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의지
2002-06-06 13:33:49

(벧전 2 : 4 - 5)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오늘은 성삼위일체 주일 후 열아홉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오후에는 이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는 부족한 저의 위임예식이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때를 맞이하여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 신앙고백적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말씀을 보면 '산 돌'이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살아있는 돌'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별명과도 같습니다. 세상의 건축가가 별로 쓸모가 없다고 해서 버렸으나 다시 귀하게 쓰이게 된 돌을 의미합니다. 바로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쓸데없다 생각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구원자임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산 돌‘이라는 단어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내려왔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고자 해서 영어권의 많은 사람들은 이 단어를 이름 가운데 사용해 왔습니다. Living stone 즉 ‘산 돌’이라는 성을 자랑스럽게 사용하여 왔습니다. 그 가운데 David Livingstone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1813년에 영국의 한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거의 모든 어린이가 그러했듯이 열 살 때부터 방직공장에 나가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좋은 가정에서 자랐기에 기독교 정신으로 인격을 닦으며 자랐고 틈틈히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면서 병을 치료하는 법도 배워두었습니다. 아무튼 그 당시 그는 잘 알려지지 않는 이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난 가운데 자라나면서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며 자라났습니다. 그래서 더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27살 때에 아프리카 선교를 떠났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러한 선교를 하나님의 사명으로 알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곳에서 의술을 베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맹수의 위험과 풍토병의 무서움을 무릅쓰고 그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달려가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잃어버리면서도 그는 하나님과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아프리카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었고 복음을 여러 곳에서 전파하며 큰 성과를 거두는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더욱이 아프리카 대륙 가운데 있는 빅토리아 폭포를 서구 세계에 알린 일로도 유명합니다.

그가 60살 되던 1873년에 죽자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무척 슬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일을 통해 그에게 최대한의 존경을 표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주검을 미이라로 만들어서 9개월 이상 걸려 영국에 수송하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영국을 위하여 큰 일을 한 사람들이 묻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게 되었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그의 비문에는 아프리카를 뜨겁게 사랑하며 복음을 전했던 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진실로 ‘살아있는 돌’이라고 명명되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온 몸을 바쳐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산 돌’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저도 ‘산 돌’ 즉 living stone으로서 살기에는 너무나도 믿음이 연약합니다. 그러면서도 ‘산 돌’로서 살고자 하는 방법을 찾아봅니다. 저는 이를 위해 어느 목사님의 시를 소개해 드립니다. 이 시는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주보의 오늘의 설교요약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름 없는 조약돌입니다.

당신이 빗물로 씻어주신 얼굴,

흐르는 물로 다듬어주신 둥근 얼굴로 삽니다.



나는 침묵하는 조약돌입니다.

당신이 놓아두신 자리 지키면서

흘러가는 세월 지켜보며 말없이 삽니다.



나는 기다리는 조약돌입니다.

당신이 나라도 필요하실 때는

사람들을 보내 가져다 쓰실 줄 믿고 삽니다.

(서삼정 목사, 미국 애틀란타 제일장로교회 시무/ 국민일보 2001. 10. 13)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우선 시인의 신앙고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약돌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산 돌’과도 같이 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러면 하나 하나 살펴봅시다.



첫째, 조약돌은 정말 이름 없는 돌입니다. 큰 바위에서 떨어져 나와 물살이 내모는 대로 떠내려온 돌입니다. 개천이나 하천에 흔하게 널려져 있는 것이 조약돌입니다. 이름을 붙이기에는 그 조약돌들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그리 귀하여 여김을 받지 못하는 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약돌은 나름대로 중요한 존재들입니다. 자연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그 자체가 존재의 의미입니다. 많은 빗물과 시냇물을 만나며 산전수전 다 겪은 삶을 살았다는데 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귀중한 존재라는 사실 하나가 중요합니다.



‘산 돌’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도 이 세상에 계실 때는 이름 없는 조약돌과도 같았습니다. 그 분은 이 세상에 계시면서 사람들이 잘 알아주지도 않는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대인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분은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뉘일 자리가 없어 마굿간 구유에 놓일 정도로 이름 없이 오신 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삼십 년 동안 준비하는 기간을 지내시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분입니다. 단지 열두 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와 당시 성경교사들과 토론을 벌인 일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평범하게 크신 분은 아니었습니다. 삼십 년 동안 조용히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은혜와 지혜의 빗물을 맞으며 준비했습니다. 이에 대해 누가복음 2:52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인 면에서 충만케 되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격적인 면에서도 다듬어지고 둥글게 되는 훈련을 받으셨습니다. 모든 종류의 사람을 대해도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는 분이었습니다. 비록 책잡으려 덧을 놓는다 해도 이를 잘 피해나가며 오히려 그들을 포용하시는 훌륭한 인격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병든 자, 고통 가운데 있는 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지혜 가운데 자라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부족한 사람 저도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조약돌과 같이 살아가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서 볼 때 저도 이름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니 이름이 날 정도의 사람도 못됩니다. 또한 이름을 날리며 살만한 능력과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저도 하나님과 여러분들을 위하여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길을 가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그 길을 가고자 합니다.

저는 아직도 모나고 각이 많이 진 돌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아직도 깎여야 할 부분이 많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직 조약돌 조차 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참을성도 부족하고 사랑도 부족하고 쉽게 화를 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계속 깍아주시고, 다듬어주시고, 또한 둥글게 만들어 주시고 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조용히 인격적이고 영적인 훈련을 감당하고자 합니다.



둘째, 조약돌은 침묵하며 지냅니다. 그저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도 자기의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스쳐가는 물고기와 많은 물건들을 보지만 무엇을 보았다고 말하지도 아니합니다. 그저 물 속에서 그대로 머금고 있습니다. 진실로 참고 견디는 모습입니다.



‘산 돌’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도 조약돌과 같이 이 세상에서 침묵을 많이 하신 분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불의와 죄악을 보고 내키는 대로 저주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하질 않으셨습니다. 불의를 보고 내키는 대로 저주하셨다면 이 세상은 벌써 심판을 받고 없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 분은 가능한 한 많이 참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죽어 가는 십자가 위에서도 거의 침묵하셨습니다. 단 일곱 마디의 말씀만을 하셨습니다. 그것도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산 돌’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침묵도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헌담과 저주 대신 복과 은혜를 선포한 것입니다. 아파하는 자에게 치료의 말씀을, 죄인들에게는 용서의 선언을, 소외된 자에게는 함께 하심의 말씀을 전하신 것입니다. 이는 적극적인 면에서의 침묵입니다. 이러한 침묵은 할수록 좋은 침묵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은 언제든지 조약돌과도 같이 자기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놓은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사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욕망과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그 목적을 항상 생각하며 살아가신 분이었습니다.



저도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했던 것처럼 또한 조약돌이 그러한 것처럼 침묵하며 하나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이는 우선 하나님의 음성을 더 많이 듣기 위한 침묵입니다. 하나님은 고요하게 기도하는 가운데 말씀하여 주시는 분입니다. 그 음성을 듣고 일하기 위해 침묵의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를 덜 들을때 하나님의 음성은 더욱 크게 들릴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도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지 않는 삶 역시 침묵하는 삶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할 바에는 차라리 말을 하지 않고 지내겠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정말 고독한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여러 성도들을 위한 삶이라면 그러한 고독을 참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반면에 저도 적극적인 침묵을 하는 사람으로 살고자 합니다. 오해보다는 이해하는 말을 하며, 분란보다는 평화와 일치를 전하며, 미움보다는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칭찬하고 격려하려 합니다.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인정하며 알아주는 말을 하고자 합니다. 이로써 적극적으로 여러분들을 섬기는 침묵을 할 것입니다.

저는 침묵을 하면서도 조약돌과도 같이 하나님이 저를 놓아두신 곳을 지키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대구제일교회에 옮겨놓으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곳은 제가 하나님을 섬기고 교우들을 섬기며 살아가도록 예정되어 있는 곳을 믿고 살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러한 계획을 하나님의 예정이요 뜻이라 믿을 때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사명은 더욱 분명해 집니다.



셋째, 조약돌은 기다릴 줄 압니다. 아니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조약돌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기를 움직이게 하는 물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사람이 들어서 옮길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 기다름이 세월은 수만 년 아니 수십만 년 해 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기약이 없습니다. 그 기약이 찰 때까지 기다리는 삶을 사는 것이 조약돌의 운명입니다.

하지만 움직여지면 그 무엇인가 필요한 곳에 쓰여지게 됩니다. 길을 까는데 바닥재로 쓰이기도 하고, 집을 짓는데 콘크리트용으로 쓰이게 됩니다. 아름답게 장식하는 벽에 쓰이는 장식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쓰고자 하는 자가 원하는대로 쓰이게 되는 것이 자갈돌입니다.



‘산 돌’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곳에 쓰여졌습니다. 그 분은 사람들이 버린 돌과도 같았으나 성전을 이루는 모퉁이돌이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는 주춧돌입니다. 이 세상의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세운 집의 기초가 되신 것입니다. 이로써 영적인 하나님의 집을 이루는데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한 제사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영적으로 연결해 주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고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인도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이 역시 자기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에 따라 된 것입니다.



저도 조약돌과 같이 쓰시는 자가 원하는 대로 쓰이기를 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저를 쓰시고자 하는 곳에 쓰이는 돌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집안에 태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쓰이고자 했기에 목사가 되고 또한 여러분들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제가 추구하던 편한 자리 교수의 꿈도 그만 접고, 고난과 보람이 교차하는 이 목회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의 신령한 집을 이루어 나가겠습니다. 이 신령한 집이란 바로 온전한 교회를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여러분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많은 기도의 부탁을 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기도 부탁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러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나와 여러분들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일에 함께 동참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들도 그렇게 사용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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