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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 와 신앙인의 태도 /예레미야 29장 11-14/ 노창영목사 /코로나 바이러스와 성령, 마귀의 역사 유기성 목사
    2020-03-13 10:14:13   read : 287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서론// 중국 우한시에서 발생한 폐렴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어제 통계를 확인해보니 신종코로나바이러스(Corona Virus Disease 2019; COVID19)로 인하여 3,150명이 확진, 17명이 사망했습니다. 치사율은 0.539%입니다. 예배를 안 드리는 교회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안 드린다는 것은 영적 흐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이 상황이 두 달 정도 간다면 교회들이 휘청거릴 수 있고, 근간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 앞으로 어떻게 상황전개가 될지 모르겠지만 오늘 예배를 통해 은혜 받고 결단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중세시대에 참절한 흑사병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Ⅰ. 흑사병과 종교개혁자들의 대응

    코로나19는 감염력이 굉장히 강합니다. 그러나 치사율은 상대적으로 낮고, 경증환자가 80%, 중증환자가 20%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무서운 전염병은 흑사병입니다.

    이러한 흑사병은 종교개혁시대에도 창궐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흑사병에 대응을 했는데 이들의 대응모델이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우리에게 교훈을 줄 것입니다.

    A. 흑사병에 대하여

    흑사병(黑死病)은 말그대로 “검은 죽음의 병”, “Black Death”입니다.
    흑사병은 쥐벼룩이 매개가 되어 박테리아 일종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가 원인균으로 임파선, 호흡기폐렴, 패혈증을 일으켜 사람의 몸을 파괴시켜서 피부가 검게 타들어가게 하는 질병입니다. 지금은 항생제가 발달되서 흑사병으로 죽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몇 년 전에 흑사병이 중국에서 발병했지만 걸린 사람은 살아났습니다. 역사적으로 크게 흑사병이 4차례 왔었습니다.

    ➀ B.C. 2세기경 그리스지역에 흑사병이 돌았습니다. ➁ A.D. 2세기와 6세기에 로마의 안토니오와 유스티니안황제 때 왔었는데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➂ 대흑사병은 중세시대의, 1347-1351년까지 4년간 있었던 전염병입니다.

    이때 유럽인구의 1/3이 죽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300년간 주기적으로 국지적으로 유행하였습니다. 당시에 흑사병의 치사율은 50%가 되고, 치료 안 받으면 24시간 안에 거의 다 사망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목회하던 시절에도 흑사병이 돌아서, 흑사병자들을 돌보는 것이 하나의 목회에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종교개혁자들이 흑사병에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한국의 6명의 신학자들과 직접 대화하면서 찾아보았습니다.

    B. 흑사병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대응

    종교개혁자들이 겪었던 흑사병에 대한 대응을 모델로 삼을 수 있다면 우리의 코로나19에 대안이 신앙적 방향을 설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울리히 츠빙글리(Uldrich Zwingli, 1484-1531) 츠빙글리는 스위스 취리히(Zurich)에서 목회했던 하나님의 종입니다.
    1519년에 취리히의 목사로 취임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 9월에 흑사병이 돌아서 츠빙글리가 흑사병에 걸렸습니다.

    두 달 동안 죽음의 문턱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과의 관계를 끊고 스위스 종교개혁에 터닝 포인트를 만드는 계기되었습니다. 하지만 흑사병으로 츠빙글리는 자녀를 잃었습니다.
    당시의 취리히 7,000명의 인구 중에 2,000명이 죽었습니다. 그는 이후에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기 위해서 “흑사병의 노래(The Song of Plague)”를 만들었습니다.

    이 시는 “하나님, 제가 곤경 중에 있습니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주님이시여, 나를 도우시고 회복시켜주시고 소망가운데 함께 하여주시옵소서. 믿음으로 주님께 순종하겠나이다.”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 노래를 종교개혁자가 만든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칭송을 했습니다.

    2.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5-1546)

    루터는 1517년 비텐베르그(Wittenberg)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세운 목회자입니다. 1527년에 비텐베르그에도 흑사병이 돌아서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갑니다. 이것을 본 작센주의 선제후 요한(John)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루터와 목회자들과 교수들은 비텐베르그를 떠나서 예나(Jena)로 피신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피신하지 않고 끝까지 남아서 성도들을 돌보고 강의하고 설교하면서 믿음의 모습을 지켜나갔습니다. 루터는 전염병이 왔을 때 이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지만, 가만히 있지 말고 인간이 해야 할 도리를 하도록 했습니다.

    약도 쓰고, 손과 집을 소독하고, 큰 모임에 가는 것을 조심하므로 자신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목회자들이 흑사병으로 목회지를 떠나 도망갔음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3. 장 깔뱅(John Calvin, 1509-1564)

    깔뱅은 프랑스의 누아용(Noyon) 사람입니다. 그는 어머니를 흑사병으로 잃었고, 흑사병 때문에 고향을 떠나 파리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1538~1539까지 제네바(Geneva)의 목회자로 있었고, 과감한 개혁을 했었지만, 제네바사람들이 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3년 동안 스트라스부르그에 가서 목회를 하면서 흑사병자들도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1541년, 3년 만에 제네바로 돌아와 목회를 하게 됩니다. 1542년에 제네바에서 목회를 하던 때에도 흑사병이 돌았습니다. 장 깔뱅을 보호하려고 제네바시에서는 깔뱅이 흑사병 환자를 돌보지 않도록 하는 권고안을 냈지만, 깔뱅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의회에서는 깔뱅을 보호하려고 다른 목회자들이 흑사병자를 돌보도록 했고, 이로 인하여 장 깔뱅은 마음아파했습니다. 장 깔뱅은 목회자의 직무는 양과 함께 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4. 데어도어 베자(Theodorus Beza, 1519-1605)

    종교개혁자가운데 가장 오래 산 장수자인데 86세까지 살았고, 무려 41년동안 제네바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는 장 깔뱅이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 함께 했던 목회자입니다.
    그가 목회를 할 때, 1568년~1571년 사이에 흑사병이 돌아, 당시 제네바 인구가 12,000명이었는데 도시인구의 25%인 3,000명이 죽었습니다.

    깔뱅 때와 마찬가지로 제네바시의회에서는 베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흑사병을 돌보는 일에 배제시키려 했지만, 흑사병자 돌보는 일에 누구를 보낼지 결정하는 제비뽑기에서 베자는 시의원들에게 자신도 보내달라고 하면서 제비뽑기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목회자가 뽑혀서 갔습니다.

    이 일이후에는 특별한 목회자가 흑사병자를 돌보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흑사병자를 위해서 모든 교구에서 공동목회책임을 가졌다고 합니다.

    베자는 1579년에, 『전염병에 대한 보고서(The Treatise of Plague)』라는 책을 썼습니다. 주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흑사병이 왔을 때,
    ➀ 목회자는 최선을 다해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➁ 혹시 자기목숨이나 가족을 위하여 떠나는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➂ 그리고 치료와 예방에 최선을 다하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➃ 그리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Ⅱ. 코로나19와 신앙인의 태도

    A. 기본적인 두가지 태도

    1. 목회자와 교회는 예배, 말씀, 기도, 목회적 돌봄을 포기하지 말고 책무를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주님의 일인 예배, 말씀, 성례전, 기도와 같은 영적 책무를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선한 목자는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10:15)는 각오로 일해야 합니다.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흑사병이 유행하는 중에도 예배와 말씀과 성례전과 어떤 것도 등한시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마음속에 기억해야 합니다.

    2. 이성과 경험으로 예방과 치료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목회와 예배가 중요하지만 예방과 치료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상생활의 범위를 최소화하고, 상식을 따라 손도 잘 씻고 마스크도 하면서 예방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인간의 이성과의 사이에서 적절한 조화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B. 예레미야 29:11-14에 나타난 말씀의 적용

    1. 하나님의 생각은 평안과 장래의 소망입니다(29:11)

    본문11절에서 이스라엘이 죄의 댓가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며, 이는 재앙이 아니고 평안이고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바벨론은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 움직이는 제 2동인(The Secand Cause)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고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제 1동인(The First Cause)은 하나님이십니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의 우한시 코로나19의 발병, 신천지의 모임과 술수와 거짓, 정부에 대한 늦장대응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 뒤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역사의 제 1동인이 되십니다.

    제 2동인은 이 땅에 있는 여러 손길들입니다.
    요셉은 애굽에 끌려갔어도 형들을 미워하지 않았고, 보디발과 보디발의 아내를 손가락질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재앙,고난이 하나님의 손길임을 알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는 통계나 사건이나 뉴스하나 때문에 울고 웃고 하면 안 됩니다. 그 뒤에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모든 일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롭게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코로나19으로 지금은 힘들지만 하나님의 더 큰 손길과 축복이 될 것임을 알아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2. 회복을 위하여 전심으로 부르짖어야 합니다(29:12-14)

    솔직히 우리는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기도할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너무 배가 불렀고, 너무 편안했고, 너무 잘나갔습니다. 때로 힘든 일도 있었지만 별로 어려움없이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바벨론포로로 잡혀가는 이 때가 기도할 때이므로, 그리해야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만나시고 들으시고, 흩어진 모든 백성을 돌아오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금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고,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고, 염병으로 유행하게 할 때, 너희가 겸비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내가 죄를 용서하고 그 땅을 고쳐주겠다는 약속(역대하7:13-14)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기도하지 못했던 것을 나태함을 자복하시고, 자기 자신의 죄를 회개하시고, 가족, 교회, 민족, 국가를 위하여 기도하셔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될 줄 믿고,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는 모든 성도, 승리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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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기성 목사 “코로나 바이러스와 성령, 마귀의 역사 /코로나 바이러스가 몰고 온 ‘죽음의 공포’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보면서 훨씬 더 무서운 죄의 바이러스,마귀의 역사를 생각하게 된다

    ▲유기성 목사(선한목자교회).

    우한폐렴 사태로 국가적 어려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여수 성동교회에서 목회자 예수동행 세미나를 인도 중인 유기성 목사(선한목자교회)가 ‘바이러스와 성령’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4일 SNS에 게재했다.

    유기성 목사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에도 신청한 목회자 부부가 거의 다 참석하셨고, 지금까지 진행된 어떤 세미나보다 깊은 은혜가 있어 놀랍고 감사하다”고 밝혔다.

    유 목사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두려움이 사람들 사이에 급속히 퍼지고 있다. 치료약도 없다는 바이러스가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계속 퍼져가니 두려울 수 밖에 없다”며 “지난 주일예배 인원도 많이 줄었고,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도 눈 인사만 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의식하니,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달라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보면서 훨씬 더 무서운 죄의 바이러스, 마귀의 역사를 생각하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 다니고 있다”며 “수많은 사람들이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고, 죄의 전염은 무섭게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그 심각함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유기성 목사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감염된 증상을 통해 존재를 알 수 있다. 열이 나고 기침이 나고 폐렴을 일으키는 것”이라며 “마귀의 역사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증상이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은밀한 죄와 음란과 탐심, 거짓과 분노 등으로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했다.

    유 목사는 “때때로 말도 안되는 침울한 감정에 휩싸일 때가 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고, 그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지기도 한다”며 “‘내가 왜 이러나?’ 싶은데도 좀처럼 마음이 회복되지 않는다. 그 때 영적 공격을 깨달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에 푹 빠져 살다가, 끊었던 음란물을 다시 보고는 깊은 좌절감에 빠진 분이 있었다. 즉시 회개하고 돌이켰지만 마음이 무너진 상태는 꽤 오래 갔다”며 “그는 ‘주님과의 친밀한 느낌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점점 모든 것이 다 부질 없어 보이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책임있는 행동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제게 그렇게 말하던 중 스스로 깜짝 놀라워했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생각만 할 때는 몰랐는데, 말로 표현하다 보니 그것이 마귀가 주는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라며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생각이다. 마귀가 주는 생각과 감정이 있다. 언제 그런 생각을 넣어주는지 스스로 알 수 없기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소개했다.

    유기성 목사는 “그러나 우리는 마귀의 역사보다 더 강력한 성령의 역사에 주목해야 한다”며 “‘나는 성령 체험이 없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는데, 그럴 수 없다. 구원받았으면서도 성령의 체험이 없는 성도는 없다”고 강조했다.

    유 목사는 “성령을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구원받은 성도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 증거는 너무나 분명하다. 부인할 수 없는 뚜렷한 증거가 나타난다”며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고전 12:3).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롬 8:15-16).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깨닫게 된다(고전 2:12).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생긴다(요일 4:12-13). 성령의 근심하심을 깨닫는다(엡 4:30). 하나님을 향한 소원(빌 2:13)과 전도할 마음이 생긴다(행 1:8)”고 밝혔다.

    그는 “예배 때만이 아니라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예수님은 주님이시고, 하나님은 아버지임을 고백할 수 있다면,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계신 것”이라며 “그것이 성령의 역사임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유 목사는 “우리가 그렇게 항상 성령을 의식하며 살면, 삶이 놀랍게 변화될 뿐 아니라 성령 역사가 주위 사람들에게도 놀랍게 퍼져간다”며 “사도행전 24장에서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사도 바울을 고발하면서 ‘이 사람은 전염병같은 자라’고 했다. 바이러스는 사람을 죽이지만, 성령의 역사는 사람을 구원한다”고 역설했다.

    또 “실제로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에 임하시면 감정과 생각이 달라진다, 죄는 유혹이 아니라, 가장 어리석은 행위처럼 보인다. 의는 손해나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행위처럼 보인다”며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면 얼마든지 감수하고 인내할 수 있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는 부르심에 조금도 망설임 없이 ‘예’ 하고 크게 대답하게 된다”고 했다.

    유기성 목사는 “우리에게 어떤 놀라운 체험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를 주목하며 늘 주님을 바라보며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며 “마귀가 이것을 알기에 사람들 마음을 어둡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게 역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이처럼 마귀의 역사를 허용할 때, 교회와 성도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따분함이다(고후 4:4). 성령께서 임하셨는데도 따분한 것은 기적”이라며 “보이지 않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조심하기만 해도 일상의 삶이 변화된다면, 보이지 않는 성령의 역사를 주목하며 순종할 때 우리의 삶이 어찌 변화되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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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바이러스가 몰고 온 ‘죽음의 공포’, 크리스천이라면…

    [이경섭 칼럼] 죽음은 궁극의 권세자가 아니다

    ◈죽음에 절대 권세를 부여하는 이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탐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상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탐심을 ‘우상 숭배(골 3:5)’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만이 우상이 아니다.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 역시 일종의 우상이다.

    이는 하나님의 ‘보호와 능력’보다 그것의 ‘능력과 강함’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의 보호를 믿는다고 하면서, 마귀를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므로 무의식적으로 마귀를 숭배한다.

    또 하나님보다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므로 ‘죽음 숭배자(death- idolater)’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극단적 공포를 드러내므로,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자 됨’을 부인한다.

    그들에겐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삼상 2:6)”, “하나님의 허락 없인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마 10:29)”는 말씀이 사문화(死文化)된다.

    인류에 대한 ‘사망의 왕 노릇(롬 5:17)’은 한시(限時)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권세일 뿐, 언젠가 생명에 삼킴을 당할 때가 온다(고후 5:4).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는 말씀은 사망이 영구적 권세자가 못됨을 가르쳐 준다.

    최후에 남게 될 최종적 권세자는 ‘사망’이 삼킴을 당할 ‘생명’이다. 개인적으로는 죄의 몸을 벗는 그 순간이 될 것이고, 우주적으로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몸의 부활 시(時)이다. ‘부활의 날’은 명실공히 사망이 생명에게 삼켜지는 날이다(고전 15:54).

    그 날은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는 말씀이 실체적으로 구현되는 날이기도 하다.

    역사 이래 죽음이 육체의 생명을 삼켜 왔으므로 죽음이 궁극적인 승리자요 종결자로 보이지만, 죽음의 허구적 실상(實像)이 바야흐로 드러나는 날이다.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은 그간 얼마나 그의 허세에 자신들이 놀아났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마귀가 반드시 멸절될 이유도 그것이 ‘생명에 삼켜질 사망’에만 기생하기에, 사망이 멸절되면 더 이상 존재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사망이 생명에게 삼켜지는 날, 그도 사망과 함께 멸망될 것이다. 마귀가 그리스도인들을 궁극적인 파멸에 빠뜨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일시적인 권세자 죽음에 그리스도인들이 ‘절대 권세’를 부여하여, 스스로를 극단적인 죽음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것은 어리석음이요 불신앙이다. 물론 이는 ‘일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아야 한다’거나,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자체가 불신앙이나 죄’ 라는 말이 아니다.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은 성도라 해서 죽음의 두려움을 전적(全的)으로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신·불신(信不信)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에게 본능적이다.

    나아가 때론 그것이 인간을 보호하고 생존력을 높이는 긍정적 역할도 한다. 예컨대 뜨거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화상을 면하게 하고 물에 대한 두려움이 익사를 막아주듯,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질병, 사고, 위험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보존시킨다.

    만일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쉽게 죽음에 노출되어 쉬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죽음에의 공포를 주어 ‘인류 보존’이라는 당신의 경륜을 도모하신다.

    죽음과 사후(死後)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신앙을 갖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이다. 간혹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은 거의 100% 무신론자들이다.

    십자가의 강도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도(눅 23:39-42) 그가 직면한 죽음과 사후(死後)의 심판(히 9:27)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라는 그의 간청에서 그러한 심정이 읽혀진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도, 불신앙의 표현인 것만도 아니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해 극단적인 두려움을 갖는 것은 지지받을 수 없다. 이미 지적했듯, 그것은 일종의 ‘죽음 우상화(death-idolization)’요,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에도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시켜 우리를 우상에서 돌이키고(살전 1:9),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켰다(히 2:15). 죽음에 대한 극단적인 두려움은 그러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무색케 만든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무위로 돌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죽음의 공포에 끌려 다닐 수 없다.

    또 극단적인 죽음에의 공포가 복음이 희생을 요구할 때, 주저 없는 순종을 바칠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지양돼야 한다. 물론 주저 없는 충성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이지만(고전 15:10), 그 은혜 안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감읍함(롬 14:8, 고후 5:14-15)’과 함께 ‘죽음을 이겼다’는 확신도 함께 있다.


    은혜의 사도요 죽음의 정복자 바울의 확신에 찬 고백을 들어보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지 못한 불신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무지함에서 오는 ‘만용’이다. 그러나 사망의 궁극적인 지배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들이 극단적인 죽음의 공포에 매몰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에 대한 극단적인 두려움에 빠지는 것은 ‘죽음’과 ‘구원’의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데서 온 것일 수 있다. 만일 죽음의 유입되고 폐지되는 원리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그런 극단적 두려움은 많이 상쇄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죽음의 유입’을 알아보자. 그것은 인간이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파기에서 왔으며, 그것은 단지 ‘행위 규범’의 위반이 아니었다. 흔히 ‘선악과(善惡果) 언약’을 단지 ‘행위 규약’으로 보는 경향들이 많은데, 그것은 ‘하나님 됨을 부정하면 정녕 죽으리라’는 ‘신앙 규약’이었다.

    아담이 타락 전 ‘선악과 언약’을 준수한 의미도 단지 ‘행위 법규’를 준수해 ‘도덕적 착함’을 보여준 것이 아닌,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후 아담의 ‘선악과 범과(犯過)’ 역시 단지 ‘행위 법규’를 어긴 ‘행위적 범과’가 아닌 더 근원적인 이유, 곧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부정하고 자기가 하나님 되려는’불신앙이고 반역이었다.

    사람들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했다(창 3:6)”는 선악과(善惡果) 말씀을 근거로, 아담의 범과를 ‘식욕, 명예욕, 정욕’에의 충동을 이기지 못한 행위적인 것으로 몰고 간다.

    그러나 그것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고 한 뱀의 유혹에 넘어간 이후에 생겨난 결과적인 것이었지 그 자체가 죄의 근원적 동기는 아니었다.

    ‘아담의 원죄’를 ‘행위의 문제’로 몰아갈 때, 그것은 ‘윤리적인 죄’로 변질된다. 그리고 ‘죽음에서의 구원’을 ‘불순한 행위’의 상쇄로서의 ‘율법적 완전 행위’를 통해 이루려는 망상을 갖게 된다.
    ‘선악과 범과’를,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부정한 ‘불신앙’으로 이해할 때, ‘구원’ 곧 ‘죄와 죽음의 폐기’는 ‘믿음의 문제’로 파악된다.

    실제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고 죽음을 폐하실 때 ‘믿음’에 의해 되게 하셨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리고 그 ‘믿음’은 실제 죽음을 폐한 ‘그리스도의 구속’에 뿌리박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죽음이 폐한 것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부어짐으로 극단적인 죽음의 공포가 그를 주장하지 못한다.

    반면 사망의 폐지를 ‘믿음’이 아닌 자기의 ‘율법적 행위’에 의존시키는 이들은 결코 사망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는 불완전한 행위에 의존된 그의 ‘구원의 불확실성’ 때문이기도 하고, 행위에 의존된 자들에게는 결코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부어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병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가 온 세상을 덮고 있다. 모두에게 믿음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사랑(롬 5:5)’이 마음 마음에 부어져,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길 기원한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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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이르노니 염려하지 말라! /마6:25-34; 잠17:22

    누가 '염려하지 않을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염려하려면 두 가지만 염려해라. 지금 아픈가, 안 아픈가? 안 아프면 염려하지 마라. 아프면 두 가지만 염려해라. 고칠 병인가, 못 고칠 병인가? 고칠 병이면 염려하지 마라. 못 고칠 병이면 두 가지만 염려해라. 죽을병인가, 안 죽을병인가?

    안 죽을병이면 염려하지 마라. 죽을병이면 두 가지만 염려해라. 천국 갈 것인가, 지옥 갈 것 같은가? 천국에 갈 것 같으면 염려하지 마라. 지옥에 간다면? 지옥 갈 놈이 무슨 염려냐? 벌받는 게 당연하지!"

    여러분, '플라시보 효과'라는 말을 아십니까? '플라시보'(Placebo)란 '기쁘게 해드리겠습니다'라는 라틴어인데, 환자에게 설탕이나, 소금 등 가짜 약을 주면서 좋은 약이라고 하면, 진짜 약 이상의 효과를 나타내는 '위약효과'를 말합니다.

    이와 반대로 '노시보 효과'도 있습니다. '노시보'(Nocebo)란 '당신을 해칠 것이다'라는 뜻인데, 의사의 말이 환자에게 부정적인 기대를 유발하여, 아무 의학적 이유 없이 환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현상입니다. 의사가 소화제를 주면서 '이것을 먹으면 머리가 아플 것'이라고 말하면, 이것을 먹은 사람이 진짜로 두통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환자들에게 정제된 설탕을 주며 토할 수도 있다고 말했더니 환자의 80%가 토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상담대학원생 증후군'이라는 것도 있답니다. 한 학생이 "교수님, 오늘 공부한 우울증증세와 제 증세가 똑같은데요"라고 호소하며 정신질환의 준거들을 열거하는데, "그건 우울증이 아니고 정상적인 우울이다"고 말해주어도 한사코 자기는 우울증이라고 우기는데, 우울증을 공부하는 주간에는 흔히 있는 일이랍니다.

    수면장애를 공부하는 주간에는 자신도 불면증이라고 호소하는 수강생이 많답니다. 그리고 '의대생증후군'도 있는데, 의대생들은 피곤해서 눈썹이 실룩이면 루게릭 병이 아닌가, 입이 마르면 당뇨병이 아닌가, 손가락이 뻑뻑하면 류머티스는 아닌가하는 건강 염려증으로, 정신과의사 조셉 내텔손은 의대생의 79%가 이 병을 호소한답니다.

    이처럼 병에 관심을 집중하면 피해망상으로 실제로 몸과 마음에 병이 생기는 증상입니다. 이를 보면, 우리에게 나타난 실제적 사실보다, 우리의 염려나 근심으로 인한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병들게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환자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어 이미 전 세계에서 1,372명이 감염되었고, 사망자도 40명을 넘어섰습니다.

    이미 2003년 '사스'와 2009년의 '신종플루', 2015년에 '메르스'라는 역병으로 몸살을 앓았는데, 전문가들은 '우한 폐렴의 감염규모가 사스보다 10배는 클 것'으로 경고하고 있어 모두 근심이 가득한데다, 2019년 우리나라 GDP성장이 2.0%로서 10년 전 세계 금융위기 당시 0.8%이후로 가장 낮은 수준이어서, 이래저래 걱정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전래민요 [진도 아리랑]에는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수심도 많다"는 가락처럼, 이 땅의 삶에는 수심도 많고, 술 마시면 시흥이 절로 나서 시를 쓴 이태백은 술로도 달랠 수 없는 근심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칼을 들어 흐르는 물을 내리쳐도 물은 끊이지 않고 계속 흐르며, 잔을 들어 술 마시며 걱정을 씻으려 해도 걱정은 더욱 쌓여만 가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약함과 염려를 아시고, '염려하지 말라' 혹은 '근심하지 말라'는 성경말씀을 무려 550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축복 중 하나는 바로 이런 근심과 염려에서 자유할 수 있는 것인데, 인간은 어리석게 염려함으로 스스로 자신을 해치고 있습니다.

    폴 투르니에는 "아무도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스스로가 자신을 죽일 뿐이다"고 말했고, 한 의사는 "질병보다는 질병에 대한 염려 때문에 죽는 확률이 더 높다"고 말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때 35만 명의 미국 청년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놀라운 것은 이 전쟁에 대한 불안과 염려로 인한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은 무려 백만이나 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를 보면 염려와 근심은 전쟁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며 해독을 끼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근심과 걱정과, 생활의 염려로 피곤에 지쳐 있고, 얼굴은 웃음을 잃은 채,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할 것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첫째, 우리 생활의 의식주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6:25).

    여기 언급한 '목숨'은 헬라어로 '퓌스케'인데, 육체적 죽음에도 멸절되지 않는 영혼을 말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영혼이 물질적인 '먹을 것과 마실 것 입을 것'으로 지나치게 염려하여 그 영혼이 상하면 되겠느냐 하십니다.

    주님은 먹는 것에 크게 관심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물론 먹어야 살지만 요즘은 너무 먹어서 탈입니다. 미식가다 뭐다 하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먹을 것 찾아 돌아다니는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음식문화의 발달은 정신문화의 퇴보를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먹는 일에 정신 팔면서 무슨 가치 있는 일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또 의복은 어떻습니까? 필리핀의 이멜다는 옷이 1,200벌이었다는데, 그 중엔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옷도 많을 것입니다. 얼마나 부질없고 헛된 일입니까?


    둘째, 막연한 내일의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4).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들을 보면, 당장 부딪쳐 있는 현실 문제이기보다는 '내일 어떤 불길한 일이나 사고는 없을지, 불황이 닥치진 않을지...'하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으로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에 미국에서 백만장자가 지금 억만장자보다 적었을 때입니다. 지금은 10억 불 짜리 부자도 많은데, 당시는 백만장자가 열 손가락 안에 들던 때, 'millionaire'라는 말이 미국에서 엄청난 부자라는 말로 통하던 때, 한 사람의 한 달 생활비가 $10 내외였습니다.

    그 때 한 백만장자가 세상을 떠나며 50만 불이 잔고에 남아, 미망인은 다른 일하지 않고 이 돈을 아껴서 잘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7년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계산해보니까 은행잔고에 3만 불이 줄어 47만 불이 남았습니다. 이 분이 3만 불이 비었다는 이 사실을 깨닫고는 그 때부터 이 돈이 다 떨어지면 내가 얼마나 비참해질까 고민하다가 자살했습니다. 이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셋째, 죽음의 문제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대해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고 말씀하십니다.

    성도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가는 과정이요, 저 아름다운 천국이 이르는 길이기에, 이 죽음에 대한 염려나 불안을 떨쳐야 할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사람들의 걱정 가운데 50%이상이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병들게 되어 있고, 그리고 언젠가는 죽게 되는데 건강할 때 병들 것을 걱정하고, 죽을까봐 걱정하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짓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죽을까에 대해선 걱정 안 한다"고 말하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차피 죽을 테니까, 죽을까 걱정해서 안 죽는다면 걱정해보겠지만, 죽음을 걱정해도 죽고, 걱정 안 해도 죽을 텐데,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을 가지고 무엇 때문에 미리부터 걱정하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은 염려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유를 말씀합니다.

    첫째, 염려는 쓸데없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6:27).

    어떤 이는 "염려란 마치 자동차 기어를 중립에 놓고 액셀레이터를 밟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기어가 중립에 있으면 아무리 액셀레이터를 밟아도 자동차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염려해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열등감 중 하나는, 자기들을 지배하는 로마인들보다 키가 작은 것이었습니다. 키 문제로 스스로 불행하게 생각하던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키가 작다고 불만을 갖고 염려한다고 해서, 너희들의 키가 커지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지혜문학서에 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을 염려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고, 어쩔 수 있는 것을 염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고 말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염려해도 안 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염려할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면 됩니다.


    둘째, 염려는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

    여기 '이방인'은 믿지 않는 자를 뜻합니다. 염려하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여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는다면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반대말을 '불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어휘적인 표현이고, '믿음'의 실질적인 반대 의미는 '염려'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으면 염려하지 않을 것이고, 염려하고 있다면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여 평생 5만 번 이상 기도응답을 받은 죠지 뮬러는 "염려의 시작은 신앙의 끝이다.

    그러나 신앙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근심하고 걱정하는 이유는 현실이 어렵기 때문만이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고 기도할 뿐,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비는 새끼 한 마리에게 수놈과 암놈이 번갈아 하루 100번 이상 먹이를 물어다준다고 합니다. 제비 한 쌍에 새끼가 5마리면 하루에 약 500마리 곤충을 잡아 먹이기에, 새끼를 키우는 3주 동안에만 1만 마리 이상을 잡아 먹이는데, 하나님은 그 모든 제비와 동물들을 다 먹이십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새도 먹이시는데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독생자까지 주셨습니다. 존 하가이는 '염려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내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기에, 다윗은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다"(시31:15)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칼뱅은 하나님의 손길을 알지도 믿지도 못하는 것이 인생 최고의 불행이며, 하나님의 손길을 알고 믿는 것이 최고의 위로와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염려를 떨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며 자기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6:26, 28).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들을 한번 지으신 다음엔 아무 관심 없이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름 없는 새나 들풀도 이 땅에 살아가는데 어려움 없도록 돌보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자비하신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런 하찮은 미물들까지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상하게 돌보시는데,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시며, 당신이 택하신 자녀들은 반드시 책임져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해하여 '하나님은 공중 나는 새가 심거나 거두지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데 저들을 먹여주시니, 우리도 아무 일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어련히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라'는 말씀은 공중을 나는 새들은 아무 일하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나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찾아 분주히 하늘을 날고, 백합화도 가만히 서있는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땅에서 물과 양분을 빨아올리고, 햇빛을 받아 탄소동화작용하며 자신을 가꿉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믿고 자기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할 때 염려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행동이 없으면, 생각만 하면서,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심신이 지치게 됩니다. 생각을 멈추고 일어나 움직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행동하고 보면 걱정이 없는데, 행동은 하지 않고 생각만 하니 걱정만 가득하여,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생각은 자꾸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져 시간이 흐를수록 나쁜 생각만 자꾸 들면서 시험에 빠져 염려의 노예가 됩니다. 지금 당장 생각을 접어버리고 일단 행동으로 옮겨보십시오. 그러면 대부분의 염려는 떨쳐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크롬웰의 특사인 화이트 락이 스웨덴에 가면서 조국에 대한 불안한 마음으로 잠 못 이루자, 사환이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도 하나님은 세상을 잘 다스렸지요?"하고 묻습니다. "물론!"라고 대답하자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하나님은 세상을 잘 다스리시겠지요?"라는 질문에 "물론!"하고 대답하니 "당신께서 살아 있는 지금도 하나님은 세상을 잘 다스릴 줄 믿습니까?"하니, 대답도 없이 평안히 잠들었습니다.


    둘째는, 중요한 것을 먼저 추구하는 가치관의 우선순위가 있어야 합니다.

    33절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염려'라는 말은 헬라어로 '메림나오'로서 '갈라진 마음'이란 뜻입니다. 일본어 '심빠이(心配)'라는 말 역시 마음이 갈라진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왜 염려합니까? 어느 한 가지에 몰두하면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하며 마음이 고정되지 못하고 흔들릴 때, 염려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최대 관심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주기도문대로,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이뤄지길 구해야합니다.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당시 해군사령관이던 스원스 씨에게 정치이념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세 가지 원칙에 따라 살아왔습니다.

    첫째, 파도가 밀려올 때는 사자처럼 용감히 대처했지요.
    둘째, 파도가 배를 덮을 때는 쥐를 잡으며 작은 일부터 해결해 나갔습니다. 쥐가 선창을 갉아먹어 구멍을 뚫으면 파선하게 되니까요.
    셋째,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당황할 때는 무조건 정의의 편에서 행동했습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가 3층 다락방에서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과 통증으로 꼼짝도 못하고 사흘 동안 누워 있다가 의사 친구에게 전화했으나, 그 친구는 빨리 오지 않았습니다. 쇼는 신경질이 나면서 더욱 몸이 아픈데, 누군가 계단을 급히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친구 의사가 왕진가방을 들고 단숨에 3층을 뛰어 올라오며 다락방 문을 왈칵 밀고 들어서는 순간, 이 의사는 숨을 훅 몰아쉬더니 그 자리에 고꾸라졌습니다.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져버린 친구를 보고 화들짝 놀란 버나드 쇼는 후닥닥 침대에서 튀어 일어나 심장에 귀를 대어보고, 눈을 뒤집어 보고, 허리띠를 풀고, 인공호흡을 하고, 정신 없이 땀흘리며 주무른 끝에 드디어 친구가 눈을 떴습니다. 친구가 살아났다고 환호하는 쇼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가보겠네. 왕진비 내놓게."

    "이 사람아, 쓰러진 건 자넬세. 정신 차려! 내가 자네를 인공호흡까지 시켰네."

    "그런가? 자네가 병을 고쳐달라고 나를 불렀는데 내가 쓰러지니까 자네는 놀랬지? 내가 더 위험해 보이니까 자네는 자네 병을 잊고 내게 매달렸지? 이게 바로 나의 치료법일세. 인간은 자신보다 남을 더 염려할 때 자신의 병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되는 법일세. 이제 자네 병은 다 나았네. 왕진비나 두둑이 내놓게."


    셋째는, 내일이 아닌 오늘에 족한 은혜를 구해야합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4).

    우리는 염려를 해결하기 위해 오늘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내일은 내일 찾아오기에 내일 문제는 오늘 처리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일은 오늘의 은혜로 족하고, 내일은 새로 은혜를 주실 테니, 내일 일은 그 새 은혜로 감당해야합니다.

    학교에서 종을 치는 종치기가 날마다 계속 종치는 일로 노이로제에 걸렸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왜 그렇게 행복하지 못한 지 물어보았습니다. 그 종치기는 매우 고통스럽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이 종을 36,000번 쳐야 합니다. 매일 이 학교에서 10번씩 종을 치는데 계산해보면 일주일에 70번, 한 달이면 300번, 일년이면 3,600번이기 때문에 내가 이 일을 다 끝내려면 앞으로도 10년을 더 쳐야 합니다."

    그 말을 듣던 사람이 보다 못해서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형제님! 하루에 10번씩만 종을 치시고 한번에 한 번씩만 종을 치시면 되지 않습니까?"

    일본 교세라 창립자이며 명예회장으로 일본 경영자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는 이나모리 가즈오는 말합니다.

    "나는 장기적인 경영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다. 내일 일은커녕 오늘 일조차 제대로 예측 못하는데 10년 후가 보일 리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기 위해 늘 노력해왔다. 오늘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면 내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제와 내일이란 두 날로부터 자유하면, 언제나 평안할 수 있습니다. 지난 문제는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내일 일은 '여호와이레'를 의지하며, 오늘 일에 나의 성실을 다하면 됩니다.


    유명한 [천국의 열쇠]를 쓴 A.J. 크로닌이 가난한 환경에서 어렵게 의과대학을 졸업하면서, 그는 드디어 지겨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희망과 포부로 들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개원 첫날부터 계속 크고 작은 사고들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심지어 분명히 성공적인 수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환자의 상태가 수술 전보다 더욱 악화되어 결국 죽음에 이른 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1년이 지난 뒤엔 빚을 갚기는커녕 더 많은 빚더미에 올라앉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크로닌은 무겁고 착잡한 심정으로 무작정 길을 나서 정처 없이 거리를 배회하다 어느 허름한 예배당 앞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생전 처음 교회에 들어가 십자가 앞에 엎드렸습니다. 한번도 기도해보지 않았기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막막하여 그저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그때 마음속에 조용한 음성이 메아리쳤습니다.

    "의사로서 네 목표가 올바로 세워져 있느냐? 진정 돈 벌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먼저 환자의 건강을 생각해라.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들의 건강을 되찾아주어라."

    그 날 예배당에서 떨리는 경험은 그를 새로운 의사로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돈버는 것보다 환자의 건강을 염려하며 치료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은 대부분 건강과 웃음을 찾아 돌아갔고, 그와 함께 그는 많은 돈도 벌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기에, 그 돈을 모두 선교기금으로 내놓았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불필요한 욕심을 떨쳤더니, 염려를 떨치고 의사로서 크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나치수용소에 있던 코리텐붐 여사는 말했습니다. "만일 이 세상을 보면 우리는 절망할 것이다. 만일 우리 내면을 바라보면 낙담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안식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그분께 내 삶의 초점을 맞추는 것인데, 우리는 자신만 바라보기에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문서에 나오는 성도들의 이름 중에는 '티테디오스'(Titedios)라는 이름이 많았습니다. '티테디오스 요한', '티테디오스 바울', '티테디오스 알미니우스' 등, 그런데 이 '티테디오스'라는 말은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들이 예수 믿고나서 자신의 삶이 변하게되자, 자기 이름에 덧붙인 애칭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들은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놀라운 은혜를 입고서 이 이름을 붙였습니다.

    잠언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고 했습니다. 뼈를 마르게 하는 염려와 근심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읍시다. 어두워져 가는 세상을 연연하지 말고, 다가오는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이루며 삽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할 때,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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