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도 뛰어도 피곤하지 않는 삶 2002-08-27 17:48:28 2002.08.18 // 이사야 40:27-31 I. 성숙한 신앙문화를 향하여 어느 국립공원 입구 플래카드에 그렇게 쓰여있었습니다. 「쓰레기를 버리는 그 마음을 버립시다!」「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라는 강요보다 한결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지하철 노약자석엔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합시다.」라는 익숙한 글 대신 멍청스런 할머니의 사진 한 장과 함께 「젊은이, 이 자리가 그리 부럽수!」모든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고 그 자리를 남겨두게 하는 여유를 갖게 해 줍니다. 어느 방송국 남자 소변기 위엔 이런 글이 씌어져 있습니다. 「나를 소중히 대해 주면 내가 본 것을 비밀로 하겠어요.」 유모스럽고 애교스런 나아가 변기에게까지 친근함을 느끼게 하는 구절입니다. 월드컵 때 국민응원단이 펼쳤던 카드 섹션 「꿈은 이루어 진다」는 표어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던 표어였습니다. 국민 모두가 그토록 원했던 16강 아니 4강의 꿈이 이루어진데 대한 감격, 거기 모인 젊은이들과 모든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 세워져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꿈인 통일을 갈망하는 한민족의 염원, 보는 이들마다 서로 다른 각자의 꿈을 그릴 수 있게 해 주는 여유스런 표어였습니다. 바로 그 현장 상암경기장에서 저는 카드 섹션에 참여하여 딸과 함께 “꿈”자의 “ㄱ”자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 간단한 표어들은 우리사회가 많이 성숙해져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미성숙했던 선교 1세기, 지금까지는 율법으로 강요하고 종교적 규범들로 묶어서 이끌어 왔지만 이제는 성숙한 신앙을 가질 때가 되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발견하고 믿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닌 생명입니다. 율법이 아닌 복음입니다.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은혜의 삶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은혜의 영성」이란 주제로 지난 7주간을 달려왔고 오늘은 그 여덟 번째 결론의 시간입니다. II. 의무에서 기쁨으로! 은혜의 영성을 공부하며 어떤 사람들은 오해를 합니다. 그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성경공부, 기도생활, 전도, 헌금, 헌신, 봉사생활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단 말인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쁨이 되어야 할 신앙생활이 의무처럼 여겨졌습니다. 특권이 되어야 할 신앙이 마치 규범이나 율법으로 여겨져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의무가 아닌 기쁨과 특권으로, 율법이 아닌 풍성한 은혜의 삶으로 우리 신앙생활을 바꾸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기쁨과 감사가 되었다면 이미 여러분은 은혜의 삶에 젖어 있는 것입니다. 감사하십시오! 의무가 아닌 기쁨이 되어야 할 첫 번째 영역은, 1. 성경공부입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훌륭한 신앙생활은 성경의 내용을 많이 알아야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공부를 반대하는 것 아닙니다. 바른 목적을 가지고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도 성경공부 방법론을 많이 배우고, 연구하고,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여러 신학교에서 이 과목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문자에 능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지식을 얻고 그 해석법을 익히고 때로 성경을 분석하는 통쾌함에 감동을 받으면 우리의 삶이 풍성해 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은혜의 삶이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앨범입니다. 성경의 장 장을 펼치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펼쳐도, 사도행전을 펼쳐도, 서신서를 펼쳐도, 요한계시록을 펼쳐도 매 장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예수님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펼치면 예수님의 얼굴이 직접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배경에서 예수님께서 빙그레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거기 나오는 많은 인물들이 어딘가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길을 찾아가다 보면 예수님이 거기서 활짝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고 있습니다. 현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성경의 내용을 몰라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성경지식이 내 삶에 한 부분이 되지 못하는 갈등이 문제입니다. 여기 지난 세기 주일학교 교육의 헛점이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을 펼쳐보면 성경에 통달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성경을 줄줄이 외우고 꾀고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입니다. 예수님 탄생의 장소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서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헬라의 어원까지 줄줄이 평신도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알지 못합니다. 성령론의 박사처럼 성령론을 잘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와 권능에는 무지합니다. 창조론을 잘 압니다. 그러나 창조의 능력은 모르고 살아갑니다. 의무가 기쁨이 되어야 할 두 번째 영역은, 2. 기도생활입니다. 율법적인 기도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독백에 불과했습니다. “특별새벽기도 합시다”라고 하면 설레임과 기대와 감격이 모자랐습니다. 그동안 기도가 의무가 되었습니다. 물론 기도는 의무로 해도 안하는 것 보다야 백번 낫지요. 그러나 은혜의 기도는 놀라운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는 의무가 아니라 크리스챤의 최대의 특권입니다. 여러분 청년시절 데이트를 시작할 때의 설레임을 기억하십니까? 우리의 하루 해는 너무 짧았습니다. 율법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은혜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요 대화입니다. 때로 말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많은 경우 말이 필요없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가족간에는 때로 말없이 대화를 합니다. 우리가 처음 데이트를 시작할 때는 많은 말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친밀해 지면서 많은 말이 필요없습니다. 가족은 아침, 저녁, 식사를 하며 함께 즐깁니다. 교제를 나눕니다. 부부는 함께 밤새도록 잠을 자며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이번 특별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영광스러운 찬양으로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을 높여드리고, 말씀을 듣는 시간에 시간 시간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고 각자에게 다가오시는 개인에게 대화를 나누고, 기도 같은 기도 은혜로운 기도를 우리가 한번 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3. 복음전도 성경공부나 기도외에 전도도 의무가 아닌 기쁨, 율법이 아닌 은혜로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적인 전도는 전도대상자들을 전도 숫자를 채우기 위한 도구나 앞으로 교회의 일원이 되고 그들이 교회의 필요를 채워가는 가망성(prospect) 정도로 봅니다. 그러나 은혜는 가망성을 보지 않고 사람 자체를 봅니다. 우리의 필요를 위한 자원이나 도구로 보지 않고 그 사람과 하나님,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의 관점에서 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종교적인 행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일을 하지 못했을 때 늘 나를 짓누르는 죄책감이나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전통적인 기존 교회는 전도를 프로그램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 은혜의 교회는 크리스챤 삶의 한 부분입니다. 전도해 본 경험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씨뿌린 경험이 없는 농부나 훈련이나 전투경험이 없는 군인과 같습니다. 신약 성경의 교회는 전도하라고 자극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전도하는 것을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전도했다가 체포되었을 때, 공회석상에서 예수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엄한 경고와 위협을 받았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해 보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복음과 은혜를 불타고 있을 때 그들을 멈추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은혜는 전도하고픈 열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무서운 핍박이 가해져서 커다란 불이 흩어져 사방에 불똥되었지만 그 불똥이 또 다른 큰 불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지요. 은혜는 잃어버린 사람을 향해 달려가게 해 줍니다. 은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증거하도록 돕습니다. 「은혜의 영성」의 저자 스티브 맥베이 목사는 얘기했습니다. “내가 은혜를 누리며 살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전하며 살아갈 때, 어느날 내가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다는 이 의식으로 인해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확신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의무가 기쁨이 되어야 할 네 번째 영역은, 4. 헌신(헌금) 생활입니다. 헌신생활을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일 예배시간에 우리는 헌금을 합니다. 어떤 교회는 모일 때마다 새벽이고 밤이고 낮이고 헌금을 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을 사람들이 모이면 회비를 내듯이 헌금을 임무나 책임 정도로 생각합니다. 율법적으로 헌금을 하므로 빼앗기는 마음으로 헌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영광을 부끄러움으로 바꾸는 사람입니다. 내 시간이든, 물질이든, 몸이든, 은사든 내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다는 것은 성도의 최고의 영광이요 특권입니다. 내 손이, 내 발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 그것은 내 손과 발이 하나님의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내 입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다. 내 입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입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내 물질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다. 내가 하늘의 은혜를 먹고 살아가는, 하늘의 양식으로 살아가는 하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쓰는 모든 물질이 하늘의 물질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많은 돈을 벌고 쓰지만 하나님께 드린 것만이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헌신은 하나님 나라 가치의 무게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감사요 감각이요 기쁨입니다. 아내가 돈이 필요할 때, 내가 돈을 줄 수 있으면 나는 남편된 보람과 자신감으로 넘칩니다. 어머니에게 용돈이라도 드릴 수 있으면 자식된 도리를 다 한 것 같아서 내게 큰 기쁨이 됩니다. 아이들의 필요를 내가 채울 수 있다면 아버지된 본분을 다 한 것 같아서 내게는 큰 감사요 보람이 넘칩니다. 교회는 빌딩이 아니라 가족입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내가 예물을 드리고 헌금하고 헌신한다. 하나님 가족들의 영광이지요. 내 가족을 살리는 보람과 기쁨이지요. 우리 교회는 율법의 헌금을 원하지 않습니다. 흔히 여느 교회가 하는 것처럼 예배 시간에 헌금 주머니를 돌리지 않습니다. 성경대로 헌금함을 구석구석 두고 자원하는 예물, 기쁨의 예물, 감사의 예물을 드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요? 그것들만 천국에 쌓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III.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자신을 노예로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임무로 합니다. 억지로 합니다. 노예처럼 합니다. 머슴은 댓가 때문에 일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일 자체가 보상입니다. 자신을 주인으로 상속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기쁨으로 합니다. 일하는 것은 주인의 특권입니다. 어느 시골에 한 아이가 산 속에 갔다가 큰 새 알 하나를 주워서 닭장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병아리와 함께 이 알도 깨어났는데 보니까 독수리 알 이었습니다. 병아리와 독수리 새끼가 함께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독수리는 자기 자신을 닭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닭이라고 생각한다 할지라도 독수리는 독수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을 닭이라고 생각하는 한 푸른 창공을 날지 못합니다. 어느날 지붕에 앉아서 하늘을 쳐다 보는데 하늘에 큰 독수리 한 마리가 훠이~ 훠이~ 날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기를 발견했습니다. 날개짓을 하며 솟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자기를 발견하는데서부터 모든 그리스도인의 풍요로움과 풍성함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야곱아, 이스라엘아! 너 왜 피곤해 하며 살아가느냐? 네게는 피곤해 하지 않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느냐.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걸어가도 뛰어가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은혜의 영성 결론의 제목이 「걸어도 뛰어도 피곤하지 않는 삶 !」입니다. 오늘 본문 하나님은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르며 야곱아, 이스라엘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에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창세기 32장에 그 배경이 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은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빼앗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세월을 보냅니다. 아내를 얻었습니다. 많은 재물과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어떻게 하면 형 에서의 분노를 달래고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자신의 잘못한 것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인가? 예물을 보냅니다. 소위 성취, 업적, 공로로 자기 잘못을 갚아보려 했습니다. 그날밤 가족들과 종들 그리고 모든 우양떼는 강을 건너고 자신은 두려움에 강을 건너지 못하고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됩니다. 홀로 남아 있을 때에 하나님이 야곱의 삶에 개입하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소위 얍복강 나루터에 천사와의 씨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씨름의 결론은 야곱의 녹다운으로 끝!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부셔뜨렸습니다. 히프 조인트를 부셔뜨린 것이지요. 이제 마지막 믿었던 두 다리 마져 못쓰게 되었습니다.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었지요. 하나님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면 놓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약탈자입니다. 발 뒤꿈치를 붙들고 앞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리고 짖밟고 살았던 인생, 아버지도 속일 수 있었다. 차남으로 태어났지만 장남이 될 수 있었다. 내 힘으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내 맘에 드는 아내를 얻을 수 있었고, 외삼촌도 속일 수 있었고,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이 야곱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내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내 힘으로 하던 모든 것이 끝장 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늘의 신령한 힘을 모릅니다. 복음의 비밀을 모릅니다. 은혜의 비밀을 모릅니다. 성령의 능력을 모릅니다.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평안과 안식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 삶을 우리는 육신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발버둥치는 모든 삶 그것이 야곱의 삶이었습니다. 이제 환도뼈가 깨지며 부셔졌습니다. 한계상황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당신의 힘이 아니면, 당신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나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존재입니다. 너는 지금부터 야곱이 아니다. 이제는 발뒤꿈치를 붙들 필요가 없다. 네 노력으로 발버둥칠 필요가 없다. 간사한 네 힘으로 살아가려 했던 모든 것을 포기해라. 신앙이 무엇이드냐?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 앞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야. 내 힘으로 몸부림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야. 하늘의 능력을 덧입는 것이야. 신령한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야. 이름을 바꾸어 줍니다. 이스라엘이라구요. 이스라엘은 네가 이겼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겼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쓰러뜨릴 수 있었습니까? 히프 조인트가 완전히 박살났는데 어떻게 이길 수 있는 것입니까? 항복함으로 승리하는 비밀을 배운 것입니다. 포기함으로 승리하는 비밀을 배운 것입니다. 나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가는 삶의 비밀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려 주신다. 하나님이 간섭하신다. 네가 해결할 수 없는 모든 문제 해결해 주마. 이스라엘이라고 하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이 신령한 은혜의 세계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환도뼈가 깨어진 다음에 내가 마지막 붙들고 있던 마지막 줄이 짤려진 다음에 내가 의지하던 모든 것이 깨어진 다음에 하나님 앞에 돌아오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분복을 하나님 앞에 내어 맡기고 지금까지 내가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 조차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되돌려 받는 삶의 신비를 배워 가시겠습니까? 문제는 야곱이 문제가 아니고 형 에서가 아니었습니다. 나 자신이 문제였습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깨어지면 모든 것이 다 끝장났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세계에서는 내가 깨어질 때에 새로운 나가 세워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납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내가 죽어질 때에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덧입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포기하면 항복하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은혜에서는 내가 항복하고 포기할 때에 하늘의 능력이, 성령의 능력이, 예수의 권능이 나를 찾아와 나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세계였습니다. IV. 느낌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 은혜의 영성을 공부하며 깨달은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 힘으로, 내 공로로, 내 경험으로, 내 재주로 하려는 것, 자기를 의지하는 삶이 바로 육신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은혜의 영성 시간을 통해 「나는 성자다. 거룩하다 의롭다.」라고 분명히 배우고 깨닫고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간밤에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분노를 이기 못하여 자식들에게 화를 내버리고 말았습니다. 직장에서 얼히고 설히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대신 밤새워 걱정하고 염려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나는 ‘역시 성자가 아니야. 거룩하지 않아.’ 무서운 느낌이 찾아옵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느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감정이 나를 다스리고 지배하도록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리가 나를 다스리도록! 어느날 문득 나는 의롭지 못하다고 느낌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과감히 우리는 선포해야 됩니다. 나는 넘어져도 가끔 죄를 지어도 의인이다. 나는 추한 실패자라는 느낌이 찾아옵니다. 아니다. 나는 거룩하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다. 나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내 모든 죄가, 내 모든 허물이, 내 모든 실수가 깨끗이 사하여 졌느니라. 나는 낡고 더러워졌다는 느낌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나는 예수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내 신분을 붙들고 그 신분을 확인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 감정과 진리가 마찰을 일으킬 때마다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느낌은 순간이요 진리는 영원하다.” 어리석은 자는 늘 감정을 믿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은혜의 사람은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자신의 고귀한 신분을 묵상하고 느낌을 대적하십시오. 내가 실수하여 넘어지고 잠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다고 느끼면 원수 마귀는 곧바로 나를 고소하고 비판하고 조롱합니다. 그 거짓말 느낌에 매이게 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너는 죄인이야. 네 본질이 죄인이야. 그래서 계속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어. 그것이 바로 너야. 내 신분을 속입니다. 이때 우리는 진리 앞으로 마귀를 끌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의 속임을 대항해야 합니다. 은혜의 영성의 저자가 한때 비참한 자학에 빠진 경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날 사랑하지 않을 거야. 나는 큰 교회를 이루지 못했잖아.’ 기도하는데 괴상망측한 생각이 스쳐지나갑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릴지도 몰라.’ 가슴속에 상처받은 분노가 이글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미움이 떠나지 않습니다. 용서해야 될 사람이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를 저주하세요.’ 무서운 자학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 느낌이 바로 사탄이 주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과감히 선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아직도 사랑한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사탄! 네가 나를 조롱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느니라. 나는 약하지만 내 안에 강한 성령이 계시느니라. 나는 죄를 짓고 넘어졌지만 그 죄를 사하고 깨끗케 하는 예수가 내 안에 계시느니라. 사탄 너는 떠나갈지어다.” 낯선 거리, 외국에서 길을 찾을 때마다 저는 한 가지 원칙을 정하고 살아갑니다. 낯선 거리 외국에서 전철을 타고 내리면 방향감각이 뒤죽박죽 됩니다. 그때 내 느낌을 따라가지 않고 이정표를 따라 갈 길을 찾아 갑니다. 내 신앙생활의 분명한 원칙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내 느낌, 감정에 따라 살아가지 않는다. 진리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 이제 내가 성자인 줄 알고 의인인 줄 알고 의롭게 살아갑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합니다. 풍성하고 멋지게 살아갑니다. 또 전도하며 늘 기도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탄이 찾아와 유혹합니다. 조롱합니다. “네가 의롭게 산다고 의인이 된 것 같니? 웃기지 마라. 넌 위선자야. 위선 부리지마. 너 인정받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조롱합니다. 여러분 위선이 무엇입니까? 외식이 무엇입니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그런 척 하는 것이 외식입니다. 위선입니다. 의인이 의인으로 살고 의인으로 행동하는 것 그것은 위선이 아닙니다. 본질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의인된 여러분들이, 성자된 여러분이, 거룩한 여러분이, 내가 죄인으로 자기 자신을 알고 죄를 지으며 죄를 먹으며 마시며 살아가는 것이 위선입니다. 왜요? 본질대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말씀과 진리를 통해 내가 의인, 성자인 것을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외식도 위선도 아닙니다. 원수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나는 믿음으로 살지 느낌으로 살지 않는다. 나는 진리대로 살지 감정대로 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행복이 찾아옵니다. 평안이 찾아옵니다. 자유가 찾아옵니다. 기쁨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느낌과 진리가 일치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나는 나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은혜의 말씀대로 내 가족과 내 목장식구들과 내 교회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보고 너를 보는 눈이 은혜의 눈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느낌과 은혜가 일치하는 자리,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자리, 그 자리를 우리는 은혜의 영성이라, 은혜의 삶이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단계 은혜의 영성이 내게 찾아 올 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무엇이든지 내 느낌대로 내 판단대로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일전에 잠깐 하와이에 들렀을 때에 집회를 마치고 나니 하루쯤 여유있는 시간이 생겼습니다. 이날 뭘 할까? 생각을 했지요. 와이키키 해변이 내려다 보이는 호텔방에서 와이키키 해변에 내려가서 마음껏 해수욕을 즐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마우이 섬이라는 환상의 섬을 비행기를 타고 달려가서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내일부터 다른 집회를 해야 되니까 성경을 읽고 책을 읽고 묵상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가족회의를 했습니다. 아내와 딸은 마우이 섬을 가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잠을 자고 좀 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호텔 방에서 머물고 아내와 딸은 마우이 섬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누가 하나님의 뜻대로 한 것입니까? 제 아내와 딸이 마우이 섬에 도착했을 때에 그 환상의 섬에서 예수님께서 두 팔 벌려 우리 가족을 반겨 주었습니다. 딸들아 어서 오너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아름다운 우주를 만들었어. 마음껏 구경하려무나. 내가 이런 아름다운 자연을 좋아하도록 너를 만든 거야. 마음껏 즐겨. 하루종일 마우이 섬을 구경하고 돌아온 아내와 딸은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과 마음껏 놀고 쉬고 온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호텔방에서 책을 펼쳤습니다. 잠이 오면 잠을 잤습니다. 먹고 싶으면 호텔에서 마음껏 먹었습니다. 성경을 읽었습니다. 내일부터 선포해야 될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그 속에서 예수님이 나를 얼마나 반갑게 맞아 주셨는지 모릅니다. 아들아 네가 여기서 쉴 줄 알았어. 너하고 놀고 싶었어. 말씀 가운데 나를 반겨 주었습니다. 내일부터 선포될 말씀을 읽어내려 가는데 얼마나 감격스럽고 눈물이 나는지 주님이 내 속에서 포근히 역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 나 피곤해 잘래요. 꿈속에서도 너 자는 모습이 아름답다. 기뻐하는 주님을 반기게 되는 것입니다. L.A.에서 한 집회를 인도하고 다음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좀 기다리는데 목요일 하루 일과가 생겼습니다. 뭘 할까? 그동안 L.A.에 올때마다 유니버샬 스튜디오나 보고 디즈니랜드나 보고 그랬으니까 이번엔 샌디에고로 달려가서 씨월드를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쇼핑도 하고 싶었습니다. 방에서 쉬고도 싶었습니다. 목도 아프고 그러니까 맛있는 것 먹구 잠 자고 성경 읽고 책을 읽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의논하다가 아내와 딸은 씨월드를 가고 싶어했습니다. 나는 잠자고 먹고 싶었습니다. 책을 보고 싶었습니다. 성경이 읽고 싶었습니다. 기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딸은 씨월드로 갔습니다. 저는 호텔방에 머물렀습니다.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씨월드에 도착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두 팔 벌려 내 가족을 반겨주었습니다. 얘들아 어서 와. 너 여기 올 줄 알았어. 이 바다 내가 만든 거야. 이 돌고래 내가 만든 거야. 이 많은 물고기들 내가 만든 거야. 신기하지 않니. 아름답지 않니. 내가 만들었어. 이것을 좋아하는 너희 성품, 자연과 함께 놀기 좋아하는 성품 내가 만든 거야. 마음껏 즐기려무나. 씨월드에서 놀고 돌아온 아내와 딸이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 모릅니다. 나는 또 호텔에서 맛있는 것을 먹었습니다. 얼마나 행복한지요. 성경을 펼쳤습니다. 성경 속에서 예수님이 나를 반겨주었습니다. 내일부터 선포할 말씀을 준비하는데 또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했습니다. 저 푸른 어머니의 가슴처럼 내일 복음을 전하는 그 대상자를 생각하고 기도할 때에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피곤해서 잤습니다. 아들아 자라. 너 잠자는 것 참 좋아하는 구나. 꿈속에서 예수님이 날 반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삶입니다. 율법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두려움으로 이해합니다. 하와이에서 어디로 갈까? 의논하다가 마우이 섬으로 갑니다. 딸이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아빠 나는 속물인가봐요. 아빠처럼 성경을 읽고 성경을 묵상해야 되는데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는게 하나님의 뜻이 아닐는지 몰라요. 사고가 나면 어떡하죠? 아빠 날 위해 기도해 주세요. 무사히 다치지 않고 돌아올 수 있게 기도해 주세요. 마우이 섬에 내렸습니다. 화산이 또 터지면 어떡하지? 두려움과 공포에 떨어서 돌아오는데 얼굴이 하얗게 반 초죽음이 되어서 돌아옵니다. 율법의 사람이지요. 씨월드를 찾아가면서 저희 집 사람이 얘기합니다. 여보 당신처럼 나도 기도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해요. 차를 몰고 가는데 혹시 사고가 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 번개를 쳐서 나에게 벌을 내리면 어떡하죠? 날 위해 기도해 주세요. 율법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 안에 있을 때, 은혜 안에 있을 때에 당신이 결정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인정해 주십니다. 은혜로 사는 삶은 담대합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V. 결론 : 걸어도 뛰어도 피곤하지 않는 삶 은혜로 사는 삶은 오늘 본문 이사야 40장을 빌리면 「걸어가도 피곤치 않고 뛰어가도 곤비치 않는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6개월을 달려가는데 피곤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평생을 걷고 또 걷고 뛰었는데 어떻게 피곤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내 힘이 아닌 다른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내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내 재주가 아니라 예수님의 지혜로 살아가는 사람은 가능합니다. 기는 놈 위에 뛰는 놈이 있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습니다. 나는 놈 위에 붙어가는 놈이 있습니다. 붙어가는 놈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힘 위에 붙어사는 신부가 바로 당신이요, 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가족! 예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성령의 권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 신비한 하늘의 비밀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은혜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래전 미국에서 큰 가뭄이 있었습니다. 농부들이 펌푸를 땅에 박아 놓고 펌푸질하는 것입니다. 30분동안 펌푸질하고 쉬고, 20분동안 펌푸질하고 쉬고, 10분동안 펌푸질하고 쉽니다. 펌푸질해서 메마른 농토에 물을 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 저 건너편에 광활한 땅이 있는데 보니까 어떤 슈퍼맨 하나가 펌푸질을 하는데 한시간도 좋습니다. 2시간도 좋습니다. 오전내내 쉬지않고 펌푸질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점심시간인데 점심도 먹지 않고 펌푸질을 합니다. 그 다음날도 밤새도록 펌푸질을 합니다. 그 다음날도 봤더니 새벽부터 펌푸질을 하고 있는 겁니다. 슈퍼맨인가? 원더우먼인가? 가보기로 했습니다. 강을 건너 가까이 가는데도 계속 펌푸질을 했습니다. 가서 보니 기계인간이었습니다. 물을 펌푸질하고 나니까 솟아오르는 물로 다시 누를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만든 것입니다. 또 누르면 물이 솟아오르게 되고 다시 그 물로 누르게 하고 기계인간인 것이지요. 이것이 예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사는 은혜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우리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는 샘이라구요. 내 힘이요? 내 힘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힘으로 퍼 올리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거함으로 자동적으로 터져 나오는 생수, 이것이 은혜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한번 뜨겁게 사랑했더니 그 다음에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돈독해져서 더 아름다운 사랑으로, 더 넉넉한 사랑으로, 더 풍성한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아름다운 신부의 관계, 신랑의 관계를 맺고 부부관계를 맺고 났더니, 하나님 아버지와 부자관계, 아름다운 가족관계를 맺고 났더니, 그 맺은 관계가 더욱더 돈독해 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 친밀한 관계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내 안에서, 나는 예수 안에서, 예수님은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나를 통하여 일하시고 나를 통하여 당신의 멋진 역사를 이 땅에 펼쳐가는 세계, 나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함께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성령의 지혜로 권능으로 내게 준 사명과 비전을 멋지게 펼쳐가는 세계, 이 영광스러운 세계가 은혜의 세계요, 은혜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승리가 이 복된 축복이 이 비밀이 우리 한소망 모든 가족들에게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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