되는가 보다 피곤해 보자. 그래서 피곤해 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내가 몸이 좀 피곤한데 우리 교인들이 제게 찾아와서 “목사님을 볼 때 마다 힘이 용솟음칩니다. 목사님은 뵐 때마다 얼굴에 생기가 넘칩니다.” 그러면 갑자기 생기가 있나 보다. 그래서 힘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심리적인 단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90%는 스트레스가 정신에서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 내적인 가능성을 잘 개발하면 우리 인생의 90%의 문제는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구나 신앙의 힘, 말씀의 능력, 성령의 권능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다.
영국의 경제학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은 “이해관계로 모인 99명보다 한 사람의 신앙의 힘이 더 강하다”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힘은 인간의 내적인 힘이나 가능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나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력 있는 분이시다. 내게는 힘이 없지만 나는 피곤하지만 나는 연약하지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예수님이 친히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너희들은 내가 했던 것 보다도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는 신구약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만큼은 나와 상관이 없는 말씀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내 꼬라지를 알지요.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모자란 사람인 줄을 아는데 내가 주님이 하셨던 일을 할 수 있으며, 주님보다 더 큰 일을 한다니 이게 말이나 되냐는 것입니다.
아마 국어 선생님이 여기 계신다면 “네 주제를 알아라” 그럴 겝니다. 그리고 수학 선생님이 계시면 “네 분수를 알아라” 그럴 겝니다. 지리 선생님이 계셨으면 “네 위치를 알아라” 그랬을 겝니다. 미술 선생님이 계셨으면 “네 꼬라지를 알아라” 그랬을 겝니다. 내가 내 꼬라지를 잘 알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나의 가능한 말씀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말씀의 앞 뒤 배경을 읽어보면, 내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너를 위하여 친히 기도하게 될 것이다. 너와 함께 하고 너를 도와주고 너를 지켜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 주셔서 나는 내가 약하다는 것 때문에 너를 버리지 않는다. 싫어하지 않는다. 성령이 너와 함께 하고 내가 너와 함께 하면 기도하게 될 때에 너는 믿음을 통하여 내가 했던 일을 너도 할 것이며 나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② 꿈이 없을 때 피곤에 지치게 됩니다. 꿈을 가진 사람에겐 열정이 생깁니다. 힘이 생깁니다. 꿈을 버린 사람은 밤낮 지쳐서 기동할 수가 없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모험을 모릅니다. 섬길 줄을 모릅니다. 삶이 단조롭습니다. 안일한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꿈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토록 놀라운 믿음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희망을 이런 믿음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왜 우리는 피곤에 지쳐있습니까? 하나님과 더불어서 꿈을 꾸지 않을 때에 이런 힘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을 꾸게되면 열정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들이 번쩍 번쩍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전진하려고 하는 새로운 용기들이 용솟움치게 되는 것입니다.
왜 현대인들이 피곤에 지쳐있습니까?
③ 죄책감의 문제 죄의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셨다. 누구든지 주님께 돌아와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어제의 죄, 오늘의 죄, 내일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 나도 하나님과 함께 미래를 열어가게 될 것이다. 이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피곤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정복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 현대인들이 피곤에 지쳐있습니까?
④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정적인 언어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인생은 앞에 백지장이 널려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각과 언어를 가지고 그림을 그려가는 것입니다. I can do.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과 할 수 있다는 말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가게 될 때에 긍정적인 그림을 그려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없다. 부정적인 말을 하게 되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면 우리 인생은 부정적으로 펼쳐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늘 우리 교우들에게 교훈합니다. 부정적인 사람하고는 교제를 하지 말아라. 부정적인 얘기 하나만 가지고도 네 귀가 회개를 해야 될 것이다. 네 속에 부정적인 생각이 있으니까 부정적인 말을 듣게 된 거야. 그렇게 남을 비판하는 얘기, 비난하는 얘기, 부정적인 얘기 들은 것 하나만 가지고도 회개 하거라. 우리가 부정적인 말을 들은 것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많은 에너지를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부정적인 사람이 옆에 있게 되면 못된 파장이 나와서 내 에너지를 다 빼앗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피곤한 사람과 함께 하시고 피곤한 사람을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시겠다고 본문 29절을 통하여 약속하고 있습니다.
한때, 우리나라에 와서 건강 강연을 하고 다니셨던 이상구 박사의 글에 보면 “내가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하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가 만난 하나님은 쓰레기통과 같은 하나님이다. 인생 살아가다 보면 내가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무거운 쓰레기 같은 짐들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씻을 겨를도 없이 쌓아 왔던 아픈마음의 번민과 고통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용서하고 깨끗하게 시원하게 살아가고 싶은데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원수된 사람들이 내 마음을 괴롭힙니다. 난도질을 합니다. 근심과 걱정이 내 안에 쌓여져 있습니다. 이 쓰레기 같은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옵니다. “하나님, 이 쓰레기 맡아 주십시오. 이 고통의 쓰레기 맡아 주십시오. 인생의 쓰레기를 맡아 주십시오. 번민과 근심과 걱정의 쓰레기를 맡아 주십시오.” 주님 앞에 쓰레기를 내려 놓으면 하나님은 한번도 그 쓰레기를 되돌려 주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맡아 주신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온갖 문제를 맡아주십시오. 여러분! 이 한해동안 문제가 있다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오면 해결함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문제를 사람에게 가지고 가려하지 마십시오. 사람에게 쓰레기를 던지면, 사람에게 위로 받으려고 노력하면 오히려 아픔만 다가올 것입니다.
제가 청소년시절 읍내에서 자취를 했지요. 그때는 연탄을 땠어요. 연탄을 때고 나면 갖다 버릴 곳이 마땅치 않아서 대문밖에 버려놓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식어지고 쌓여지게 되면 쓰레기 차가 지나가며 다 가져갑니다. 그런데 새벽에 학교에 갔다가 밤늦게 돌아오곤 하니까 쓰레기를 버릴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꾀를 냈지요. 쓰레기를 우리 집 대문 앞에 버리는 것이 아니고 남의 집 대문 앞에 살그머니 갖다 놓았습니다. 아 그랬더니 이게 신통만통이 이네요. 내가 안 갖다 버려도 되고. 그런데 어느날 쓰레기를 남의 대문 앞에 갖다 놓다가 아주머니한테 들켜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 쓰레기가 왜 자꾸 쌓이나 했더니 앞집 학생이 그랬구만!” 그러더니 자기 집에 있는 쓰레기까지 우리 집 마당에 던지는 바람에 한나절 내 청소하느라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렇습니다. 내 아픔을 가지고 좀 위로 받기 위해서 찾아가면 그 사람의 아픔까지 나한테 집어 던집니다. 내 인생의 짐이 무거워서 친구를 찾아가 보면 친구의 아픔, 무거운 짐까지 내가 받아와야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에게는 위로가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픔과 우리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면 하나님은 그때마다 우리의 문제를 맡아 해결하여 주십니다.
옳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은 겸손한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을 쓰십니다.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얻어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이 쓰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다 내게로 오라”는 말입니다. 이 한해동안 여러분에 인생의 짐이 무거울 때마다 주님께로 달려나오시기를 바랍니다.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아픔, 고통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로 달려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힐 때마다 성령에게로 달려나오시기를 바랍니다.
IV. 새 힘이란?(What)
주님 앞에 찾아왔을 때 주님께서 내게 주시는 새 힘이 무엇입니까? 세상에는 새 힘이 없습니다. 권력도 낡아지고 내려오는 날이 있습니다. 새 양복을 입었다고 하나 새 것이 아닙니다. 지을 때 이미 때가 묻었습니다. 돈도 새 것이 아닙니다. 젊었다고 하나 늙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라.”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십니다. 말씀은 적은 문제를 물리칠 수 있는 양날선 칼과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불과 같습니다. 인간의 온갖 쓰레기를 태워 소멸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찾아올 때마다 산을 옮기는 믿음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힘을 받은 자는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에는 매연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구름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독수리가 창공을 향하여 솟아오르게 되면 맑은 공기가 있는 곳까지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먼지가 없습니다. 구름이 없습니다. 독수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을 때는 크기가 비둘기하고 비슷합니다. 그러나 한번 날개를 펼쳐서 날아가게 되면 하늘에 있는 모든 짐승들이 두려워 떨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날개 쭉지에 날아가던 새들이 걸리게 되면 사정없이 찟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힘이 있는 새가 바로 독수리입니다. 하루 아침에 그렇게 힘 있는 새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조류 연구가들에 의하면 독수리는 아주 어릴 때에 어미 새가 새끼를 등에 걸머지고 언덕 위로 올라갑니다. 구만리 창공으로 솟아 올라간 다음에 새끼를 집어 던집니다. 아직까지 날개가 노랗게 채 자라지도 못했는데 그때부터 살아보겠다고 퍼득퍼득 날고 몸부림을 합니다. 그러다가 벼랑으로 떨어질둥 말둥할 때에 어미 독수리가 쏜살같이 내려가서 사뿐이 등에 걸머지고 창공으로 솟구쳐 올라 갑니다. 그리고 다시 벼랑을 향하여 집어 던집니다. 그러면 날개를 퍼득퍼득 노력을 해봅니다. 그러다가 다시 떨어지려고 하면 다시 나꿔채서 창공으로 올라갑니다. 이런 훈련을 백번 천번 만번 수만번 반복하는 동안 창공을 솟아 하늘을 나는 독수리가 된다고 합니다.
지난 한해동안 실패를 안고 살아오신 분이 계십니까?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이 시간에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신앙생활에 실패의 흔적으로 얼룩지신 분들이 계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실패를 통하여 우리를 훈련시켜 주십니다. 신앙생활이 지금까지 실패했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시대가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우리는 더 높이 올라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한 젊은이가 등산을 하기 위해 산 속에 들어갔습니다. 길을 잃고 한 나절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산을 향해 올라가다가 숲이 너무나 깊고, 또 산세가 험하고 복잡해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무래도 돌아가야 되겠다 싶어서 언덕 밑으로 내려왔습니다. 더 길이 복잡해 졌습니다. 도무지 길을 찾을 수가 없고 마을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한 현인이 나타나더니 “젊은이 길을 잃어버렸구만. 길을 잃어버릴 수록, 앞이 보이지 않을 수록 내려가면 점점 더 망한다네. 더 깊은 어려움에 빠진다네. 이보게. 이럴 때 일수록 언덕 위로 올라 가게나. 정상에 올라가면 언덕이 보이고, 저 마을이 보이고, 내려갈 길이 보인다네”
그렇습니다. 세상이 어려울 수록 우리는 올라가야 합니다. 내려가면 망합니다. 사업을 확장한 것 중요하지만, 오늘 우리는 믿음을 확장해야 할 때입니다. 권세가 올라가고 사회적인 지휘가 올라가는 것 중요한 일입니다만 오늘 우리는 믿음을 상신시켜야 할 때입니다. 올라가면 길이 보입니다. 올라가면 내가 가야할 길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길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V. 어떻게 새 힘을 받을 수 있습니까?(How)
어떻게 새 힘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새 힘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앙망”한다는 원문의 뜻은 새끼새가 어미새를 향하여 입을 좍 좍 벌리면서 먹이를 기다리는 그 모습을 앙망한다고 그랬습니다. 거지 어린아이 하나가 어디에서 빵 한조각을 얻어 먹기 위해서 깡통을 내밀고 주인의 자비를 구하는 자세를 앙망한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하나님 나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하나님 아버지 당신이 나를 도와 주셔야 돼요.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없어요.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주님 만을 신뢰합니다.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주님 앞에 맡깁니다. 주님은 파도를 일으키실 수도 있는 분이시며 파도를 잔잔케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산을 세우시는 분이시며 산을 평지로 만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생명을 이 땅에 보내신 분이시며 인간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사업을 일으켜 주시는 분이시며 사업을 주님께서는 거두어 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 역사의 흥망성쇄가 아버지 당신에게 있습니다. 당신만을 의지합니다. 하는 믿음의 자세를 우리는 앙망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습니다. 나 혼자 달려가도록 하나님이 내 버려 두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나 혼자 해결하도록 고독하게 나를 내 버려 두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성령님이 능력 주시니, 삼위일체 하나님 찬양
예수님이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님이 능력 주실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찬양. 할렐루야!
VI. 새 힘을 얻어서?(What Then)
새 힘을 가진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가? 그들의 특징을 본문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저는 참 재주가 메주예요. 집에서 못 하나를 박는데 꼴에 사내라고 ‘집에 있는 못은 내가 박아야지’ 그래서 박아보면 못이 똑바로 박힌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똑바로 박겠다고 힘을 줘서 땅! 치면 엄지손가락을 쳐서 엄지손가락에 피멍이 들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그때부터 나는 아예 포기를 합니다. 집안에 못 하나 박는 것도 우리 집사람이 다 박습니다. 정히 높은데 박는 것은 나는 엎드리고 우리 집사람이 내 등을 타고 올라가서 박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그랬어요. 팽이를 만드는데 다른 얘들이 팽이를 만들면 팽팽 잘 돌아가는데, 내가 팽이를 만들면 두번도 안 돌아 가서 그냥 쓰러집니다.
썰매를 만드는데도 다른 아이들이 만들면 썰매가 쌩쌩 가는데, 내가 만들면 썰매가 아무리 저어도 앞으로 가지 않아요. 비틀비틀 가다 쓰러지고 넘어져요. 재주가 매주입니다.
또 연을 만들면 가관입니다. 다른 친구들이 연을 만들면 높이 솟아 올라요. 얼마나 멋있는지. 가오리 연, 꼬리 연을 만들어 놓으면 그게 꼬리를 흔들며 올라 가는게 얼마나 멋있는지. ‘나도 한번 연을 만들어 봐야 되겠다’ 생각하고 연을 만듭니다. 그리고는 실을 매달아서 동생에게 “잡아 내가 뛸 테니까. 하나 둘 셋 하면 놓는 거야.” 그리고 뛰기 시작합니다. 하나 둘 셋 높이 올라갔나 싶어 보면 한 바퀴 두 바퀴 빙글빙글 그냥 곤두박질 칩니다. 그러면 동생에게 가서 “야! 이 녀석아, 네가 똑바로 잡아야 되는데 잘못 잡아서 그렇다고” 꿀밤을 주고는 “다시 잡아” 그러면 동생은 울면서 “왜 그래” 그러고는 다시 잡습니다. 아무리 잡아도 안 올라갑니다. 나중에 안 이치이기는 합니다만 이 연이라고 하는 것은 균형이 잘 맞아야 올라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쪽이 조금만 비틀어지게 되면 그것이 그냥 땅을 향하여 곤두박칠 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창공을 향하여 솟아 오를 수 있습니까? 새해에는 균형잡힌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와도 신앙생활이 반듯한 사람, 가정에 가도 가정생활이 행복한 사람, 말씀 앞에 반듯할 뿐만 아니고 기도생활에 열정적일 뿐만 아니고 사회생활도 인정받는 사람. 저 사람은 하나님이 도와주는 사람이야. 저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야. 예수 믿는 사람이야. 과연 다른 사람이야. 교회에서도 인정받고 세상에서도 인정받는 주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의 날개에도 균형이 잡혀서 예배 시간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의 승리자들, 받은 은혜를 가지고 소그룹에서 사역현장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나누며 살아가는 양 날개로 비상하는 성도들이 될 때에 주께서 여러분을 창공을 솟아 오르는 믿음으로 축복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날개가 훠이 훠이 저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날개를 힘차게 저어갈 뿐만 아니고 사업의 날개와 건강의 날개와 이 세상의 범사가 잘 되는, 날개를 훠이 훠이 저어 갈 때에 주님 앞에 영광돌리며 창공을 솟아 오르는 복된 성도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주께서 이 한해동안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복을 주시고 여러분과 함께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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