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종류의 부활
2002-08-13 14:03:16

요한복음 5:24-29절 // 02/08/11

'태양인 이제마'라는 텔레비전 프로가 과거 '허준'이라는 프로와 닮은꼴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많은 관심과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드라마의 전개과정은 비슷할지 몰라도 실존했던 두 사람의 의학에 대한 생애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동의보감을 저술한 허준의 의학은 기존 한의학을 충실히 따랐던 반면 이제마는 항상 그에 대한 의문을 품고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는 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에 의해 체계화 된 사상의학(四象醫學)은 사람을 태양인(太陽人), 소양인(少陽人), 태음인(太陰人), 소음인(少陰人)의 네 가지 체질로 설정하고 각 체질에 대한 생리, 병리, 진단, 변증, 치료와 약물에 이르기까지 서로 연계를 갖고서 임상에 응용할 수 있도록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우수한 이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드라마상에서 이제마는 한 의원에 의해 숨이 끊어졌다고 진단되어진 사람을 체질에 의한 처방으로 그를 살려내는 장면이 소개되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저는 의학적인 지식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현대의학에서도 일반적으로 숨이 멎은 경우 전기충격을 가해 다시 호흡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보면 전혀 불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이미 19C에 그 사람이 타고난 체질에 의해 처방해야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학을 통해 우리의 목숨을 살리는 일은 단지 생명의 연장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 혹은 영생은 목숨을 연장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심판에 이르지 않는 구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4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구원'에 관한 문제를 언급할 때 사람들은 굉장히 멀게만 느낍니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 자신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버거운데 구원은 무슨 얼어죽을 구원이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그런데 쏟을 열정이 있으면 하루라도 더 벌어 먹는 일에 힘을 쏟겠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대 다수의 사람들처럼 살아있는 동안은 구원이 얼마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인지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사람이나 받지 않은 사람이나 별로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 교회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어렵게 살고, 힘들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구원이라면 차라리 당신이나 실컷 구원받아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인생이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과 그 인생이 끝나는 날 확연하게 차이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했습니다. 설령 사람들이 의학의 힘을 빌어 목숨을 연장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며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느낌이 없다하여 이를 무시하거나 등한시한다면 죽음이후에 찾아오게 될 심판에 대해서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 불을 본 듯 뻔한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심판에 이르지 않는 비결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내 말을 듣고'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지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이곳에 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이 있느냐?" 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심지어 졸면서도 듣습니다. 어떤 분은 조는 폼이 너무 절묘합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사실은 졸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정신력이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왠만한 사람들은 다 속아넘어갑니다. 하지만 졸고 있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그런 분들 중에서도 말씀을 듣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끔 가다가 정말 중요한 말씀은 다 잊어버리고 예화 하나만 기억하면서 그 날 설교는 혼자 다 들은 것처럼 떠들어대기도 하지만 어쨌든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듣는다'는 말은 그런 식으로 듣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이신 예수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도 쉽고도 간단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쉬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집중호우로 인해 많은 인명피해가 잇따랐습니다. 수년 전, 지리산 계곡에서 야영을 하던 야영객들 수십명이 사고를 당한 기억이 있는데 올해도 똑같은 일을 많은 사람들이 당하고 말았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비가 쏟아지는데도 철수하지 않고 그곳에 있다가 결국 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까? 사실 집안에서 뉴스만 듣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비가 저렇게 쏟아지는데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 있느냐? 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야영객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일년에 한번 어렵게 시간을 내서 놀러왔는데 그까짓 비 때문에 텐트를 접고 내려간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저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이번 휴가기간동안 처음으로 서울 근처에 살고 있는 가족이 다 모여서 휴가를 떠났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오기 전날까지 비가 왔습니다. 그래서 사흘간 그냥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민박집에서 시간을 다 보냈습니다.

물론 저는 편안하게 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어렵게 휴가날짜를 맞추어서 가족이 함께 지낸 시간이었는데 물놀이할 수 있는 곳까지 가서 발에 물한번 담궈보지 못하고 돌아온다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했습니다. 아마 비가 오는데도 텐트를 치고 그곳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특별히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왠만하면 그곳에서 지내보다가 빗줄기가 굵어져서 더 이상 야영을 할 수 있는 형편이 되면 그때 내려오겠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을 무조건 틀렸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오랜만에 왔으니까 적당하게 놀다가 좀 위험하다 싶으면 내려가겠다는 생각이 뭐가 그렇게 잘못된 생각입니까? 그러나 한가지 그들이 알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계곡에서 불어나는 불은 그들이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방심하는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이 자신을 얼마나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하는지 실감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만약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면 무모하게 계곡에서 계속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왜 사람들은 예수 안에서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는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일까요?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인정을 하든 하지 않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영생이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끝까지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은 원래의 내 모습에 대해 더하는 것도 아니고, 덜하는 것도 아닙니다. 즉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죄인인 까닭에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지 대단한 것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는 것을 가지고 마치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우리는 대단한 것을 수용하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들이 아니라 원래 죄인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나 자신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우리가 그렇게 대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바꾸어보려고 합니다. 내 생각과 일치하게끔 요구합니다. 그래서 내가 요구 하는대로 되지 않으면 배타적이 되어버립니다. 가장 현실적인 예가 아내나 남편 혹은 자식과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생각보다는 내가 요구하는 수준으로 바꾸어보려고 얼마나 많이 노력합니까? 그러다가 잘 되지 않으면 티격태격 부부싸움하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데 있습니다. 원래 죄인이었으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들 중에 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면죄부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내가 교회 다닌다는 것이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죄인임을 진심으로 고백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 여러분의 심장에서 고동치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듣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졸면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믿고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죄로 인해 괴로워하며 통회하면서 내가 죄인됨을 진심으로 고백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어려서부터 다녔기 때문에 그런 고백한번 없이 지금까지 믿음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아내의 등살에 못 이겨서 교회에 나오기는 했지만 아직 한번도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해 본 일이 없다면, 오늘 우리는 모든 것을 제쳐두고 그것을 먼저 고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지금 우리들에게 결단할 것을 촉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무슨 말입니까?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것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생명의 말씀이 증거 되어질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자는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이때'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때라고 했습니다. 그 옛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 사실을 이미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바 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한 백성들이 불뱀에게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게 하셔서 그 뱀을 장대에 매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낫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결단하여 그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믿지 않았거나 차일피일 미룬 사람들은 결국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믿음에 관해서 만큼은 항상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자신이 결심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자신이 결심만 하면 언제든지 믿음 안에 들어갈 수 있고,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버스 지나가고 손 흔드는 격입니다.

어떤 사람은 버스 지나가도 손 흔들면 택시라도 서지 않느냐? 고 말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택시가 서지 않으면 콜 택시라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에 관해서는 그런 얘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원해도 기회를 얻지 못할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입니다. 항상 기회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혹시라도 이 자리에 아직도 자신의 죄를 고백해 본 일이 없거나 결단해야 할 일에 대해 기회가 또 오겠지 생각하고 미루고 계신 분이 있다면 이 시간에 결단할 것을 촉구합니다.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입니다. 바로 이때야말로 여러분이 주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절호의 기회입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감정을 주께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미루지 말고 지금 주님의 품으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의 연륜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훌륭한 믿음 때문도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수고하고 충성했느냐? 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순간, 그때가 바로 내가 살아나는 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결단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26절에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사자소학 (효행편)에 보면 '부생아신 모국오신'(父生我身 母鞠吾身)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는 내 몸을 낳으시고, 어머니는 내 몸을 기르셨도다'는 뜻입니다. 또 '신체발부 수지부모' (身體髮膚 受之父母)라 했습니다. 즉 '신체의 모든 것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맞는 말입니까?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틀렸습니다. 생명은 부모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만약 부모가 생명을 줄 수 있다면 어느 부모가 자식을 자기보다 먼저 떠나보내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실 것이라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주신 분이 거두기도 하시고, 다시 살리기도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턱대고 살리시지는 않습니다. 그 아들로 하여금 생명을 주어서 그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번 여름성경학교 주제가 보물섬의 비밀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속에 네 가지 보물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 지혜, 기쁨,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 들어 있느냐? 하면 성경 속에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속에 생명에 관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 말씀 안에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요즘도 여전히 다이어트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의 핵심된 주제입니다. 어떻게 뱃살을 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통무우같은 다리를 날씬하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들을합니다. 그런데 제가 다이어트를 해 본 결과 '먹는 것 다 먹고 다이어트 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음식 양을 조절하고 식사패턴을 바꾸지 않으면 다이어트는 실패할 확률이 거의 100%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이어트를 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첫째는 건강을 위해서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몸이 뚱뚱하면 여러 가지 성인병이 찾아오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다이어트를 하고 나니 건강도 건강이지만 매사에 자신감이 붙는 것도 함께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전에는 쉽게 포기했던 것도 이제는 한번 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고, 또 전에는 아예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대해 도전해 보고 싶은 욕망도 생기고, 다이어트를 하고 나니 여러 면에서 좋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다이어트를 영적인 것에도 똑같이 적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말씀을 먹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살려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는데 예배를 소홀히 여깁니다. 그러다 보니 말씀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날씬해졌다고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날씬해 진 것이 아니라 말라비틀어진 것입니다. 아니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말씀을 통해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은 아들에게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앞에 내 자신을 돌아볼 때 주어집니다. 누가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명이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내 혈기대로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내 기분대로 신앙생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그 말씀 속에서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그 말씀 속에서 내게 능력을 주시는 주님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는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도 하지만 우리를 심판하실 권세를 동시에 가지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27절에 보면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심판을 세상사람들이 죄를 짓고 쇠고랑 차는 정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 정도라면 누군들 견디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텔레비전 화면에 죄짓고 수갑 채여서 형사들에게 끌려가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심판은 영원한 형벌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갈라놓는 심판입니다. 여기엔 사면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한번 결정은 영원한 결정이 되어버려 돌이킬 수 없습니다.

신문을 보니까 광복절이 다가오면서 대통령의 사면권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국가의 경축일 때 국민적 화합차원에서 사면을 단행하는 것을 좋게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 정당하게 법을 지켜 산 대다수의 사람들마저 준법정신을 흐려 놓을 소지가 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지난번 월드컵 4강진출을 계기로 500만명에 달하는 교통법규 위반자들에 대한 사면이 단행되었습니다. 물론 사면대상이 된 사람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면의 대상에 음주 운전하다가 적발된 사람들까지 다 포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허탈해 했습니다. 그런식으로 사면을 해 줄 거면 무엇 때문에 기를 쓰고 적발을 하며, 또 애써 지키는 사람들은 뭐냐?는 것입니다. 그 주장이 상당히 일리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세상에서는 권력자의 결단에 의해 죄를 지은 사람들이 사면도 되기도 하고, 복권도 단행이 됩니다. 얼마든지 다음 기회를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 기회를 놓쳤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외면하여 그 기회를 놓쳐버린다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심판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사면이 없는 영원한 형벌에 대한 심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두고 주님은 28절에서 29절을 보면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왜 기이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까? 사실 하나님께서 심판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한번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갑자기 이 말씀을 툭 던지셨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심판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현실문제를 잘 해결하며 살 수 있을 것인가? 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눈앞에 놓인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고도 막상 심판을 얘기하면 전혀 새로운 말을 듣는 것처럼 이상하게 여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판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너희들에게 지금까지 계속해서 말해 왔던 것인데 너희들이 현실 문제에 집착하느라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것이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현실문제에 급급해 자신에게 곧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심판을 잊고 삽니다. "어떻게 하면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낼까?"만 생각하다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생을 즐기며 한번 멋지게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거대한 불기둥으로 다가오고 있는 무서운 주님의 심판을 잊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에게 다가온 심판 앞에서 의아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달래거나 웃음을 짓게 하려할 때 어떤 단어를 씁니까? '까꿍'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는 아이 앞에 가서 무조건 '까꿍'하면 아이가 놀래서 더 울어 버립니다. 그러면 '까꿍'을 하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까꿍'을 준비과정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까꿍'하기 전에 '오로로로'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까꿍'하면 아이가 놀래지 않고 웃습니다.

좀 재미있는 표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어느 날 갑자기 '까꿍'하지 않으십니다. 생각지도 못하고 준비하지도 못한 상태에 있을 때 갑자기 심판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전에 준비과정을 거치시고 여러차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심판에 대해 말씀해 오셨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현실문제 때문에 그 심판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현실문제 때문에 다가올 미래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미래를 내다보며 현실 문제를 극복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등불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얘기가 한낱 이야기책 속에 나오는 창작동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삶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반드시 심판의 날이 우리들에게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미래를 준비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입니다.

며칠 전 폭우가 쏟아졌을 때 계곡에서 물이 불어나 그곳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119 구조대원들이 구조를 했습니다. 구조되어 안전한 곳에 대피해 있는 그 사람에게 기자가 다가가서 질문했습니다. "왜 빨리 계곡을 빠져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랬더니 그 사람이 말합니다. "위험하다는 방송을 한번도 들은 일이 없습니다. 이런 일이 있으면 신속하게 위험하다는 방송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물론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어쩌면 신속하게 방송을 했더라면 그들이 좀 더 일찍 피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가 오면 계곡에서 야영을 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은 굳이 그날이 아니라 하더라도 수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공중파 방송을 통해 알려 왔습니다. 그런데 굳이 그날 방송하지 않았다 하여 방송이 없어서 피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핑계밖에 되지 않습니다. 비가 오는데도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실컷 재미있게 놀다가 불어난 계곡의 물 때문에 그제서야 자신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일을 기이히 여긴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실 본문을 통해서 볼 때 유대인들은 심판에 대해 놀라움을 나타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보다 그들이 지금 놀라고 있는 것은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자신이 심판할 권세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였습니다. 그들이 보기엔 이것이 너무도 터무니없고 참을 수 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무덤 속에 있는 자는 어떤 자들입니까? 죽은 자들입니다. 죽은 자들이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 전부 다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그들의 영원한 운명이 갈라지게 됩니다. 어떻게 갈라집니까?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갈라지게 됩니다.

여기서 '선한 일을 행한 자'라는 말은 우리의 선한 행위를 근거로 생명의 부활이 주어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성경전체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의 교리가 뿌리채 흔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의 행위를 보신다는 점입니다. 행위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행위가 믿음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종 어떤 이들은 이 세상이 우리인생의 종착지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의 세계는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무덤이 곧 우리 인생의 마지막을 결산하는 장소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큰 비석을 세우고 그 비석에다 아주 멋있는 글을 남깁니다. 무덤도 보통사람보다 화려하게 꾸며놓고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룹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무덤이 인생의 종착지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무덤이 우리인생을 결산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또 인생의 결산이 어떻게 무덤을 훌륭하게 꾸며놓느냐? 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결산의 우리가 생명의 부활에 참여할 것인지 아니면 심판의 부활로 참여할 것인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인생을 살다가 마지막에 무덤을 화려하게 꾸며놓아도 심판의 부활을 맞이하게 되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세상말로 '꽝'입니다. 비록 무덤은 돈이 없어 공원묘지 한쪽 귀퉁이에 조그마하게 세워졌다하더라도 주의 음성을 들을 때 생명의 부활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수지 맞은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어느 쪽에 해당 될 것으로 생각이 되십니까? 생명의 부활입니까? 아니면 심판의 부활입니까? 많은 사람들의 착각이 교회 안에서 열심히 설교를 듣고, 봉사를 하면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런데 실제 삶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그 삶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선한 일을 위한 행위가 없습니다. 그러고도 나는 믿음이 좋고, 신앙적이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 행위가 선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여러분이 생명의 부활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행위가 선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구원받은 사람의 증거는 그 행위가 선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에 해당되시는지 여러분 자신을 곰곰이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제 개인적으로 여러분에게 당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의 선한 행위를 얘기할 때 서로를 향해 칭찬하는 말을 아끼지 말자는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어떤 여 집사님이 설교시간에 목사님으로부터 남편을 칭찬해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서 남편을 어떻게 칭찬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칭찬할 거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날씨가 무척 더워 남편이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여집사님이 결혼 전에 남편이 운동을 했다는 얘기가 떠올라서 '당신 다리는 건강미가 넘쳐 흐르는 것 같애'라고 했습니다. 그날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겠습니까? 집안에 있을 때나 밖에 나가거나 심지어 늦가을까지 반바지만 입고 다니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선한 행위를 다른데서 찾지 말고 작은 것에서부터 한번 찾아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선한 삶이 여러분의 믿음을 나타내는 도구이며 생명의 부활로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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