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 2002-09-24 11:19:40 로마서 4:13-25 // 2002.09.22 구약에서 출애굽 사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입니다. 창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복을 주십니다. "내가 네게 복을 주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 하나님이 오셔서 구원으로 불러주신다는 것 이것이 복음의 형식입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 땅을 차지하는 것은 복입니다. 내가 장수하고 형통하고 부유하게 되는 것도 복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 복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질적인 생명이 깨어지면 인생은 불행한 운명에 떨어지고 맙니다. 저주와 사망 아래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죄와 저주와 사망 아래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영광의 하나님 그분은 복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 편에서 보면 그분이 복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복이 되시기 때문에 영광스럽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의 창조자로서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아버지 하나님은 구원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우리들에게 구원의 큰 상급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구원을 얻으리라"(창 22:18)고 말씀하셨을 때 그 자손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우리 구원의 기초와 근거가 됩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대속주가 되시고 부활로 승리하신 다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새생명을 우리 속에 넣어주시고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 주실 때에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히 6:13-14). 성령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믿는 자에게 그대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4). 복, 그것은 구원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복은 한 마디로 말해서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받는 것입니다. 다시 쉽게 말씀드리면, 오늘 우리들에게 참된 복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과 공동운명체가 되었습니다. 구원과 복을 주시고 보호하시는 분, 구원과 복을 성취하시는 분, 구원과 복의 보증이 되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근심도 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이 계시는 한 복도 계속될 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복으로 삼으신 여러분, 여호와를 구원자로 의지하고 사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복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가뭄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 시냇가에 심기운 뿌리깊은 나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여, 우리에게 복에 복을 더하소서"입니다. 또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도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말씀하셨습니다. 왠 복타령입니까? 복에 복, 생명 위에 더 풍성한 생명이 무엇일까요? 구원보다 더 큰 복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은 직분자의 복이요 사역자의 복입니다. 저는 이 복을 장자의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의 신앙 위에다 영적인 권능을 주시고, 건강과 부요를 주셔서 이 땅 위에서 주의 나라를 위하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사람답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옵소서" 이것이 천국시민의 한결같은 기도입니다. 저는 이것이 올바른 복의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과도 대신할 수 없는 복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 하나님과의 평화, 하나님과의 교제가 열려야 합니다. 그 다음에 받는 복은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나누어 주는 천국의 서기관이 되고 사랑방 손님이 아니라 사랑방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 모두 그러한 복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런 복을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질을 살펴봅시다. 믿음을 말할 때 믿는 자의 믿음도 물론 중요하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의 대상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었습니까? 그가 믿은 하나님은 어떤 성질의 하나님이십니까? 어떤 실력의 하나님이십니까? 오늘 본문 17절은 요약해서 그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이"라고 하였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이 말씀은 천지창조의 역사를 연상시켜 줍니다. 라틴말로 CREATIO EX NIHILO, 성경에서 창조한다는 말씀은 무에서의 창조를 의미합니다(창 1:1). 아무것도 없는데서 있게 하신 전능하신 분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갈대아 우르에 살던 75세의 늙은이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 믿음을 가지고 그 하나님을 따라 나섰던 것입니다. "나를 부르신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다" 그 믿음이 그로 하여금 땅끝까지 하나님을 따라가게 만들었습니다. "나를 부르신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시되 무로부터 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나를 구원하시고 복을 주신다. 그러므로 구원의 역사, 구원의 중심, 구원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그는 그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겼고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신앙이란, 구원과 복을 위해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내가 하나님께 드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자기의 무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무에서부터(from zero), 이것을 라틴말로 Ex nihilo라고 표현합니다. 창 4장에 나타나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보십시오. 가인은 자기 것을 드렸습니다. 자기 것을 가지고 자기 죄를 속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죄를 가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삶은 다시 무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자기 절망, 자기 무를 드렸습니다. 동물의 죽음이 내포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나에게는 죄의 값인 죽음 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무입니다. 오직 당신께서 무언가 채워주셔야만 합니다"는 것입니다. 동물의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해도 아벨은 자기가 무로 돌아갈 존재이고 하나님만이 속죄를 위해 무언가 일하실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신앙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무를 겸손히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육신 속에 쓰러져 가는 생명이 있지만 나는 무로 돌아갈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본토 친척 아비 집이 나의 구원과 복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잠시 내 곁에 머무를 뿐입니다. 곧장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힘, 사람의 소유, 이 모든 것들이 당신 앞에서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의 모든 소유, 고향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창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그 약속 속에 숨쉬고 있는 하나님의 생명 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 바칠 하나님의 필요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의 자유만이 그를 이끌어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주님을 따랐다고 하지만 그의 순종은 늘 부족했습니다. 그는 늘 주님의 요구에 못미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택하시고 그에게 당신의 구원의지, 주권적 약속을 늘 재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창 15장에서는 의기소침해 있는 아브라함을 장막 밖으로 이끌어내시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하늘을 우러러 보아라 저 뭍별을 셀 수 있느냐?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것을 다시금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 되신다" 아브라함은 실날같은, 정말 겨자씨 한알같은 믿음이었지만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진 것은 Ex nihilo란 자기 고백 뿐입니다. "나에게는 무 밖에 없습니다. 있는 것은 오직 약속 뿐입니다" 창 17장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도와드리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약속대로 구주가 내 후손으로 오시려면 내가 아들을 낳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도 내 아내도 생식능력이 사라졌으니 첩을 구하여 아들을 나아드리겠나이다. 그래서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고는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의심을 고쳐주십니다. "아브라함아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이다. 나는 너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약속의 씨는 네 아내가 낳을 것이다" 창 18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하나님 앞에서 웃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픈 Irony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다같이 하나님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24년이 지난 다음 99세의 아브라함과 89세의 사라가 Ex nihilo를 고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부부는 생명을 잉태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년 이맘때 아들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4). Ex nihilo, 25년 간 자기 무가 철저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가 믿었던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나사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지 3일을 기다렸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죽음에서 부활을 가져오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혈루증 여인을 보세요. 12년 간이나 고통 속에 있어서 Ex nihilo의 상태가 되었을 때 예수님은 새생명을 주시는 이심을 극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보세요.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영적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와 함께 우리 죽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대표해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Ex nihilo를 가정하고 나타납니다. 동정녀로부터 출생하신 예수님은 빈 무덤으로부터 부활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구원은 형성해 놓는 것이 아니라 없는데서 꺼집어 내놓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복은 흑암과 혼돈 속에서 질서와 조화를 이끌어 내는 은총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시종일관 자족적입니다. 은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의 도움을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것은 자신의 절대 무, 무능과 약함을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과 복은 하나님 편으로는 예수님만이, 약속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며 사람 편으로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없이 성령없이 열심내는 것은 다분히 육신적인 열심입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는 것은 철저히 Ismael적인 봉사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시작과 과정과 끝은 철두철미 절대 무, 절대 절망, Ex nihilo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비울 때, 바로 그 빈자리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십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말씀합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John Calvin도 말합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성을 우리에게 연결시켜주는 끈이다" 우리 다같이 Ex nihilo로 돌아갑시다.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우리도 아브라함과 똑같이 절대 능력, 절대 소망가운데 지상에서 영원으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철두철미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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