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느냐?…아시나이다 2001-12-25 17:12:30 read : 17122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한복음 21장 15-17절)
<목회기도>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멀고 가까운 곳에서 예배 드리려고 여기 모였습니다.
거룩한 주일, 복된 자리에 앉게 하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예배가 하나님이 두려워
의무감에서 드리는 예배일까봐 두렵습니다.
습관적으로 드리는 예배일까봐 염려스럽고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특별히 나쁘지도 않아서
취미생활로 교회에 나와 앉아 있을까봐 염려스럽습니다.
하나님, 지금 어떤 마음으로 왔든지
모든 이들이 신령과 진정의 마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신이 가득한 구석 구석에서
유아실, 5층 높은 곳까지, 강단 밑 기도실까지
은혜와 평강이 충만한 예배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이 회복되게 하시며 소망을 굳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육체적으로 병든 이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병든 이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병든 이들이 있습니다.
치료받는 신유의 역사도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군대에 가 있는 이, 외국에 나가 있는 이, 객지에 나가 있는 이
병상에 누워 있음으로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한 이들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우리가 받는 은혜를 저들도 함께 나누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쩔 수 없는 형편에서 기둥교회의 예배에
인터넷으로 접속한 이들도 예배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게 하시고
우리와 함께 예배의 자리에 앉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족한 종을 붙드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여 주셔서
악한 마귀 틈타지 않도록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병상에 누운 사람들도 많고 가뭄으로 기막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평안하다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어렵다면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건강한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몸이 약하고 건강하지 못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고쳐 쓰시지만 건강을 완전히 잃고 누워 버리면 하나님이 쓰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 건강을 위해 기도하고 조심하며 감사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저는 지난 5월 28일부터 6월 9일까지 2주간 동안 제 몸 상태가 별로 좋지않음에도 불구하고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가기 전에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기도 많이 했고, 책도 많이 보고 갔습니다. 그래서인지 은혜를 많이 받았고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제가 몸이 약해서인지, 사람이 모자라서 인지 저는 아직 눈물이 많습니다. 이번에 성지에 가서도 많이 울었습니다. 앞으로 몇 번에 걸쳐서 성지 순례를 하며, 눈물을 흘리며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이미 몇 차례 제가 설교 했고, 제가 지은 [예수님의 질문]이라는 책에도 발표한 내용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삶의 자리로 돌아간 제자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예수님의 부름에 따랐던 제자들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가족도, 삶의 현장도,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까지도 모두 변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들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제자들은 그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 다녔습니다. 물론 예수님 주변에는 제자들 말고도 다른 추종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힘들었지만 예수님께 특별히 부름 받았다는 자긍심으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보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어떤 제자는 '혹, 예수님이 한 자리 하시면 큰 덕을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심지어 우편과 좌편의 큰 자리를 노리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막10:35~37). 그런데 그 모든 꿈을 이루어 주셔야 할 예수께서 잡히시고 감옥에 갇히고 재판을 받고 처형을 당하실 때… 그들의 소망은 산산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가 이루겠다던 하나님의 나라도 그의 죽음으로 끝난 것 같았고, 제자들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 떨고 있었습니다. 처형 당한 중죄인, 사형수와 한 패거리였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죽었던 예수, 돌무덤에 갇혔던 그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공포에 떨던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유령으로, 귀신으로 여기기도 했고, 진짜 살아나셨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던 도마는 못 자국에 손을 넣어 보고 나서야 믿게 되었습니다(요20:24-29). 제자들은 너무나도 기뻐했습니다. 그렇게 따라 다녔고 기대했던 예수님이 죽어서 실망했는데 다시 부활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는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한번 주님과 무엇을 해야겠다든지 주님의 부활을 알리는 자가 되기 보다는 모든 것을 접어 두고 옛 생활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다시 사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요20:30). 그러나 불안과 공포의 사건이 있었던 예루살렘을 등지고 갈릴리 호수로, 그들이 살던 곳이 있는 그 지역으로 쉽게 돌아갔습니다.
사실 제자들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꿈은 깨지고, 예수를 쫓아다녀 봤자 십자가에 달려 죽기나 하고… 부활해서 좋아했더니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일하시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예수님을 따라 다녀봐야 이득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고향으로 간 제자들의 행동이 특별히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급한 베드로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3절에 보면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부로서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요21:3)고 말했습니다.
오랜 만에 그들은 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개역성경)라는 목소리였습니다. 이 말씀은 헬라어 원문성경이나 영문성경에 보면 다음과 같은 표현입니다.
"이보슈 친구들, 고기 좀 잡았수?"
(Friends, haven't you any fish? - NIV)
(Young men, you haven't caught anything, have you? - The Simple English Bible)
"못 잡았습니다. 헛탕이요".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려 보시오. 고기를 잡을 것입니다."
(You will find some.)
제자들은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렸고 그물을 들어 올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자들 중 한명이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주시라"(요21:7), 주님이신 것 같다. 주님이시다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급한 베드로는 "주시라"는 말에 배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베드로는 누가복음 5장에 기록한 대로 몇 년 전에 비슷한 경험을 했었습니다(눅5:1-14). 그물을 내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고기를 잡지 못했을 때 어떤 한 사람이 나타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했던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을 때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때 그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이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리라"는 말을 듣고 그물을 내리고 나서 고기를 많이 잡고 보니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들 앞에 나타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
제자들이 다 뛰어 내려가 예수님을 만났고 잡은 고기를 구워 먹으며 예수님과 아침 식사를 마쳤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의 대변인격인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견고하고 단단한 반석을 나타내는 베드로, 그 베드로를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신앙고백을 했던 베드로(마16:13-18), 예수님의 수제자 역할을 하고 기둥같이 쓰임 받는 일꾼이었던 그 베드로를 부르지 않으시고 자신의 삶의 자리로 돌아간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삶의 자리로 돌아간 사람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2000여년 전에 갈릴리 호숫가에서 있었던 한 사건, 예수님이 베드로 앞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던 그 사건만을 듣고 기억한다면 여러분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던 것처럼 여러분 각자 각자의 얼굴을 향해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 주시는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덕지 덕지 붙은 이름이 아닙니다. 명예스런 '사'자나 '장'자가 붙은 이름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집사, 권사, 장로, 목사와 같은 타이틀이 아닙니다. 저를 예로 들자면 <고씨네 집 장남 "신일아">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김씨네 집 둘째 딸 "영희야", 박씨네 집 맏아들 "철수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화장으로 얼굴을 가리고, 화려한 옷으로 가리고, 신분으로 가려진 모습이 아닌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의 친구와 가족들이 부르는 그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교회에서는 여러분에게 '집사, 권사, 장로'라는 편의상 직분을 주어 이름을 부르지만 교회는 그런 직분으로 앉는 자리가 아닙니다. 집사라는 이름으로, 권사라는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는 여러분의 각자 각자 누구나 똑같은 모습으로 말씀에 '아멘' 하기 위해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오매
주님이 물으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친구들, 너하고 같은 생각을 하고 함께 땀흘리고 정들었던 사람들보다 "네가 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만났던 친구들, 혈연관계로 만나는 사람들, 여러분의 이익과 안전함을 위해 만났던 그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우리들은 사심있는 사랑, 이해관계에 있는 사랑에 너무 관심이 많습니다. 오늘도 거룩한 주일임에도 불구하고 친구 때문에, 친척의 결혼으로, 친목회 때문에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러나 우리는 사심있는 사랑, 이해 관계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외면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본문 요한복음 21장 15절~17절에 보면 예수님이 세 번 연속으로 질문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째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근심했습니다. 슬픔에 잠겨 버렸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답하기를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내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감히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고, 주님을 외면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등지고 고기를 잡으러 간 사람입니다. 그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 어떻게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모든 것을 다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한때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큰 소리치던 사람입니다(마26:33). 베드로는 "주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라고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또 다시 예수님 앞에서 큰 소리 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의 그 고백은 양심적인 고백이요, 회개하는 마음과 순수한 마음이 담겨 있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렇게 나약한 고백을 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다시 부탁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처음 베드로를 만나셨을 때(마4:19, 막1:17),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명하셨던 그 주님이 그를 찾아가셔서 다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고, 정말 안타깝고 두려운 마음으로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랑에는 의무가 수반됩니다. 사랑한다면 지킬 것이 있고 할 일이 있습니다. 이제 말보다는 행동으로 그 사랑과 마음을 표현해 주어야 한다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명하십니다.
행함이 없는 사랑, 실천이 없는 사랑, 희생과 손해 봄이 없는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물론 사람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십니까?
말로만 하는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저는 성지순례를 가기 전에, 함께 가는 다른 목사님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야드 바셈(Yad Vashem)에 갑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잘 모른다고 하기에 여행업무를 취급하는 여행사 직원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야드 바셈에 갑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간다는 것을 확인하고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오래 전에 한 권의 책을 읽고 감명 받았던 내용의 조각을 보려는 마음을 품고 야드 바셈에 갔습니다.
야드 바셈(Yad Vashem)은 독일군에게 학살된 유대인 600만명을 기념하는 '학살 기념 박물관'입니다. 그 600만명의 유대인 희생자들 가운데 150만명이 어린이들입니다. 야드 바셈에 가보면 150만명의 어린이를 기념하는 방이 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캄캄합니다. 그 안에는 150만명의 어린이를 기념하는 150만개의 작은 불빛들만 비칩니다. 그리고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150만명의 어린이의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부릅니다. 캄캄한 그 방을 지나서 바깥으로 나가면 작은 뜰이 있는데 그곳을 [야누스 코르자크]정원이라고 합니다. 그곳 한편에는 한 어른이 겁에 질린 아이들을 팔로 감싸 끌어 안고 있는 조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폴란드의 작은 마을 학교에 독일 군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유대인 학생들을 잡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이들은 무서워 선생님에게 매달렸습니다. 야누스 코르자크 선생님은 유대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아이들의 손을 잡고 트럭에 같이 올랐습니다. 그 차가 어디로 간다는 것을 선생님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코르자크 선생님은 아이들을 끌어 안고 "얘들아, 걱정하지 말아라. 더 좋은 세상에 가게 될 것이다. 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아이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코르자크 선생님은 트레블렌카 강제수용소 가스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희생되었습니다. 그 선생님을 기념하기 위해서 뜰에 조각을 해 놓은 것이 위의 사진입니다.
여러분, 코르자크 선생의 사랑이 참 사랑의 실천이 아닙니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창조주 하나님, 그분을 믿고 영원히 살며 천국에 갈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가정의 식구들을 정말 사랑하십니까? 얼만큼,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십니까?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끼리 서로 사랑하십니까?
코르자크 선생 처럼 가스실에서 함께 죽어갈 만큼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순간 순간 주님이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갈릴리 호숫가에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기도>
좋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거룩한 주일 교회에 찾아 나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때로 베드로처럼 주님을 외면했음을 고백합니다.
때로 주님을 등졌으며, 때로 주님을 섭섭하게 해 드렸습니다.
삶의 현장에 있는 우리들의 이름을 부르시며
"네가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그 음성을 들으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2001년 6월 17일 주일 낮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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