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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방향을 잘 잡자 2001-12-13 21:06:50 read : 19066
2001년 10월 21일
빌 1:3-6
생각의 힘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다
세상은 내가 느끼는 것만이 보이고, 또 보이는 것만이 존재하며, 세상은 내 마음 끌리는 대로 있다고 합니다. 이시형 박사가 쓴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어 소개합니다. "신발 사러 가는 날 길에 보이는 건 모두 신발뿐이다. 길가는 모든 사람들의 신발만 눈에 들어오고 사람 전체는 안중에도 없다. 미장원을 다녀오면 모든 사람의 머리에만 시선이 집중된다. 그 외엔 아무 것도 안 보인다. 그런가하면 그 반대 경우도 있다. 근처 도장 방이 어디냐고 물어오면 나는 갑자기 멍해진다. 어디서 본 듯도 한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바로 회사 앞에 있는 그 도장 방을 아침저녁 지나다니면서도 도대체 기억 속에는 남아있질 않는 것이다. 마치 그 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다.
사실이 그렇다. 세상은 내 마음 끌리는 대로 있기 때문이다. 조화도 그게 가짜인줄 알 때까진 진짜 꽃이다. 빌려온 가짜 진주 목걸이를 잃어버리고는 그걸 진짜로 갚으려고 평생을 고생한 모파상의 어느 여인의 이야기도 이에서 비롯된다. 세상은 내가 보는 대로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있다고 또 다 보이는 것도 아니다. 있는 게 다 보인다면 대뇌중추는 너무 많은 자극의 홍수에 빠져 착란에 빠지게 될 꺼다. 그러기에 대뇌는 많은 자극 중에 몇 가지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선택의 기준은 그때 그때의 대뇌의 조절장치에 따라 달라진다.
신나게 기분 좋은 아침엔 날마다 다니는 출근길도 더 넓고 명랑해 보인다. 그래서 휘파람이라도 절로 나오는 음 조절기능이 될 땐 슬픈 것들은 아예 눈에도 귀에도 들어오질 않는다. 그러기에 내가 웃으면 세상이 웃는다고 하지 않던가... 세상은 우리가 보는 것만 보인다. 해변에 사는 사람에겐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저녁, 문득 바라다본 수평선에 저녁달이 뜨는 순간, 아 ∼ 그때서야 아름다운 바다의 신비에 취하게 될 것이다.
세상은 내가 느끼는 것만이 보이고, 또 보이는 것만이 존재한다. 우린 너무나 많은 것들을 그냥 지나치고 있다. 느끼질 못하고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늘이, 별이, 저녁놀이, 날이면 날마다 저리도 찬란히 열려 있는데도 우리는 그냥 지나쳐 버린다. 대신 우린 너무 슬픈 것들만 보고 살고 있다. 너무 언짢은 것들만 보고 살고 있다. 그리고 속이 상하다 못해 좌절하고 자포자기까지 한다. 희망도 없는 그저 캄캄한 날들만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세상이 원래 어려운 것은 아니다. 어렵게 보기 때문에 어렵다. 그렇다고 물론 쉬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반 컵의 물은 반이 빈 듯 보이기도 하고 반이 찬 듯 보인다. 비었다고 울든지, 찼다고 웃든지, 그건 자신의 자유요 책임이다. 다만 세상은 내가 보는 것만이 존재하고 또 보는 대로 있다는 사실만은 명심해야겠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존재하는 세상이 그래서 좋다. 비바람 치는 캄캄한 날에도 저 시커먼 먹구름 장을 꿰뚫어볼 수 있는 여유의 눈이 있다면, 그 위엔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평화스런 나라가 보일 것이다. 세상은 보는 대로 있다. 어떻게 보느냐... 자신의 책임이다."
필자는 말하기를 세상은 보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삶을 사시겠습니까? 생각의 방향을 잘 잡으시기 바랍니다.
오 헨리의 작품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늦은 가을 초라한 3층 지붕 밑 방에서 존지라는 소녀가 폐렴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녀에게 있어서 폐렴보다 큰 문제는 의지를 잃어버린 감상주의였습니다. 존지는 자기 병상에서 보이는 건너편 집 담장에 있는 담쟁이 넝쿨을 바라보면서 그 넝쿨의 잎이 마지막으로 떨어지면 자신의 생명도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언니는 말합니다. "담쟁이 잎이 너의 생명과 무슨 상관이야." 그러나 존지는 대답합니다. "아냐. 언니. 저 잎이 떨어지면 나도 분명히 죽을 거야." 드디어 담쟁이 넝쿨의 마지막 한 잎새가 남았습니다. 존지는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마지막 잎새가 남았던 그 날 밤은 유난히 비바람이 심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존지는 떨어진 마지막 잎새의 흔적을 보려고 커튼을 젖혀달라 했는데 놀랍게도 그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지 않고 아침햇살에 더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다음날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마지막 잎새가 붙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그 마지막 잎새는 이미 떨어졌는데, 그 집 1층에 사는 걸작품을 하나도 그리지 못한 노(老) 화가 베어먼 할아버지가 그 담장에 그 마지막 잎새를 그려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그려진 담쟁이 넝쿨의 마지막 잎새 하나가 결국 존지를 병에서 일으킵니다. 생각의 힘은 우리는 생각을 초월합니다. 죽는다고 생각하면 살 확률이 줄어듭니다. 그러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죽을 확률이 극히 줄어듭니다. 잘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할 때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피땀 흘려 개척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로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우리는 이런 말을 많이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배우자에게 "여보!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정말 감사해요!" 부모님에게도 "부모님을 생각할 때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자녀들에게도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한단다"라고 말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더 감사가 나오게 되고, 얼마나 행복하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목회자인 저도 우리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자주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제가 이렇게 건강한 목회를 잘 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기도와 사랑 때문임을 압니다. 그런 식으로 서로 기쁨을 주고 서로 감사하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믿는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 있습니까?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는 모습에 있습니다.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대개 은혜를 알고 기억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상처와 원한은 금방 잊어버리되 은혜를 잊는 건망증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받은 상처는 평생 잊지 못하지만 받은 은혜는 금방 잊어버립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 나서 된 것이고, 잘못되면 남을 탓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성숙한 인격의 표시입니다.
밤하늘이 사실은 까만 것이 아니고 파랗다고 합니다. 우리 눈으로 느끼기에 까맣기 때문입니다.
파란 밤하늘
밤하늘도 사실 파랗다는 것을 알고 계신지요. 사람들은 밤하늘이 까맣다고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밤하늘을 사진 찍을 때에 카메라 셔터를 20초 동안 누르고 있으면 파란 하늘의 사진이 나온다고 합니다. 살다보면 까만 밤하늘처럼 앞이 캄캄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생각의 셔터를 20초만 누를 수 있다면 까맣게 보이던 마음의 하늘이 파랗게 찍힐 수도 있지 않을까요.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전에 어려웠던 일들도 돌아보면서 조금만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그렇게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밤하늘도 파랗습니다.
여러분! 정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은혜를 기억하며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감사할 일이 많은지 모릅니다. 정말 기가 막힐 정도입니다. 때로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찾아와도 자세히 보면 그것이 꼭 불행만은 아닙니다.
어떤 분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최고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일에 매달렸습니다. 그처럼 일에 매달리다보니까 자기도 없고, 가족도 없고, 이웃도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사람 관계가 없으면 스트레스와 짜증이 심해지고 얼굴도 어두워집니다. 그러다 어느 날 쓰러집니다. 이제 건강을 잃었으니 거의 다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 그가 찾은 것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중요성"입니다.
병상에 있을 때 사람들이 그를 정성스럽게 돌봐주는 모습을 보고 그는 깨닫습니다. "사랑 받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이제는 저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지." 그렇게 가치관을 일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꾼다면 그 병은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깊이 생각해보면 나의 삶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만 보지말고 신령한 세계를 생각할 줄 알아야합니다. 눈에 보이는 건강은 잃어도 더 소중한 사랑과 믿음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고, 때로 어떤 일에 실패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모처럼 겸손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러한 감사의 영성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하면 모든 상황이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러면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려고 훈련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런 생각이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축복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초석이 됩니다.
감사는 생각의 방향을 잘 잡는 것이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하면서 생각의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감사가 나옵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생각을 깊이 하면 감사할 일은 없고 원망할 일만 생겨납니다. 사람에게 원망이 많은 것은 원래 악해서라기보다는 방향을 잘못 잡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감사의 방향으로 조금만 바꾸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그처럼 생각할 때마다 감사거리를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이란 마치 그림과 같아서 밝은 부분도 있고, 어두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밝은 부분을 보기로 작정하여 감사하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고, 어두운 부분을 보기로 작정하여 불평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는 자신의 선택이요, 그처럼 감사를 선택하면 삶이 행복해집니다.
그런데 왜 삶이 피곤하고 느껴집니까? 서로 시기하고 원망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교회에 다니는 두 사람이 너무 미워해서 서로의 축복을 갉아먹는 것을 보고 천사가 안타깝게 그들을 보다가 서로를 축복하며 살도록 그들에게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너희 중에 누가 기도하면 그 옆의 사람에게 두 배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옆 사람 때문에 두 배를 받게 되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한 사람이 100억을 달라고 하려는데 옆 사람이 200억 받는 것이 배가 아파서 금방 기도제목을 바꿔 기도했습니다. "천사님! 저에게 100원만 주세요!" 그러자 옆 사람은 겨우 200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200원 들고 너무 화가 나 "정말 아주 나쁜 친구야! 어떻게 저럴 수 있나?"고 하면서 그가 천사에게 기도했습니다. "천사님! 제 한쪽 눈을 뽑아주세요."
우리가 옆 사람을 감사와 기쁨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시기의 대상으로만 본다면 그런 마음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과 행복이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마음이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이기에 우리는 감사를 작정해야 합니다. 오해하기로 작정하면 오해할 일뿐이지만 이해하기로 작정하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구원의 기준은 십자가의 복음에, 철이 드는 기준은 감사하는 태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해(5해)가 있어도 생각을 세 번 고쳐먹으면(3을 빼면) 이해(2해)할 수 있고, 이해(2해)를 두 번만 할 수 있으면 감사(감4)할 수 있고, 사랑(4랑)할 수 있다." 이처럼 생각을 조금만 고쳐먹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감사거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생각을 건설적이고 창조적으로 바꿔보십시오. 그러면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어느 상황이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좋은 면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 감사하기 시작하면 그 생각이 상황을 바꾸는 위대한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구하십시오. 바로 그런 분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고, 축복을 받을만한 성도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보기에 누가 가장 훌륭한 성도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도하는 사람, 헌신하는 사람도 훌륭한 성도이지만 무엇보다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고통을 축복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태도가 바로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넘치도록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며 얻은 축복은 오래가지만 불평하며 얻은 것은 금방 사라집니다. 아무도 인생을 자신할 수 없습니다. 그저 겸손히 만족하며 감사하며 사는 삶이 행복입니다. 행복은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의 것이 아니라 많이 감사하며 누리며 사는 사람의 것입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불평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계절을 누리며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믿는 사람에게 모든 세계와 상황은 하나님의 은혜가 곳곳에 미쳐있는 것으로 보여야 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통해서 공동체에 평화가 주어지고, 자기에게도 행복과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감사는 축복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인생 성숙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에게 철 들어야 한다고 자주 말하는데 철드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기준은 십자가의 복음이지만, 철이 드는 기준은 감사하는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며 믿는 사람답게 살려고 해야 합니다.
감사는 헌신을 아는 겸손한 사람의 몫이다
감사를 아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헌신과 겸손입니다. 사도 바울이 생각할 때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있었던 것은 빌립보 교인들의 사도 바울의 선교사역에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 후원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들은 최선을 다해 바울의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려면 어려울 때 찾아와서 도와주는 것은 필수적인 자세입니다. 사실상 어려울 때는 불평이 생기기 쉽고 서로에 대해 손가락질을 하기 쉬운 때입니다. 그때 서로 격려하며 도와주며 서로를 위해 헌신할 때 진정한 감사가 꽃피게 됩니다. 교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인들이 서로에게 헌신하며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분위기가 정말 좋아지고, 교회의 분위기가 좋아지면 교인은 행복해집니다.
누가 가장 아름다운 작품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까? 바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 보기에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여도 헌신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걸작 인생입니다.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베어먼 할아버지는 평생 걸작품 하나 남기지 못한 화가였지만 그는 존지를 살리려고 추운 밤에 담쟁이 넝쿨의 마지막 잎새를 힘써 그리다가 폐렴을 앓게 되고 결국 존지가 회복된 그 날, 베어먼 할아버지는 대신 죽게 됩니다. 그러나 베어먼 할아버지의 <마지막 잎새>야말로 어느 작품보다 훌륭한 작품이었고, 그 할아버지의 인생 자체가 작품 인생입니다. 고귀한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신비
어떤 분은 셋방살이를 하지만 기쁨으로 살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앞장서서 도와줍니다. 어떤 분은 "선교"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뜨거워지며 정성을 다해 선교에 동참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요, 그런 신비로운 헌신이 가장 큰 감사제목이 아니겠습니까? 가장 가난한 사람이 가장 남을 돕는 일에 앞장설 수 있다는 것!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가장 배우지 못한 사람이 가장 지혜로울 수 있다는 것도 신앙의 신비가 아니겠습니까? 가장 약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깊은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신앙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신앙을 소유한 분들을 잊지 않고 반드시 축복을 예비해주실 것입니다.
자신의 원래 신분을 생각하며 자기를 작게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하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를 크게 생각하는 사람은 원망을 하게 됩니다. 부부간에도 아내가 자기를 작게 여기면 남편이 크게 보이고 남편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남편도 자기를 작게 여기면 아내가 크게 보이고 아내에 대한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남편은 자기가 고집이 강한 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기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 같은 고집스런 남편을 보고도 "남 편" 들지 않고 항상 "내 편" 들어주니까 고맙다. 내가 만약 여자라면 나는 절대로 나 같은 사람과는 살지 못할 거야."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남편에 대해, 아내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높게 보는 사람은 생각할 때마다 감사한 일은 없고 불평뿐입니다. "내가 어쩌다 저런 사람은 만나서 이런 고생을 하나? 이것은 정말 역사적인 실수야." 그렇게 자기를 높게 생각하니까 결혼이 억울하고 항상 손해본 것 같습니다. 이런 자기에 대한 거품평가를 없애야 합니다. 실속도 없이 자기를 높이면 감사가 없어지고 그때부터 삶이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겸손하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감사할 일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감사가 없는 이유는 건방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높게 평가하지 말고 진실하게 평가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정당한 자기 평가가 없이 자기를 높이면 많은 사람을 괴롭히면서 살게 됩니다. 그러한 삶이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자녀교육 중에서 최고의 자녀교육이 무엇일까요? 겸손한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은 항상 권리보다 책임을 많이 생각하는 귀한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분은 당연한 권리를 얻어도 "나는 받을만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하고 봉급을 받을 때 당연히 받는 것이지만 "나는 받을만해!"라고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참 감사한다!"라고 생각하면서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삶의 모든 순간이 오직 감사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공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영성이 무엇입니까? 철든 믿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대의 영성은 감사에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물을 보십시오. 그러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보십시오. 그러면 예쁜 구석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 저 사람에게 저렇게 좋은 면이 있었다니!" 하고 감탄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불평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꽃밭과 가시밭
범사에 감사해보십시오. 감사는 축복을 예비하는 것이고, 원망은 망하는 길입니다. 불행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며 원망하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습니다. 착하고 선하게 살겠다고 다짐하고 감사하면서 살려고 할 때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감사하는 마음과 생각은 꽃밭과 같고, 불평하는 마음과 생각은 가시밭과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생각에 따라 감사의 샘이 될 수도 있고. 원망의 시궁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것
하나님은 사람에게 망각이라는 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잊어버릴 줄 알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종종.. 꼭 기억하고 있어야 될 일을 너무 쉽게 잊어버려 낭패를 당하는 일도 많지만, 여자가 끔찍했던 출산의 고통을 잊을 수 있기에 또 다시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법입니다. 헤어지면 죽을 것만 같았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아픔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희미해져가고, 비가 올 때나 가을날 낙엽이 질 때... 그 때 잠시 잠깐 생각날 뿐 아주 덤덤해지게 됩니다. 이것은 필시 생사고락이 많은 우리네 삶을 굽어보시고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가장 잊어버려야만 될 일을 가장 잘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망각이라는 선물을 시기 적절하게 유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감사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처럼 감사한 생각을 가지면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 축복이 반드시 주어질 것입니다. 항상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예비하며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기도는 요구를 넘는 감사
전형적인 가을입니다. 요즘의 하늘은 가을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단풍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빨간 감 알이 푸른 가을 하늘을 배경 삼아 지닌 맛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사람을 살리고 싶다고 합니다. 까치를 살리고, 까마귀와 청설모를 살리고 싶다고 합니다. "먹어 주십시오, 밥이 되겠습니다" 하는 태도로 매달린 감나무의 감 알들. 십자가에 매달려 밥으로 오셔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라야 나와 상관 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가을걷이가 끝나 흙 살을 드러낸 논밭들. 쓸쓸하기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짐과 옷을 벗고서 있음 그대로 드러내놓은 홀가분함을 느끼게 합니다. 가을은 기도하고픈 마음을 일으키는 계절입니다. 기도는 감사요 찬양입니다. 기도는 거듭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은총 중의 은총입니다. "보시니 참 좋았다" 하는 좋음의 세상을 거저 주신 하나님 사랑에 대한 노래가 기도요, 또 그런 세상이 있음을 지구 방문 동안에 듣고 보게 해주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감사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의 맛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기도의 참 맛, 그 비밀은 요구를 넘어 감사가 될 때 알 수 있습니다.
불만을 감사로 다스리면 내 삶의 새로운 감사가 될 것입니다. 다음의 글을 통해 새로운 삶을 채워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스리면
나에게는 만족이 있는가 하면 불만도 있습니다. 그 불만을 감사함으로 다스리면 내 삶의 새로운 감사가 될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미움도 있습니다. 그 미움을 겸손으로 다스리면 내 삶의 새로운 사랑이 될 것입니다.
나에게는 희망도 있지만 낙심도 있습니다. 그 낙심을 인내로 다스리면 내 삶의 새로운 소망이 될 것입니다.
나에게는 잘하는 일도 있지만 잘 못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 잘못하는 일을 지혜로 다스리면 내 삶의 여유의 일부분이 될 것입니다.
나에게는 부드러운 말씨도 있지만 거친 말씨도 있습니다. 그 거친 말을 온유함으로 다스리면 내 삶에 빛나는 말들이 넘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깊이 생각하면서 생각의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감사가 나옵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생각을 깊이 하면 감사할 일은 없고 원망할 일만 생겨납니다. 사람에게 원망이 많은 것은 원래 악해서라기보다는 방향을 잘못 잡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감사의 방향으로 조금만 바꾸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그처럼 생각할 때마다 감사거리를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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