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과의 식탁 2002-06-07 19:37:37 ■ 설교자:박 종 화 목사 ■ 설교일:2002년 2월 17일 020217.ram(LOAD:75) 구약의 말씀: 에레미야 9:22 ~ 24 나 주의 말이다. 너는 이렇게 전하여라. '사람의 시체가 들판에 거름 더미처럼 널려 있다. 거두어 가지 않은 곡식단이 들에 그대로 널려 있듯이, 시체가 널려 있다.'"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 서신서의 말씀: 고린도전서 9:24 ~ 27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썩어지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달음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가 버림을 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9:9 ~ 13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집에서 음식을 드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드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 말을 듣고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오늘부터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이 시작됩니다. 사순절 첫날인 오늘을 예수님은 어떻게 보내셨을까 하고, 오늘의 성서 본문 말씀을 읽어보았더니, 마태복음서 본문에,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불러모아서, 함께 식탁을 차리고 먹고 마시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오늘 사순절을 시작하는 때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사시면서, 집이 없다, 누울 자리가 없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기가 막힐 것입니다. 집이 없는 사람들, 그래서 누울 곳이 없는 사람들, 거기다가 함께 음식을 차려놓고 함께 둘러앉아 먹을 밥상도, 그런 공간도 없는 사람들! 의식주가 인간의 생활에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 그 의도, 식도, 주도 불가능한 사람들, 그들의 심정을 이러저러하게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하게도 이 세상엔 그런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유대 땅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으로 살기는 사는데,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식탁에 초대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난이 무슨 죄라고! 마찬가지로 병이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병자라는 이유 때문에, 성전 예배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가정 모임에도 참석할 수 없고, 식탁에도 초대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창녀이기 때문에, 또는 정결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또는 세금을 걷어서 로마 제국에 바치는 세리로 일하기 때문에 모임에 배제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죄인으로 낙인찍힌 많은 군상들,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것 때문에 함께 거주하지도, 먹지도, 대화하지도 못하는 군상들이 있었습니다. 예수 주변에 몰려든 군상들은 주로 이들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러 온 군중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요즘 말로 말하면 집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 함께 먹는 자리에도 초대받지 못하는 사람들! 예수의 목적은, 바로 이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집을 주자는 것입니다. 그분 메시지가 그겁니다! “집이 없는 사람들한테 하나님의 집을 지어 주겠다.” 그런데 그분은 스스로를 내놓음으로써, 그 일을 이루십니다. “나 자신이 바로 이 사람들이 거할 수 있는 집!” 예수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분은 하나님의 집이라고 답변하면 됩니다. 예수한테 오면 가난한 사람도 누울 자리가 있습니다. 쉴 집이 있습니다. 병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주고 고쳐주는 병원이라는 집이 바로 예수입니다. 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죄 사함을 받고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역사를 경험하는 그 집이 예수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병원입니다! 예수는 밥을 먹을 수 있는 구호소입니다! 예수는 죄인을 용납하여 의인을 만드는 사랑의 집입니다! 예수는 집! 이 집을 성서에서는 헬라어로 “오이코스(oikos)”라고 합니다. “오이코스”라는 말은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집의 ‘살림살이’를 뜻하는 말은 헬라어로 “노모스(nomos)”라고 합니다. 이 둘을 붙여서 “오이코노모스” 그러면 요즘말로 ‘경제’라는 말입니다. 성서에서 보면, 경제학이란 다른 뜻이 아니라, 집을 어떻게 가꾸고 꾸려서 집 살림을 넉넉하게 할까, 침실을 어떻게 만들고, 밥 먹는 테이블은 어떻게 만들고, 잠자리는 어떻게 만들까, 가계는 어떻게 꾸려야 할까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오이코노미아!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 당신의 집에 부자와 가난한 자, 병든 자와 건강한 자, 죄인과 의인 모두 불러다가 복된 삶을 살게 하려 하십니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살림살이, 그것이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입니다. 하나님의 경제학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식탁 교제를 통해서 한 가지를 지적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왜 부자만 들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제외시키는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의 초점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문제는 가난 자체인데, 왜 가난한 사람을 배제하느냐? 병이 문제인 것인데, 왜 병들어서 고생하는 사람을 배제하느냐? 죄가 나쁜 것인데, 죄 때문에 허덕이면서 용서받기를 갈망하는 사람을 왜 배제하느냐? 예수의 관심은 가난이나 질병이나 죄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죄“인”입니다. 병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병든 사람이, 죄가 문제가 아니라 죄를 지은 사람이 문제입니다. 예수께서는 “다 와서 우리 함께 집에 거하자.”고 하십니다. 그분의 집에 거하는 것은 가난이 아닙니다. 그분의 집에 누울 수 있는 것은 병이 아닙니다. 그분의 집에 쉴 수 있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입니다! 병든 “사람”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지, 사람이 아닌 것이 모여든 것이 집이 아닙니다. 저는 심방하면서 여러 가정을 방문할 기회를 가지게 되어서 굉장히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믿습니다. 요즘에는 아파트가 많은데, 아파트라는 집은 구조가 거의 같습니다. 똑같이 틀로 찍어 놓은 듯한 구조인데, 그런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제가 그냥 인간적으로 말씀드리면, 우선 집안의 냄새가 다릅니다. 문을 열자마자 그 집에 사는 분들의 향기가 납니다. 똑같은 차를 대접하는데도 그 차의 향이 서로 다릅니다. 음식을 대접하는데, 음식의 맛도 다릅니다. 향기도, 맛도, 분위기도 그 외의 모든 것이 다릅니다. 그걸 느끼면서, 똑같은 집 속에서도 다양한 맛과 향기와 그리고 느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조화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자의 집이 있었지만, 민족 전체에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함께 거할 수 있는 집, 이스라엘의 오이코스, 그것은 이스라엘의 성전(聖殿),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에는 가난도 안 되지만, 가난한 사람도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병도 안 되지만 병든 자도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죄도 안 되지만 죄인도 출입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의인, 건강한 사람, 부자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믿은 그 집은, 그런 집은 결코 하나님의 집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는 배제된 그런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집을 지으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유대사람들이 자기들의 집 전통을 파괴한다고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예수의 수난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사실 오늘 예배를 마치면 집으로 갑니다. 편안한 집, 행복한 집, 풍족히 먹을 수 있는 집, 편안히 누울 수 있는 집! 저는 여러분이 여기 오실 때에 경동교회가, 이 교회가 여러분의 영적, 육적 집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이 교회가 따뜻한, 풍족한 집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예수가 계시니까요!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죄인은 당시 상황 속에서는 그냥 병자, 죄인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배제된 자들입니다. 종교나 경제적으로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완전히 소외된 계층들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주민등록증도 발급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군상들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2002년을 사는 우리의 눈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섣불리 2002년의 세상에는 이런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2월 2일에 유럽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여러분, 언론 보도를 통해서 다 알고 계실 겁니다. 2002년 2월 2일 네덜란드에서 황태자의 결혼예식이 있었습니다. 황태자의 이름은 뮐렘 알렉산더, 황태자비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막시마 조레 구에타! 그런데 2002년 현대의 이 결혼 사건이, 예수께서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경험했던 그 스캔들의 연속입니다. 그 결혼에 얽힌 정치 논쟁 하나 소개합니다. 신문에 났습니다. 그 결혼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문제는 이런 것입니다. 막시마라는 황태자의 신부가, 아르헨티나에서 1976년에서 1983년까지 있었던, 비델라 장군 치하의 흉악무도했던 군부독재 체제에서 농림부 장관을 지난 사람의 딸이라는 것입니다. 수용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국민들의 여론은 이렇게 돌아갔습니다. “황태자가 결혼하겠다고 나서니, 그 딸은 받자. 그러나 독재자의 주구였던 아버지는 못 받는다.” 그래서 신부의 아버지가 결혼식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신부 쪽과 친분이 있는 천주교 신부님이 아버지 대신으로 오셔서 결혼예식에서 성서 말씀을 봉독했다고 합니다. 그것조차도 말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나의 정치적 사건입니다. 그런데 황태자의 어머니인 여왕, 이름이 빼아트릭스입니다만, 이 빼아트릭스 여왕이 1966년 결혼을 했는데, 결혼할 때 남편감이 누구냐 하면, 히틀러 치하의 군대에서 장교 노릇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가담했던 사람, 암스베르크 백작, 이 사람을 남편으로 모신 겁니다. 네덜란드가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 여왕의 부군으로 모실 수 없다. 그러나 결국 빼아트릭스 여왕의 고집 때문에 결혼을 했는데, 66년 결혼식을 행하던 그 장소에 화염병이 투척될 정도로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고 합니다. 이걸 기억하는 네덜란드 국민들이 아르헨티나 독재자의 딸을 앞으로의 왕비로 모셔야 하느냐는 문제로 들끓었습니다. 결국 황태자가 원한다니까 왕비는 받아들이고, 그 아버지는 배척하게 되었습니다. 정치 논쟁의 하나입니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에는 가난이라는 말이 있었고, 또는 죄인이라는 말이 있었고, 병든 자라는 말이 있었으나, 오늘날은 또다른 말로 구별과 배제, 질시와 원한이 생겨납니다. 정치 논쟁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황태자의 결혼에 관한 교회 논쟁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세계교회로부터 들은 뉴스입니다. 정치 논쟁은 그렇게 끝이 났는데, 교회논쟁은 이렇게 생겨났습니다. 네덜란드 왕족은 전통적으로 장로교 교인들입니다. 그래서 네덜란드의 공식 교회의 이름이 “네덜란드 리폼드 처치(Netherlands Reformed Church)”입니다. 국교는 아니나 왕실은 장로교에 속해 있고, 황태자도 장로교 교인입니다. 그런데 막시마라는 이 여성은 로마 천주교 신자입니다. 천주교 신자와 개신교 신자가 어떻게 결혼하느냐고 논란이 많이 있었습니다. 결국 결혼 예식은 장로교 식으로 치르기로 하고, 황태자도 결혼한 이후에 개신교, 장로교의 신자임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고, 이 여성은 개종을 결심하지는 않았지만, 이제부터 장로교를 공부하기로 하고, 그래서 결혼이 성사되었나 봅니다. 그런데 동일한 종교적 문제가 14년 전에 있었습니다. 1988년에, 빼아트릭스 현재 여왕의 조카가 결혼을 하는데 천주교 신자인 여자와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신교의 목사와 구교의 신부가 공동 집전하여 결혼예식을 행하고,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여, 천주교 신자와 개신교 신자인 신랑, 신부에게 떡과 포도주가 분배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네덜란드에 난리가 났습니다. 개신교 보수 측에서는 천주교와 연합한 결혼 예식, 불결하다, 그래서 난리가 났구요, 네덜란드 천주교의 시몬스 추기경은 그에 질세라, 신구교가 공동 집전해서 분배된 영성체는 세속적이고 타락한 것이라고 선언해서 난리가 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사건 때문에 이번 결혼식도 아마 풍파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유럽, 그 중에서도 가장 자유스럽다고 하는 나라, 마약도 일정 한도는 약국에서 자유로이 살 수 있는 나라, 임신 중절도 자유롭게 하는 나라, 자유라고 하는 말이 특징처럼 되어 있는 나라에도 여전히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교리 논쟁, 교파 간의 논쟁, 정치 논쟁이 있습니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계속될 수 있습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말입니다. 오늘날의 이 논쟁을 보면서 저는, 우리 주위에 만연한 이런 종류의 논쟁이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십자가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다 죄 사함을 받고, 십자가 안에서 다 용해되어, 새로운 하나님의 집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 가운데는 그런 게 없습니까? 우리 스스로의 삶 속에, 우리 가정의 삶 속에, 사회 속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제대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따르는 우리 각자가 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으면, 우리 각자가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런데 이 집에는 무엇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 집 속에는, 제 마음의 집 속에는 가난한 자가 들어올 수 있습니까? 제 마음의 집에서는 병든 자가 한 상에 같이 앉아 숟갈로 된장 뜰 수 있습니까? 혹시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자를 초청하여 차 한잔 마실 수 있습니까? 제 집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각자의 집은 어떻습니까? 팔레스타인 땅에 있던 유대교인들의 집, 구분해서 격리시키고 관계를 끊어 놓는 집, 자기들만의 집, 혹시 그 집이 우리들 집은 아닙니까? 예수는 무엇 때문에 오셨습니까? 오늘 구약 본문인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여, 지혜 자체를 자랑하지 말아라. 그걸 자랑할 것이 아니라,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여라. 힘센 용사들이여, 힘 자체를 자랑하지 말아라. 오히려 그 힘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여라. 부자들이여, 재산 자체를 자랑하지 말아라. 재산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여라. 신앙이 있는 자들이여, 신앙 자체를 자랑하지 말고, 신앙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자랑하여라.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지혜 속에, 힘 속에, 재산 속에, 신앙 속에 살아있는 주인으로 역사하실 것이다. 그래야 너희가 살아 있는 집이 될 것이다.” 이사야서를 통해서 이미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집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집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집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사순절에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집은 어떤 집입니까? 요즘 패션이 중요한 관심사입니다만, 요즘 말로 하면 사순절에 하나님의 패션은 뭡니까? 사순절이 시작되는 오늘 하나님의 패션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부터 십자가의 모습으로 우리 집에 와 계십니다. 십자가 없는 집은 격리의 집, 소망이 없는 집입니다! 십자가 있는 집은 생명이 담보된 집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십자가가 있는 집을 만들어 가십시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성 프랜시스가 우리한테 좋은 기도를 전해 주었습니다. “평화의 기도.” 우리가 찬송으로도 부르고 기도로도 드립니다. 그런데 이 분이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하나 준 것 같습니다. 생활에서 나온, 작지만 엄청난 의미를 지닌 지혜입니다. 하루는 자기 하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데, 물을 길어 올릴 때마다, 물통에 나무 막대기 하나를 집어넣습니다. 그걸 왜 넣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이 하인 하는 말이, “물통을 끌어올리면, 물이 꽉 찼든 덜 찼든, 줄에 매달린 물통은 반드시 흔들리게 되고, 그러면 물통의 물이 많이 흘러 버립니다. 그런데 막대기 하나를 넣어두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깨친 바 있어서 성 프란시스가 자기 명상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모든 인생은 하나의 물통! 어떤 물통은 두려움 때문에 흔들리고, 어떤 물통은 고통 때문에 흔들리고, 어떤 물통은 죄책감에 흔들리고, 어떤 물통은 가난하여 흔들리고, 절망 때문에 부수어집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 물통 속에 나무 하나 담아야 됩니다. 그 나무 이름이 뭡니까? 이름하여 십자가라는 나무! 그 나무를 담그면 물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집은 지혜의 집, 달란트가 많은 집, 재산이 풍부한 집, 신앙이 깊은 집, 희망이 넘쳐나는 집일 수 있습니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집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아니 항상 흔들립니다. 우리의 재능도 흔들립니다. 우리의 힘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흔들리거나 부숴지지 않는 집, 그런 집은 어떤 집입니까? 십자가가 가운데 박히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여 십자가를 여러분의 집 한가운데 박으시기 바랍니다. 그 집은 복이 있고 생명이 움트는 집이 될 겁니다. 이것이 사순절에 우리가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십자가를 가운데 세우고 우리 인생을 살아가십시다.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여러분 속에 생명의 구세주로 오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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