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나를 외치는 자들
2002-06-07 19:41:04




■ 설교자:박 종 화 목사
■ 설교일:2002년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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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50:6 ~ 9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나와 다투겠는가! 함께 법정에 나서 보자. 나를 고소할 자가 누구냐? 나를 고발할 자가 있으면 하게 하여라.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니, 그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 하겠느냐? 그들이 모두 옷처럼 해어지고, 좀에게 먹힐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 히브리서 12:1 ~ 3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 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요한복음서 12:12 ~ 19
이튿날에는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 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를 맞으러 나가서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타셨다. 그것은 이렇게 기록한 성경의 말씀과 같았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네 임금이 오신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이것이 예수에 대하여 기록된 것이며, 또 기록된 그대로 사람들이 예수에게 그렇게 하였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또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사로를 불러내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일어난 그 일을 증언하였다. 이렇게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온 것은, 예수께서 이런 표적을 행하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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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본문을 읽을 때 여러분이 들은 “호산나”가 오늘 예수의 수난 주간을 시작하는 노래요, 찬양이요, 기도입니다.
예수께서 지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해 입성하시는데, 성서 말씀에 보면 자그마한 나귀, 안장도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를 빌려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십니다. 예루살렘! 이름하여 유대 땅의 수도(首都), 이스라엘의 중심, 센터, 종교와 정치와 사회, 문화 모든 것의 센터, 그야말로 메트로폴리스(metropolis)입니다. 하잘것없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변방의 갈릴리에서 자란 예수가 지금 이스라엘의 센터를 향해서 진입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맞으러 나온 사람들은 개선장군처럼 입성하는 예수, 그 예수한테 엄청난 기대를 걸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그 기대의 목소리가 이렇게 압축적으로 쓰여 있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우리를 구해 주십시오. 호산나,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당신에게 복이 있기를!”
그 사람들은 “그 복을 우리한테 주십시오. 우리한테 주실 복은 구원의 복!” 하면서 예수를 맞이한 것입니다.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그분이 지나가는 길에 종려나무 잎을 깔고 그 가지를 흔들면서, “우리의 왕으로 오신 분! 당신에게 복이 있으니, 그 복을 우리에게 베풀어서 구원받게 하소서.” 하고 외친 것입니다.
로마 식민지배에 착취당해 생존을 위협받던 백성들! 가렴주구에, 엄청난 세금에 착취만 당하던 사람들! 그러면서도 병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식탁에 같이 앉을 수 없었던 사람들! 예수 앞에 몰려든 무수한 군상들! 이 사람들이 호소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호산나! 당신 이외에는 우리를 구할 자 없습니다. 그 동안 로마 지배하에서 살면서 로마제국의 관리나, 이스라엘을 종교적으로 통치하던 유대교 지도자나, 여러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큰소리를 쳤지만, 우리는 완전히 배신당하고 살았습니다. 이제 유일하게 당신만이 우리를 구하실 수 있습니다. 호산나! 당신께만 우리를 구해달라고 말씀드립니다. 호산나!”
여기까지는 참 좋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까지는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구절, “이스라엘 왕에게 복이 있기를!”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후반부가 없었어야, 호산나가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고, 만백성을 구원하고, 세계를 뒤집으면서 새 생명을 주시려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이 있기를, 하늘에 복이 있기를,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 하고 외치는 것이 올바른 외침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뜻이고, 예수의 뜻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뜻은 “당신이 오셨으니, 당장 로마 제국에서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가렴주구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이렇게 소외시킨 이 지긋지긋한 인생살이에서 해방받고 싶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스라엘의 왕, 당신이여!” 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외침을 듣는 로마 관원들은, 이 외침을 듣는 유대교 지도층은, 아마도 백성들의 호산나가 헛소리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호산나는 로마제국을 향해서, 유대종교를 향하여 조롱하는 소리입니다. “로마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나,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는 우리를 구하십니다. 로마 제국이여, 호산나 소리를 듣고 있는가? 유대교 지도층이여, 당신들이 내세운 율법으로 우리는 이렇게 처참한 인생이 되었소. 우리는 이제 나귀 타고 오는 새로운 복음을 원합니다.”
“호산나” 외침은 예수에게는 영광의 상징, 관중들에게는 희망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로마제국과 유대교에는 저주와 조롱의 상징입니다. 이렇게 호산나로 칭송을 받으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의 기쁨, 개선장군만이 누릴 수 있을 그 기쁨, 우리가 상상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호산나를 외친 이 군중들은, 유대인의 왕, 이스라엘의 왕, 호산나의 주인공이 그날로부터 시작하여 불과 닷새가 지난 다음에 당할 골고다 언덕에서의 비참한 처형을 결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예상했다면, 아마 호산나의 소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예상하고 미리 재단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닷새가 지난 다음에,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고 호산나를 부르던 바로 그 사람들의 입에서 “당신 자신이나 구원하시오.”라는 비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왜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갑니까?” 대답이 없습니다. 호산나 찬양을 받았던 그분은 골고다 언덕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종려주일에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서, 이 사람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소리질렀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던 백성은 180도로 바뀌어서,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질렀습니다.
예수께서는 침묵 가운데 아마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그래, 닷새 전에 호산나를 외치던 자들이, 얼마나 지났다고 나를 배신하는 것인가?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아니 사람들은 항상 배신할 수 있습니다. 닷새가 아니라 바로 그날 배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닷새 전에 당신을 호산나로 불러 주었는데, 당신은 어떻게 우리를 배반하고 십자가에 무참하게 죽어갑니까?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쩌란 말입니까?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예수가 배신자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수난절의 역사는 배신과 배신이 상호 교차하는 역사입니다. 이 역사는, 마치 오늘 세계가 21세기의 문명을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혹은 문화적인 차원, 다시 말해 모든 세상의 삶이 전부 배신으로 점철된 역사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배신과 배신이 엇갈리는 역사, 그래서 질책하고 저주하는 이런 역사는 2천 년 전 예루살렘에만 있었던 역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있습니다.
예수를 향해 호산나를 불렀던 심정을 금요일에, 닷새 후에도, 골고다에서도 그대로 유지했다면, 십자가 앞에서도 똑같이 “못박힌 저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요. 호산나!” 하고 외칠 수 있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참으로 신앙의 백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진정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하나님이 당하신 수난 앞에서 “호산나!” 할 수 있습니까? 좌절을 느끼고 고민할 때에, 십자가 보면서 주님만이 나를 구할 수 있다고 믿으며, “십자가에 달리신 주여, 호산나!” 할 수 있습니까? 개선 행렬 앞에서가 아니라, 골고다 앞에서 호산나 할 수 있습니까?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 겁니다. 사고방식의 급진적인 전환이 필요할 겁니다. 죽어 가는 약자를 향해서 호산나, 매맞는 당신 호산나, 할 수 있습니까? 오늘 성서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종려주일이 시작될 때만 아니라, 골고다 언덕에서도 호산나 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이틀이 더 지난 뒤, 칠일되는 날, 부활절 아침에 할렐루야로 환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읽고 명상하고 따라야 할 종려주일의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십자가를 참고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세상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것의 상징입니다. 그분은 순한 양처럼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괴로움이 생기면, 그분이 지신 십자가 수난의 인내를 기억하고 참아보십시오.
마틴 루터가 십자가의 복종을 해석하면서 예로 든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 산언덕 가파른 바위 위에서 두 염소가 서로 마주쳤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야기에는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외나무다리가 됐든, 바위 위가 됐든, 어쨌든 가파른 바위 위에서 마주쳤는데, 두 염소는 뿔을 들이밀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큰 염소가 바위 위에 넙죽 엎드렸습니다. 그리고서는 마주 오던 작은 염소한테 자기 위로 밟고 지나가라고 했습니다. 작은 염소가 그 위를 밟고 지나갔습니다. 그런 다음에 큰 염소가 자기 길을 갔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란 인간들 앞에서, 죄인들 앞에서 넙죽 엎드리고서, 비굴해 보일 정도로 완전히 겸손하게 누워서 죽기까지 복종하고, “죄인들이여, 민중들이여, 군중들이여, 기득권자들이여, 모든 백성들이여 나를 타고 넘어가시오. 그 길이 바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내 등을 타지 않으면 생명의 길로 갈 수가 없습니다. 떨어지면 죽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자신의 등을 타고 가라는 겸손의 자기 공여입니다.
골고다 언덕의 사건이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버린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골고다 언덕에 넙죽 엎드려서 세상으로 하여금 내 등을 타고 나를 밟고 가라고, 밟고 가는 자에게 생명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사건입니다. “십자가를 밟고 가라!” 우리는 그 말을 십자가를 지고 간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까?
우리가 아는 구약의 민족지도자, 신앙의 아버지 모세, 그는 훌륭한 사람 같지만 인간의 표준으로 보면, 말을 더듬는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나 어눌해서 말을 잘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말 잘하는 똑똑한 사람 불러서 일을 맡기시지, 하필 말더듬이 모세를 하나님의 사자로 세웠습니까? 예레미야는 눈물의 예언자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역시 모세 이상으로 말을 못해서 사람들이 못 알아듣겠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가 되었습니까?
예수 당시 세리는 가렴주구의 상징이었습니다. 세금을 몽땅 걷어다가 로마제국에 바치는 가렴주구의 상징들. 그 중의 하나인 마태를 무엇 때문에 선택하여, 사도로 삼았습니까?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실 때, 왜 자기가 고기, 빵 가져다가 기적을 행하지, 가난한 어린 소년이 가지고 있던 물고기와 빵으로 오천 명을 먹이게 했습니까? 무엇 때문에 하필 어린 소년의 수중에 있는 것으로?
비천하고 무능한 어부 베드로를 무엇 때문에 수제자로 택하셨습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종교적 신념에 불타서, 예수를 믿는 자들을 다 잡아 죽이기로 결심하고 이제 막 체포 구금을 위해 떠나던 사울이라는 사람을, 요즘말로 말하면 종교적 테러리스트입니다만,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하고많은 사람 중에 그 테러리스트를 잡아다가, 회개시켜 선교자, 신학자 바울로 바꾸고, 그를 통해 교회를 만들었습니까?
인간의 지혜로 보면 어리석은 일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의 방식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없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부요하게 하시고, 모자라는 자를 택하여 넘치는 복을 주시고, 무식한 자를 택하여 유식하게 하십니다.
골고다 언덕이 없이도 구원해 주시면 될텐데, 왜 하필 비참한 골고다라는 역사를 통해서 구원을 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문부호를 붙이든 말든, 골고다라는 방식을 통해서 구원을 주셨습니다. 길은 하나입니다. 골고다를 통한 은혜의 방식을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이 직접 수난을 당하는 그 방식을 여러분도 따르십시오. 그 길을 타고 가야 생명의 나라에 이를 수 있습니다. 골고다 언덕의 밤이 없이는 부활의 아침이 열리지 않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함께 오르십시다. 그 고통의 언덕 위에서도 호산나를 외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한테 할렐루야를, 부활의 아침의 기쁨을 약속하십니다.
십자가, 우리가 좋아서 택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한테 십자가라는 아픔이 주어지면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듯이 우리도 받아야 합니다. 그 십자가 그릇이, 그 고통의 그릇이 생명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골고다 언덕의 피는 부활의 새 싹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하는 할렐루야의 함성, 이 약속 하나로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을 시작합니다.
지난주 수요일에 저는 수도교회를 방문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수도교회는 작은 집 하나를 운영하는데, 그 집 이름은 사랑의 집입니다. 정신적, 육체적 지체아들을 보살피는 집입니다. 우리 교회는 외국인 노동자를 치료하는 집을 하나 만들었고, 수도교회는 우리 사회의 지체아들을 위한 집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지체아를 가진 부모님들이 오셔서 같이 예배도 드리고, 애들도 돌보고 그러는데, 그 집에서 조그마한 책을 하나 냈습니다. 30대의 한 어머니가 쓴 고백적인 글입니다.
내용을 봤더니, 아이는 낳은 지 3일만에 여러 종류의 지체에 걸려서, 자폐증에, 신체적 장애에, 정신적 지체에 고통을 겪었는데, 지금은 이 사랑의 집에 나오면서 자기가 이름이 씌여진, 작은 무늬에 자기 이름이 붙은 신발장에 자기 신발을 벗어서 넣을 수 있고, 식탁에 앉아서 식사기도도 같이 하고, 찬송도 어눌하지만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애절한 이야기가 많지만 접어두고, 그 어머니는 이제 여덟 살이 된 그 아이와 자기의 삶을 소개하면서, 이런 시 하나를 썼습니다. 내용이 이런 것입니다.

작고 예쁜 십자가 하나 내게 있습니다.
원한 것도 아니고 바란 것도 아닌데,
좋다고 가질 수도 없고 싫다고 버릴 수도 없는
십자가 하나 내게 있습니다.
(아기가) 웃으면 웃기에 슬프고
(아기가) 울면 울어서 슬프고
(아이가) 잠들면 말이 없기에 슬프고.
너무나도 작고 너무나도 예뻐서 제 가슴이 저린 십자가,
나만이 안고 가야 할 아주 작은, 아주 예쁜
십자가 하나 내게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어머니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잘났다고 떠들지만, 자기 몸, 자기 영혼, 자기 인간, 자기 가정, 자기 직장, 자기 가진 모든 것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여기저기에 장애와 지체가 있음을 볼텐데…” 사실이 아닙니까? “나는 불구자입니다. 나는 장애자입니다. 나를 끌어안아 줄 사람 누가 있습니까?” 누가 이런 시를 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다 지체아, 장애아입니다. 자폐증으로부터 시작해서, 잘났다는 교만 병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외치지만, 우리 모두 다 골고다 언덕에서 함께 죽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가슴에는, 아주 작은, 그러나 용서해주셔야 되기 때문에 아주 예쁜 우리 하나 하나의 십자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 가슴에 있는 십자가 가운데 하나는 바로 부활을 약속하는 생명의 할렐루야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십자가가 되어, 십자가의 주인이 되어 골고다에서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비참한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해서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던 예수의 골고다 언덕에서 오늘 우리는 호산나를 외칩니다. 하나님의 그런 방식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을 받아들이십시다. 부활의 할렐루야 함성이 곧이어 터져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생명의 길, 그 생명의 길을 열기 위해 오늘 예수께서 하나님의 방식에 따라 우리에게 오십니다. 승복하는 자, 자진해서 승복하는 자, 그 사람은 오늘,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의 죄를 다 용서하고 새로운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집, 사랑이라 이름하는 그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 집에 들어간 사람은 완전히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는 자유, 복종을 통해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완전한 자유, 생명을 보듬어 끌어안을 수 있는 자유, 십자가가 생명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파격적인 자유를 확보하게 됩니다. 이 자유는 신앙인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그 복의 현실이 오늘 종려주일 아침부터 시작합니다. 금주 내내 여러분에게 십자가의 복이 함께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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