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2002-05-21 14:42:46 성경구절 마가복음 2:13-17 설교날짜 2002/04/14 춘추시대, 제(齊)나라 영공(靈公)이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男裝)을 시켜 놓고 완상(玩賞)하는 별난 취미를 일상화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취미는 곧 백성들 사이에도 유행되어 남장한 여인이 늘어났고 그러자 영공은 재상인 안영(晏 )에게 "궁 밖에서 남장하는 여인들을 처벌하 라"는 금령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유행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 아 영공이 안영에게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전하께서는 궁중의 여인들에게는 남장을 허용하시면서 궁 밖의 여인들에게는 금령을 내렸사옵니다. 하오면 이는 '밖에는 양 머리를 걸어 놓고 안에서는 개고 기를 파는 것(羊頭狗肉)'과 같사옵니다. 이제라도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을 금 하시옵소서. 그러면 궁 밖의 여인들도 감히 남장을 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영공은 안영의 진언에 따라 즉시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 금지령을 내렸고 그 이튿날부터 제나라에서는 남장한 여인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유래된 고사성어가 '양두구육(羊頭狗肉)'입니다. 즉 밖에는 양의 머리를 걸어놓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판다는 뜻인데 '좋은 물건 을 내놓고 나쁜 물건을 파는 것'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는 것'의 비유로 사용되 는 말입니다. 지난 주간에 한 통의 편지가 목사의 마음을 어둡게 했습니다. 이제까지 존경과 높임을 받던 분이 한 사건과 관련되어 그 행적이 너무나 더럽 고 추하여 실망한 나머지 도저히 그 교회로 출석할 수 없게 되어 교회를 옮기게 된 가슴 아픈 내용이었습니다. 그 분이 쓴 단어 가운데 목사의 가슴을 예리하게 찌르는 단어가 하나 있었습니 다. "제 심정은 지금 단장(斷腸)의 고통이랍니다." 즉 '단장(斷腸)'이라는 말입니다. 단장이란 말은 끊을 단(斷), 창자 장(腸)입니다. 즉 창자가 끊어졌다는 말로 서 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의 비유입니다. 저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분에게 답 글을 보냈습니다. 계란을 한 판 사면 썩은 계란이 몇 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시는 가 게에 가서 계란을 사지 않는 주부는 없습니다. 학교 선생님 가운데 종종 촌지(寸志)를 받기도 하고 사도(師道)의 걸음이 흐트 러져서 구설수에 오르는 선생님이 있지만 그렇다고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학부모는 없습니다. 병원에서 종종 의료사고가 나는 것을 봅니다. 믿고 병원에 찾아갔는데 오진으 로 환자가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다고 병이 났을 때 병원에 다시 는 가지 않는 환자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생활에서 지도자들이, 존경하는 분들이 겉과 속이 다른 사건들 을 종종 우리가 접하지만 그렇다고 교회를 가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토요일 늦게 다시 메일 답신이 왔는데 자기 자신의 편견을 부끄러워하면서 성 실하게 교회 생활을 하겠다는 답을 받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극단적인 말이지만 불의한 한두 사람 때문에 의로운 다수의 사람을 불의한 사 람과 같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불의하고 더럽고 추한 사람들이 있 게 마련이고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의를 추구하고 거룩성을 보전하며 더불어 살아감에 행복을 공유하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단 신앙인이 아닐지라도 인격적이며 한 차원 높은 사고를 가진 사람 이라면 극복할 수 있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받기 전에 여러분에게 조용히 질문해 봅니다. 여러분은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여러분은 정녕 다른 사람으로부터 질타 받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의로운 삶 을 살아가십니까? 오늘 말씀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예수가 부르시는 사람 14절 말씀입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레위가 누구입니까? 마태입니다. 그리고 그의 직업은 세리였 습니다. 그런데 로마 제국 당시의 세리는 대개 로마인들이었으며 이들은 속국의 주민들 을 고용하여 해당 지역의 세금을 거둬들이게 하거나 통행세를 직접 거두게 하였 습니다. 공관복음에 나오는 '세리'는 '텔로네스'( )로 바로 후자에 속한 유대인 세리들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당시의 유대인 세리들은 과중하게 세금을 거둬들여 관청에 보고하고 남은 것 은 자기 몫으로 착복하면서 동족들에게 미움을 받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도 죄인 취급을 받았던 부류가 바로 세리들이었 습니다. 그러니 당시의 세리들의 마음은 늘 불안하고 자기들의 잘못된 생활 관습으로 말미암아 동족들에게 미움과 냉대 속에서 마음이 상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예수님이 세리 마태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바로 주 님의 부르심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소외당하고, 자신의 허물과 죄로 인해 마음이 상해 있는 세리 들을 향해 주님은 천국의 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자칭 의인이라 하면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무거운 짐을 지우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곧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오히려 세리보다 더 무서운 죄를 짓고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요한 일서 1:8-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 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 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그래서 세상에 죄 없는 자는 없는 것입니다. 내 죄가 있는데 어찌 너를 향해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요한복음 8장 의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주님의 메시지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죄를 정죄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 된 그 사람의 고통과 어 두움을 보시고 그 고통에서 자유케 하는 것이 주님의 관심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부르심의 대상이 어떠했습니까? 하나 같이 당시의 상황에 지치고 힘든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많 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처절한 사람이 어떤 부류입니까? 죄인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먼저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75년 동안 우상을 섬기던 가정의 아브라함을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뽕나무밭의 아모스도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보리타작 마당의 기드온도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갈릴리 바닷가 베드로도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그렇게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먼 저 '버리는 결단'이었습니다. 가정도, 부모와 처자도, 직장도, 사업도, 지금 여기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 야 했습니다. 버리지 못했던 부자 관원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이 부르시는 것은 자칭 의롭다고, 죄 없다고,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다고, 이만하면 됐다고 하는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이든 죄로 말미암아 고통 가운데서 힘들어하고 아파하며 슬픔과 괴로 움에 진정한 행복을 잃어버린 사람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냐? 그것을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어떤 상황이냐? 그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작은 자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 15~16절 말씀의 내용은 작은 자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 습니다. 작은 자가 누구입니까? 지금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나 제사장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삶 자체가 만족이었고 의인이 었고 거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세리나 창녀나 앉은뱅이나 소경이나 벙어리나 각색 병든 자들 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작은 자라 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그들에게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며 생활하신 내용이며 가르치신 교훈이 었습니다. 예수님이 마태의 집에 들어가셔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함께 한 사람 들이 누구였습니까? 세리들이었고,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작은 자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해 봅시다. 보편적으로 오늘의 우리의 삶의 내용은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내가 가 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에게 내가 가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지방 작은 도시를 방문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곳에 모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겠습니까? 그 지방의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겠습니까? 결코 그렇 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언제나 작은 자와 함께 하셨습니다. 어디를 가시든 작은 자를 찾으셨고 작은 자를 만나셨고 작은 자를 도우셨습니 다. 예수님의 관심이 바로 그랬습니다. 비록 죄인이지만, 허물 많은 사람이지만, 겸손하게 자신의 무가치함을 고백하 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에게 나아오는 자는 '용서받은 죄인'이 되고 '구주 예 수 그리스도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작은 자를 경멸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자칭 의인이라고 했던 바리 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서는 가장 어리석고 눈먼 자들이라고 질타하셨던 것입니 다. 작은 자를 사랑하고 작은 자를 돌보아 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관점입 니다. 의인인가? 죄인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겸손하게 들어야 합니다. 당신은 의인입 니까? 아니면 죄인입니까? 17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건강한 자는 다른 사람에게서 어떤 도움도 필요치 않다고 느끼는 일종의 종교적으로 교만한 자를 빗댄 말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자는 영적으로 자칭 건 강한 자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은혜도 사랑조차도 필요없는 자칭 의인입니 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님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 다. 즉 철저하게 타인의 도움이 필요함을 절감하는 사람, 특히 영적으로 의사 되시 는 예수님의 치유하심이 필요한 사람이 곧 병든 자이며 죄인이며 예수님은 그들 을 치료하시고 그들을 건강케 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것은 병듦에서 건강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것은 저주에서 축복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것은 죄인에서 의인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것은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누구입니까? 죄인입니다. 병든 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건강한 자입니까? 병든 자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일찍이 깨달았습니다. 그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베냐민의 지파를 자랑하고, 율법으로 흠없 는 바리새인으로서 가말리엘의 문하생을 자랑하고, 유대인으로서 로마의 시민권 을 가지고 생활할 때는 어느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는 의인이요 건강한 자로 생활했었습니다. 그랬으니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을 잡아죽이는 데 앞장섰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 그의 삶은 180도 변화가 일어났 습니다. 40에 하나 감한 서른 아홉 대의 매를 다섯 번이나 맞으면서도, 세 번 태장에 맞으면서도, 한 번 돌에 맞으면서도, 강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을 경험하면서도,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고통 당하면서도 그는 단 한 번도 자기를 앞세운 적이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했습니다. 주님이 아니면 살 소망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주님이 자기를 구원할 자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기에 불평하지 않았고, 그러기에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기다렸 고 기다림으로 승리했습니다. 도움이 필요치 않다고 자칭 의인이었던 청년이 철저하게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 한 죄인 됨을 깨닫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위대한 생애입니다. 오늘날도 자칭 의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은 철저할 정도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고 항변합니다. 모든 것 이 자기 뜻대로 되는 줄 압니다. 자기는 전혀 죄가 없는 듯 말합니다. 행동합니다.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은 다 옳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기의 모든 행위는 정당한 것으로 압니다. 타인의 충고 같은 것은 소귀에 경 읽기입니다. 그러면서 타인의 작은 허물에 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정죄합니다. 심판합니 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들은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 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주님의 관심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허물 많은 연약한 사 람이라고,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의입니까? 죄인입니까? 의인이라고 생각되시면 지금 바로 그 자리에서 마음의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 다. 그것이 주님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라고 생각되시면 지금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 니다. 주님은 곧 바로 구원의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자기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아주 간단합니다. 쉽게 남을 정죄합니다. 자신은 불의하면서 오히려 의인을 불의하다 합니다. 육신의 것을 얻기 위해 영적인 것을 쉽게 버립니다. 거짓을 즐기면서 불의함을 쾌락으로 삼습니다. 자신의 삶은 더럽고 추하고 불의하기 그지없지만 언제나 의인처럼 생활하는 것 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으십니다. 주님과 관계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은 주님의 구원에 동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결정적인 말씀이 17절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주님 앞에 정직한 고백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의인(義認),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입은 그 리스도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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