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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교회를 아시나요/ “한국교회 급속히 쇠퇴할 수 있다” / 목회실패의 10가지 이유
2006-10-24 14:39:07   read : 65536















▲ 깡통교회인 전주 안디옥 교회 모습 ©구굿닷컴

검소와 절제를 실천하는 전주 안디옥 교회
허보람 명예기자 soulhurt@hanmail.net

우리 주변 여기저기를 둘러보면, 이제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교회당을 자주 접할 수 있다. 고풍스럽고 웅장한 멋을 자랑하는 교회당이 있기도 하고, 좁은 주택가에 자리 잡은 작은 교회당들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흔히 접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아무데서나 접할 수도, 볼 수도 없는 교회가 전주시 금암동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찾아가 보았다.

1983년 3월 27일 건립된 이 보기 드문 교회당은 전주 안디옥 교회로써 안디옥 교회라는 말보다 ‘깡통교회’로 더 널리 알려진 교회이다. 전주에서 깡통교회를 모르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매우 유명하다. 교회당이 위치한 곳의 반대편에서 교회당을 바라보면 왜 깡통교회로 불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꼭 깡통을 세로로 잘라 엎어놓은 듯한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 격납고장이 교회당으로...

어떻게 해서 교회당이 이렇게 깡통모양을 하게 된 것인지 전주 안디옥 교회의 한 수 장로님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지금 교회당이 있는 자리에 당시엔 아무것도 없었고, 이동휘 목사님께서 개척하여 교회를 건립하려하는데 교회에 돈이 많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교인 중 한분께서 군산에 미군 비행장이 있는데 그 곳에 철거되는 콘센트 막사 즉, 비행기 격납고를 가져와서 짓는 것이 어떨까 하여 그 철거되는 비행기 격납고를 가져와서 지어진 것이 지금의 안디옥 교회이고 깡통교회로 불리게 된 이유입니다.”라고 설명한다.

또한, “원래 비행기 격납고로 지은 교회당은 지금 크기의 1/3이였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기도하면서 지금의 크기로 늘어나게 되었고, 그 밖의 선교활동을 위한 부속건물들도 생기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검소와 절제의 본, 깡통교회

콘센트 막사인 본당의 내부는 한 낮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깜깜했다. 출입문이 열려진 곳으로 빛이 조금씩 들어올 뿐이었다. 지금은 에어컨이 4-5대 정도 있고 선풍기도 벽에 여러 대가 달려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겨울에는 온풍기가 없어서 건축현장에서 못쓰게 된 나무를 주워와 그 나무를 때워서 난방을 하였고, 에어컨도 없었기 때문에 여름에 검은 콘센트 막사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그대로 받으며 예배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교회당 안에는 유독 많은 의자들이 있었는데 한 교인께서 “그 의자들 모두 주워 온 거예요. 다른 교회에서 쓰다가 버린 것들인데 다 주워왔어요. 요새 그런 의자 다른 교회에서 안 쓰잖아요.”라고 말한다.



▲ 깡통교회로 불리는 전주 안디옥 교회의 내부 ©구굿닷컴

전주 안디옥 교회는 교회당 이외에도 한반도 선교관, 온민족 선교관, 베델관, 임마누엘 선교관 등 총 4개의 부속건물이 존재하는데 그 중 임마누엘 선교관의 겉모습은 본당인 비행기 격납고장으로 만들어진 것과 매우 비교될 정도로 현대적인 건물이었다.

임마누엘 선교관은 장애우들을 위한 시설과 선교관의 교육과 훈련을 위한 건물로, 1층은 장애우들을 위한 카페로 그 곳에서 장애우들이 한방 비누와 한약재를 사용한 향수 등을 만든다고 했다. 2층은 교육관이며 3층은 예배당 그리고 4,5,6층은 바울 선교회에서 선교관으로 사용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임마누엘 선교관은 겉은 현대식 건물로 매우 멋져보였지만, 선교관들이 훈련을 받으며 생활하는 곳은 에어컨도 없는 곳으로 여름이 되면 뜨거운 열기를 고스란히 받으며 생활해야 한다고 한다.

‘불편하게 살자’
한 장로님께 교회당을 다시 지을 생각이 없으신지 여쭈어 보았더니 “이동휘 목사님께서는 교회의 가장 큰 목표를 ‘불편하게 살자’와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다’라고 말씀하셨고, 그 부분에 역점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지으라고 하셔야 짓지 않나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고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선교에도 힘을 쓰고 있으며, 다른 부분에서도 노력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고 말하였다.

이렇듯 검소와 절제를 생활화하는 깡통교회는 매주 성인예배만 사천여명이 참여하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매우 큰 교회가 되었다. 앞으로도 이 투박한 모양의 깡통교회가 지금처럼 따듯한 마음을 계속해서 베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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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급속히 쇠퇴할 수 있다”
<시사저널> 최근호에서 개신교 쇠퇴 이유 분석



한국 개신교가 급속히 쇠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지적됐다.

▲ 시사저널의 보도만이 아닌 한국 교회 내부에서도 위기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사진은 시사저널 관련 캡쳐

<시사저널> 최근호는 ‘개신교는 왜 홀로 쇠퇴하고 있는갗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류상태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유상태 사무국장의 말을 인용해 개신교가 최근의 ‘위기’를 체계적으로 극복하지 못할 경우 앞으로도 개신교 세가 급속히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기사에서는 지난 12일 한국C.C.C.총재 김준곤 목사가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위한 국가 조찬기도회’에 참석해 “세계 50개 대형 교회 가운데 25개가 한국에 있지만,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개신교 인구가 14만 4천명이나 줄었다”고 설교한 것과 관련해, “개신교의 쇠퇴는 지난 20년간 한국 사회의 종교 변화를 상징하는 최대 사건이다”고 보도했다.

<시사저널>은 이어 한국 개신교의 쇠퇴 이유에 대해 ‘한국 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한미준)’의 자료집을 인용해 ‘한국 교회가 이미지 전쟁에서 패했다’고 규정했다.

구체적으로는 ‘교세 확장, 헌금 강요, 종교 지도자의 영적 자질, 영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는 것 등에서 불교나 천주교보다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한국교회의 양극화도 문제로 지적됐다. 기독교인들이 대형교회로 몰리고 경향이 커지는 반면, 소형교회들은 해마다 3천개가 넘게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이 같은 대형교회 집중현상에 대해 <시사저널>은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장 방인성 목사의 말을 인용, “앞으로는 교회가 지역의 사랑방이 되어 탄탄하게 뿌리를 박는 쪽으로 변해야 한다”며 교회가 철저히 지역교회로 자리매김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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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이 천주교로 몰린다
남성, 교회의 권위적이고 비합리적인 조직 외면



여성 종교인구 증가보다 남성 종교인구의 증가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 남성들은 천주교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나,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1985년에 종교를 갖고 있던 남성은 39.3%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5년 조사에서 남성 종교 인구는 49.7%로 나타나 20년 전에 비해 10.4%가 늘었다. 2004년 한국 갤럽조사에서도 1997년에 비해 종교를 갖고 있는 남성의 비율이 8.3% 늘어난 반면, 여성은 4.9% 중가에 그친 것으로 나왔다.

시사저널 최근호가 이와 관련하여 종교별 증가를 분석하여 발표했는데, 천주교를 믿는 남성들이 꾸준히 느는 반면 불교나 개신교는 1995년 이후 줄어드는 추세라고 발표했다. 결국 늘어난 남성인구 대부분은 천주교로 갔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를 보여주듯 천주교를 신앙하는 남성들은 20년 전에 비해 2.5배 이상 늘었다.

지난 10년 동안 천주교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비종교인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비쳤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천주교의 좋은 이미지는 크게 보아 ‘전통과 역사가 깊고 점잖은 종교’라는 것과 ‘민주화운동과 사회복지 활동으로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도덕적 종교’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천주교의 이미지는 남성들이 선호하는 이미지와 맞아떨어지면서 꾸준히 성장하게 됐다.

또한 술과 담배문제가 자유롭고, 제사와 같은 전통적인 관습을 지킬 수 있다는 장점(?)도 남성들이 천주교를 선호하는 까닭이다. 이런 내부적인 이유와 함께 조직에 억매이기 싫어하는 현대인의 성향, 강요하지 않는 자유로운 종교분위기, 다양성을 인정하는 포스터모던문화의 수용 등 교회 외적인 변화를 수용하는 종교분위기가 이같은 성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천주교의 남성성장은 이런 사회분위기의 변화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장점을 받아들인 ‘노방전도’에 매달리는 적극적인 태도변화도 한몫 거들고 있다. 최근 전도하지 않는 종교의 이미지를 벗고 지하철 입구나 시장입구에서 ‘천주교’를 홍보하는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런 현상이 ‘이미지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분석하면서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천주교의 남성성장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기독교는 어떤 대안을 찾고 있는가? 그나마 일부교회들이 ‘두란노 아버지학교’라는 이름으로 대안을 모색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역부족이다. 대부분 교회들은 손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앉아서 재난을 맞고 있는 실정이다. 기독교를 떠나는 남성들은 권위적이고 비합리적인 교회조직을 이유로 들고 있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교회조직에 적응하지 못하겠다는 것. 또 교회 지도자들의 스캔들, 이기적인 교인들의 모습에 실망하고 있다.

한때 기독교는 한국의 근대화를 이룬 종교로, 개화와 개방, 권위적이지 않은 조직의 유연성, 경제적인 풍요와 행복을 주는 종교로 비종교인들에게 상당한 호감을 주었다. 여기에 70, 80년대 민주화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면서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종교로 부흥을 맞이했다.하지만 최근 한국교회는 과거의 명성뿐만 아니라 복음의 본질까지 잃고 있다는 사실이다.

짐 심발라목사(블루클린 테버너클)는 지난 10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개최된 ‘불가능한 전도는 없다’ 전도 컨퍼런스에서 “성령의 불”을 강조했다.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다시 부흥할 수 있는 길은 “성령의 뜨거운 체험”밖에 없다며 한국교회가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즉 한국교회가 ‘복음의 역동성’을 잃어버린 채, 그 자리에 외형적인 프로그램으로 채우면 안된다고 지적했다.
기독교연합신문 송영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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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s.com’이 소개한 목회실패의 10가지 이유

목회자들의 실패경험담 묶어 공통점 분석

교인들을 너무 믿는다, 일을 혼자서 처리한다, 지지않으려는 경쟁심 등등
목회를 성공에 비유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지만 목회자도 사람인 이상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인정받고픈 욕구가 있다. 목회를 잘 한다는 것은 신학교 성적순도 아니고, 성경지식이 많아서도 아닌 것 같다. 미국의 목회전문 인터넷 사이트 ‘패스터스닷컴’(pastors.com)은 목회현장에서 좌절을 경험한 몇몇 목회자들의 진솔한 고백들을 모아 목회실패의 유형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의 경험은 목회원론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무엇보다 복음을 갈망하는 성도들의 갈증을 다각도로 충족하지 못하는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10가지 유형들을 소개한다. /

◆ 성도들을 과도하게 믿는 것

열심을 내어 전도한 결과 교회는 부흥됐다. 그 중에서 하나님께 헌신된 일군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교회는 과거에 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교인들의 모습이 아름답기만 하고 가족처럼 느껴졌다. 가족이상으로 사랑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교인들을 믿게 됐고 목회자의 인간적인 모습까지 보여줄 정도로 관계가 깊어졌다고 느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목회자의 좋은 점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쁜 점까지 죄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역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교인들은 “나는 이렇게 살아도 사역자는 절대 안된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마음속의 이야기를 교인들 중 믿을 만한 사람에게 했던 것이 나중에 다른 말로 다시 귀에 들어오고 심지어 목회에 어려움을 가져다주곤 했다. 믿을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성도는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점이다.

◆ 일군을 세우지 못한 것
교회개척 이후 성장을 거듭하여 교회건축 부지를 마련할 정도가 됐다. 그 목회자는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했다. 부지매입과 교회건축 업자 선정 등 건축관련 일들까지 다 결정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이었다. 교회는 웅장하게 건축을 완료했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던 것이다. 결국 건축과정에서 양육되어졌어야 할 일군을 배출하지 못해 규모가 커졌음에도 그에 걸맞는 목회를 하는데 실패했다.

◆ 목회자로서 준비하지 못한 것들
목회자로서 준비해야 할 것들은 상당히 많다. 성경지식은 이것들 중 가장 기초적인 부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격이다. 주님의 제자다운 인격을 만들어가야 한다. 온유하고 겸손한 인격은 중요하다. 잘못된 교인을 질책하기만 했지 온유하고 겸손하게 섬기지 못한 것은 목회자의 인격에 속한 부분이다. 주님의 영력과 능력을 겸비하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경쟁심
인근에 새로 지어지는 교회를 보면서 기뻐해야 할 교회사역자들이 오히려 시기하며 혐오하는 불미스런 일을 하곤 한다. 경쟁의 목회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큰 목회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목회자는 공허한 목회를 할 뿐이다. 목회는 경쟁이 아니라 동역이다. 지역의 교회들이 연합하여 사단의 결박을 예수님의 능력으로 끊어야 한다는 일체감이 중요하다고 늘 확신해야 한다.

◆ 머리로만 생각하는 성장원리
교회성장이 목회소원이다 보니 각종 세미나와 훈련과정을 거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너무 많은 방법들을 알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성장이론이 머리에만 있었지 그것을 가슴에 새기는 사명감은 갈수록 결여된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목회는 이론이나 다른 목회자가 남겨놓은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 언어관리를 하지 못한 것
목회자는 강단에서 혹은 심방 가운데 교인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목회자의 언어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사역자의 언어 때문에 상처받는 교인이 없도록 돌아보아야 한다.

◆ 교인 편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
일을 앞세우다가 자칫 교인들의 입장보다는 일 그 자체에 몰입하는 수가 많다. 일을 앞세우면 그 일을 담당할 교인은 수동적인 존재로 머물게 하고 마음에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동역하는 자세가 바람직하다는 충고다.

◆ 교인들이 할 일이 없는 것
목회자는 이 땅의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실을 종종 잊는다. 사역자는 교인들의 은사를 발견하고 그 은사대로 일을 분배하는 지혜를 보여야 한다. 일을 나누어 하면 교인은 일군으로 변한다.

◆ 목회자가 섬기지 않는 것
건강한 목회를 하는 교회의 공통점은 목회자가 하나님을 섬기듯 교인을 섬긴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우리를 섬긴 것처럼 목회자도 그의 지체되는 교인을 섬기는데 열심을 내야 한다.

◆ 참고 견디지 못하는 것
목회는 견디는 것이다.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목회자는 늘 분주하다. 바쁜 일과를 견디지 못하면 실패가 빨리 온다. 특히 침묵은 꼭 숙지해야 할 부분이다. 인내는 그래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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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민 목사 “당회가 경건회 인도까지 막아”
주택구입 문제와 재정 문제 해명 "투명하다"

미주=우형건 hgwoo@christiantoday.us

LA 한인타운 내 최대교회인 동양선교교회(OMC)의 강준민 담임목사가 전격 사의를 표명했다. 강 목사는 10월8일 주일예배 광고시간에, 자신의 목회활동과 리더십이 심각한 제약을 받고 있다면서 사의를 밝힌 경위를 설명했다.

강 목사는“지난 4일 수요일 당회가 끝난 후,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데 한계를 느껴 당회 서기인 한승수 장로에게 사의 의사를 표명했다”면서, 당회가 인신공격의 장으로 변하고 최근 두 번의 당회에서는 담임목사의 특권이자 책임인 경건회를 인도하는 것조차 막았다고 밝혔다.

이날 강 목사는 당회서 추진 중인 헌법개정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이 개정안에는 장로 임기를 현 65세에서 70세로 연장할 것과 당회서 부목사의 신임투표를 매년 실시할것 등을 담고 있는데, 4일 열린 당회에서 표결에 붙여 27명 중 찬성 14명, 반대 11명, 기권 1명으로 통과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강 목사는 “부목사 신임을 당회서 투표로 묻겠다는데, 그런 교회를 본 적이 없으며 부목사들이 장로들에게 인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를 추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한 강 목사는 주택구입과 재정 문제 등에 관련된 의혹들에 대해 해명했다. 주택은 교회에 가까이 오기 위해 LA에 구입했으며, 금전적 어려움으로 이자만 갚는 프로그램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또 돈을 벌기 위해 외부집회를 다닌다는 주장은 자신의 건강상태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억지라고 말했다.

예배를 마친 후에는, 당회 서기인 한승수 장로가 강단에 올라 공동총회 소집을 위한 교인들의 서명을 당부하고 나섰다. 한 장로는 “뜻있는 장로와 권사∙집사들이 모여 공동총회를 청원키로 하고 교인들의 서명을 받기로 했다”면서, 담임목사가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교회개혁을 위한 임시 공동총회 개최 청원서에 서명과 함께 기도를 요청한다”고 말했다.

한편 청년들을 중심한 교인 100여명은 8일 예배당 인근 곳곳에서 ‘우리는 개혁을 원한다’란 문구가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강준민 담임목사 사의표명 철회 및 교회 개혁을 위한 임시 공동총회 개최’를 청원하는 서명을 받았다.

서명운동을 주도한 한 안수집사는 “공동총회 소집목적은 당회를 해산하고 교회를 개혁하자는 것”이라면서, 서명한 교인이 4000명을 넘었다고 밝혔다. 또한 부목사와 전도사 등 풀타임 교역자 전원이 8일 사임서에 서명해 강 목사에게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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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선교교회 강준민 목사, 사임의사 번복

교회 개혁으로 방향 선회… 외부사역도 줄이기로 [2006-10-23 09:10]

얼마 전 당회와의 갈등을 이유로 사임 의사를 밝혔던 미국 LA 동양선교교회 강준민 목사가 입장을 번복했다. 지난 10월 8일 주일 예배를 통해 당회장직 사의를 표명했던 강준민 목사는 22일(현지시각) ‘좋은 발자취를 남기도록 합시다’라는 제목의 주일 목회서신을 통해 사임하는 대신 교회 개혁에 앞장설 것을 천명했다.

강준민 목사는 서신에서 “그동안 헌법, 구조, 조직, 시스템에는 큰 관심이 없었으나 우리 교회가 시대가 변했고 교인 수가 많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구조에 의존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됐다”고 교회 개혁을 추진하게 된 취지를 밝혔다.

그는 “불변하는 진리를 전하기 위해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해야 한다”며 “죽은 것은 변화하지 못하며, 변화하지 않으면 죽게 된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어 “30년 전 영광스러웠던 교회들이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강준민 목사는 “눈 덮인 들판을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걷는 발자국은 뒷사람들의 길잡이가 되리니”라는 김구 선생의 말을 인용해 교회 개혁에 대한 비장한 각오를 비치기도 했다. 그는 “하나님과 이민교회, 조국교회의 시선이 우리 교회에 머물러 있는만큼 사명감을 갖고 개혁을 추진해야 할 것”이라며 “새 시대를 맞이해 ‘교회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기도하고 있다. 교회 개혁은 ‘장로’라는 존귀한 직분을 경시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교회가 존재하는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강준민 목사는 열왕기서 강해를 통해 교회 개혁을 강조해 왔다. 그는 19일 새벽기도회를 통해 교회 개혁을 반드시 완수할 것이며 내년에는 오엠캠 사역, 코스타, 레노바레 세미나 인도 외에는 어떤 외부 사역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동양선교교회는 오는 11월 5일 2부 예배 후 임시공동회의를 개최한다. 회의 안건은 ‘담임목사 사의 의사 표명 철회’와 ‘교회 제도·조직 개선 및 헌법 개정을 포함한 개혁을 담임목사에게 위임한다’는 두 가지다. 동양선교교회는 이를 위해 한 달여간 교인들의 서명을 받아 15일까지 출석 성도 4,506명의 서명을 받았다. 그 결과 지난 18일 임시당회에서 2차례의 투표를 거쳐 찬성 14표, 반대 13표로 임시공동회의 개최가 확정됐다.

공동의회에는 16세 이상 세례 받은자로 등록 교인이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으며 총회 참석자의 3분의 1이 찬성하면 안건은 통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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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도 당신 설교 듣느냐?"...교회 여성차별 여전
감리교 양성평등위원회, 교단 양성평등 지수 발표

감리교는 1955년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목사를 탄생시킨 교단이지만, 아직도 여성들의 위치는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여성교역자, 여성장로, 여성 총대.. 모두 한자리 수 미만

감리교 양성평등위원회가 23일 발표한 '감리교 양성평등 통계 자료집'에 따르면 우선, 여교역자의 비율은 전체교역자의 5.4%로 5명 가운데 1명이 여성 목사인 미국 감리교와 비교해 큰 차이를 보였다.

또, 전체 감리교인의 60%정도가 여성도지만여성 장로는 전체 장로 가운데 8.4%에 불과했다.

이는 소위 섬기고 봉사하는 일은 여성에게 집중돼있고 정책결정 구조에서는 여성이 배재돼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기도하다.

또, 이같은 결과는 총회의 총대 수에서도 드러나, 지난 해 입법총회 대표 751명중 여성은 34명인 4.5%에 불과했다.

여성 리더십...여신도가 오히려 더 부정적

이번 조사에서는 여성 목사 청빙과 여성 장로 선출에 있어 여신도들이 오히려 더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함을 보여줬다.

특히, 올해 신설된 ‘부부 목사, 같은 교회 사역금지’조항은 오히려 시대에 역행하는 제도로 지적되기도 했다.

"남편도 당신 설교 듣느냐?"

한편, 이번 조사에서는 여성 목회자가 겪는 여러 불평등 사례도 제시됐다.

그중에는 진급 심사 시 심사위원들의 성차별적 질문들이 도마 위에 올랐다.

"아이는 하나만 낳아라, 심방 갈 때 업고 다닐 거냐?" "남편도 당신 설교 듣느냐?" "얼굴이 예뻐서 남성 신도들이 좋아하겠다" 등.

이 외에도 부목사 청빙 조건 등에 '군필자' 등 남성을 요구하거나, 지금은 폐지된 기혼여성은 담임목사를 할 수 없다는 차별 조항으로 예전에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해 목회하던 교회에서 물러나야했던 사례들이 소개돼, 감리교회의 멀고먼 양성평등의 현주소를 보여줬다.
CBS TV뉴스부 조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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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대책협, 여자 피스퀸 컵 축구대회 주의 당부

한국기독교통일교대책협의회는 통일교측이 오는 28일부터 다음 달 4일까지 2006여자 피스퀸컵 국제여자축구대회를 개최하는 것과 관련해 어제(22일) 성명을 내고 기독교인들의 경계와 주의를 당부했다.

통일교대책협의회는 통일교측이 피스컵 대회에 이어 이번에는 여자 피스퀸컵 축구대회를 개최한다면서 통일교측 행사인만큼 각별한 주의와 함께 불참해 줄 것을 당부했다.

한편, 피스퀸컵 2006 국제여자축구대회는 2006 Peace Queen Cup Korea(피스퀸컵 2006 국제여자축구대회)란 명칭으로, 지난 달 20일 FIFA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았다.

이번 대회에는 한국, 이탈리아, 브라질, 캐나다(이상 A조),호주, 덴마크, 미국, 네덜란드(B조) 등 8개 팀이 참가해 조별리그를 치른다. 북한은 핵실험 여파로 참가할 수 없게 돼 네덜란드가 대체 팀으로 출전하게 됐다.

피스퀸컵 조직위원회(위원장:곽정환)은 지난 14일 오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패션디자이너 앙드레김 사무실에서 디자이너 앙드레김과 2006 피스퀸컵 국제여자축구대회 전야제 행사인 ‘앙드레김 패션쇼’ 조인식을 가진 바 있다.

한편, 통일교대책협의회(대표회장 최재우목사) 이영선 사무총장은 “통일교측이 축구를 통해 평화와 행복, 삶, 사랑, 희망 등을 피스퀸컵이 갖는 의미"라고 외치면서 신동아 보도사건을 통하여 폭력집단임을 스스로 인정한 결과를 보여주었다고 지적했다.
CBSTV뉴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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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봉 목사의 삶, 부흥운동, 그리고 회개
한국복음주의협회 세미나 ‘한국교회와 회개운동’

박명수교수 / 서울신대, 교회사

머리말
많은 사람들은 한국교회의 신앙이 1907년 대 부흥운동을 통해서 구체화되었다고 말한다. 1907년 대부흥운동의 핵심은 진정한 회개였다. 이것은 1907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성봉 목사의 삶과 부흥운동은 우리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준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이성봉 목사의 삶과 목회와 부흥운동에서 나타난 회개를 살펴보려고 한다.

필자는 이성봉 목사의 자서전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그의 자서전은 어거스틴의 참회록과 같이 자신의 죄악과 잘못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자서전은 일종의 참회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1. 유년시절과 회개

우리가 그의 자서전을 읽어 보면 그 첫 줄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의 선조와 부모님은 이렇다 할 가문이 못된다. 그 보다 더욱 죄에 얽매인 하류층의 가정이었는지도 모른다.”(17) 보통 자서전의 첫 줄은 자신의 가문을 자랑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자서전은 자신의 가문의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이것이 그의 위대한 점이다.

그는 곳 이어서 “우리 부모님이 모두 예수를 믿고 자기들의 죄의 고민으로 증인삼아 나를 데리고 산중으로 들어가 아버지는 아버지의 죄를, 어머니는 어머니의 죄를 회개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에 나는 부모님들의 죄악의 혈통을 이어받았음을 알게 되었다.”(17)고 말한다. 이것은 이성봉 목사가 어려서부터 회개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부모로부터 받은 기독교는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봉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원래 장로교회와 감리교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 같은 죄에 대한 고백은 당시 한국교회의 보편적인 모습이었고, 이성봉 목사는 이것을 계승한 것이다.

우리가 이성봉 목사의 자서전을 읽어 볼 때 우리는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같이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큰가를 강조하는 것을 본다. 그는 7세 때 동생이 태어났는데, 동생에 대한 질투가 생겼다. 그런데 그 동생이 세살 때 죽었다. 이것을 보면서 시원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내면에 “악착스러운 마음”이 있다고 고백하였다.(20) 이것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죄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내면의 죄성을 인식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의 자세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같은 고백은 그가 장성하여 기독교신앙의 깊이에 들어갔을 때 이루어진 것이다.

이성봉이 아홉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주일에 교회를 가지 않고 아버지가 모아 놓은 돈을 훔치기 위해서 아버지의 전대를 뒤지고 있는데, 외할머니가 들어오셨다. 그래서 순간에 그는 아버지의 전대를 붙잡고, 들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외할머니는 이성봉의 기도모습을 보고, 우리 손자가 신앙이 좋다고 칭찬하였다. 이성봉은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졌다고 감사 기도하였다.(21-22) 하지만 그 돈을 가지고 과자를 사먹었다. 여기에서 그의 기도는 죄에 대한 기도가 아니라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기도였다. 하지만 그 후 그가 참된 신앙을 가졌을 때 이것도 철저하게 회개하였다.

2. 이성봉의 최초의 회개

이성봉의 젊은 시절은 낙망과 좌절의 시기였다. 어머니가 교사로 있던 황해도 신천의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평남 대동군으로 돌아와서 농사를 도왔다. 큰 꿈은 있었지만 시골에서 과수원 일을 하였다. 그에게 유일한 희망은 돈을 버는 것이었고, 신앙은 점점 쇠퇴하였다. 21세 되던 6월 어느 날, 주일을 지키지 않고 과일을 가지고 평양에 나가서 물건을 팔고, 온갖 타락한 일을 다 하였다. 그런 데 돌아오는 길에 오른 쪽 다리가 뜨끔하고, 쿡쿡 쑤시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쓰러지고 말았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점점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것은 철저한 회개로 이어졌다. 이것은 이성봉 목사의 생애에 있어서 최초의 진정한 회개였다.

이 최초의 회개는 몇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첫째, 자신의 죄인 됨의 자각이다. “나는 이제 죄인인 것을 알았다. 법률상으로 지은 죄, 도덕상으로 지은 죄, 양심상으로 지은 죄 등등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나는 죄인인 것을 깨달았다.”(32). 그는 이것을 놓고 간절하게 회개하였다. 둘째, 어머니의 교육이다. 회개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회개에 대한 분명한 교육이 있을 때 가능하다.

이성봉의 어머니는 그에게 “회개하라. 죄 지은자가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지 않은 자가 지옥에 가는 것이다.”(32) 셋째, 사명에 대한 자각이다. 이성봉은 회개를 위한 기도를 하면서 이제는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고백하였다. "한번만 살려 주시면 이 몸을 주님께 바치고, 이 사실[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 증거 하겠습니다.“(33)

넷째, 회개는 새로운 삶을 제공해 주었다. 그의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평안을 주었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보게 되었고, 과거의 모든 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회개는 과거와 단절하게 만들었다. 다섯째, 그의 회개는 신유와 연결되었다. 하지만 당장에 신유가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미 은혜가 시작되었으나 병에서 완전하게 치유된 것은 3년 후였다. 그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연유로 조사를 받았으나 이 병 때문에 수감을 면하였다. 어쨌든 그의 회개를 결국에 가서는 신유로 이어졌다.

3. 경성성서학원과 회개

이성봉 목사는 1925년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 은혜를 체험한 그가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것이 장애물이 되었다. 그런데 경성성서학원의 소문을 듣고,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성결교회 교역자가 되는 훈련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곳에서는 나를 3년간 불가마에서 빚어냈는데, 지적으로는 별것이 없었으나 영적으로 부흥과 말씀과 신앙을 통하여 깊이 지도해 주시는 선생님들 … 그 중에서도 이명직 목사님은 나의 잊지 못할 은사이니, 그의 성경강의와 설교 때는 시간 시간이 은혜로왔다.”(38)

먼저 이명직 목사는 부흥회의 중심이 진정한 회개에 있다고 보았다.(이명직, <기독교의 사대복음> (서울: 성결교회출판부, 1952), 22-23.) 이명직 목사는 회개를 위해서는 첫째 철저한 죄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죄의 각성을 위해서는 율법이 필요하다. 루터는 율법은 병을 주고, 복음은 치료한다고 했다. 이명직 목사는 진정한 부흥회는 죄에 대한 설교에서 시작한다고 보았다.

죄에 대한 분명한 설교가 없이는 회개는 가능하지 않다. 이명직 목사는 죄와 더불어서 지옥에 대한 분명한 설교를 하였다. 심판을 말하지 않는 죄에 대한 설교는 파괴력이 없는 망치와 같다. 이런 점에서 이명직 목사는 설교의 목적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지 그들의 흥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둘째는 통회가 필요하다. 통회란 마음 속 깊이 뉘우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명직 목사는 부흥회 때에 통회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통성 기도를 하게 한다. 통성 기도는 한국교회와 성결교회 부흥회의 중요한 전통이다. 성결교회의 부흥회는 보통 설교 후 통성 기도로 이어진다. 성결운동은 부흥회 동안에 죄를 회개하고, 은혜를 사모한다는 의미에서 은혜좌, 곧 앞의 제단으로 신자들을 초청하였다. 이명직 목사도 상해의 집회 기간동안에 신자들을 은혜좌로 초청하기도 하였다. 이런 초청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분명하게 하도록 한다.

셋째는 고백, 혹은 자백(자복)이다. 이명직 목사와 한국 성결교회의 부흥회 기사를 보면 수 많은 죄의 자백이 나타나고 있다. 〈활천〉은 자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자복에 대하야,” 〈활천〉 (1924년 8월), 21.) “자복에 대하야 죄를 자복하야 바리지 아니하면 시톄를 방안에 둔 것과 갓하야 하나님의 말삼을 드를 마다 내암새가 나게 된다. 죄를 자복하는 것은 가나안 7족쇽을 멸하는 것이다. 죄를 자복하는 것은 나의 죄를 十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죄를 자복지 아니하면 항샹 마귀의게 위협을 당한다. 더러만 하는 자복은 아해낫고 후산 못한 것 갓다.”

넷째 배상이다. 배상은 지은 대로 갚는 것이다. 금전적인 죄는 금전으로, 말로 지은 죄는 말로 구체적으로 배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회개의 열매이다. 이런 것은 초기 한국교회에서 보편적인 것이었고, 특별히 성결교회에서는 더욱 강조되었다.

이성봉은 경성성서학원에서 특별히 “회개와 합당한 열매”를 강조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21세 때 회개했지만 아직 거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자신을 돌아보니 철저하게 회개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오래 전에 기차를 탈 때 나이를 속이고, 반표를 산 것이 생각이 나서, 총독부 철도국장에게 사죄 편지와 함께 4배의 요금을 보냈다. 그랬더니 사죄장과 함께 돈도 학비로 쓰라고 다시 보내왔다.(39)

이성봉의 부흥운동은 그의 신학교시절 주일학교 부흥운동부터 시작한다. 성서학원에 다니면서 그는 1927년 경북김천에서 여름에 봉사하게 되었고, 이 때 주일학교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이성봉은 주일학교 학생들에게도 역시 회개를 강조하였다. 그랬더니 순진한 어린 심령들이 다 자백하고 무서운 죄를 회개하였다. 여기에 놀란 사람들은 이성봉을 비난하였고, 신문기자들은 찾아와서 어린이를 마취하였다고 공격하였다.(40)

성결교회는 소아 부흥집회를 종종 개최하였는데, 역시 죄의 회개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이것은 어린아이도 원죄 아래 있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죄를 깨달을 수 있고,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있다는 신학에 근거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의 낙관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일반교육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4. 이성봉의 목회시대와 회개

이성봉 목사의 첫 번째 목회지는 수원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회개의 복음을 외쳤다. 그 결과 어느 날 새벽기도 후 한 청년이 일곱 가지 죄를 써가지고 와서 죄를 자복하였다. 그 중 하나가 황해도 국무농장에서 사무원으로 있을 때 공문서를 위조하고 횡령한 것이었다. 이 청년은 죄에 대한 변상으로 교회에 헌금하겠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이성봉은 변상은 그 대상자, 곧 농장에 하라고 권하였다. 결국 이 청년은 고민하던 중, 말씀에 순종하여 자복서를 농장 주임에게 보냈다. 얼마 후 농장주임은 자복서에 감복했다는 내용과 함께 용서한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것은 초기 한국교회와 성결교회의 전통이었다.

이성봉에게 회개는 일회성이 아니라 평생의 과제였다. 수원교회에서 목회하던 중, 몸이 몹시 쇠약하여 졌는데, 혼몽 중에 “이제 살기 어렵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자신 속에 회개하지 못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내를 불러서 증인을 삼고, 자기 청년시절에 연애하던 시절을 고백하였다. 사탄은 이것을 방해했으나 끝까지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고, 회개하였다. 긴 고통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그는 큰 은혜를 받았고, 몸은 온전히 치유를 받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회개, 은혜 체험와 신유는 연결되어 나타났다.

이성봉 목사의 두 번째 목회지는 목포였는데, 여기에서도 그는 회개의 복음을 외쳤다. 이 설교를 들은 그곳 신문사 사장 소실이 회개하고 첩살림을 청산하였다. 이것을 핑계로 신문은 이성봉 목사가 가정을 파괴했다고 신문에 기사를 내 보내기도 하였다. 또 일부 청년들은 이성봉 목사를 축출하고자 그가 설교에서 너무 죄를 많이 지적한다고 총회본부에 불만을 보고하기도 하였다.(53-54)

이성봉 목사의 세 번째 목회지는 신의주였다. 이곳에서 그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은 이곳에서 회개한 이야기를 길게 설명한다. 그것은 주일 아침에 설교준비를 하는데, 아내가 닭을 잡으라고 해서 싫지만 억지로 닭을 잡으러 나갔다. 그러나 닭은 이성봉 목사의 오른 손에 상처를 남기고 날아갔다. 매우 아팠다. 아픈 손을 잡고 기도하다가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자신은 주의 종이라는 이유로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미루었다. 그는 “다시는 나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미루지 않겠습니다.”라고 회개하였다.(60) 이성봉의 회개 이야기는 거창한 회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일어난 것들도 많이 나오고 있다. 매일 매일 주와 동행하려고 하는 그의 삶은 회개로 이어졌던 것이다.

5. 이성봉의 부흥회와 회개

1937년 성결교회 총회는 이성봉을 전국순회부흥사로 임명하였다. 이제 이성봉 목사는 개교회 목회에 구애받지 않고, 전국으로 돌아다니면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이성봉 목사의 부흥집회는 수많은 회개운동을 일으켰다. 특별히 여성들은 이성봉 목사의 회개 외침에 진정으로 응답하였다. 당시 한국여성들의 가장 큰 문제는 축첩이었다. 이성봉 목사의 집회에는 많은 첩들이 나오게 되었고,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자 첩 생활을 청산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함북 웅기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어느 부잣집 소실이 복음을 듣고 첩살이를 포기하였다. 이 여인에게는 자식이 3남매가 있었는데, 남편은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돌아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돌아오지 않고 혼자 장사를 하며 교회에 충성하였다. 남편은 나중에 이 소식을 듣고,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이 여인은 이 재산으로 자녀를 키우며 교회를 섬겼다. 믿음으로 승리한 것이다.(71)

이성봉 목사는 일제말 평양의 3개 노회(평양, 강서, 안주) 연합집회를 인도한 경험이 있다. 이 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는데, 그 중 가장 클리이막스는 살인죄의 회개였다. 이 집회에 참석한 최경자라는 신자가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평양경찰서에 찾아가서 살인죄를 회개하였다. 원래 이 여인은 결혼해서 아니 셋을 나았는데, 얼마가지 않아서 남편이 죽고, 곧 이어서 아들이 죽고, 따 둘 남았다. 이 두 딸을 데리고 친정에 갔으나 부모는 이혼했고, 어머니에게 갔지만 박대하였다.

그래서 작은 딸을 죽여 버리고, 큰 딸을 데리고 동해바다에서 자살하려고 했는데, 딸이 “어머니 살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돌아와서 선교사집에서 식모생활을 하다가 이성봉목사의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회개한 것이다. 경찰이 조사를 해 보니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상을 참작한 경찰은 이 여인에게 일년 징역에 3년 집행유예를 선고하였다. 이 여인은 기간을 지나고 나와서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였다.(89)

그러면 이성봉 목사의 일제말 행적은 어떠했는가? 일제 말을 지나온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다. 이성봉 목사는 일제 말, 가능한대로 신사참배를 피해 보려고 노력했다. 당시 집회를 열려면 경찰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이 과정에서 뇌물이 오가기도 하였다. 이성봉 목사는 이것을 마음 아파했다. 이성봉 목사는 이런 상황이 싫어서 일제 말에는 만주로 가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종종 조선으로 와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집회에서 재림의 복음을 주장하였고, 이것이 일본경찰에게 들어갔다. 그래서 사리원에서 검거되었다. 하지만 6개월 만에 기소유예로 풀려나왔다. 이렇게 일제에 의해서 고난을 받았지만 이성봉 목사는 자신의 신앙이 완벽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일제말의 행적이 오십보, 백보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일 뿐 실지로는 신앙의 정조를 다 지키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화간과 강간을 구분한다. 화간은 자신이 원한 것이요, 강간은 강제로 당한 것이다. 자신의 모습은 일제에 의해서 강간을 당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강간인지 화간인지는 하나님만이 판단할 문제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항상 일제 말 자신이 보다 강하게 신앙의 종조를 지키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있다.(91-92)

6. 이성봉 목사의 회개의 특징

우리는 이상에서 이성봉 목사의 자서전에 나타난 회개를 살펴보았다. 이제 그의 자서전에 나타난 회개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그는 철저한 회개의 교육을 받았다. 그의 부모는 신앙을 가진 후 자식을 증인삼아 회개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성봉의 회개는 부모의 회개교육에서 출발한다.

둘째, 이성봉 목사는 인간 본성의 타락을 믿었다. 그는 신학적으로 원죄를 믿었고, 실질적으로 자신은 죄 중에 태어났다고 고백하였다. 성결교회의 목사인 그는 단지 자범죄만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있는 죄성, 곧 죄악의 쓴 뿌리를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것은 그의 회개 운동이 깊은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이성봉 목사는 구체적인 자범죄를 지적하였다. 이성봉 목사는 인간의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죄에 대한 구체적인 지적이 없는 곳에 죄에 대한 구체적인 회개가 없다. 이성봉 목사는 죄를 지적한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배척운동을 당하기도 하였다.

넷째, 이성봉 목사는 자백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그의 회개 모습을 보면 단지 하나님 앞에서 혼자 회개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증인 삼아서 회개하였다. 그의 부모는 자식을 증인삼아서 죄를 자백하였고, 자신은 아내를 증인 삼아서 연애사건을 자백하였다. 이것은 죄의 고백이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의 회개 운동의 강점이 있는 것이다.

다섯째, 자백에는 변상, 곧 회개의 열매가 강조되었다. 이성봉 목사는 죄의 고백에는 거기에 합당한 대가를 치룰 것을 요구하였다. 물질적으로 훔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배상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힌 것이 있으면 가서 사과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배상할 대상이 없으면 그것을 교회에 헌금하라고 가르쳤다. 이런 회개 운동은 구체적인 역사로 나타났다.

여섯 번째, 변상은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이것을 변상할 때 일반사회는 놀라게 되었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에는 부정한 물질이 많이 있지만 이것을 회개하고, 변상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런 변상운동은 사회로 하여금 기독교인의 다른 모습을 보게 만들었고, 결국은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해 주었다.

일곱 번째, 이성봉 목사의 회개운동은 신유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성봉은 여러 차례 질병을 앓았다. 하지만 그는 이럴 때 마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회개하였다. 이런 신유와 함께 그는 병에서 치유되었다. 죄의 회개는 내면의 치유뿐만이 아니라 육체의 치유로 이어진 것이다.

여덟 번째, 그의 회개운동은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이해된다. 이성봉 목사는 항상 그리스도의 재림의 빛 아래서 매일 매일 살았다. 재림의 복음은 자신을 살펴보게 만들고, 다시 오시는 신랑되신 그리스도 앞에서 순결하게 서기 위한 몸부림이 바로 회개였던 것이다.

맺는 말: 이성봉 목사의 회개와 한국교회

이성봉 목사의 회개운동은 1907년 대부흥운동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미 잘 알려졌듯이 1907년 대부흥운동의 특징은, 회개와 자백과 변상이었다. 이것은 한국교회를 갱신했고,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성봉 목사의 회개운동은 이것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성봉 목사의 회개운동은 성결교회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성결교회는 자범죄의 용서와 원죄의 정결을 강조한다. 전자를 중생이라고 하고, 후자를 성결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신유와 재림과 연결된다. 이성봉 목사의 회개운동은 사중복음적으로 전재된다.

이성봉 목사의 부흥운동은 회개를 통한 진정한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은 그 이후의 부흥운동과 구분되는 것이다. 이성봉 목사 이후의 부흥운동이 회개를 통한 진정한 변화 보다는 신비적인 은사와 물질적인 축복에 강조점을 두어왔다. 물론 이성봉 목사의 부흥집회에 이런 요소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강조점은 회개를 통한 진정한 변화였다. 이런 점에서 이성봉 목사의 부흥운동은 그 이후의 부흥운동과는 구분된다. 지금 한국교회는 진정한 회개를 통한 참된 부흥을 갈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성봉 목사의 회개운동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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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선주 목사의 회개
한국복음주의협회 세미나 ‘한국교회와 회개운동’
김인수 교수 / 장신대 역사신학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전후하여

-들어가는 말
내년이면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 난지 꼭 100년이 된다. 이때를 기해 한국교회는 다시 한 번 부흥운동을 재현하려고 각종 행사와 세미나, 강연회, 설교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진행하고 있다. 1907년의 부흥운동이 없었다면 진정한 한국교회는 없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부흥운동은 교회를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교회로 탈바꿈하게 한 전기가 되었다. 그 이유는 한국 교인들이 이 운동을 통해 진정한 기독교가 가르친 회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의 중심에 길선주 목사가 서 있다. 그는 이 운동에서 참회의 경험을 다시 하게 되었고, 또한 이 운동을 이끌고 가는 견인차 노릇을 하였다. 그는 전국 교회에 다니면서 이 운동의 불길을 계속 당겼고, 성령의 역사를 통한 참회의 집회를 이끌었다.

길선주는 본래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으나 후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고, 평양 장대현교회를 목회하며서 <말세학>을 저술하여 이것을 갖고 전국교회를 다니면서 종말론 사경회를 인도한 우리 교회의 선각자요, 말씀의 사도였다. 여기서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또 어떻게 참회의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 길선주 목사의 간추린 생애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 또는 “가장 위대한 한국 개신교 인물 중에 한사람“ 인 길 선주는 1869년 3월 15일 평안북도 안주에서 부 길봉순과 모 노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일곱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 한학자 정씨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그가 열 한 살 되었을 때에 당시의 습속에 따라 안주성에 거주하는 신 협씨의 외동딸 선행 양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 1녀를 두고 해로하면서, 말년까지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는 15세 때에 초인(招引)이란 군속(郡屬)으로 잠시 있다가, 다시 학업을 계속 하다가 17, 8세 어간에 평양에서 장사를 하기도 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정리하고 친구 몇과 더불어 평양 근처의 용악산에 입산하여 수도하다가 병에 걸려 하산하고 말았다.

그는 병도 고치고 도(道)도 닦을 겸 조용한 곳에 가서 수양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용악산에 들어가 관성교에 심취하여 그 교의 주문인 보고문(譜告文)을 만독(萬讀) 하였다. 어느 날 그는 어떤 도인을 만나 그가 써준 차력주문(借力呪文)을 7일 동안 외우는 중에 잡념이 없어지고, 심신이 상쾌하고 무아의 경지에 이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관성교에서는 더 이상의 어떤 영적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 그는 관성교를 포기하고 21세부터 선도(仙道) 수련에 몰두하였다. 이 때 얻은 건강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길선주의 종교 편력은 다양했지만, 아무 것도 그의 영적 만족을 주지 못 했을 뿐만 아니라, 갈증만 점증 시켰다.

그러던 중, 평양성에 양귀(洋鬼)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는 생전 보지 못했던 서양 사람이 나타난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1890년 8월 29일에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마포삼열(Samuel A. Moffett)이 처음으로 이곳에 와서 약 2주일간 머물면서 선교의 교두보를 확보할 가능성을 엿 보고 있었다. 약 3년 후에 마포삼열은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고 후에 길선주와 함께 첫 신학교 졸업생이 된 한석진이 마포삼열을 도와 선교 활동에 조력하였다.

길선주는 서양 종교에 관심이나 흥미가 없었음으로 무관하게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서양 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에 대해 적개심까지 갖게 되었다. 그의 가까운 친구인 김종섭이 마포삼열과 교분을 가지면서 길선주에게도 기독교 신앙에 대해 탐구 해 보라고 강권하면서, 여러 가지 기독교 교리서를 갖다 주자, 학문적 탐구심이 강한 길선주는 그 책들을 탐독하면서 차차 기독교 진리에 대해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를 기독교로 이끈 결정적 책자는 번연의 <천로역정>이었다.

후에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를 기독교 신앙으로 이끈 또 하나의 요인은 서울에서 원두우(Horace G. Underwood) 선교사가 발행하고 있던 <그리스도 신문>의 기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기술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길선주가 결정적으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것은 김종섭의 권유에 의한 기도 중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경험에서였다. 그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알기 위해 깊은 명상과 기도에 열중하면서 결정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 체험의 일단을 그의 아들 진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예수가 인류의 참 구주인지 알려 주옵소서.”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옥피리 소리가 방을 진동하더니 요란한 총소리에 선생이 깜짝 놀라는 순간, 공중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하고 세 번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너무나 무섭고 떨려서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엎드린 자세대로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여, 제 죄를 사하여 주시고 저를 살려 주옵소서”하고 기도 하였다. 그때 비로소 마음이 터지면서 열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스스로 죄인임을 깨달아 방성대곡하였다....선생의 기도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되었다....마음에는 기쁨이 용솟음 치고 감사한 눈물이 샘물처럼 넘쳐흘렀다...예수가 구주임을 알게 해 달라고 상제께 기도드릴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순간에, 선생은 그 자신이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었다.

길선주는 19세에 관성교에 입문하여 29세까지 선도에 몰입하였다가, 아프리카의 성자 아우구스티누스처럼 결국 기독교에서 그의 영적 만족을 얻게 된 것이다.
길선주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은 바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관성교도 선도도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죄를 말하는 것은 기독교뿐이다. 특히 도둑질, 간음, 살인 같은 죄는 거의 모든 부족과 민족이 죄로 치부하지만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죄, 다시 말하면 하나님 이외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죄 중에 가장 큰 죄임을 주장하는 종교는 기독교가 유일하다. 따라서 기독교는 소위 종교다원주의를 배격하는 것이다.

길선주의 회개는 바로 이 핵심적인 기독교 진리에 관한 회개였다. 하나님을 불신한 죄의 참회,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이다. 세례 요한의 첫 마디가 “회개하라”였고, 예수님의 공생애 첫 말씀도 “회개”였다. 회개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회개 없는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길선주의 첫 번째 회개는 바로 하나님 불신의 죄악이었다. 십계명의 제1, 그리고 제2계명을 어기는 죄가 가장 큰 죄이다.

따라서 일제 말엽 신사참배를 한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죄는 무겁고, 참회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짐이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고 한 계명을 지키기 위해 온 몸으로 사탄과 싸워 이긴 주기철 목사를 위시한 감옥에서 순교한 50여명의 목사들의 거룩한 피로 우상 앞에 고개 숙이고 있었던 당시 목사들의 더러운 죄를 씻어 내렸던 것이다. 길선주는 1897년 7월 12일 삼십 세 되던 해에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길선주는 개심 하던 해에 영수 직을 받았고, 33세에 장대현교회 장로에 선출되었다. 1902년에 마포삼열 선교사는 그에게 평양 장대현교회와 황해도 각 교회의 조사(助事) 임무를 부과하였다. 그는 비록 보잘 것 없는 보수였으나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 일에 진력하였다. 1903년에는 당시 마포삼열 선교사에 의해 새로 시작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교하여 1907년에 제 1회 졸업생으로 졸업하여 그해에 설립된 독노회에서 안수 받고, 장대현교회에서 시무를 시작하여 20년 동안 목회 하다가 교회의 분규로 이향리교회를 창립(이 이향리 교회는 사실 길선주 목사가 창립 한 것은 아니고 그를 따르는 교인들이 장대현교회에서 길 목사를 배척하므로, 따로 떨어져 나와, 이향리에 교회를 세우고, 길 목사를 청빙 하여 이루어진 교회이다. 참조, “靈溪先生小傳,” 74 이하.)하여 목회 하면서 전국 교회의 부흥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과 길선주의 회개

1907년 정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남자 도사경회가 개최되었다. 이 사경회는 매년 열리는 연례행사였지만, 이때의 사경회는 한국교회가 새로 태어나는 결정적 전기가 되는 대 사건이었다. 이 부흥운동은 일찍이 1903년 원산 지방에서 선교하던 선교사들이 한 주간동안 성경공부를 겸한 기도회를 가질 때 이 지방에서 선교하고 있던 남감리회의 소속 하디(R. A. Hardie)선교사가 선교 사역의 결과가 없는 것을 통한이 여기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고백한데서 발단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06년 가을부터 길선주는 장대현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를 시작하였다. 그는 기독교에 입문하기 전 관성교와 선도에서 행하는 새벽예불을 일상적으로 해 왔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한 후부터 새벽예불 대신 새벽기도를 하였다. 한국 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세계 어느 나라 교인들 보다 기도에 열심인 것은 수천 년 동안 내려오면서 새벽기도를 드린데 기인한다.

길선주는 1906년부터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친구인 박치록 장로와 더불어 규칙적으로 새벽기도를 시작하였다. 길선주가 새벽에 예배당에서 기도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교인들 중에도 예배당에 나가 기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약 300-500명이 매일 모이는 집회로 변했다. 장대현교회 시무 장로였던 길선주는 당회의 허락을 얻어 정식으로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다. 이때가 1906년 가을로 이것이 한국교회의 전형적인 기도회 중 하나인 새벽기도회가 비롯된 시점이다.

이 새벽 기도회는 한국교회의 특징적 기도 중 하나로 세계 어느 곳이거나 한인교회에서는 새벽기도회가 열린다. 로즈 선교사는 새벽기도회의 종이 한국의 새벽을 깨웠다고 기록한 일이 있다.

사경회나 부흥회에 새벽 기도회는 일반적이다. 어떤 사람은 새벽 2, 3시경에도 온다. “많은 동네의 새벽 고요는 새벽 4시에 치는 교회의 종소리가 깨뜨린다.” 밖에는 살을 어이는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예배당 안도 그런 추위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따뜻하고, 그들의 기도는 열정적이다.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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