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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설교와 죽은 설교 (Living Sermon and Dead Sermon)
2017-02-02 21:27:20   read : 41543

당신이 설교자라면 산 설교와 죽은 설교 중 어느것을 택할것인가?

김무영 | 24eden@gmail.com

그동안 교회를 열심히 나오던 사람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잠간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다. 아예 교회를 떠난 것이다. 어디에 문제점이 있는가?

예배에 참석한 사람이 가장 인상을 깊이 받는 것은 강단의 설교이다. 설교에는 산 설교(Living Sermon)와 죽은 설교(Dead Sermon)가 있다. 산 설교는 사람들을 모은다. 그러나 죽은 설교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만든다. 세월이 변해도 교회의 강단이 산 설교로 채워진다면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진 성과 같이 든든할 것이다. 당신이 설교자라면 산 설교와 죽은 설교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더 말할 것 없이 산 설교일 것이다.

산 설교 (Living Sermon)

설교를 듣는 사람 속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는 설교는 산 설교이다. 생명의 역사는 변화의 역사이다. 더러움에서 일어나 성결함을 향해 가는 변화이다. 속된 것을 버리고 거룩한 것을 향해 일어서는 변화이다.

깨달음을 일으키는 설교는 산 설교이다. 이전에는 모르던 것을 알게하는 설교이다. 듣는 사람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보게하며 자신이 다른 길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설교이다. 감사를 유발하는 설교가 산 설교이다. 나에게 내려진 그 크신 은혜에 감동하여 누가 강요해서가 아닌 자발적인 감사를 표하게 되는 설교는 산 설교이다.

산 설교는 생명에서 나온다.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설교자가 임의적으로 만든 설교가 아니라 생명에서 나온 설교를 하려면 설교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설교자 안에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일된 상태에서 산 설교는 생산된다. 사람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합일의 경지에 도달하는가?

바울(St Paul)의 경우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바울은 하나님을 열심이 섬기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그로 하여금 예수를 핍박하는 선봉장이 되게 만들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남으로 변하였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에서 하나님을 품은 사람이 된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이제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표현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가 되었다. 생명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바울과 합일 됨으로 그는 산 설교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설교학을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힉위를 받았어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합일을 이루지 못하였다면 그는 결코 산 설교를 할 수 없다. 백과사전 식으로 많은 지식을 그의 설교에 나열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요즘 같이 쉽게 자료를 구하기 쉬운 때가 또 있었을까? 신문 칼럼을 쓰는 의사(MD)에게 어떻게 그렇게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되었는가 물어본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솔직했다.

산 설교(Living Sermon)를 하기 원하는가?

무릎을 꿇어라. 무릎 꿇고 있는 시간을 늘여라. 주 성령님께 사로잡힐 때까지 기다리라. 이것은 산 설교를 하기 위한 기초작업(Foundation)이다.

성경을 읽어라. 성경 속에 파묻혀야 한다. 이 말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라는 말이 아니다. 성경은 연구할 대상의 책이 아니다. 성경연구가 일으키는 피해는 막심하다. 성경을 매일의 양식으로 끊이지 않고 읽어야 한다. 설교준비를 하기위해서 펴는 성경책이 아니라 성경을 읽는 것이 삶이 되어야 한다.

성경의 난해한 귀절에 잡히지 말라. 성경을 읽다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을 만나면 그것을 해석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지 말라.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안방 따스한 아랫목 구석의 큰 다라이 위에 시루를 얹어 놓고 콩나물을 키우던 것을 기억한다. 어머니는 매일 다라이에 담겨 있는 물을 퍼서 시루에 부으셨다.

물은 시루에 들어가자 마자 아래로 흘려 내렸다. 그런데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콩나물은 먹기에 좋을만큼 자란 것을 보았다. 어느 귀절에 잡히지 않고 매일 계속하여 성경을 읽을 때 물은 빠져도 자라났던 콩나물을 기억하라. 매일 읽는 성경이 시루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같아도 내 안에서 신앙은 자란다는 확신을 가져라.

말씀(Rhema)을 잡아라. 이렇게 매일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다 보면 성령께서 전광석화와 같이 내 안을 환히 비치게 하는 말씀(Rhema)이 있을 것이다. 그 말씀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원어 사전을 펴라. 성경 원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것은 연구를 위한 작없이 아니다. 확인을 위한 작업이다. 잘못된 이해와 해석으로 강단에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삶의 현장을 살펴라.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을 모르고서는 생명력 있는 산 설교가 효과를 발할 수 없다. 아무리 산 설교를 준비하여 강단에 섰다 할지라도 들을 귀가 없으면 그 설교는 무용지물이다.

산 설교를 준비함의 중요성 못지 않게 설교를 듣는 이들의 귀를 여는 것도 중요하다. 어린 젓먹이에게 헤겔의 철학을 이야기 한다면 무슨소용이 있겠는가? 들을 귀를 열기 위해서는 설교 들을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살펴야 한다. 그들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찾아가라. 그리고 말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들어라. 들어주는 것은 좋은 치유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삶과 설교의 접촉점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어떤이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설교를 듣는 어떤이의 감격의 연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작품의 한 줄거리가 될 수도 있다.

죽은 설교

설교를 들은 사람이 그 설교의 제목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 설교는 죽은 설교이다. 산 설교는 기억에 살아 남지만 죽은 설교는 쉽게 잊혀진다. 설교자가 산 설교를 하지 못하면 그는 죽은 설교를 할 수 밖에 없다. 죽은 설교는 시간을 좀먹는 벌래와 같다. 설교자가 죽은 설교를 피하는 방법이 있을까?

상자(Box)에 갇히지 말라. 자신은 물론 사람들을 만들어진 어떤 박스에 쳐 박아 넣으려 하지 말라. 소위 교회력(Church Calendar)이란 것에 의해 만들어진 성경 분문(Text)을 가감없이 받아 들고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가 생각보다 많다.

역사가 오랜 교단(Main Line Denomination)의 교회일수록 더하다. 교회력에 따라서 하는 설교는 약은 꾀를 부리는 목회자들이 선호한다. 주어진 본문(Text)이 있으니 말씀(Rhema)를 얻기 위한 노력을 안해도 된다는 편리함을 그들은 알고 있다. 더러는 그 본문(Text)이 어쩌다가 말씀(Rhema)이 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복권에 당첨되는 비율 정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설교(Sermon)는 강의(Lecture)가 아니다. 설교는 설교이지 강의가 아니란 사실을 잊지 말라. 강의는 같은 레벨의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대학 강의는 대학생들을 위한 것이고 중학교 강의는 중학생들을 위한 것이다.

일반 교회의 설교는 모든 레벨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 곳에서 행해진다는 것을 명심하라. 당신이 강의하듯 하는 설교를 고집한다면 어느 레벨의 사람에 맞추어 할 것인가? 모든 레벨의 사람에 맟주어 설교하기는 불가능하다. 신학교에서 신학생을 위해 한 교수들의 강의를 교회 현장에서 그대로 사용하지 말라. 교인들이 모두 도망간다. 그리고 예배당은 텅텅 비고 마침내 교회 문을 닫을 날이 올 것이다.

당신의 말로 시간을 때우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게 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에 있어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신의 이야기나 다른 이야기를 잠간 이용할 수 있겠지만 주객이 전도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성경 본문에 대한 당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말아야 한다. 설교시간은 당신의 의견발표(Opinion Presentation) 시간이 아니다. 기도하면서 준비한 말씀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그 주일은 설교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은혜로운 타인의 설교를 금기시 하지 말라. 기도하면서 말씀을 얻으려고 노력했는데도 잡히는 것이 없다면 은혜로운 타인의 설교를 효과적으로 활용해도 좋다. 설교자의 목표는 교인들로 하여금 말씀을 통해 복을 얻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이 은혜와 복을 얻을 수 있다면 어째서 주저하는가? 자신의 설교도 그렇게 이용되도록 허용하라. 설교자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지 자신의 영역확보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탤런트를 아끼지 말라. 찬양의 텔런트는 효과적인 설교를 위한 훌륭한 자산이다. 언변이 좋은 사람이 있다. 그것은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텔런트이다. 같은 말을 해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감동을 받게 하는 것은 은사중의 은사이다. 사람을 끌어 모이게 하는 피플스킬(People Skills: personal effectiveness, interaction effectiveness, and intercession skills. from Wikipedia Encyclopedia)은 대단한 축복이다. 설교를 함에 이것을 아끼지 말고 활용하라.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 지식과 경험이 풍부해도 자신을 과신하는 것은 죽은 설교를 만드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이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 사람은 자신을 차에 맡긴 사람이다. 자신이 차를 끌거나 밀고 가려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이 인도하시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의 양을 채워야 한다. 매사에 기도가 없이는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말라.

교회가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목회자는 물론 교인들도 바라는 소원이다. 어떤이가 말했다. “교회가 들어오는 문은 활짝 열어 놓고 나가는 문은 모두 닫아버리면 년말에 가면 교회가 많이 성장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은 나가는 문을 닫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나가는 문이 너무 넓게 열려 있어서 들어왔던 사람이 나갈 때는 넓게 열린 문으로 다른 사람을 데리고 나가는 경우도 있다. 죽은 설교는 나가는 문을 더 넓게 열어 놓는 마스터 키(Master Ke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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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의 위기는 어디서 오나

박충구 (newsnjoy@newsnjoy.or.kr)

말씀의 종교

내가 본 가톨릭교회 중 가장 아름다운 교회가 로마 바티칸 성베드로성당이라면 개신교의 가장 아름다운 교회는 독일 베를린에 있는 베를린교회(Berliner Dom)가 아닌가 싶다. 성베드로성당의 중심은 모든 시선을 사로잡는 영광의 제단이라 할 수 있으나, 베를린교회의 중심은 역시 금관처럼 꾸며 놓은 강단이다.

베드로성당으로 들어가는 좌우의 문 옆에는 베드로와 바울이 서 있다. 반면 베를린교회에는 교회를 받치고 있는 기둥 곁에 루터, 츠빙글리, 칼뱅, 멜란히톤이 서 있다. 이 교회는 특별히 루터와 츠빙글리를 강단 좌우에 배치해 놓았다.

구교가 교회의 모퉁잇돌이 된 베드로와 말씀의 증언자로서 사도가 된 바울을 신앙의 모범으로 보았다면 개신교는 개신교 신학의 기초를 놓은 인물들을 중시했다. 또한, 베를린교회 강단 위쪽에는 성서적 사건의 중심이 된 두 인물이 부조되어 있다. 하나는 돌을 맞고 있는 스데반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다.

당시 베를린교회를 짓던 이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기둥 삼아 현실에서의 고난을 수납하고 미래의 지평에서는 부활의 영광을 내다보는 의미에서 개신교 신앙을 고백한 셈이다.

가톨릭교회의 제단에는 사제가 홀로 서는 경우가 별로 없다. 가톨릭교회의 미사를 집전할 때 사제를 곁에서 돕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개신교 강단에 서는 이는 설교자 한 사람뿐이다. 가톨릭교회 미사 중에도 강론이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중앙에서 준비된 메시지를 낭독하거나 사제가 무엇인가 그것에 덧붙여 말한다. 그러나 목사의 경우 홀로 설교를 준비하고, 준비된 설교문에 기초하여 말씀을 증거하는 경우가 원칙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가톨릭교회가 눈의 종교라면 개신교는 귀의 종교라고 말한다. 사제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는 예배에서 예배자들은 사제의 제의적인 행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성체에 참여하는 성찬을 나누는 데 초점을 둔다. 개신교는 바라봄의 종교, 눈의 종교가 아니라 귀의 종교, 들음의 종교다. 이런 이유에서 베를린교회의 경우, 1,650개 좌석은 설교자가 서 있는 강단을 향해 바라보도록 설계되어 있고, 설교자가 서서 말씀을 증언할 강단은 고귀한 왕관처럼 꾸며져 있다.

귀의 종교

귀의 종교인 개신교는 이렇듯 말씀의 증언자가 예배의 중심이 된다. 따라서 말씀 증언자의 영적이며 신학적, 도덕적인 능력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개신교의 생명이 달려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씀 증언자의 기초 신학적 훈련은 신학대학에서의 훈련 과정에서 상당 부분 이루어진다. 하지만 말씀 증언자로서 성서에 대한 궁구와 영성적 훈련, 그리고 언어적 소통을 위한 인문학적인 훈련은 평생 이루어져야 할 과제다.

설교자는 이런 점에서 질 높은 연구와 영성적 훈련과 독서를 병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 증언자로서 주어진 소명을 제대로 감당하기 어렵다. 이러한 과제들을 수행할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었기에 개신교는 강단의 자유를 목회자에게 맡긴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데 있어서 강단 증언자의 신앙 양심은 무한한 자유를 가진다. 그러나 그가 그 자유를 행사하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그의 소명의 전제로서 신학적인 것이다. 이는 교회 전통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7년 현재 한국의 교회 숫자는 약 7만 8,000개다. 편의점 수가 2만 5,000개인데 비하면, 편의점 1개 있는 곳에 교회가 3개 세워져 있는 셈이다. 매주 예배 시간이 되면 최소한 7만 8,000명의 설교자가 강단에 올라 말씀을 증거할 것이다. 이 모든 장면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볼 수 있다면 참으로 장엄한 광경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말씀의 증언자가 선 강단은 몇 가지 요소에 의해 치명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 첫째는 말씀 증언자의 인문학적인 인식 능력, 곧 넓은 의미에서 지성의 위기다. 둘째는 말씀 증언자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는 생존의 위협에서 오는 소명의 위기다. 셋째는 개교회주의로 인한 연대성을 상실한 경쟁에서 오는 윤리적 위기다.

지성적 위기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지성적 위기를 맞고 있다. 목사가 주어진 소명을 감당하려면 영성적 능력도 필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지성적 능력도 요구된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지성을 무시한 영성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런 흐름을 조장하는 신학적 성향은 반지성주의를 조장하는 근본주의신학이다. 무수한 목회자들이 근본주의 성향에 동조하는 근본 원인은 그들의 매우 낮은 학문적 능력 때문이다.

정규 신학대학교를 나온 이들에게도 문제가 많지만 400여 개에 이르는 무인가 신학교에서 양산되는 목회자들은 너무나 쉽게 반지성주의라는 흐름을 선택한다. 이런 흐름에 편승하여 정규 신학대학에서도 학력의 수준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신학대학 입학생들을 분석해 보면 중·고등학교나 대학에서의 학력이 전국 백분율 하위 10%에 속하는 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런 이들은 신학대학이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준비한 커리큘럼을 제대로 소화할 능력이 없을 정도다.

최근 강남에 지어진 화려한 교회의 담임목사가 학력을 세탁한 사실로 인해 교계에 추문이 일었다. 그는 학위논문을 표절하고, 학력을 과대 포장해 자신의 학문적 능력의 취약성을 감추려고 부정직한 행위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례는 부지기수다. 심지어 심혈을 기울여 공부하지도 않은 사람이 박사 학위를 남발하는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박사 학위 명패를 걸어두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입으로는 반지성주의를 외치는 영적 지도자임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평균 이하의 학력을 감추기 위해 허위 학위를 돈 주고 사는 예도 있다. 이런 모든 양태는 형식과 허례, 명분과 체면 문화가 조장하는 과시 욕구를 이겨 내지 못하는 목사들의 자화상이다.

이렇듯 허위의식에 가득 찬 이들이 지키는 강단의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성실성 없는 반지성주의와 더불어 도덕성이 없는 강단의 권위는 결국 복음의 근본을 파괴한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 정직하지 못한 이들이 세워진 강단에서 어떤 복음이 울려 퍼질 수 있겠는가? 나는 이런 이들은 개신교 전통이 목사에게 맡긴 강단의 자유를 지킬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영성적 지도자가 지녀야 할 통전적인 성실성의 의무와 정직의 의무에 아랑곳하지 않는 성직은 결국 강단을 타락시킨다. 정직이라는 것이 상식임에도, 정직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이 자리 잡은 강단에서 울려 퍼지는 상식 이하 수준의 설교 때문에 하나님 말씀의 위기가 찾아온다. 부도덕한 그들의 의식에서 기독교의 도덕적 위기가 일어나고 있다. 지성적 위기가 결국 강단의 도덕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교회에 대한 일반의 신뢰도가 수년간 20%에도 못 미치는 원인은 목회자의 수준 이하의 지성적 능력과 도덕적 판단 능력에서 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변증자로서의 목회자는 신학적 훈련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신학 훈련에 게으른 이들이 바른 신앙의 길로 신자들을 인도할 리가 없다. 또한,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목회자는 지성적 능력을 갈고닦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성 능력의 미달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저학력 비지성적인 이들이 그 상태를 감추기 위하여 반지성적 영성 운운하며 신자들을 우둔함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한국 기독교의 미성숙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지성적이며 인문학적인 인식 능력이 평균 이하인 목사일수록 다른 이의 설교를 우왕좌왕 표절하고, 일반의 비판에 피해 영성을 강조하며 반지성주의적 설교를 남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경우, 이들은 복음의 전파자가 아니라 복음의 장애로 기능하게 된다.

생존의 위기

개신교 교회의 강단을 개신교 신학과 영성, 그리고 인문학적 이해 능력이 미숙한 목사들이 이끌고 있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위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상태를 더욱 극심하게 조장하는 요소는 80%에 이르는 목회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생존의 위기다.

1990년 이후 한국 개신교의 교인 수는 정체되어 있다가 2010년 이후부터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반면 쏟아지는 인가 비인가 신학교 졸업생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2013년 기준으로 감리교회의 수는 6,518개인데 목사는 1만 725명이고, 예장합동의 경우 교회 수는 1만 1,593개인데 목사 수는 2만 2,216명이며, 예장통합의 경우 8,592개 교회에 1만 7,468명의 목사를 두고 있다. 3개 교단만을 종합해 본다면 2만 6,703개 교회에 5만 409명의 목사가 있다. 이에 더하여 매년 약 4,000명이 정규, 약 6,000명이 비정규 신학교를 졸업한다. 그런데 이들은 과연 말씀을 궁구하고 독서를 통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 말씀의 증언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무임 목사를 차치하고서라도 전국 7만 8,000개 교회 중 약 80%에 이르는 교회 목회자들은 정부 기준 기초 생계비를 받지 못하는 극빈 목회자들이다. 교단마다 교회 연 예산 3,500만 원 혹은 3,000만 원이라는 미자립 교회의 기준이 다르지만, 현실에 있어서 목회자의 기초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는 교회는 전체 교회의 약 20%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교단마다 교인 수는 줄고 있고 목사 수는 여전히 늘고 있다.

이런 극빈의 상태에 처하는 목회자를 양산하는 구조는 과도한 성직 소명감을 조장하는 목회자들의 그릇된 인식에 비롯된다. 지상에서 목사직을 최상의 소명으로 여기며 이를 영예스럽게 여기는 성직 제일주의가 보편화돼 있는 탓이다. 이런 길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저학력자라도 누구나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될 수 있는 신학 교육 구조의 허점 때문이다. 정규학교가 안 되면 무인가 학교라도 가면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될 수 있는 더 쉬운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양산된 목사들의 신학적, 지적 훈련의 극심한 결핍이다. 결국, 이들 중 소수의 성공(?)적 인물을 제외하고 대다수는 매우 비참한 현실에 처하게 된다.

저학력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성직자의 길은 고도의 경쟁 사회에서 낙오한 이들의 출구로도 간주한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현실은 이들이 강단의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자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목회지를 가지지 못한 무임 목사들이 증가하고 있는 한편,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는 미자립 교회 목사들은 전체 교회 8할에 이르는 형편이다. 결국, 오늘날 한국 기독교 안에서 무수한 설교자들이 기초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수입으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 치솟는 전세 임대 보증금으로 인하여 가난한 목회자의 삶의 자리는 더욱더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

요즈음에는 목회자들이 마지못해 부수적인 직업을 가지는 경우도 빈번하다. 내가 아는 이들 중 대리운전 기사를 하는 이, 조그만 커피 가게를 운영하는 이, 노동 현장에서 막노동하는 이도 있다. 물론 이러한 이중 직업도 도시 인근에 거주할 때만 가능하다. 대부분 목회자는 이중 직업의 기회를 가질 여건도 없는 자리에 머물고 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아예 목회를 접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이런 현실은 목회자 간에 심각한 경쟁 구조를 유발하기도 하며, 목회지를 선점한 이들의 뿌리박기도 이어진다. 나아가 자연스럽게 더욱 안정된 목사의 생활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교회를 향한 약진과 이동을 선호하는 적자생존적 성향을 조장하고 있다. 여기서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궁구하고 심혈을 기울여 강단에서 전할 메시지를 준비할 시간과 공간, 그리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가 갈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부유한 교회를 향한 약진의 길은 대부분 목회자에게 있어서 고도 경쟁의 길이다. 이 경쟁 가도에서 유리한 이들은 역시 강력한 교권을 가진 큰 교회 목사와 근친성을 가진 이들이다. 대형 교회 부목사들은 담임목사의 영향권 안에서 경쟁 관계가 아닌 특혜를 입을 기회를 더 많이 얻는다. 그러기에 대형교회 부목사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그 교회 명성을 부러워하는 장로들이 기다리는 중형 교회로 이동하곤 한다.

이렇게 찾아간 자리는 다음 자리를 위한 징검다리가 되고, 더 나은 교회로 이동할 수 없을 경우 그 교회를 향한 무형의 소유권을 행사하듯 뿌리를 내린다. 여기서 누구보다도 유리한 이들은 대형 교회 목사의 자제들이다. 그들은 교단 정치의 대가인 아버지의 그늘 아래 남다른 특혜를 얻을 수 있다. 그러한 특혜 중 하나가 소위 교회 세습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렇게 성공한 이들을 포함해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난 목사들은 겨우 20%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계를 위협받고 있는 목사, 강단을 가지지 못한 목사가 오늘의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강단의 자유를 지키기가 쉽지 않다. 이들에게 목사로서의 신학적 독서, 지성적 독서, 그리고 시대정신과 대화할 능력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빈곤한 목회 현실은 강단을 더욱 부실하게 만들어 강단의 위기를 심화하고 있다.

공동성의 위기

가난한 목회자도 깊은 영성의 소유자가 될 수 있고, 사회적 여건과 목회자의 성실성이 있다면 미자립 교회를 부흥시켜 큰 교회를 이루어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적자생존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야만적 관계를 승인하는 것이다. 미자립 교회를 부흥시켜 큰 교회를 이룬 성공적인 목사들은 지극히 소수이며, 이들은 대부분 개척자 주권증이라는 질병에 걸린다.

한 교회에 오래 머문 목사일수록 그 주권증의 정도가 극심해진다. 그리고 그 교회를 떠날 시간이 되면 목사 주권을 돈으로 바꾸거나 자기 자식에게 넘겨주는 가장 비신학적이며 비윤리적인 자의가 유통된다. 한국 기독교는 교단을 막론하고 이런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승인하는 우매함에 빠져 있다.

서구나 미주 교회들 역시 이러한 우매함에 빠진 적이 있었다. 서구에서도 대형 교회 목사들은 자신이 세운 교회를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영예스럽게 여기는 게 은사적 지도력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 교단에서는 이런 행태가 불가능하다. 목사가 교회를 향해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배교적 행태로서, 신학적 정당성이 없다. 배교적 행태일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부자 간에 사사화(privatization)하고, 목사가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 개척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찬탈하던 습성을 융통시킨 엘리 집안의 범죄와 같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공교회라 여기지 않고 목사와 장로 소수가 한 교회와 그 교회에 드려진 헌물과 재화를 독점하여 지배하는 데 있다. 교단의 교리와 교회법도 그들을 통제할 수 없도록 비대해지면 그 교만은 하늘을 찌른다. 강남의 대형 교회 몇을 예로 들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결국 이러한 현실은 하나님 말씀의 자유가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교회 정치가 소수자의 특권과 지위를 지키고 나누는 데에서 강단의 자유를 제한하고, 특정한 이들이 자의에 따라 강단을 점유 배분하는 것이다. 귀의 종교가 개신교의 본질인데, 정작 교회의 중추가 강단의 말씀이 아니라 친족 간 유대가 지배하는 교회 정치에 모아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외양이 제아무리 거대하고 화려하다 하여도 하나님의 교회라 불릴 수 없다. 한편에서는 가난으로 인하여 강단의 위기가 오고, 다른 편에서는 교회 정치가 강단의 위기를 불러오는 것이 작금의 한국교회 현실이다. 한편에서는 금수저들의 잔치가 있고, 다른 편에서는 흙수저들의 빈곤이 있는 것이다. 교회와 성직자 간의 연대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서구의 교회들에서 배울 수 있다. 독일이나 미국의 주류 교단 교회에서는 목사의 주권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 없도록 철저하게 제약하고 있다. 개교회주의가 불러오는 목회자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교단적 중재와 재분배 노력으로 최저생계비를 보장하는 공동성을 이루기 때문에 모든 교회 간의 우애적 공동성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목사 임기제를 통해 목사가 한 교회를 점유하여 뿌리내리고 일평생을 주인처럼 지배하는 형태의 목회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다. 목사는 명목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개교회 주인처럼 행세할 수 없다.

합리적 제도를 통해 교단 내 목사들이 강단의 자유를 지킬 수 있도록 최저생계비를 보장하고, 교단이 목사의 수급을 조절해 잉여 목사들이 양산되는 폐해를 미리 방지하고 있다. 부유한 교회들이 더 많은 부담금을 내 약한 교회 목사들의 최저생계비를 보장하는 교회의 공동성을 지켜 나갈 때 '교회 일치'라는 에큐메니컬 정신을 이룰 수 있다. 이렇게 목사들은 일정 기간 소임을 마치면 그 자리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섬기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종"으로서 자기의식을 지킬 수 있다. 자신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한 교회에 걸터앉아 주인 행세하는 목회는 불가능하다.

공동성의 위기는 결국 일치의 정신은커녕 고도의 경쟁 구조를 유발하고, 교회 간 경쟁, 교인 간 경쟁이나 교인 쟁탈전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소형 교회들의 교인들을 빼앗아 부유하고 거대한 교회를 이루어 내는 데에서 목회의 성패가 갈리는 것이다. 거대한 교회를 이루어 내면 그 교회에 바쳐지는 모든 헌금은 개교회 것이 되고 마는 부조리가 당연시되고 있다. 부유한 교회는 문어발처럼 거대한 프로젝트를 벌리고, 화려한 건물을 지어서 부유한 교회를 경쟁적으로 더욱 비대하게 만들어 간다.

결국, 목사와 그 목사를 조력하는 교인들의 왕국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성공적인 목회라고 여기고 자기들끼리 우선순위 다툼을 하는 것이다. 이런 구조 안에 있는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느냐는 근본적인 신학적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성의 위기는 강단의 일치를 깨고 강단을 사유화하게 만들어 기독교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강단의 위기 넘어서려면

제아무리 목사가 복음적 소명과 굳건한 신앙이 있다고 해도 7만 8,000개 교회에 약 15만 명의 목회자가 자리를 잡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현실은 비정상이다. 목회자의 저학력, 빈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참모습이다. 여기에서 가나안 신자들이 생산된다. 그런데도 마치 무한한 잠재성이 있는 양 허세를 부리며 오늘도 젊은이들을 무작정 신학대학이나 신학교로 무책임하게 몰아가고 있다.

교회는 목회 후보생을 가려 뽑아 훈련해야 하고, 신학 교육은 사교육이 아니라 교단적 공교육이 되어야 한다. 교단마다 목사 수급 계획을 세우고 그들의 최저생계비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목사 주권증이라는 역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개교회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려면 결국 이판사판의 교단 정치를 하루속히 청산해야 하고 교단 정치가들의 책임성과 도덕성이 먼저 제자리를 잡아야 한다. 머뭇거리면 결국 교회들의 몰락 길에서 더는 성직을 소명으로 여기지 않는 세속화에 교회가 점령당할 수도 있다.

올해에는 신학대학마다 지원자 미달 사태다. 이제는 결단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영성과 지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목사가 강단에 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면, 이미 말씀의 종교, 귀의 종교에서 강단의 위기는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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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스포츠를 즐기는 목사

이계선 | 6285959@hanmail.net

“도파민을 만들어 내는 뇌세포가 망가져서 생긴 병 입니다. 약 잘 먹고 단백질음식 잘 먹고 운동 잘하면 완치는 안 되지만 병의 속도를 늦춰 주지요”

4년전 의사가 내게 내린 파킨슨씨 병 진단이다. 세상에 완치가 불가능한 병이 있다니! 의사가 아니라 사형선고를 내리는 판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3잘”만 잘 지키면 얼른 죽지 않는단다.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은 기분이었다.

모범수처럼 “3잘”을 잘 지켜오고 있다. 도파민약을 “잘” 먹고 있다. 육식을 싫어하는 채식(菜食)성이지만 단백질고기를 “잘” 먹었다.

그런데 운동이 문제다. 파킨슨을 앓고 있는 조목사는 열심히 짐(Gym)에 나간다. 매일 태산무게만큼 역도를 들어 올리고 다람쥐 채바퀴자전거를 타고 200리를 달린다. 이씨는 걷기도 힘든 다리로 100리를 달려 마라톤선수가 됐다. 운동을 좋아하는 파킨슨 환자들이다.

난 운동을 싫어하는 체질이다. 초등학교 6년동안 운동회에 나가 열심히 뛰어봤지만 동메달한번 따본 적이 없다. 대신 운동구경을 좋아한다. 장충체육관을 나 만큼 많이 가본목사는 없을것이다. 고등학교때 본 효창구장 축구경기를 평생 잊지 못한다. 당시 아세아최강 이스라엘대표팀이 내한했다. 돈이 없는데도 갔다.

효창공원 언덕배기로 올라가면 그라운드의 3분의 1정도가 보이기 때문이다. 관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표를 갖고도 들어갈수 없게 됐다. 아우성을 지르며 밀고 밀치다가 그만 정문이 무너져 버렸다. 그 바람에 우르르 휩쓸려 들어가 난 공짜구경을 할수 있었다. 난 그때 알았다. 공짜구경은 VIP보다도 상석(上席)이라는 것을! 적진을 무인지경으로 휘졌고 다니는 아세아 최고의공격수 최정민, 수문장 함흥철, 머리를 다쳐 피묻은 수건을 두르고 펄펄날던 우상권...한국이 4:1로 이겼다.

이민와 보니 미국은 스포츠천국이다. 우리집 대형TV에서는 연중무휴로 스프츠중계가 나온다. 오늘날 스포츠는 단순히 운동만이 아니다. 예술이요 치료(Healing)이다. 하얀유니폼의 레알마드리드와 빨간색의 바로셀로나가 푸른잔디위에서 펼치는 축구경기는 한편의 그라운드예술이다. 선수들의 묘기백출을 보고 있으면 잠자던 앤돌핀이 몽골몽골 깨어 올라온다. 응원하는 팀이 9회말에 역전 만루홈런을 터뜨리면 십년앓던 중병이 한방에 날라가 버릴것 같다.

“여보, 구경만 해도 절반의 효과를 보는게 운동이래요”

아내의 권고대로 하루종일 TV에 매달려 스포츠채널을 돌렸다. 프로야구 미식축구 UFC종합격투기는 맨날 봐도 질리지 않는 나의 인기종목들이다.

그런데 아내에게 문제가 생겼다. 스포츠시청 때문에 아내가 전공인 연속극 드라마를 볼수 없기 때문이다. 드디어 아내가 나를 운동장으로 내몰았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했어요. 일류선수들의 경기를 TV로 100번보는것 보다 바닷가로 나가 한 발짝 걷는게 건강에 더 효과적이예요”

하긴 의사도 그랬다.

“매일 6천보(10리)를 걸으세요. 빨리 걸으면서 뛰기도 하세요”

YMCA 짐에 나가는 아내는 함께 나가잔다. 친구목사는 골프를 권한다. 난 골프는 반대다. 돈을 주고 하는 운동은 진정한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이다. 짐(Gym)도 반대다. 손바닥 만한 실내체육관에서 달려보고 걸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 에서 손오공 재주부리기 이기 때문이다.

‘대자연속에서 하늘을 보고 땅을 밟고 뛰어다니는 돌섬운동을 하자’

아파트에서 8분을 걸어 바다로 나간다. 숲속을 지나면 보드워크가 나온다. 보드워크를 따라 명사십리백사장이 하얀 그라운드처럼 널려있다. 여기서 6천보를 걸으면 된다. 3천은 파도소리를 들으며 백사장을, 3천은 연인들이 걷고 있는 보드워크로 올라와 걷는다. 파킨슨 병 초기인 4년전엔 6천보 걷는데 30분도 안 걸렸다.

2년쯤 되자 다리가 무거워졌다. 운동이 아니라 구경을 하면서 걸었다. 걸으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놀라 미친놈처럼 웃기도 하고 소리도 질렀다. 음영(吟詠)시인이라도 된 기분. 소요시간 1시간.

4년을 맞는 요즘은 몸이 더 피곤하다.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얼간이처럼 얼얼한 얼뜨기가 됐다. 아름다움을 느끼는게 피곤하고 부담스러워졌다. 어떻게 운동할까? 고안해 낸것이 산책명상을 즐기는 명상철학운동이다. 난 이걸 신선스포츠라고 부른다. 사색을 하면서 걸으면 꿈길처럼 힘이 들지 않는다. 기도 찬송 성경묵상 회상 작품구상 만날준비를 걸으면서 하는 것이다.

화담서경덕은 사색으로 사상과 학문을 집대성했다. 그가 읽은 고서는 수십권에 불과했다. 대신 토정이지함 병해대사갓바치 여류 황진이와 풍류를 즐기며 고담준론을 나눴다. 그리고 나면 홀로사색의 길을 찾아 나섰다. 아인슈타인이후 최대의 물리학자 호킹박사의 천체물리학도 사색으로 얻어낸 우주탐사였다.

“얘야, 일어나 아침먹고 학교가야지”

고향의 어린시절 먹어도 먹어도 배가고프고 자고자도 졸렸다. 어머니의 성화에 일어나 보면 늦었다. 아침을 먹는둥 마는둥 가방을 들쳐맸다. 10리길을 달려 중학교에 가면 첫시간이 그렇게 졸렸다.

아내가 어머니 역할을 한다. 파리버섯을 먹은 병아리처럼 졸고 있는 날 일으켜 바다로 몰아낸다. 아파트를 나서면 시원한 바닷바람이 졸음을 깨운다. 가슴에 통증이 오고 발이 무겁다. 모래위를 걸어간다. 머리위로 갈매기가 날고 겨울인데도 파도를 타고 보드셔핑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있다.

이생각 저생각을 하면서 걷는다. 마지막은 반드시 생각없이 뛴다. 골인!

운동하러 바닷가로 나가던 난 이제 사색하러 바닷가로 나간다. 사색운동이 끝나면 청마의 “그리움”으로 파도와 대화한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물같이 까딱도 않는데/ 날 어쩌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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