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을 탈출하라 2002-05-31 18:39:37 요한복은 9:1-7 영국이 낳은 유명한 크리스천 작가 중에 C.S. 루이스(1898-1963)라는 분이 있습니다. 요즘 서점가에 가보면, 이분의 저서들이 많이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습니다. 이 C.S. 루이스는 목사이면서 많은 역경을 거친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엄청난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죽은 아내가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보, 슬픔을 당한 곳은 눈물의 골짜기지만 기운을 내세요. 그곳은 삶의 또 다른 시작이에요." C.S. 루이스는 이 음성을 듣고 힘을 얻게 되었고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는 수많은 역경으로 수놓아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려운 순간을 겪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역경은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가족간의 불화, 이웃간의 갈등, 직장에서의 위기, 죽음, 질병, 기근, 전쟁 등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삶을 어렵게 만듭니다. 오늘 저는 "역경을 탈출하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슬픔과 좌절 속에 있었던 C.S.루이스에게 힘이 되었던 음성-"그곳은 삶의 또 다른 시작이예요."라는, 이 음성을 들으시고, 힘을 얻어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가는 귀한 기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9장은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어느 한 사람을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소경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소경을 바라보셨습니다." 예레미야스(Jeremias)라는 신학 성서학자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은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많은 걸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길을 가다가 소경을 보셨다는 것은 많은 걸인들 중에 한 사람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우연한 만남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만남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만남입니다. 무심코 지나갈 수도 있었고 소경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소경과 눈을 마주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 이 소경이 앞을 못 보게 된 것이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눈먼 것은 이 사람의 죄 때문도 아니요, 그의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다. 다만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성도 여러분,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의 질문에는 어떤 사상적인 흐름이 있습니까? 제자들은 운명론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유대 사람들 중에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생각에 있어 세 가지 커다란 흐름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의 경우에는 모든 사건이 예정되어 있으나 부분적으로는 인간들의 의지적인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고, 사두개파는 인간의 일에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엣세네파는 모든 사건이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바리새파와 엣세네파 사람들과 같은 운명론적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운명론적 사고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운명론의 한 가지 특징을 말한다면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과거를 더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의해서 오늘 나의 삶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운명론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운명론의 한계는 무엇입니까?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과거에 의해 결정된 현재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운명론에 빠진 사람을 보세요. 지나온 삶에 얽매여 있고 고작 잘 산다고 해봐야 현재에 그럭저럭 사는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운명론에 빠진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역경을 만나보면 알게 됩니다. 어려운 순간을 만나면,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의 원인을 찾습니다. 마치 오늘 말씀에 나타나는 제자들이 소경을 바라보면서 "이 사람의 소경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묻는 것처럼,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역경의 원인은 무엇인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만을 묻습니다. 만약, 성도들이 운명론에 빠지게 되면,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 어떻게 나에게 어려운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정말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신가?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가?"하고 한탄하게 됩니다. 1. 역경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누구에게 오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수많은 원인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역경의 원인을 살펴보면, 첫째, 하나님께서 주시는 역경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육체적인 질병을 주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찾아오는 역경이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입니다. 셋째는 사단이 주는 역경이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고통받는 수많은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욥입니다. 고통을 받게 되는 원인을 덧붙여 말한다면, 집단적인 죄악으로 인해 고통받는 경우-즉 미국과 아프가니스탄과 있었던 전쟁을 통해서 무고한 국민들이 목숨을 잃고 난민이 되는 경우입니다. 또한, 고의적 혹은 무의식적인 실수로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와 같은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연재해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이 이외에도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경우는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고통의 원인을 알기는 하면서도 치유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은 역경을 겪을 때 힘들어하고, 어떤 사람들은 역경을 겪으면서도 인생의 성공을 맛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앙드레 세니에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평온한 얼굴 모습으로 고뇌를 숨기고 있다. 때문에 누구도 다른 이의 고뇌를 가늠할 수 없다. 그가 번민을 숨기듯 다른 사람도 모두가 고뇌를 감출 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각자 자기만을 측은하게 여긴다. '나만 빼놓고 다른 사람은 행복하지'"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독 자신만이 지금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나무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잘못해서 그늘에서 잠자고 있던 호랑이의 꼬리를 잡아 당겼습니다. 잠자던 호랑이를 건드린 나무꾼이 놀라 나무 위에 올라갔는데 호랑이가 나무를 흔들어 떨어지게 되었는데, 마침 호랑이 등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힘껏 호랑이 등을 끌어안았는데 호랑이가 이 나무꾼을 떨어뜨리기 위해 몸부림쳐도 떨어지지 않게 되자, 이 사람을 등에 얹고 힘껏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나무꾼은 떨어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다하며 호랑이를 꽉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농부가 무더운 여름 밭에서 일하다가 이 광경을 보고 '나는 평생 땀 흘려 일해도 사는 게 이 꼴인데 어떤 사람은 팔자가 좋아서 호랑이 등만 타고 다니니 어디 살맛이 나겠는가?'라며 탄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 어려운 처지에 있음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유독 자신만 더 힘든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통의 원인만을 찾고 자기 자신만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고통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2. 그렇다면 역경은 어떻게 이겨낼 수 있습니까?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역경의 원인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역경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역경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럼으로, 성경은 역경의 원인을 찾는 일에 중점을 두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역경의 원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경을 대하는 우리의 반응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역경의 원인을 찾는 일에 급급한 나머지, 하나님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은 소경이 당하는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까? 보지 못하는 이 소경을 보게 했습니까? 제자들에겐 그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하나님을 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이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실까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미래에 있을 일에 더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이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분명히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성도라면, 적어도, 역경의 원인,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삶의 문제의 원인에 너무 얽매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역경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경의 원인을 파악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역경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역경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도록 반응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를 받아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노예가 된 요셉은 성실하게 맡겨진 일을 수행하여 보디발로부터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또 다시 역경이 찾아왔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다 실패하자, 요셉이 자기를 범하려고 했다고 누명을 씌우는 바람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모든 역경을 이겨내어 결국에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후에, 요셉은 오랜 가뭄으로 식량을 구하러 온 형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요셉이 형제들에게 한 말이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나를 먼저 이곳에 보내어 우리 가족과 민족을 구원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과 역경은 믿음의 사람 요셉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고난과 역경을 바라보는 시각만큼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키케로는 '고난이 크면 클수록 그 영광도 크다'고 말했고, 베네트는 "역경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보석들을 가공하시는 다이아몬드 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허버트는 "큰 배는 깊은 바다를 필요로 한다"고 했으며, 아논은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은 역경을 지치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요셉과 같은 고백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바울과 같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인 질병이 하나님께서 교만치 않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타내는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3.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고백하는 성도가 되려면... 찰스 스탠리 목사는 현재와 미래의 삶에 대해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 자는 언제나 승리한다고 말하면서, "만약 당신이 역경을 겪고 있다면, 먼저 자기 연민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역경을 만나면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됩니다. "아, 나는 이제 어떻게 하지? 더 이상 나를 도와 줄 사람도 없고. 내 처지를 봐. 난 가망이 없어. 머지않아 친구들도 떠나고, 나 홀로 남겠지..." 성도 여러분, 왜 자기 연민에 빠지는 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아닌 자신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자신과 환경 사이에 하나의 가상적인 영역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공감해 주는 사람들에게만 그 세계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종종 혼자 있게 되고 결국에는 고독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쉽게 낙심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일수록 오히려 분노와 독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데, 결과적으로는 분노와 독한 마음으로는 역경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성도가 역경 중에 처해있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사용하셔서 긍정적인 결과를 낳게 해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실망하거나 낙심해 자포자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고통을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⑴ 먼저, 역경의 원인이 죄에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①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②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범했다고 고백해야만 합니다. 우연한 사고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죄를 지었다면 그것을 죄라고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동의해야만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청산해야만 합니다. ③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나의 행위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원망할 자격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사람들로부터 동정심을 얻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낭비하면서까지 원망하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성도 여러분, 원망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을 위해서만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④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반복해서 죄를 짓는 원인은 연약한 신앙 때문입니다. 신앙이 약하면 약할수록 사단을 우리를 유혹해서 죄를 짓게 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나의 연약한 부분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잘못된 생각은 없는가?', '혹 성경의 교훈과 정반대가 되는 인생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내 안에 결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불안전한 영역은 없는가?', '나를 끌어내리는 친구는 없는가?', '내 삶 가운데 계속해서 미혹하는 사람은 없는가?',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봄으로써, 우리는 나의 삶 가운데 죄가 들어와 자리잡게 된 정확한 원인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⑤ 하나님께서는 내 삶 가운데 역경을 사용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역경은 그것의 원인과 상관없이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 맡겨질 때 언제나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소경도 그랬고,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홍해 앞 바다에서 뒤쫓아 오는 애굽 군사에 의해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 장소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지 않습니까? ⑥ 죄의 결과를 피할 수 없도록 하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진정한 감사로부터 나옵니다. 우리가 나의 죄를 있는 그대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무서운 해를 당하지 않도록 우리의 삶에 역경을 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⑵ 죄가 역경의 원인이 아닐 때...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죄가 역경의 원인이 아니고 하나님이나 사단에 의한 역경일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①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위치를 재확인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안다. 나는 구원받은 자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다. 나는 성령으로 인친 자다. 주님께서는 결코 나를 혼자 두거나 방치하지 않으신다. 거룩하신 아버지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도 나를 해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르심 받은 내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라는 확신만 있다면, 역경은 극복된 것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② 우리의 삶에서 역경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역경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는 유치한 기도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 자기의 고통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그같은 기도에 대해 그를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 역시 하나님께 대한 의지와 믿음의 표현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③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의 약속을 재확인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께 역경을 제거해 달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그 방법을 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고통을 감당하고자 하는 자는 그것에 완전히 짓눌려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힘으로는 고통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우리 하나님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은혜를 매순간 충분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 ④ 영적으로 자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역경의 순간은 고통을 참는다고 해서 극복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역경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의도를 찾아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의 신앙은 점점 더 성숙해질 것입니다. ⑤ 역경을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겪는 역경이 사단에게서 온 것이든 그렇지 않든 그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역경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역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차라리 이것이 유익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성도 여러분, 역경이 사단에게로부터 왔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싸울 힘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계속해서 싸우게 되고, 그 싸움이 오래 지속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역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 역경을 극복하기란 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만 의지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분에게는 그것을 극복할 힘이 있습니다. ⑥ 성경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겪은 역경에 대해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읽어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느꼈을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별로 원하지 않는 땅을 갖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예비하신 것을 보십시오. 노아는 방주를 만들고 있을 때 자신에 대해 얼마나 어리석게 느꼈을 것인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성도 여러분,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신실함만은 변치 않았습니다. 이들의 삶을 역경 가운데서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이러한 인물들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할 수 있도록 그들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돌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정리>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역경을 겪을 때 자신만이 겪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역경을 겪을 때, 그 원인만을 찾으려고 하지 미래를 보지 못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역경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할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역경을 담대히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역경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더욱 강하게 될 것이며, 넘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깊이 역시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부디 바라기는 역경의 성격이나 원인을 찾는데 급급한 삶에서 벗어나 역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의 삶 가운데 무엇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지를 깨닫는 축복된 삶,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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